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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7/06 02:30:41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남한산성 - 9. 병자년까지


+) 이 글은 각종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며 내 가족, 이웃까지도 병들게 할 지도 모릅니다.
+) 건강을 헤치는 스트레스, 그래도 이 글을 보시겠습니까?

한 12부 정도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10편째가 가까워졌네요. 음... 호란 끝나고도 할 얘기 많을테니 속전속결로 가 보겠습니다.

1. 후금의 팽창
정묘호란 후 후금은 바로 명을 아박해 들어갑니다. 명의 금주, 영원 등 산해관바깥을 열나게 두들기지만 원숭환이 이끄는 명군은 적절한 운용으로 25일 동안 28차례의 전투를 벌이며 후금을 막아내죠. 결국 홍타이지는 작전을 바꿉니다.
28년부터 홍타이지는 북진하여 몽골 동부의 차하르 지역을 공격합니다. 이 때 일부 영토를 획득한 모양입니다. 한편 영원성 쪽으로는 소규모 병력을 보내 소모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29년 10월, 그는 명과 몽골 중 어디를 칠 것인가 의논하죠. 결국 결정된 것은 명이었습니다. 산해관을 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길이 열렸거든요.

그는 동맹국인 코르친 몽골의 도움을 받아 산해관을 우회, 북경을 직접 공격합니다. 기습을 받은 명군 지휘부는 도주했고, 후금군은 북경 외곽의 요충지들을 공격해 많은 성과를 올리죠. 이후 아민에게 소수 병력을 남기고 돌아가는데 아민이 명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면서 많은 학살을 벌였다고 합니다. 명 태조 주원장의 능조차도 약탈당했다는군요. 이 때 원숭환은 급히 북경으로 가서 남아 있던 후금군을 공격해 승리하지만 후금군을 막지 못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됩니다. 한편 홍타이지는 명의 태감 둘을 붙잡아서 "원숭환이 나와 밀통하고 있다"고 한 뒤 풀어주고, 숭정제는 이에 분노해서 원숭환을 책형이라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합니다. 반간계에 제대로 넘어간 거죠. 여기에는 모문룡을 죽인 것도 관련이 있다고 하지만 뒤로 넘기죠.

29년 10월부터 30년 2월까지의 후금의 북경 공략, 이것을 기사 전역이라고 부릅니다.

가도의 명 지휘부는 이것을 조선에 말하면서 자신들이 승리했고 홍타이지도 죽었다고 하면서 조선에서도 원군을 보내야 된다고 강요했고, 후금은 왜 사신이 늦냐면서 전쟁을 관망하려는 게 아니냐고 욕 합니다. 이 때 원숭환이 자기와 내통하다가 걸려서 죽었다는 말도 흘리죠. 이 때 인조는 "병력만 있으면 적 본진 털 건데 오히려 사신을 보내야 되다니 갑갑하구만"이라고 하죠. 그래도 최대한 중립을 지켜서 양 쪽에 모두 사신을 보냅니다.

여태까지도 그래왔지만 이걸 계기로 많은 한인들이 후금에 투항하거나 내통했고,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31년 후금은 마침내 홍이포를 얻게 되고 제작 기술까지 얻게 됩니다. 이를 통해 대릉하성을 공격하는데, 이전에 원숭환과 함께 열심히 싸웠던 조대수는 끝까지 버티다 마침내 항복하고 오히려 명을 치는 데 앞장서게 됩니다. 33년에는 모문룡의 부하였던 공유덕과 경중명이 수군을 이끌고 항복하죠. 후금은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수군까지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누르하치 사후 내부가 불안했던 20년대 후반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후금은 날로 강성해졌고 명은 내부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나고 후금에 투항하는 수가 늘어나 갔죠. 이미 이쯤 되면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봐야 되겠죠. 이 해에 홍타이지는 휘하 팔기들과 조선, 몽골, 명 중 어디를 먼저 칠 것인지 의논합니다. 대부분의 의견은 일단 지금은 포용하고 명을 먼저 치는 데 집중하자는 거였죠. 이미 조선은 청의 속국 내지 금방 취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35년, 차하르 몽골은 후금에 완전히 복속됩니다. 한편 여전히 산해관은 넘지 못 했지만 명군한테도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죠. 차하르의 칸은 후금으로 귀순했고, 그를 통해 원의 국새를 얻습니다. 홍타이지는 이미 25년에 동맹국인 코르친 몽골에게서 후비를 얻은 바 있습니다. 칭기즈 칸 가문의 사위가 된 것이죠. 그리고 이번에는 원나라의 옥새를 얻었습니다. 대원제국의 후예로서 그는 "신무영명황제"라는 존호를 받아냅니다. 청의 탄생입니다.

35년 12월, 후금, 투항한 한인, 몽골인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합니다. 홍타이지는 역사에서 늘 보던 것처럼 거부했지만요. 그들은 역시 형제국인 조선의 찬성을 받아내기 위해 조선으로 향합니다.

형제관계는 끝났습니다. 이제 조선은 청을 명을 대신한 황제국으로 섬길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의 기로에 빠지게 됩니다.

2. 조청관계의 악화
1) 조청무역
정묘호란을 얘기하며 적었듯 후금은 조선에게서 물자를 뺏는 목적보다는 모문룡 무력화와 조선과의 화친을 중시했습니다. 그래도 악착같이 포로를 잡아가고 물자를 약탈하는 모습을 보여 주죠. 그래도 이 때까지는 포로들을 송환하는 문제에서도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무역이었거든요.
무역을 개시한 곳은 중강이었습니다. 애초에 명이랑도 여기서 무역을 한 모양이네요. 한명기 교수는 이 때 청은 미곡 무역을 간청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청태조실록을 보지 못 했으니 제가 그 어투를 알 수는 없네요) 조정은 대신 포로 송환을 요구했죠. 특히 과일, 약재 등에 대한 수요가 높았는데 그 중에서도 홍시를 특히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때 명과 일본과의 무역에서 얻은 물건도 같이 보냈구요. 후금이 국가를 정비하면서 직물에 대한 수요도 늘고 그 귀한 후추 (...) 도 많이 팔린 모양입니다. 이 때 후금은 명과의 교역이 끊기면서 생긴 손해를 최대한 조선에 기댔고, 그 정도는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특히 몽골을 점령하면서 그들을 회유하기 위한 물자는 만주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땅이 넓으면 뭐 해요 -_-a 이외에도 각종 경전과 역사책 등 서적을 얻어 갔습니다. 오랑캐일 뿐이던 후금이 내실을 다지고 문명국으로 가는 길이었죠.

+) 역시 한반도는 금싸라기땅이라니까요 ( - -)a

후금의 조선에 대한 기대는 커져만 갔습니다. 28년에는 회령에도 개시를 하자고 요구했죠. 31년에는 조선이 보낸 방물의 양이 적다며 접수를 거부합니다. 후금은 개시하는 때를 봄, 여름, 가을 세 번으로 늘리고 이후에는 그것도 없애자고 요구했죠. 하지만 조선은 회령의 개시도 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령은 함경도 동북쪽 끝에 가깝습니다. 인구도 적고 상인들도 가기 꺼렸죠. 거기에 후금과의 개시에만 신경쓰면 명과 일본과의 무역의 비중이 줄게 됩니다. 거기에 명과의 관계도 생각해야 됐고, 김상헌은 교역을 오직 토산품으로만 하고 중국산은 하지 말자고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명도 이걸 요구했구요.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모문룡은 후금에 보내는 곡물과 상인, 사신들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그 후에도 계속 시도했습니다. 이건 후에 논하죠. 후금의 요구는 커져 가기만 하고 조선은 꺼리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후금은 계속 조선에 기대면서 개시에 소극적이면 어김없이 질타했습니다. 거기에 개시에 참가하는 수도 늘어서 35년에는 1300명이나 되었다고 하죠. 조선은 상인들만 왕래하자고 했지만 후금은 거부합니다. 거기에 후금 상인들은 품질이 나쁜 인삼 등을 강제로 팔려고 했습니다. 한편 후금도 조선이 파는 물건이 나쁜 게 많고 숫자도 부족하다고 탓 했죠.

거기에 청은 자기들 사신을 명과 같은 대우로 해 주기를 계속 요구했습니다. 명 사신이 오면 금은그릇을 내놓으면서 자기네가 오면 사기 그릇을 내놓냐느니 벽제관부터 모화관까지 영접하지 않느냐느니 하면서 불평을 터뜨렸고, 숙소 역시 명 사신들이 묵는 곳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투항한 한인들에게 명나라와 대접이 얼마나 다른지 확인하게 했죠. 이미 정묘호란 이후 계속 그들은 명과 같은 대우를 요구했습니다. 황제를 칭하려 한 게 36년이었을 뿐, 그들이 원한 것은 형제국이 아닌 군신의 대우였습니다.

2) 가도를 둘러싼 갈등
정묘호란 직후 명의 천계제가 죽습니다. 권세 높았던 환관 위충현도 제거되죠. 그에게 연줄을 대던 모문룡은 난감해졌습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어이 없게 후금이었습니다. 정묘호란 전부터 그는 계속 후금에 선을 대 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에서도 그걸 크게 의심했었죠. 그러면서도 계속 후금을 공격한 걸 보면 개인적인 줄타기일까요. 전투력은 몰라도 능력이 나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_-; 정묘호란 후에는 후금 사신들도 이걸 인정했다고 합니다. 둘의 사이가 계속 좋아지던 어느 날, 원숭환은 모문룡을 호출합니다. 낌새를 느낀 그는 2만 8000명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가죠. 자기의 위세를 보이려 한 겁니다. 하지만 원숭환은 그를 후하게 대접하다가 기회를 틈타 급히 참수해 버립니다. 이건 원숭환이 처형당한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이후 자신의 부하들에게 가도를 맡기고 조선에게도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모문룡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 이 때 파견된 장수 중 유해가 있는데, 이 유해가 세 명이나 있네요. -_-; 요동 한인이었다가 후금에 투항한 유해, 모문룡의 뒤를 이어 가도를 통치한 유해, 조선인 출신으로 명군으로 참전한 유해. 연려실기술에서는 유해 형제의 일이라면서 이들을 모두 넣고 있는데 한자도 다 똑같은 모양입니다. 최소한 두 명의 동명이인이라 봐야겠고 (정묘호란 때 유해가 왔으니) 이름이 똑같아서 실수로 겹친 기록들이 있나 봐요. 아무튼 정묘호란 때 "조선인 출신 유해"가 사신으로 왔다는 것은 오류인 것 같네요.

이들은 모문룡과 다름 없이 조선을 협박해 군량 등을 얻어냈고, 심심하면 후금 사신들이나 상인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조선도 여기에 협력하라고 하죠. 그들의 이런 행동은 후금의 뒤를 잡고 있으면서도 아무 활약도 못 한 것에 대한 부담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거기다 북경까지 털리는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요. 30년 3월 17일, 진계성과 유흥치(유해) 등은 병력 2000으로 후금 사신 중남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동쪽으로 도망해서 창성을 거쳐 귀환하죠. 이 때 의주 부윤 이시영은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해 놓고 중남은 도피시킵니다. 진계성은 조선이 그들을 빼돌렸다고 하며 성을 포위하고 성 안의 창고를 부숴 버립니다. -_- 이 때 박난영이 심양에 사신으로 갔다가 회답 차사와 함께 귀환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돌아갑니다. 회답차사는 도로 돌아갔고, 홍타이지는 용골대를 의주로 보내 그걸 또 탓하죠. 조선에서는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 선약해를 후금에 파견합니다만 명군과 마주칠까봐 길을 돌아갑니다. 그러자 후금에서는 왜 다른 길로 왔느냐, 홍타이지가 원정 중인데 기습하려는 거 아니냐고 합니다. -_-; 실제 이 때 후금은 조선의 뒷치기를 걱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정도면 참 고급 샌드위치입니다.

3) 양자택일
인조 정권은 이렇게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둘은 그걸 원치 않았죠. 정묘호란까지야 후금도 명도 조선의 입장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는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많이 뜯어먹었지만요. 30년대로 가면 더 이상 그 입장을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31년, 가도에서는 유흥치가 후금으로 투항하려다가 장도와 심세괴에게 피살당합니다. 이 때 가도에 있던 만주인들이 학살당합니다. 문제는 이 때 살아남은 385명이 조선 땅으로 온 거죠. 후금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데리고 갔고, 홍타이지는 유흥치가 후금에 투항하려 했는데 조선이 군량을 지원해 줘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도 재침공 가능성을 내비치고 실제로도 평안도에서 배를 수색합니다. 후금 내에서도 배를 만들려고 했고, 조선에 수군을 요구했죠. 조선은 배를 빌려주는 것만큼은 절대 할 수 없다고 버팁니다. 후금은 포기하고 평안도 연안에서 훔친 배 11척으로 공략하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해전은 전문 인력 없이 하기 어려우니까요. 한편으로는 조선이 명 쪽에 기우는 것에 대한 의심을 키웁니다.

33년 1월 25일, 홍타이지는 세폐를 퇴짜 놓으면서 병선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 때 말이 참 웃기네요. 옮겨봅니다.

"더구나 귀국이 준 물건은 본래 정으로 준 것이 아니며 또 우리가 요구한 것도 아니오. 이는 귀국이 까닭없이 명나라를 도와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기에 하늘이 벌을 내려 준 것이니, 우리가 그 숫자를 정한 것이 실로 이 때문이오." (33년 1월 25일)

이 때 그는 세폐의 양을 크게 늘립니다. 그 양은 금 100냥, 은 1000냥, 면주 1000필, 마포 1000필, 세포 1만 필, 물소 뿔 100부, 소목 200필 등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하죠 -_-;

거 참 (...) 아무튼 이에 대해 인조는 특히 노합니다. 이에 대한 대응을 논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글의 내용은 ‘앞서 정묘년에 하늘을 두고 맹세하여 두 나라가 함께 태평을 누리리라 바랐는데, 따르기 어려운 요청이 뜻밖에 갑자기 나오니, 너희들이 먼저 끊은 것이지 우리가 끊은 것은 아니다. 또 저자를 개설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답서의 내용을 들은 후부터 모두 분개하여 한번 싸우고자 한다. 누가 너희들과 영리를 다투려고 하겠는가.’라는 뜻으로 꾸미는 것이 좋겠다." (1월 28일)

이 정도면 싸우자는 거죠. 그는 팔도에 교서를 내리고 싸울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이 때 임경업이 청북 방어사가 됩니다. 비변사에서는 우호적으로 보내자고 하지만 인조는 이렇게 답 합니다.

"오랑캐의 본심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경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그들이 갑자기 성을 내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구나. 어떻게 조처해야만 오랑캐가 성내지 않고 국가가 태평하겠는가?" (2월 1일)

당시 보내려 한 국서의 내용을 막 적으면 이렇습니다.
- 우리가 형제의 우의를 맺고 5, 6년 동안 작은 다툼도 없었고, 다만 니네가 불공평하게 구니까 우리 상인들이 도망간 것 뿐이다. 내가 이거 한 두번 말했어? 근데 니네는 왜 계속 그래?
- 또 저번 겨울에 국서도 없이 들어오고 달라고 한 것도 원래의 몇 배가 된다. 외제 말고는 토산품은 다 수 채워 보냈는데 니가 이걸 모르고 그러면 어쩌냐.
- 내가 이렇게 해 줬는데 니가 말도 안 되는 거 달라면서 내가 마음 없다면 누가 믿겠냐. 니 하는 게 그런데 상인들이 가려고 하겠냐.
- 확실히 말한다. 생각 바꿔라.

물론 본문은 훨씬 유~하게 적혔습니다만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사실상의 절교 선언이죠. 최명길은 여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물론 거부당하죠. 재밌게도 이걸 막은 것은 무신들이었습니다. 그 때 막 4도 도원수로 임명된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은 의주에서 김대건을 붙잡아 두고 국서를 고치자는 건의를 강하게 합니다. 일개 무신이 왕명에 반대한 것이고, 인조는 이에 크게 분노해서 그들을 효시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라고 합니다. 비변사는 다시 힘을 내 이들의 말을 듣자고 강하게 건의하고, 인조는 한 발 물러섭니다. 결국 국서의 내용은 고치지만, 김시양과 정충신은 교체당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도원수의 자리에 오른 이가 김자점입니다. -_- 다음 편에 다시 얘기하죠.

일단 세폐 문제에 대해서는 저 정도 다른 물자는 요구한 양의 1/10만 주고, 금은과 소 뿔은 토산품이 아니라서 거부했습니다. 일단 이렇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요구한 양만큼은 아니더라도 물자를 더 주고, 나름 합의를 하긴 한 모양입니다. 실록에 나타나는 물자의 양은 이렇습니다.

각색 면주(綿紬) 6백 필, 저포(苧布)와 마포(麻布)가 모두 6백 필, 각색 목면(木綿) 7천 필, 표피(豹皮) 50장, 수달피(水獺皮) 2백 장, 청서피(靑黍皮) 1백 60장, 단목(丹木) 2백 근, 상화지(霜華紙) 5백 권, 백면지(白綿紙) 1천 권, 세룡석(細龍席) 1장, 각색 채화석(綵花席) 1백 장, 호초(胡椒) 10두, 호도(好刀) 8병, 소도(小刀) 8병, 황률(黃栗) 10두, 대조(大棗) 10두, 건시(乾柿) 50접, 전복(全鰒) 10접.

이후 36년에는 다른 명단이 나오는데 그건 이렇습니다.

"잡색주(雜色紬) 6백 필, 백저포(白苧布) 2백 필, 백포(白布) 4백 필, 잡색 목면 2천 필, 정목면(正木綿) 5천 필, 표피(豹皮) 50장, 수달피 2백 장, 청서피(靑黍皮) 1백 60장, 상화지(霜華紙) 5백 권, 백면지(白綿紙) 1천 권, 채화석(彩花席) 50장, 화문석(花紋席) 50장, 용석(龍席) 1장, 호도(好刀) 8병(柄), 소도(小刀) 8병, 단목(丹木) 2백 근, 호초·황률·대추·은행 각 10두, 건시(乾?) 50첩, 전복 10첩, 천지다(天池茶)·작설다(雀舌茶) 각 50봉이었는데, 금년에는 또 금나라에서 힐책함으로 인해 백주 2백 필, 백포 2백 필, 정목면 3천 필, 청서피 40장, 백면지 5백 권, 호도 12병, 소도 12병을 더 보냈다." (36년 2월 4일)

일단 실록에 나타나는 양은 이렇고, 이 기사에는 "정묘호란 후"라고 돼 있는데 -_-a 지금까지를 보면 후금의 요청에 따라 30년대에 계속 바뀐 모양입니다.

일단 위기는 한 번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한 번 얘기했듯 주화파는 오히려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무신에게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당이 쳐들어올 때 영류왕이 그랬고, 고려 때 척춘경이 그랬고 광해군이 그랬던 것처럼요. 3월 6일에 홍타이지의 답서가 오는데 다행히 그냥 인조를 달래면서 "잘못은 니네가 했잖니~"하는 유~한 말투였습니다. -_-a 그리고 배에 대한 얘기는 아예 빼 버렸구요. 비변사는 이게 "그니까 좀만 더 주어~" 하는 것으로 파악했고, 좀 더 줘서 보내서 사태는 가라앉습니다.

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모문룡의 부하였던 공유덕, 경중명이 등주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패해서 여순으로 도망쳤다가 후금에 투항합니다. 아무래도 홍타이지가 배를 달라는 말을 빼고 유한 답서를 보낸 건 이것 때문일 듯 합니다. 명에서는 이들의 요격을, 후금에서는 이들의 군량 지원을 요청합니다. 테마게임일까요. -_-a

조정은 결심합니다. 요격하기로요, 실제 공격해서 후금군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조선이 어느 편을 들 것인지가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또한 홍타이지가 조선에게 때로는 저자세로, 때로는 협박으로 요구했던 수군도 갖춰졌습니다. 그는 이들을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까지 극찬하죠.

조선의 이용가치가 없어진 겁니다.

한편 인조가 전에 없이 강경하게 나선 것도 쉽게 이해가 되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의 추숭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반대하는 대신들을 유배 보내고 (이 중에는 공신 김류도 있었습니다) 계속 반대하자 명에 요청했죠. 3월에 추숭이 이루어지고, 5월에는 명의 승인도 떨어집니다. 이렇게 선조-원종-인조로 이어지는 정통성이 확립되고 광해군은 완전히 흑역사가 되죠. 이 시기가 절묘하게 겹칩니다.

인조가 후금에 전쟁 불사를 외친 데에는 자기 아버지의 추숭, 즉 자기의 정통성이 관련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 때 후금은 어디를 칠까를 고민하다가 조선은 아직 끌어안을 대상으로 보고 뒤로 미룹니다. 하지만 반드시 복속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것도 확실해졌죠.

지금까지의 일들을 보면 정묘호란의 화의는 절대 영원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인조는 최대한 중립 외교를 지키려 하다가 결국 명으로 확실히 가닥을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은 북경 외곽이 털린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특히 33년에는 조선군이 확실히 명을 편 들면서 확실히 전쟁을 각오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조선 자체의 친명반청적 성격보다는 아버지 정원군의 추승 문제가 더 컸다는 결론을 내고 싶습니다.

조선은 정묘호란 후부터 후금의 재침공에 대한 준비를 합니다. 인조는 절대 준비 없이 당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지난 역사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빠른 굴복이었습니다.

1636년 병자년이 밝았습니다. 2월 24일, 후금의 사신 용골대는 몽골의 왕족들을 이끌고 조선을 찾습니다. 조선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당시 조선의 방비 태세와 병자호란까지의 일들을 다뤄 보겠습니다. 제목은 "폭풍전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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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체적으로 한명기 교수님의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를 참고했습니다. 이전 글들도 모두 참고한 게 많지만, 이번 글의 경우 거의 베낀 것과 다름 없습니다.
... 한 번 보세요. 특히 후반부로 가면 열 올라서 진짜 -_-

큰 오류가 나서 고칩니다. 홍타이지가 세폐에 딴지 건 건 33년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갈등이 있어도 잘 넘어갔던 게 33년이 되자 폭발했다고 보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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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06 02:56
수정 아이콘
이래저래 정묘호란이 아쉽네요

정묘호란 정도만 되더라도 군사력이 엇비슷하여 해볼만 했지만 별로 싸워보지 못하고 화의를 한것 보면은 말이죠

이미 병자호란때 되면은 군사력 뿐만 아니라 모든것이 청쪽으로 넘사벽이 되어 버렸죠
Je ne sais quoi
11/07/06 03:04
수정 아이콘
역시 정통성 타령인가요. 조선 역사 보면 맨날 그놈의 정통성 따지다가... 당당한 자세를 취하려면 뭐라도 준비하고 하지 도대체 아무 것도 없으면서 허세 부리는 건 왜 일까요 -_-;;
11/07/06 03:23
수정 아이콘
병자호란편은 임진왜란 편과 다르게 답답한 것들 뿐이라 그런지
눈시님의 글의 인기가 그것만 못한 거 같아 아쉽네요.ㅠㅠ

사실 역사는 결과나 과정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하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텐데..
Amunt_ValenciaCF
11/07/06 10:25
수정 아이콘
다다음편이 진짜 홧병나게 하겠네요;; 참고하신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제가 그간 생각했던 것만큼 인조가 넋놓고 있던게 아니네요.
나이트해머
11/07/06 10:48
수정 아이콘
청의 칭제선언은 사실상 조선이 넘을 수 없는 마지노선에 가까웠죠. 황제란 것의 의의는 그냥 '왕의 한단계 위' 정도가 아니라 '천하의 중심이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유일한 기본축' 이니 말 그대로 '청이 명을 대체한다' 는 확증이 없다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입니다.

거기다가 북경 인근 공략이라고 해도 명은 이미 토목의 변 당시 비슷한 꼴을 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버티어 낸 전적이 있단 말이죠. 주변국들 입장에선 헷갈리기 그지없는 상황입니다. 청이 칭제하고 기세등등하게 지내고 한다 해서 그게 북원이나 오아리트부와 다를 거란 보장이 어디 있냐 이말이죠. 실제로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북경이 함락되고(=강남의 물자를 화북 군진으로 분류해 보내는 대운하의 종점이 함락) 숭정제 및 황태자의 탈출 실패(숭정제는 몸을 못빼고 자살했고 황태자는 몸을 빼긴 했는데 실종됬습니다.)로 정통성있는 정부가 소멸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청이 과연 제대로 입성을 했을지, 입성한 후에도 강남을 장악할 수 있었을지 의문을 던져야 할 판입니다. 남명정권 실패의 근본적 원인은 정통성의 부재와 이로인한 분열이였으니까요.(남경에 관부를 설치해 놨다고 해도 거의 형식 수준이였고 정통성도 현저히 부족했습니다. 오죽하면 '먼저 오는 황족을 황제로 모시자' 는 선착순논란이 있었을까요.)

결국 어떤의미로는 '국제정세의 불확실성' 문제가 크다고밖엔 할 수 없을지도요. 어짜피 인조반정 이후 정세에서 조선은 종속변수였지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고. 이 부분에서 내정 부분이 중요하게 여겨지며, 광해군이 까입니다.(...) 광해군이 처리해야 했던 내적 과제는 대단히 많은데 거기엔 신경 안쓰고(한 예로, 임란 이후 선조대에 임시방편으로 파악한 전결 수는 임란 이전의 26%정도던가밖엔 안되는 수준인데, 광해군은 빨리 수행했어야 할 양전을 치일피일 미루기만 합니다. 결국 인조 9년에 결정, 이후 흉년이니 뭐니 하면서 미뤄지다가 12년에 했죠. 병자호란 2년 전의 일입니다.) 쓰잘데기없는 궁궐공사(조선왕조 역사상 광해군때만큼 단기간에 궁궐을 마구마구 지어댄 적이 없습니다. 권위네 뭐네 해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국력 재건에 힘써야 할 판이었는데 말이죠.)에만 힘써 오히려 국력을 갉아먹었습니다. 그 여력을 국력 재정비에 나섰다면 자기가 말한 것처럼 고려초와 같은 대외정책을 수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치를 보면 솔직히 그냥 핑게로밖엔 안들려요.
백마탄 초인
11/07/06 14:06
수정 아이콘
역시 전쟁은 하기도 전에 결론이 대부분 난 상태로 진행되는거 같아요;;

청은 조선을 이미 이겨놓은 상황에서 침공했다고 봅니다...

너...너는 이미 죽어 있다;;;

글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 합니다. ^-^
무리수마자용
11/07/06 18:10
수정 아이콘
순신이형같이 빠져들것이 엄네요ㅜㅜ
그래 m에 빠져보자 [m]
호떡집
11/07/06 21:51
수정 아이콘
호란을 쭉 읽어보니 전쟁이라는게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과정이 결과를 낳게 되는 거죠.

단 한명의 천재가 불리한 전황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쪽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충무공께서 이상한 거였어요...ㅠㅠ
무리수마자용
11/07/06 23:10
수정 아이콘
상식과 다르다는 점에서 충무공은 층분히를 거뜬히 상회해서 이상하십니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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