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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05 03:39:17
Name 구밀복검
Subject [일반]  매직 마자르에서 바르셀로나까지 - (4) 유러피언컵의 출범과 스테파노와 푸스카스의 만남 上
매직 마자르에서 바르셀로나까지 - (0) 서론
https://ppt21.com/?b=8&n=36149

매직 마자르에서 바르셀로나까지 - (1) 1953년 11월 25일
https://ppt21.com/?b=8&n=36181

매직 마자르에서 바르셀로나까지 - (2) 1954년 스위스 월드컵
https://ppt21.com/?b=8&n=36321

매직 마자르에서 바르셀로나까지 - (3) 1958년 스웨덴 월드컵 上
https://ppt21.com/?b=8&n=36886

매직 마자르에서 바르셀로나까지 - (3) 1958년 스웨덴 월드컵 下
https://ppt21.com/?b=8&n=36887



0.
“전설의 용사 다간의 그레이트 다간 GX와 지구용사 선가드의 그레이트 파이버드가 합체하면 어떻게 될까?”

최고의 대상 둘이 합성되었을 때 어떠한 결과물이 나올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은 유치하지만, 누구든 즉물적으로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논의를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증거다. 프징징들은 등광퓨전을 늘상 외쳤으며, 그들의 시기가 지나가고 나서는 똑같이 택뱅퓨전을 외쳤다. 축구 커뮤니티에는 호날두와 메시가 한 팀에서 뛰게 되는 것을 기대하는 이들이 여럿 존재하며,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잭슨의 듀엣곡은 프레디 머큐리의 죽음으로 인해 정식 발매가 되지 않았음에도 많은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곤 했다.

그런 유치하면서도 명료한 욕망을 가장 잘 충족 시켜주는 예로 드래곤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정한 패턴의 반복으로 진부함이 가중되던 찰나, <퓨전>이라는 도구를 통해 “베지터와 카카로트가 더해지면 얼마나 강할까?”라는 독자들의 호기심 – 독자 모두가 의식적으로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잠재적이고 막연한 형태로나마 모든 이들의 내부에 침잠하여 작가가 이를 살짝 일깨우기만 해도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 을 자극함으로써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고, 그 덕에 베지트는 불과 3분의 1권 분량을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래곤볼을 소재로 삼을 경우 빠질 수 없는 캐릭터가 되었다.

갈락티코가 각광받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지단과 피구, 호나우두 등 최고의 스타들만 모아놓은 팀을 볼 수 있다면...”이라는 요구를 실현시킴으로써, 그들의 빈약한 성과 –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약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 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는 유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래리 버드와 매직 존슨이 같은 팀에 속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 – 물론 이 경우에는 대립 구도 자체가 작위적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 이 함께 공연하는 일을 본 이는 아무도 없다. 로버트 드 니로와 알파치노가 호흡을 맞춘 작품은 히트(Heat) 한 작품 뿐이고, 마르크스와 존 스튜어트 밀은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며, 슈퍼맨과 원더우먼이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 창작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설혹 그러한 행운이 일어나더라도, 그로 인한 결과물이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에어리언과 프레데터가 한 작품에 나왔을 때, 이를 찾은 관객 중 몇 명이 기대를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갔을지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가 없을 것이며, 모리스 르블랑은 홈즈와 뤼팽을 동시 투입 시키며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의 눈으로 이를 돌이켜 볼 때 호평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축구계에선 이런 행운이 한 차례 찾아온 바가 있었고, 모두가 만족할만한 결실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푸스카스와 스테파노의 만남이었다.



1.
1953년 무렵, 27살의 디 스테파노는 이미 만인이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서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해 아르헨티나를 우승시켰으며, 소속팀인 리베르 플라테에서 47년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48년에는 현재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원형인 사우스아메리칸 클럽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데에 공헌했으며, 71경기 동안 53골을 넣는 등 맹활약을 했다. 49년에 콜롬비아 리그의 밀리오나리오스로 임대된 그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52년까지 4시즌 동안 팀을 3번이나 우승시켰으며, 110여 경기에서 100골을 넣었다.

이에 따라 그에게 유럽 구단들의 오퍼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가 왔는데, 바로 1952년 밀리오나리오스가 스페인으로 투어를 와 레알과 경기를 가진 것이다. 이 때, 바르셀로나의 이전 레전드였으며 클럽의 수석 스카우트였던 페페 사미테르는 경기를 관람하고서 스테파노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고, 스테파노를 영입하는 데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바르셀로나는 이미 1950년에 헝가리에서 탈출하여 바르샤에 입단했던 라즐로 쿠발라라는 스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데뷔 시즌에 28경기를 뛰고 39골을 넣었는데, 바르셀로나는 디 스테파노를 쿠발라와 결합시킴으로서 바르셀로나를 최강의 팀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구상을 했다.

스테파노는 당시 리베르 플라테에 소속되어 있었고, 콜롬비아의 밀리오나리오스에 임대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에 따라 바르셀로나가 디 스테파노 영입을 위해서는 스테파노와 리버 플레이트와 밀로나리오스, 3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스테파노 영입에 먼저 착수한 것은 바르셀로나였다. 그들은 밀리오나리오스 주주의 아들인 라몬 트라이스 파르가스라는 카탈루냐의 변호사를 교섭인으로 임명하였다. 파르가스는 스테파노 영입을 위해 자신의 아버지와 암호문을 사용한 전보를 교환했는데, 이는 프랑코 정부가 바르셀로나의 스테파노 영입에 개입하여 레알 마드리드가 영입 경쟁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엇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 정부의 유착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바르셀로나는 디 스테파노와 리버 플레이테 구단의 승낙을 받은 상태입니다. 비록 레알 마드리드도 영입에 착수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들보다 앞서 있습니다."
"최근 스페인에 있어서 풋볼은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들만의 카탈루냐 향토애를 유일하게 분출할 수 있는 곳이 축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디 스테파노 영입은 전 지역민들의 관심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번 영입 건에 관한 것은 프랑코의개 입을 막기 위해서도 암호문을 의한 전보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바르셀로나가 그들이 스테파노를 십중팔구 영입했다고 생각한 반면, 리베르와 밀리오나리오스는 밀리오나리오스가 아직 이적료를 받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교섭이 난항을 겪자, 영입 시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바르셀로나는 사미테르와 그의 콜롬비아 친구인 주안 부스케츠에게도 영입을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부스케츠는 밀리오나리오스의 라이벌인 보고타의 CF 산타페의 임원을 역임한 바 있었는데, 그는 그들이 리베르 플라테의 동의만 얻어낸다면, 스테파노를 카탈루냐로 데려올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테파노가 5000달러의 부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노가 베네수엘라 투어 기간 동안 무단으로 밀리오나리오스를 이탈한 뒤에 바르셀로나로 데려왔다. 스테파노는 바르셀로나와 계약을 맺고 유니폼을 입게 되었으며, 이 이적은 피파에 의해 승인되기까지 했다.  밀리오나리오스는 당연히 분개하며 스테파노의 이적에 반발했고, 스페인 축구 협회에 바르셀로나를 고발했다.

파르가스는 그들과 재차 협상에 나섰는데, 밀리오나리오스 측에서는 이적료 4만 달러와 스테파노의 개인 부채 5천 달러를 바르셀로나가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파르가스는 여러 번의 흥정을 거쳤고, 결국 밀리오나리오스와 바르셀로나가 친선 경기를 가지는 조건으로 1만 달러에 스테파노를 바르셀로나로 이적시키는 데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런데, 파르가스에게 교섭을 위임했던 바르셀로나의 의장 엔리크 카레토는 해당 조건이 적절하지 않으며, 1만 달러를 지불하는 것 외에는 밀리오나리오스의 제안을 들어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에 대해 후일 파르가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왜 카레토 의장은 고집스럽게 1만 달러를 요구했는가? 교섭은 상대를 고려해야 한다. 협상 최초의 금액이 4만5천 달러였지만, 어렵게 1만 달러까지 금액을 낮추었다. 보통 이정도 쯤에 협상의 합의점을 찾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어째서 콜롬비아의 고도가 높아서, 혹은 스케줄이 빡빡해서 친선경기를 할 수 없다는 식의 핑계를 댔는가? 정말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원래 엔리케 의장은 정말 디 스테파노 영입을 원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나를 콜롬비아까지 보냈단 말인가? 혹시 교섭 중간에 방향이 바뀌었단 말인가? 정부나 마드리드로부터 어떠한 압력을 받았을까?”

“일부 클럽 수뇌부들과 얘기를 나눠 봤는데, 보드진 회의에서는 2만 달러까지 이적료를 지불이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카라카스에 머물고있는 카레토 의장에게 이것을 보고도 했고, 친선경기 스켸줄 역시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했다.”

한편 바르셀로나 클럽은 이를 그저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클럽의장 카레토의 행보에 대해 의문을 가진 몇몇 운영진들은, 카레토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리베르 플라테와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와의 협상을 지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1954년 여름부터 디 스테파노의 소유권을 바르셀로나가 획득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것으로 디 스테파노의 바르셀로나 이적은 마무리 되는 듯 했고, 유니폼을 입는 것만 남은 듯 했다.

하지만 8월 22일, 프랑코 정부는 외국인 선수의 계약을 법적으로 금지시켰다. 이로써 스테파노의 이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에 대해 바르셀로나는 강하게 반발했으며, 레알 마드리드 역시 스페인 축구 협회에 이의 제기를 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코 정부는 디 스테파노를 외국인 금지 조항으로부터 예외로 하되, 오직 그의 소유권을 바르셀로나와 레알이 분점할 경우에만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경우, 스테파노는 53-54시즌과, 55-56시즌은 레알 마드리드에서, 54-55시즌과 56-57시즌은 FC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식으로, 매 시즌 소속팀을 바꿔 뛰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이 기간 안에 양쪽 클럽에서 어느 쪽에서 최종적으로 디 스테파뇨가 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결국, 바르셀로나의 의장 카레토와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그 계약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스페인 혁명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프랑코 정부와 레알 마드리드에 대해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카탈루냐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실망한 팬들의 반발은 거세졌고, 1주일 뒤 바르셀로나 이사회에서는 이사회와 엔리케 의장을 사임시켰다. 그리고 스페인축구협회의 주관으로 새롭게 이사진이 구성이 되었는데, 이 임시 이사진들은 53년 10월 23일 디 스테파노의 소유권을440만 파세타의 금액으로 레알 마드리드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디 스테파노를 둘러싼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간의 10개월 동안의 영입 경쟁이 일단락 지어졌다. 이후, 디 스테파노는 27살부터 37살이 될 때까지 레알 마드리드에서 11시즌 동안 뛰면서 396경기 동안 307골을 넣었고, 8번의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트로피와 5번의 유러피언 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며, 발롱도르를 2번 수상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고, 이는 바르셀로나 인들에게는 두고두고 상처가 되었다.



2.
위대한 인물의 등장에는 항상 그가 능력을 발휘할 조건과 환경이 준비되어 있어야 함은 상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돌이켜보면, 가끔 인물의 성세기가 시작될 무렵, 그에 걸맞은 기회가 제공되는 경우를 관찰할 수 있다. 가령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에 대항해 95개조항 반박문을 작성했을 때, 때마침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판 인쇄술을 발명함으로써 전유럽에 그의 저작이 전파되었던 것과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테파노에게는 유러피언컵의 출범이 바로 금속 활판 인쇄술의 발명과 같은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남미의 축구 스타가 유럽에 도착한지 불과 1년 뒤에, 유럽 단위 클럽 대항전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된다.

그 계기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1954년, 12월 14일, 울버햄튼 원더러스가 푸스카스의 부다페스트 혼베드를 3-2로 이긴 후, 잉글랜드 언론들은 울버햄튼이야말로 유럽 최고의 팀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주장에 대한 논쟁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고, 르퀴프의 편집자였던 아노는 이런 흐름을 틈타 도발적인 주장을 했다.

“울브스는 모스크바와 부다페스트로 가서 그들이 무적임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잉글랜드인들이 축구에 대한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대해 그리 확신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전 유럽의 토너먼트를 만들 때이다.”

1954년 12월 16일, 아노와 그의 동료 자크 리스윅은 그들의 계획의 초안을 공개했다.

1) 14-16개 팀이 참가할 것이며, 리그전을 벌일 것이다.
2) 노동자 계급이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 경기는 주중 야간에 열릴 것이다.
3) 경기는 참가 클럽의 국가 또는 가장 명망 있는 스포츠 언론에 의해 후원 받을 것이다.

경기의 숫자를 감소시키기 위해서 녹아웃 토너먼트가 리그전 대신에 채택되었다. 르퀴프는 잠정적인 참가팀의 리스트를 만들었고, 각국의 협회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 초청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의 18클럽이 리스트에 포함되었다(르퀴프는 최종 참가팀으로 16개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몇몇이 기권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팀들의 절반 이상은 그들의 국내 리그 챔피언이 아니었다.

SC 로트베이스 에젠(서독), 첼시 FC(잉글랜드), SK 래피드(오스트리아), RSC 안더레흐토이스(벨기에), KB(덴마크), 하이버니언 FC(스코틀랜드), 레알 마드리드 CF(스페인), 스타드 드 랭스(프랑스), 플라멩고 홀란드 스포르트(네덜란드), 부다페스트 혼베드 SE(헝가리), AC 밀란(이탈리아), 스포르팅 CP(포르투갈), FC사르브룩켄(자르), 말뫼 FE(스웨덴), 세르베트 FC(스위스), TJ 스파르탁 소콜로보 프라하(체코), FK 디나모 모스크바(소련), FK 파르티잔(유고 슬라비아)

1955년 3월 2일, UEFA는 빈에서 조직 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르퀴프의 몇몇 대표들은 그들의 제안을 유러피언 최고 축구 협회에 제안할 권한을 얻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대륙 단위 토너먼트에 대한 그들의 아이디어를 개진했다. 비록 드로니, 세베시, 슈바르츠, 또는 그래험 같은 대부분의 UEFA의 구성원들은 그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크라헤이는 프랑스 저널리스트들을 격려했으며, 최종 보고서를 검토했다.

그동안,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이탈리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축구 협회들은 1927년부터 39년 사이에 열렸던 옛 중부 유럽 대회였던 미트로파컵을 부활시키기 위한 회의를 3월 4일에 개최했다.

르퀴프는 이에 발빠르게 대응했다. 1955년 4월 2일, 프랑스 매거진은 새로운 대륙 단위 토너먼트를 위한 동의를 구하기 위해 가장 주요한 유럽 클럽들의 구단주들과 파리에서 모임을 가졌다. (소련과 체코는 헝가리의 UEFA 회원이자, 매직 마자르의 감독이었던 세베시에 의해 대표되었다.) 그리고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회의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는 재정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각각의 게임의 수익으로부터 지방세가 공제되어야 했으며, 몇몇 도시들은 시정부나 여타 조직에 경기장이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기장대여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 대회 조직과 심판에 따르는 비용도 마련해야 했고, 여기에 원정팀을 위해서 1000달러의 지원금이 필요했다.

르퀴프는 일단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1) 5%는 지역 클럽의 소속 협회.
2) 60%는 홈 팀.
3) 30%는 플레이 된 경기의 숫자에 의해 모든 참가자들 사이에서 나누기 위한 공금.
4) 5%는 조직 비용.

회의 끝에,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모든 경기의 수입을 양 팀에게 50대50으로 분배하자는 요지의 제안을 통과시켰다. 그 의견은 다른 회의 참가자들을 만족시켰는데, 왜냐하면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에서 가장 큰 경기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베르나베우가 대회 전체를 위해 분명하게 금전적인 이득에 있어 더 큰 파이를 취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정한 태도로 여겨졌다.

그리고 대회 관리를 위한 운영 위원회가 다음과 같이 임명되었다.
위원장: 에르네스트 브드리뇨(프랑스).
수석 부위원장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스페인)
차석 부위원장: 구스타프 세베시(헝가리).
대표위원: 버스비(잉글랜드), 켈러(자르), 얀센(서독), 피아잘루나(스위스).

참가 클럽들이 확정됨으로써 파리의 마라톤 회의는 마무리지어졌다. 18개의 초대 팀의 그룹으로부터, 부다페스트 혼베드 SE, 플라멩고 홀란드 스포르트(네덜란드), 말뫼 FE(스웨덴), 그리고 KB(덴마크)는 각각 부다페스트 보로스 로보고, PSV, 융가르덴스 IF, 그리고 AGF, 대체되었다.

UEFA는 처음에 챔피언스 컵의 조직을 반대했으며, 견본시들이 제안한 다른 대회를 지원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지역 정부가 모든 대회 운영 비용을 부담함으로써 이익이 확실한 대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55년 4월 10일에, UEFA의 대표들이 바젤에서 회의를 가졌고, 그에 따라 바르셀로나, 바젤, 버밍험, 브뤼셀, 부다페스트, 스톡홀름, 프랑크푸르트, 로잔, 라이프치히, 런던, 밀라노, 모스크바, 파리, 비엔나, 그리고 자그레브 등이 참가하는 인터-시티 페어스 컵(국제 견본시 컵)이라는 명칭의 새로운 유럽 대항전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두 개의 대회를 둘러싸고 르 퀴프와 UEFA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으며, 이에 따라 FIFA는 문제에 관여할 것을 결정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조정자 역할을 자청했다. 5월 7일에, 최고 축구 협회의 운영 위원회는 유럽 축구의 현상황을 토의하기 위한 긴급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르퀴프의 대항전, 인터 시티 페어스 컵, 그리고 미트로파 컵이라는 각기 다른 세 개의 대륙 클럽 대항전의 창설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르퀴프의 대항전에 대하여, FIFA는 다음의 요건을 규정했다.

1) 참가 클럽은 각각의 국가에 의해 인가되어야 한다.
2) 대회는 UEFA에 의해 조직되고 감독되어야 한다.
3) 유러피언 컵이라는 명칭은 향후의 국가 대항전을 위해 가능한 한 남겨둘 것이며, 그러므로 르퀴프의 대항전은 유러피언 챔피언스 클럽스 컵으로 불려야한다.

1955년 5월 17일에, 새로이 만들어진 챔피언스 클럽스 컵의 운영 위원회는  마드리드의 카스텔라나 힐톤 호텔에서 그들의 첫 번째 회의를 소집했다. 이곳의 구성원들은 피파에 의해 기획자로 인정되었으며, 나중에 UEFA의 회장으로 추대된 대니시 에베 슈바르츠가 그들에게 합류했다. 참가 팀들과 대회 날짜가 명확하게 정해졌다. 5월 21일, UEFA 대표자들과 운영 위원회 간의 다른 회의가 파리에서 열렸다. UEFA는 그 자신이 새로운 대항전을 조직하고 이전에 승인된 모든 결정들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슈바르츠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운영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매직 마자르의 세베시가 부위원장으로, 드로니는 총무로, 그래험과 보웬스는 대표위원으로 정해졌다.

1955년 9월 4일, 마침내 유러피언 챔피언 클럽스 컵의 시작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첫 번째 경기는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CP와 유고슬라비아의 FK 파르티잔의 사이의 리스본 경기였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클럽 대항전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음을 의미했다. 비록 첫 대회의 참가팀들은 명망이 높다고 할 수 없었지만, 다음 시즌인 56-57시즌부터는 대회의 명칭도 유러피언 챔피언스 컵으로 변경 * 했고, 각국의 리그 우승팀만이 대회에 참가하도록 했다. 물론, 당시 각국의 리그는 동등한 수준에 놓여있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간혹 전력차가 많이 나는 팀 간의 경기에서 10골에 육박하는 다득점이 들어간 적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회의 참가팀들은 분명 유럽 최강을 자처할만한 팀들이었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는 이 대회에서 스테파노를 중심으로 3시즌의 토너먼트 동안 22경기에서 16승 2무 4패 / 65득점 27실점을 기록하며 3시즌 연속으로 정상에 섰다.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스쿼드의 강화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이 때에 타겟이 된 것이 바로 푸스카스였다.

* 유러피언 컵은 이 명칭의 약칭이었다.



3.
이전에 상술했다시피, 월드컵 이후 푸스카스는 계속 혼베드와 헝가리에서 활약을 이어나갔다. 매직마자르는 월드컵 직후, 55년까지 1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15승 3무를 거두며 건재함을 알렸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56년부터였다. 터키에게 3-1의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유고와 무승부를 거뒀으며, 체코에게 패배했다. 그 직후 벨기에에게 3-1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30분 동안 역전을 당하며 5-4로 패배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자, 당국은 더 이상의 관용을 허용하지 않았고, 세베시는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후임 감독으로는 MTK의 감독이자 세베시 밑에서 코치직을 수행하고 있던 부코비가 선임되었고, 첫 상대였던 포르투갈과 비긴 다음부터는 5연승을 달렸다. 다소 삐걱거리긴 했지만, 적어도 당대의 강자 반열에서 탈락할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때,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56-57시즌 챔피언스 컵에 출전했고, 첫 상대로 아틀레틱 빌바오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빌바오에서 열린 원정경기에서 2-3으로 패했다. 10월 당시, 헝가리에서는 혁명이 발생했기 때문에 2차전은 헝가리가 아닌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푸스카스는 이 경기에서 후반 86분 득점을 기록하며 동점골을 뽑았지만. 팀은 3-3 무승부를 기록하였고, 그리하여 합계 스코어 5-6으로 부다페스트는 탈락하고 만다.

당시 헝가리 선수들은 국내의 불안한 상황을 염려하여 부다페스트에 있던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피파와 헝가리 축구협회의 반대에서 불구하고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브라질 등 유수 국가들을 돌아다니는 투어를 기획했다. 투어가 끝나고 유럽으로 돌아온 후, 보지크를 포함한 몇몇 선수들은 헝가리로 돌아갔고, 치보르, 코치시, 푸스카스 같은 선수들은 서유럽에 있는 새로운 클럽에 들어갔다. 헝가리 국가대표팀은 풍비박산 났고, 팀을 재구성하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매직 마자르의 신화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중, 헝가리로의 복귀를 거부한 후 푸스카스는 RCD 에스파뇰에서 비공식경기를 몇 차례 치뤘다. 이를 주목했던 AC밀란과 유벤투스가 그와 계약하려고 했고, 이적은 순조로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UEFA는 망명자인 푸스카스에게 2년 동안 축구 선수 활동을 정지시켰고, 그는 2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 출전정지 기간이 끝나고 나서 푸스카스는 다시 이탈리아에서 뛰고자 했지만 명문클럽 중에서는 그와 계약하려고 하는 팀이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꽤 뚱뚱한 편이었고, 그 당시엔 서른을 넘은 나이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감독들은 그의 기량에 의문을 표했다. 마침 1958년 뮌헨 참사로 인해 선수단의 상당수가 사망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스쿼드를 보충하기 위해 그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외국인 관련 규정의 제약과 푸스카스의 영어 실력 부족으로 인해, 당시 감독이던 지미 머피는 푸스카스를 영입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 달 후, 푸스카스는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당시 그의 나이는 31살로 전성기를 지난 나이었지만, 37살까지의 7시즌 동안 팀의 레전드로 남을만한 활약을 보이며 레알 마드리드 역사에 길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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