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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1/25 03:03:19
Name mang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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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테오에게 보낸 편지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1학년 교양시간에 들었던 '인간과 가치'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학습 자료였던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지금 다시 보니 참 인상 깊네요.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화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살아 생전 보냈던 600 여통의 편지를 묶은 것입니다.
불우했던 인생, 사랑했던 여자, 그림과 인생에 대한 생각이 구구절절 쓰여 있는데
가슴이 아프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예술적 감각이 글 여기저기에서 묻어나는 모습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 중 몇몇 눈에 띄는 편지를 pgr 분들과 나눠보고 싶어서 타이핑해서 올려봅니다.



1882년 5월 3일~ 12일

오늘 모베를 만나 아주 유감스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그와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모베는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가버렸다. 내가 쫓아가길 원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와 이야기라도 나눌 겸 내 그림을 보러 오라고 했는데 "다시는 자네를 보러가지 않겠네. 다 끝났어"라고 딱 잘라 거절하더군.
테오야, 나도 귀가 있다. 누군가 "넌 정말 타락했어"라고 말할 때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나는 그냥 돌아서서 혼자 집까지 걸어왔다. 모베가 그 말을 미리 준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에게 설명을 요구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을 작정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모베가 약간의 가책이라도 느끼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어떤 일 때문에 의심을 받고 있다.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어떤 것을 비밀로 하고 있다.
글쎄, 예절과 교양을 숭배하는 너희 신사들에게 물어 보고 싶구나.
한 여자를 저버리는 일과 버림받은 여자를 돌보는 일 중 어떤 쪽이 더 교양 있고, 더 자상하고, 더 남자다운 자세냐?
지난 겨울, 임신한 한 여자를 알게되었다. 남자한테서 버림받은 여자지.
겨울에 길을 헤메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얻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겠지.
하루 치 모델료를 다 지불하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했고, 잘 해나갔다.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른 여자가 내 가슴을 뛰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멀리 떠나버렸고,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 병들고 임신한 데다 배고픈 여자가 한 겨울에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


1882년 6월 1일~2일

식구들이 나에게 법의 보호를 받게 할지도 모른다고 했지.
몇몇 목격자들만으로도 내가 경제적인 문제를 스스로 책임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질테고, 그것으로도 아버지는 나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법의 보호 아래 묶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
요즘 같은 시절에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그걸 거부할 권리가 있단다.
보호조치를 하는 법적인 절차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나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람'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쉽게 적용될 수 없다.

나는 진심으로 시엔을 좋아하고, 그녀 역시 그렇다. 그녀는 나와 어디든 동행하고 있고,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물론 내가 시엔에게 느끼는 애정은 작년 케이를 향해 느꼈던 열정보다는 약하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케이를 향한 열정이 좌절된 후 이것은 나에게 찾아온 유일한 사랑이다.
이 사랑이 시작될 때부터, 내 존재를 주저 없이 내던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승산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나를 던진다 해도 승산은 아주 희박하지.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을 이룰 가능성을 미리 헤아려야 하는 걸까? 이 문제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지.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니까.

네가 이리로 온다는 생각을 하면 아주 기쁘다. 시엔이 너에게 어떤 인상을 줄 지 궁금해 진단다.
그녀에게 특별한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이거든.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하게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이 사랑을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겠지. 시엔을 만나지 않았다면 마법이 풀려 실의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와 그림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1882년 7월 21일

다른 사람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 것 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여주겠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


1883년 12월 15일

아버지나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덩치가 크고, 털이 많으며, 집안에 지저분한 발을 하고 드나들 게 분명한 개를 집에 두기 망설이는 것처럼 나를 집에 들이는 걸 꺼려한다.
그래. 그 개는 모든 사람에게 걸리적 거리고, 짖는 소리도 아주 큰 불결한 짐승이다.
그래 좋다. 그러나 그 짐승은 사람이 내력이 있고 사람의 영혼이 있다. 게다가 다른 개와는 달리 아주 예민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내가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가족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들이 개를 계속 집에 두는 이유는 그 개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저 억지로 참고 있을 뿐임을 개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개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으려 한다.
이 개는 한 때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그를 길거리로 내쫓은 사람은 아버지다. 너무 오랫동안 쫓겨나 있던 개는 더 사나워졌다.
개는 사람을 물 수도 있고, 광견병에 거릴 수도 있다. 그러면 경찰은 그 개를 찾아가 총으로 쏘아버리겠지.
아,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실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개를 집 지키는 개로 삼고 키울 수도 있을텐데.
개는 이곳에 돌아온 걸 후회한다. 그들이 친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황야를 떠돌 때도 이 집에서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불쌍한 짐승이 돌아온 것은 생각이 모자란 탓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랄 뿐이다.


1884년 10월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8년 6월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왜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1889년 9월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 있다.
욱신거리는 오른쪽 귀에서 강물 소리가 들린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두 남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별이 빛나는 밤에 캔버스는 초라한 돛단배처럼 어딘가로 나를 태워갈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
흔들리는 기차에서도 별은 빛나고 있었다.

흔들리듯 가라앉듯 자꾸만 강물 쪽으로 무언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
강변의 가로등,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어내고 있다.
심장처럼 파닥거리는 별빛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
나는 노란색의 집으로 가서 숨죽여야 할 테지만 별빛은 계속 빛날 테지...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
트왈라잇 블루, 푸른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나오고 있다.



참고)

1881년 고흐는 사촌인 케이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사랑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케이에 대한 슬픔에 취해있을 무렵, 임신한 매춘부 시엔과 만나게 되고 둘은 급속히 사랑에 빠져 결혼을 꿈꿉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1년도 채 못 가 고흐는 시엔과 그녀의 아이를 버리고 홀로 드렌테로 떠납니다.  
고흐는 평생을 시엔과 그녀의 아이를 버렸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하네요.
1884년에는 열 살 연상의 마르고트와 사귀면서 결혼을 꿈꿨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집안에서 반대하면서 또 다시 결혼에 실패합니다.
결국 그는 1890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쓸쓸하게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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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12/01/25 03:43
수정 아이콘
그리고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주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작품들은 빛을 보기 시작했다는..?크

이런 글 좋아요.
시나브로
12/01/25 03:47
수정 아이콘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고흐의 편지




이런 것도 있어요.

미술학도는 아니지만 제가 공감했던 고흐 편지 크..
Rock[yG]
12/01/25 22:15
수정 아이콘
덕분에 몇년만에 로그인 한번 해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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