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6/21 15:07:28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창군 - 38선 : 반격 작전
해방 직후, 북한에서도 다수의 사설 무장 단체가 만들어집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북한의 건준을 이끌었던 조만식의 자위대-_-와 토착 공산주의자이자 조만식과 좌우 합작을 했던 현준혁의 치안대였죠.

여기에 김일성이 내려오면서 소련파를 중심으로 적위대를 조직합니다. 이후 소련은 사설 무장 단체를 모두 해산, 보안대를 창설하죠. 여기에 별도로 46년 1월에 철도보안대를 창설, 이를 기반으로 인민군 창설을 시작합니다. 간부 양성을 위해 평양학원과 중앙보안간부학교가 설치됐고, 보안훈련소가 설치됐죠. 이후 46년 8월 15일 최용건을 사령관으로 한 보안간부 훈련대대부가 설치됩니다. 남한에서도 그렇듯 북한에서도 시작은 군이라는 걸 함부로 말 못 했죠. 이후 47년 5월에 "인민 집단군 총사령부"가 만들어지면서 인민군은 본격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는 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설로 이어졌고, 북한이 탄생한 9월 9일에 4개 사단으로 시작하게 되었죠.

흥미로운 건 이 때 소련이 북한에 한 것은 지원 내지 원조가 아니라 "판매"였습니다. (...)

얄타 회담 때 만주로의 출병의 조건으로 소련이 요구한 것은 "러일전쟁 때 잃어버린 동북의 모든 특권의 회복"이었습니다. 다시 말 하면 자기가 점령한 지역의 일본군 자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었죠. 일본이 공 들여 공업국으로 키웠던 만주국의 공장부터 발전소들이 철거돼 소련으로 실려갑니다. 이건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소련군정 초반 북한에 있던 공업시설과 발전소를 뜯어간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죠. 중국에 대해서 이렇게 한 이유가 경제적인 것보다는 동북에 공업지대를 없애서 안정되게 한다는 목적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데 북한에 대해서도 같을지는 모르겠군요 -_-a

+) 참고로 미군정은 이런 일본인 재산을 모두 한국인에게 줍니다. 이런 신흥 졸부들이 문제가 됐지만, 최소한 소련군정보다는 나았죠. 이후 한일협정 때 일본은 이런 남은 재산을 모두 포기했죠. 어차피 6.25 때 다 날아갔습니다만 =_=a


이제부터 다룰 얘기들도 전부 이런저런 자원들을 주고 산 것입니다. 여기에는 농산물부터 납 (1950년 기준 무려 2만 5천톤 (...)), 금(9톤), 은(40톤) 등부터 모자나이트 15000톤까지 끼어 있었습니다. 이 모자나이트는 우라늄과 토륨 등의 원광석이죠. 이러고도 더 원해서 북한에는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이 벌어집니다. 한국에서 이게 행해진 것은 해군 백두산함과 공군 건국기 정도였습니다만, 국가에서 주도하는 북한에서는 이게 훨 쉬웠죠. 이 때 미처 못 준 금이 국군의 북진 중에 발견돼서 가지기도 했습니다. 뭐 북한도 남진 중에 한국 거 가져갔습니다 - -a

소련군이 해방군이라... 글쎄요 '-') 아무튼 김일성도 국가 재건할 생각은 안 하고 인민의 피땀을 쥐어 짜면서 군대나 늘리고 있었던 겁니다. 이승만의 호전적인 태도와 국군의 공격적인 모습이 여기에 좋은 명분을 줬구요.

---------------------------------------------

1949년 2월 22일, 김일성, 박헌영, 홍명희와 스티코프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모스크바를 향합니다. 이들은 3월 4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죠. 여기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북한군이 더 강하고 한국에 간첩을 심어뒀다면서 적화 통일을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불가하다. 북한군이 남한군보다 확실한 우위가 아니며 수적으로 열세다. (중략) 적들이 만약 침략의도가 있다면 조만간 먼저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면 절호의 반격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 때는 모든 사람이 동지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원할 것이다."

북한의 '반격 작전'은 이 때부터 청사진이 그려진 것입니다. 미국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북한이 남침할 시 국군의 반격을 도와 무력 통일을 해야 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이 때부터 이를 준비해 왔고, 미국은 전쟁 자체를 거부한 것이었죠.

김일성이 소련에 있던 3월 11일, 외무상 몰로토프는 "북한에 시설물, 재료, 군사시설의 공급을 위해 소련이 제공하는 차관에 대한 북한과 소련 정부 간의 협정서 초안"을 제출했고, 이건 3월 17일 "소련과 북한 간의 물품거래 및 대급결제에 관한 의정서"가 체결됩니다. 그 시작은 49년 6월 1일부터, 이에 대한 상환은 52년 6월 1일부터였습니다. 이자는 연 2% (...) 다만 김일성은 그 해부터 현물 상환을 합니다. 이 때 북한에 뿌려진 것 역시 신품이 아니라 중고품이었구요. 뭐 싸고 많고 오래가는 소련제긴 합니다만 -_-a

이어 4월 말, 김일이 중국을 방문합니다. 여기서 모택동은 인민해방군 소속 3개 한인 사단 파병에 동의합니다. 그는 당장 전쟁에는 반대했지만, 50년 초반 국제 정세가 유리하게 돌아간다면 공격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웃긴 건 여기서 "일본군"이 동원된다면 중공군도 도울 것이라고 했죠. 미군은 이들의 머리 속에 없었던 듯 합니다. 또한 그는 이것이 소련의 동의가 있은 후 시작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떄는 중공군의 양쯔강 도하가 성공하고 미국이 장개석의 국민당을 포기할 때였습니다. 이 이전부터 북한도 모택동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보답 및 약속대로 3만 7000명 이상의 중공군 소속 한인들이 북한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중소로부터의 지원이 본격화되는 시점은 49년 7월, 그 때까지 김일성은 나름대로 가드를 굳히며 명분을 최대한 얻어내는 데 열중합니다. 때는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김일이 중국에 갔을 무렵, 김일성은 5월에는 공군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편성 완료되고, 9월에는 공군도 편성이 완료된다고 보고합니다. 이어서 무기의 대금을 9~10월에 인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죠. 소련 정부는 6월 4일에 이에 동의해 대규모의 소련제 무기가 도입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중공군 내 한인병사들이 7~8월 동안 정비작업에 돌입, 북한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죠.

7월 초 송요찬이 양양으로 독단 공격을 감행할 때, 처음으로 인민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이전까지 국군이 맞섰던 상대는 정규 인민군이 아닌 38선 경비대였죠. 본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등장이었습니다.

국군이 한창 공세에 매달리던 6~7월을 지나 38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던 8월, 북한의 공격 징후를 알리는 첩보가 범람하기 시작했습니다.

--------------------------------------

8월 4일 05:00, 대규모 포격과 함께 3개 대대가 물밀듯이 내려옵니다. 수비 중이던 2개 중대가 순식간에 전멸당했고 웅진을 지키던 18연대는 철수까지 고려했지만 다행히 막아낼 수 있었고, 국군은 다음 날 다시 웅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해 반격을 시작해 8일에 잃었던 지역을 탈환합니다. 미군은 이를 이전까지의 고지전으로 일축했지만, 그들 자신에게도 이것이 웅진 반도를 점령하기 위한 국지전 시도였다는 정보가 잔뜩 들어왔습니다. 이 때 북한군은 고지뿐만 아니라 웅진 읍내를 향한 대규모 공격을 꾀했고, 여기에 참가한 이들 중 무려 77명이 국기훈장과 군공메달을 받았습니다. 북한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웅진 반도는 남한에 있어서도 계륵이었지만, 북한에 있어서도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옆구리를 찌를 수 있는 위치에다 국군은 여기에 나름 대병력을 주둔시켜 놨고, 안 그래도 서울을 향해 달려야 되는 남침 때 여기에 병력을 따로 보내야 했죠. 즉 이것은 남침의 전초전이었고 그것이 18연대의 목숨을 건 방어로 막아낸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속이 타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말 한 "반공격"의 기회는 오지 않았고, 북한군은 이제 확실히 국군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승만이 "평화통일을 거부한다"는 이유를 대면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소련은 이를 거부했죠. 이게 막히자 김일성은 대신 삼척에 해방구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실제 웅진반도 공격 때 소규모 부대가 삼척을 공격해 오기도 했습니다. 이 2차 웅진 전투가 끝난 후 김일성은 다시 웅진 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허락받으려 했습니다. 소련측 문서에 따르면 이 횟수도 4차례 이상이라고 하죠. 이건 9월 중순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2차 웅진 전투는 김일성의 독단이었다는 거죠.

- 웅진 반도 주둔 남한군 2개 연대를 격파해 웅진반도를 점령한다. 웅진반도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예를 들면 개성까지 영토를 차지한다.
- 북한 기습으로 남한군이 사기 저하되면 계속해서 남진해도 무방하다.
- 웅진작전 이후에도 남한군의 사기가 저하되지 않는다면 방어선을 3분의 1로 단축하고 경계선의 방비를 굳게 한다.

김일성은 이런 근거로 옹진 반도를 점령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충분히 "반공격"의 명분이 쌓여 있고, 빠른 시일내에 남한 전역을 점령하려면 옹진을 취해야 했고, 설령 옹진이 먹히더라도 남한에서 반격할 수 없을 거라고 주장했죠. 반면 소련 측은 이런 근거로 이걸 거부합니다.

- 부분 작전이 전면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 북한군의 능력이 불충분하며
- 남한 주민과 빨치산의 도움도 부족해 조속한 성공이 불가능하며
- 전면전이 발발하지 않아도 큰 정치적 손실이 예상된다

이 때 보여준 김일성의 모습은 참 -_-; 똥줄이 타는 것 같습니다. 빨리 남조선 치게 해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이런 식이죠. 이런 건 확실히 지나친 모험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국군의 역량과 미국의 참전 가능성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국군은 툭 치면 쓰러지고 자기에게 붙을 존재로, 미국은 한국이 먹히는 걸 멀뚱히 보기만 하는 존재로 말이죠. 옹진을 점령하겠다고 한 것 자체가 이걸 빌미로 바로 전면전으로 넘어가려 했다고 생각해도 되죠. 아직 소련에서 주기로 한 무기가 제대로 도착도 안 한 시점이고 중공에서 지원한 병력은 이제 막 들어오고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 부분과 동시에 그가 추진한 삼척 공격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결론이 나옵니다. 옹진은 서쪽 끝이고 삼척은 동쪽 끝이죠. 그는 이렇게 국군을 38선의 양쪽 끝으로 몰리게 한 후 전면전을 개시할 생각이었습니다. 머리는 썼네요 -_-; 하지만 북한이 짠 계획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소련은 물론 미국이 예상했듯 훈련도 부족했습니다. 결국 소련이 다시 다 짜 줘야 했죠.

소련은 이런 김일성의 징징을 들으면서 개전을 위한 점검을 합니다. 국군의 병력, 장비, 군사력에 대한 평가와 남한 빨치산이 현실적으로 인민군을 도울 수 있는지, 북한의 선공에 대한 일반인들과 사회 단체의 태도, 미군의 참전 여부, 북한군의 전투력, 북한 계획의 현실성 등이었죠.

무서운 점은, 이 때 김일성은 국군의 규모를 거의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엇다는 점입니다. 워낙에 자주 바뀌어서 현대 연구가들도 헷갈리는 걸 말이죠. 국군은 물론 경찰과 예비군이었던 호국군까지 모두요. 오히려 소련에서 자체 조사한 정보가 부정확했습니다. -_-; 대체 간첩은 누구였을까요.

빨치산의 경우는 김일성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반면 박헌영은 이들이 큰 역할을 할 거라고 주장했죠. 그로서는 자기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라도 남로당이 뭘 해 주길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 남한의 일반 민중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좋다고 보진 않았고, 미군에 대해서는 지상군만큼은 오지 않을 거라 여겼습니다. 여기에 북한군의 규모는 9만 7천 5백에 남한은 8만 5천 정도로 수와 군기, 전투력, 사상 무장 등에서 압도한다고 답 합니다.

이에 대해 툰킨은 현재 북한군이 능력이 부족하고 조속한 승리는 불가능하며, "북한이 단기간 내 남한을 점령할 수 있을 경우"에만 남침이 가능하다고 못 박습니다. 여기에 스티코프는 미군의 개입을 우려했고 북한군에 병력과 화력을 더 지원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옹진 반도 점령은 "상황이 좋다면" 점령해야 된다고 했죠. 그리고 남침에 대한 명분은 38선 주변에서의 남한의 스파이 행위나 사소한 도발을 핑계로 하면 된다고 했죠. 애초에 스탈린 역시 국군의 대대적인 북침을 가정하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사소한 걸로도 핑계를 댈 수 있고, 이는 겨울전쟁 당시 이미 써 먹었던 것이었죠.

소련 당국에서는 현재는 안 되며 옹진반도 점령 역시 안 된다고 거부합니다. 이렇게 49년 9월의 남침 계획은 나가리 됐고, 인민군에 대한 지원 및 빨치산에 대한 지원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를 위해 800명이 한국에 추가 투입되었죠. 특히 해군에서 많은 배들이 납북되고 9월 22일에는 미 해군 함정 킴벌 스미스호까지 납북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해군 편에서 언급한 이승만의 투정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 -a

우선 이 결정이 나가리되긴 했지만, 정병준 교수는 이 때 이미 남침에 대한 승인은 이미 된 것으로 평가합니다. 이 때의 결정이 개전 자체애 대한 반대가 아니라 더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는 거죠. 그에 대한 근거로 스탈린이 여러 차례 말 한 "국제 정세"를 듭니다. 50년 초부터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내고 3월에 직접 만나면서 국제 정세가 유리하다는 것을 말 했는데, 이 8~9월의 국제 정세는 정말 좋아지고 있었거든요.

이 시기 중공군은 국민당에 확실히 승리를 거두었고, 10월 10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됩니다. 소련은 여기에 미국이 개입할 것인지 걱정했지만 끝내 개입하지 않았죠. 스탈린은 이걸 지켜보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10월 14일에는 옹진 반도의 은파산에서 다시 전투가 일어납니다. 남북간의 마지막 연대급 전투였습니다. 북한군은 6월 24일 이래 4개월째 은파산을 뺏기고 있던 걸 은폐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확실히 이를 되찾으려 한 것이었죠. 은파산은 해주로 가는 도로와 철도를 감제할 수 있는 고지였거든요. 여기서도 미소의 반응이 재밌습니다. 국군은 은파산을 뺏긴 이유를 105mm 곡사포가 없어서라고 하며 이걸 요구했지만 미국은 감제고지로서의 이점은 있지만 어쨌든 명백히 이북에 있는 은파산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한편 소련에서는 북한이 자기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해 크게 질책했는데, 북한에 있던 스티코프는 이것이 대대적인 공격이 아니라 이전에 늘 했던 고지전의 하나라고 변명합니다. 틀린 얘기는 아니었고, 이후 북한은 소련의 말을 어기지 않으며 병력 증가와 무장 강화에만 몰두합니다.

이후에도 38선에서의 분쟁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이전처럼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죠. 북한은 발톱을 감춰야 했고, 국군은 대규모로 싸워봐야 밀린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며, 미국은 애치슨 라인까지 그으며 이 정도면 되겠다고 만족합니다. 그 동안에도 북한군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고,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었죠. 여기에 평화통일 공세를 계속 하며 명분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려 했습니다. 정말 전형적인 화전양면전술이었죠.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전문을 보냅니다.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한다. 그가 착수하려고 하는 남한에 대한 큰 과업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너무나 큰 모험이 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나와 토론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접견해 대화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이를 김일성에게 전하고 본인이 이 일에 대해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리기 바란다."

김일성은 이걸 보고 스탈린의 면담 허락이 사실이냐고 여러 차례 되물으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스탈린은 2월 2일에 추가로 전문을 보내며 이 일은 모택동은 물론 북한 내 지도부들에게도 비밀로 해야 된다는 단서를 답니다. 이렇게 소련 붕괴까지 이 사실이 철저히 비밀로 묻힌 것이죠.


김일성과 박헌영은 3월 30일 모스크바를 방문합니다. 여기서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합니다. 단,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했죠. 대신 그는 모택동에게로 가 참전 동의를 받게 합니다.


이어 그들은 5월 13일 북경에 도착합니다. 모택동 역시 "이 작은 영토를 위해 미국이 제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고 했죠. 여기서 모택동의 "동의" 역시 얻어내는 데 성공했죠.


이제 남은 것은 그 때가 언제냐는 것 뿐이었죠.

이쯤 해서 브루스 커밍스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솔직히 좀 불쌍하긴 해요. -_-; 그 동안의 자료로도 충분히 반박 가능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쨌든 상당한 근거를 가진 이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소련 붕괴 후 기밀 문서가 한둘도 아니고 뭉텅이로 나와 버린 게 문제였죠. (...) 이런 게 나온 이상 과거의 학설이 될 뿐이죠.

이렇게 김일성은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을 열었고,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시작했습니다.

개전 후에 나타난 "북침론"에 대한 근거들은 그 때 가서 반박하겠습니다.

=======================

다음 편은 이 1950년, 개전 직전의 상황을 좀 더 세밀하게 다뤄보겠습니다.

그 전에 다른 얘기 하나 할게요 '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그리메
12/06/21 15:13
수정 아이콘
이제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는데...진정한 트루먼 쇼를 보게 되겠군요.
코큰아이
12/06/21 15:40
수정 아이콘
아오 김일성 아 뺙쳐....
나중에 박헌영 숙청과정도 서술해주시길 바라는데요... 해주실거죠?흐흐흐
기대하옵니다. 눈시님
군인동거인
12/06/21 15:59
수정 아이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이 긴 글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ㅠㅠ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뚫훓쀓꿿삟낅
12/06/21 16:59
수정 아이콘
조만식은 정말 너무 안타깝습니다-_-;
사실상 북한쪽의 지도자나 다름없었는데 소련놈들과 김일성이란 놈이 내려오는바람에 -_-;
12/06/21 18:0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디테일한 설명 너무 흥미롭네요.
예전에 스탈린이 이이제이로 간도 일부를 김일성에게 주어 중국을 견제하려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북한은 일시적으로 주둔군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었구요.
흥미롭게 생각했는데, 글을 잘 읽어보니 북한에게 그런 여력이 있었을런지 의문이네요.
게다가 스탈린이 만주와 북한일대의 공업시설까지 뜯어가며 장사를 했다니...
김일성...아오
Je ne sais quoi
12/06/21 20:10
수정 아이콘
소련의 진정한 목적(?)은 저거였군요 -_- 개입을 주저하는 미국의 모습은 마치 시오노 나나미가 쓴 한니발 전쟁 후 새로운 전쟁을 거부하던 로마가 떠오르네요.
워3팬..
12/06/21 21:58
수정 아이콘
아 짜증나는 면상 나오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0324 [일반] 안철수 후보 정책공약 : 안철수의 약속 (2) 교육, 복지 [27] 타테시5853 12/11/12 5853 0
40311 [일반] 불굴 - 4. 어디까지가 한국인가 [8] 눈시BBbr6749 12/11/12 6749 0
39993 [일반] [계층] 좋아하는 성우 있으신지요? [36] Cool Gray3959 12/10/30 3959 0
39957 [일반] 새로운 전쟁 - 3.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14] 눈시BBbr11193 12/10/28 11193 2
39802 [일반] [철도계층...?] 새마을호를 타며 [22] Cool Gray4587 12/10/20 4587 1
39524 [일반] 북진 - 1. 낙동강 돌파 [24] 눈시BBbr6326 12/10/06 6326 2
39464 [일반]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 [20] 알고보면괜찮은5165 12/10/03 5165 0
39418 [일반] 인천상륙작전 - 3. D-Day [16] 눈시BBbr6060 12/09/29 6060 1
39220 [일반] 첫사랑과 인연 #4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5] 단백질3492 12/09/19 3492 0
39003 [일반] 보험이야기 (5) 생명보험 vs 손해보험 2 [19] 블레이드5100 12/09/04 5100 3
38632 [일반] 낙동강 - 1. 뚫느냐 막느냐 [16] 눈시BBver.27887 12/08/15 7887 4
37868 [일반] [6.25] 폭풍 - 1. 개성, 문산지구 전투 [58] 눈시BBver.29017 12/06/25 9017 8
37806 [일반] 창군 - 38선 : 반격 작전 [7] 눈시BBver.25650 12/06/21 5650 1
37727 [일반] 창군 - 14연대 반란 사건 [20] 눈시BBver.29557 12/06/16 9557 1
36825 [일반] [오늘] 4.19 [39] 눈시BBver.28867 12/04/19 8867 8
36200 [일반] 해방 후 - 조선 공산당의 몰락 (1) [12] 눈시BBver.26833 12/03/25 6833 5
35389 [일반] KTX 민영화, MB정부-대우건설 담합? [11] 부끄러운줄알아야지4989 12/02/17 4989 0
35233 [일반] 아래의 열차이용중 제일 뒷자석 의자 논란을 보고,, [168] 부끄러운줄알아야지10032 12/02/10 10032 0
34884 [일반] 테오에게 보낸 편지 [3] mangyg4941 12/01/25 4941 1
34745 [일반] 철도공단 "KTX민영화 찬성댓글 하루20개씩 달아라" [43] 아즐5622 12/01/17 5622 0
34737 [일반] 대몽항쟁 1부 - 4. 폭풍의 시작 [15] 눈시BBver.26578 12/01/17 6578 4
34620 [일반] 결국, 이정부는 KTX 민영화를 할려고 하나 봅니다.. [42] 마르키아르6964 12/01/11 6964 0
34249 [일반] 중국 경제에 대한 잡다한 지식 모음. [42] OrBef6446 11/12/28 6446 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