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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4/10 21:37:23
Name madtree
Subject [일반] 연애의 종언
나는 그 구두가 좋았다.
너는 잿빛쎄무구두가 어쩐지 바랜듯이 보여 지하철 화장실에서 몇번이고 물칠을 했다고 말했다.
그걸 알리 없는 나는 색이 약간 바랜듯한 답답한 모양의 그 구두가 좋았다.
얌전한 구두 위로 단정한 폭의 까만 바지, 그리고 너무 자주 입어, 나중에는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니가 떠오르던 체크무늬 코트가 나는 좋았다.



"너무 내스타일이 아니야"
소개팅에 나온 남자는 약간 날티가 났다.
소개팅의 결과를 묻는, 이제는 모두 애기엄마가 되어버린 친구들에게 나는 똑같은 얘기를 세번째 반복했다.
나는 안다.
결국 나는 꼰대스타일이야.
끝내 나를 질리게 했던 너의 답답함, 우유부단함이 사실은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알고 있다.
너만큼이나 나도 참... 사귀기 힘든 사람이란 걸.



우리가 처음 헤어졌던 2001년의 봄.
부산대역 승강장에서 창밖으로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다,
별무늬가 촘촘히 박힌, 세상에서 제일 유치한 커플가방을 맨 고삐리커플을 보다가 나는 울었다.
가방이 조금이라도 덜 촌스러웠으면 눈물까진 나지 않았을텐데, 저렇게 유치한 가방마저 부러운 내자신이 한심해져 울어버렸다.
5월이었고, 날씨가 아주 좋았다.
나는 전혀 유치하지 않은, 그렇다고 결코 세련되지도 않은 책가방을 메고 있었고, 내옆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나 눈물 한방울 없이 너와 다시 헤어진 지금, 나를 울렸던 그날의 가방을 떠올려본다.
그날의 아이들은 또 얼만큼 울면서 헤어졌을까?



'겨울이 너무 길어'
일기예보는 날씨가 풀렸다고 생글생글 웃으며 거짓말을 해댔지만 여전히 밖은 쌀쌀했다.
그래도 나는 거짓말쟁이 기상캐스터를 보며 조바심이 났다.
연애하고 싶다...
봄이 오면 연애를 하면 좋겠다.
지금은 모르는 누군가와...
아직 쌀쌀했지만 곧 봄이 올거라고 TV속의 여자는 봄처럼 살랑거리며 말을 했고, 내 조바심은 더해만 갔다.



며칠 새 거짓말처럼 따뜻했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내 조바심들이 사라졌다.
뭐 지금 이대로도 뭐 나쁘진 않아.
분명 겨울에 나는 설레고 싶었는데,
곧 봄이 올거고 꽃이 필거니까... 봄엔 설레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에 두근거렸는데,
그런데 막상 봄이 되자 설레고 싶었던 마음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지금 이대로도 좋아.
귀찮아. 피곤해. 사람 만나는 것도 다 스트레스야.
어디로 갔을까?  
서른한번째 만나는 봄에 나는 설레임은 커녕 설레고 싶었던 마음마저 잃어버렸다.



사람에겐 연애세포란 게 있어서 연애를 너무 오래하지 않으면 세포가 다 죽어버려 연애를 할 수 없게 된다고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교수는 말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지부진한 연애를 너무 오래해도 연애세포가 다 죽어버리진 않을까?
이름뿐인 연인, 이름뿐인 연애로 눈을 가리고 있던 사이, 쓸모를 잃어버린 연애세포들이 다 죽어버리진 않았을까?
다른 사람에게 허락된 3년의 유효기간마저 나에게는 남지 않은게 아닐까?
길고 지루했던 우리의 연애가 내 연애세포를 야금야금 갉아먹어버려서, 나는 3년도 채우지 못한채 이제 더는 설레이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어느새 나는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교수의 과학적인 연애분석의 신도가 되어있었다.
쳇 감수성이 메마른다고 이성이 냉철해지는 것도 아니군...



문을 열고 나서면 너무 추워서, 3월하고도 중순이 훌쩍 지났는데도 따뜻해지질 않아서, 사무실에 들어서면 바깥보다 한결 싸늘한 공기가 훅 끼쳐와서... 나는 영영 봄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봄이 왔다.  
일찍부터 꺼내놓은 봄옷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고, 고양이 몽이는 걸음마다 한웅큼씩 털을 흩뿌려 놓았다.
여전히 설레임은 간데 없고, 연애세포의 종적도 도통 알 수가 없다.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교수를 찾아가 따져물어볼까?
과학적으로 내 연애는 이제 끝이 났냐고.
아니면 봄처럼 거짓말처럼 생각지도 못한 어느날, 색이 바랜 구두가 수줍게 걸어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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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진이빵조아
11/04/10 22:10
수정 아이콘
그런 것 같아요. 누구에게나 실연은 깊은 상처를 주고 시간은 흉터를 만들지만, 어떤이에게는 너무 흉하게 흉터가 남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힘들게 하죠. 사랑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더욱 더 괴로움만 생기게 되고요. 지난날의 인연을 나와 너무 맞았던 그래서 행복했던 시간으로 억지로라도 기억하고 이제부터의 사랑에 과거의 사랑을 덧입히지 마시길 바랄게요. 만나다 보면 정들고 정들면 다 좋아보이는게 사랑 아닐까요,,
11/04/11 00:59
수정 아이콘
'좀 수수한걸..'

더벅머리 처럼 손질한, 누가봐도 어설픈 머리. 짙은 눈썹인 반면에 쌍커풀 없는 작은 눈, 뭉툭한 코와는 다른 날렵한 입술. 약간 불룩한 광대 옆으로 내려온 각진 턱선, 까만 셔츠에, 폭이 좁지 않았던 청바지. 그 위에 걸쳐입었던 마치 학생처럼 보이게 한 트렌치 코트. 그리고 그것을 완성시켜주는 뿔테 안경과,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이 남자. 오늘 소개팅은 조금 별로이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인생이란 어쩜 이리도 알 수 없는지, 결국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당신이 되리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했어. 그 뒤로 몇 번의 봄이 지나도, 예전같았으면 참 멋진 남자들을 그냥 지나치며, 이제는 다들 짝 만나 잘 사는 친구들 사이에서 오늘도 별로 외롭지 않게 니가 생각나더라.


그때 당신이 내게 잘 지내라고 했을 때, 난 이게 이렇게 오래오래 갈 줄은 몰랐어. 당신이 떠나면서 정작 울었던 것도 당신이었는데. 난 그때도 진짜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놀고, 일도 잘 하고, 그냥 아무렇지 않았는데. 벌써 몇 년이 지나 노처녀 소리를 들을때가 될 때 까지 마지막으로 사랑한 게 당신이었어. 그 동안 좋은 남자, 멋진 남자, 능력있는 남자 다 기회가 있었는데 왜 난 사랑하지 못했을까?


매번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발렌타인 데이가 지나. 그리고 따뜻한 봄이 왔다가, 바다가 그리운 여름도 오구. 산 꼭대기 바위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서 땀을 훔치며 볼 수 있는 가을하늘을 보구, 그리고 다시 당신과 첫 눈을 맞아. 그때는 그게 참 촌스럽고, 귀엽고, 귀찮고 그랬는데.. 왜일까? 당신은 내 첫사랑이 아닌데, 당신이랑 지낸 게 다 그립다. 그때 당신이 날 사랑해준 만큼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벌 받는 걸까?


나 이제 나이 30인데..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아직도 난 당신에게서 돌아오는 길인가봐.
난 잘 지내고 있어. 가끔 당신이 불쑥불쑥 떠올라서, 소개팅도 미팅도 선도 하기 싫어지는, 일이랑 결혼했다는 소리나 듣는 여자가 되었지만, 괜찮아. 나쁘지 않아. 당신이랑 추억이 되게 많아서 그런지 별로 외롭지 않았어.

넌 지금 행복하니?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난 뻔뻔하게 널 사랑할텐데.
11/04/11 05:1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닮고 싶은 문체로군요.
정용현
11/04/11 11:06
수정 아이콘
이런 귀신같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madtree님 요즘 뭐하시냐고 근황이 궁금해서 질게에 글 남기려던 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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