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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30 00:22:44
Name nickyo
Subject [일반] 하늘을 날고 싶었다.


내가 어릴 적, 우리집은 가난하다고 말 할 수는 없는 집이었지만 부유하다고 말 할 수도 없는 집이었다. 그냥 보통의 아버지가 열심히 일을 하고, 보통의 어머니가 열심히 맞벌이를 하는 그런 집. 흔히 자소서에 주로 쓰이는 엄한 아버지와 상냥한 어머니.. 같은게 참 잘 맞는 표준적인 수준의 가정쯤 되었다. 만약 '세상의 표준 가정'이라는 모델이 있다면 굉장히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우리집에서는 나 혼자 유일하게 해외여행을 했다. 부모님은 젊을때 일과 돈에 치여 살았고, 가난한 윗 세대로부터의 유산을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애썼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해외여행 같은 것은 사치였고 부모님은 결국 나중에, 나중에를 외치다 아이엠에프와 정년과 재취업과 세계 경제 경직등에 의해 영영 해외여행은 사치로 남을 것 처럼 이야기 하시곤 했다. '일 안하면 돈도 못버는데, 일 쉬고 돈까지 쓰고오면 되겠니...' 하지만 철 없던 난 그저 해외를 가보고 싶었고, 스물이 넘어서 아르바이트 한 월급으로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자 부모님께서는 선뜻 비행기 티켓을 선물해주셨다. 그래서 티켓 선물도 받은 겸 가까운 일본으로 갔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는 일본인 친구가 재워준 덕에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 때 밤 비행기를 타고 도심의 불빛이 점점 작게 멀어져 가는걸 보면서 처음으로 정말 깊은 후회라는걸 했다. '나는 왜 파일럿이 되려 하지 않았을까?'




고작 몇 세기 전만해도 하늘을 날 수 없었고, 한두세기 전만해도 하늘을 나는건 허락된 사람만이 가능한 특수한 행위였다. 비록 우주까지 밟은 인류지만, 지금도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꽤 한정되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유치원생때 비행기에서 창 밖을 바라볼 수 있었더라면 파일럿이 되려고 했을텐데..라며 자조섞인 후회를 하곤 했었다. 우리집은 그런 한정된 하늘을 나는 집들만큼은 잘 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하늘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하늘을 나는 사람이 얼마나 들뜰 수 있는지 몰랐다. 파일럿이라는 직업은, 어릴때 컴퓨터 프로그래머나 의사, 경찰관이나 대통령보다 후순위에 있었다. 심지어 좋은 아빠되기 보다도 뒤였다.





중학교 3학년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보았다. 졸업여행으로 학교는 제주도를 보내주었는데, 그게 첫 비행기였다. 남자 중학교 학생이라는게 어차피 오기와 허세로 똘똘 뭉친 법이라, 그 당시 비행기를 한번도 안 타봤지만 애써 태연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느라 40분이라는 귀한 시간을 다 보냈다. 그래서 처음 탄 비행기에는 별 감상이 없었다. 손에서 마구 땀이나고 아랫배가 간질간질 했지만 마치 비행기는 내가 자주 타 봤는데, 하는 느낌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주변 아이들도 비슷했다. 다들 흔들거릴때 말이 없어지고, 애써 허세를 부렸다. 아쉬운 기억이다.





오늘 태풍이 지나간 하늘을 퇴근길에 문득 올려다 보았다. 평소라면 스마트폰을 쥐고 타임라인을 긁어내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지만 오늘 막 데이터 용량을 다 썼다는 메세지를 받아서 데이터통신을 더 쓰고싶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평소에는 잘 안보는 하늘 풍경을 보게 된 것이다. 서울의 퇴근길 하늘색은 대체로 누렇게 떠 있다. 회색빛과 누런색이 섞여 고층 빌딩 사이로 보인다. 하늘을 겹겹히 막은 고층빌딩들 덕에사이사이로 보이는 누런 하늘색은 칙칙하고, 가라앉는다. 그런데 오늘은 하늘이 정말 높았다. 푸르고, 높고. 멀었으며, 참 예뻤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다 주변을 쓱 둘러 보았다. 이렇게 예쁜 하늘을 올려다 보는건 나 혼자였다. 사람들은 갈길이 바쁜 듯 재빨리 움직이고 나는 그 사이에서 왠지 홀로 이질적인 기분을 느꼈다. 하늘이 참 예쁜데. 라고 생각하며 저 먼 구름떼를 쳐다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하늘을 보며 걷다보니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듯 머리속에서 이런저런 상념이 떠오른다. 지나온 사람들이 하나둘 머리를 스쳐지나가면서, 고작 스물 하고도 몇 해 더 붙인 인생에 이런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만나서 반가울 사람보다 안 반가울 사람이 많다니. 인생을 좀 잘못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싫다기보다 반짝이는 젊음을 만끽하는 그들에 비해 내 위치가 너무 추례해 보여서 그렇다는걸 알고 있었다. 이상한 열등감은 잘 지워지는게 아니었다. 그래도 하늘이 오늘은 위로가 되는 날이다.





제일 만나고 싶은 사람도 생각났다. 그렇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이기도 했다. 묘한 일이었다.




요 몇년간 가끔, 이렇게 하늘이 높고 푸르면 나는 그 제일 싫어하는 사람에게 '하늘을 보라'고 꼬박꼬박 얘기했었다. 그 사람은 남들보다 두배는 바빠서, 하늘을 보며 돌아다닐 시간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이렇게 시원한 푸른색과 넓게 드리운 하얀 구름들은 내가 보고 알려주곤 했다. 가을을 좋아한다던 그 사람에게 여름은 좀 길었을지도 모르겠다. 잘 지낼까 하며 움직이는 구름따라 걸음걸이를 옮긴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빠앙-하는 소리에 나 혼자 더디게 걷는걸 알아채고는 꾸벅거리며 재빨리 뛰었다. 오늘 하늘을 봤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아마, 그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해 줄 테지. 하고 생각했다. 여전히 조금 쓰라리다.





문득 저 하늘위에 있고 싶어졌다.



구름 사이로 도시가 점처럼 작아져 이내 보이지 않는 그 하얀 세상에서, 계속 그걸 보고 싶었다..
파일럿이 되려고 뒤늦게 알아봤을 때에는 모든 조건이 불합격상태였다.

그렇다고 미국 같은 나라를 가자니 돈이 있을리 만무했다.

어줍잖은 책임감덕에, 나 혼자만 생각하며 훌쩍 도망칠 수도 없는 깜냥이었다.


그냥 돈 많이 벌어야지, 그래서 비행기 실컷타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늘을 날고 싶다.
여기저기 휙휙 날아다니며, 반가울 사람도, 반갑지 않을 사람도 잘 사는지 슥슥 둘러보고 싶다.
빌딩 숲 사이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정수리에 여기 좀 보라고 소리쳐 보고 싶다.
높게 솟은 봉우리에 걸친 구름 위에 두둥실 실려 산내음을 들이쉬면

얼마나 시원할까.



얼마나 잘난 놈이랑 같이 있어요? 하고 근두운 타고 부웅 날아가
생각보다 멋진 놈의 뒤통수를 짝 치고
혀를 낼름대며 도망가고 싶은게 본심이지만
어쨌거나 하늘을 날고 싶다. 하늘이 좋다.




며칠 더 하늘이 푸른 색으로 높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뉴스에서는 태풍이 온다고 했다.


태풍 이 멍청이가! 하고 이죽대었는데 생각해보니 만약 듣기라도 했다면 우리집 창문만 부수고 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무슨 신문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예쁜 연아의 슬림샷이라도 큼지막힌 찍힌 신문지나 준비해서 붙여둬야겠다.

내가 태풍이면 씨익 웃을거같다.


아, 하늘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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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쏠
12/08/30 00:57
수정 아이콘
진중권씨가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딴다고 트윗에 한창 글올리곤 하던데, 돈 조금 버시면 그런거라도 해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진중권씨 말에 따르면 돈 많이 드는것도 아니라던데. [m]
양웬리
12/08/30 01:00
수정 아이콘
제가 너무 앞선게 아닌가 싶지만..아직도 어느정도는 맘이 아프신가봐요. 저까지 씁쓸해지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스타본지7년
12/08/30 01:11
수정 아이콘
좋은글입니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씁쓸한건 어쩔수 없네요. 물론 님한테 씁쓸한게 아니라 제 마음이..
12/08/30 01:11
수정 아이콘
http://www.youtube.com/watch?v=YRJeaH_UrY4

왠지 이한철 씨의 이 노래가 생각나네요.
Cazellnu
12/08/30 01:43
수정 아이콘
(제가) 싫어하는 열도 노래이지만
날개를 주세요가 생각납니다.
어머나...
12/08/30 03:48
수정 아이콘
하늘을 날고 싶었다 해서 생각난 여담이지만...
다들 어렸을 때 음료수 포장보고 옥상에서 우산들고 한번쯤 뛰어본 적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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