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1/04/09 00:47:33
Name nickyo
Subject [일반] 수십번 다진 마음위에 쏟아진 술 한잔


한동안 모든 술약속을 피했다.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술도 좋아하고 그리 잘 먹는 놈이 공짜 술자리를 이리 마다하냐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건강상의 이유나 금전적인 이유, 시간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저 술이 한잔 들어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술은 몸을 둔하게한다. 그것은 신경을 특히 둔하게 하는 듯 하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모든게 둔하고 느릿느릿해지는 데다가 말이 꼬여도 마음은 점점 멀쩡해진다. 알콜이 위를 적셔나갈 때 마다 마음에 가까스로 덮어놓은 많은 가식들을 순식간에 벗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날이었다. 내심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많이 풀었고, 시간도 지났고, 괜찮을거다. 그래도 수십번 마음을 다졌다. 술을 마셔도 그 사람이 떠오르지 않기를, 술을 마셔도 그 사람에게 전화하지 않기를, 술을 마셔도 그냥 태연하게 웃기를.


연거푸 소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사람들과 웃고, 노래방에 가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누군가 패닉의 기다리다를 불렀다. 널 기다리다 혼자 생각했어, 떠나간 넌 지금 너무아파 다시 내게로 돌아올 길 위에 울고있다고...  그 다음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통곡이라도 하듯 마이크 없이 그 노래를 따라했다. 패닉의 기다리다를 수 없이 들었지만, 처음으로 그 가사들이 전부 이해가 되었다.


노래방을 나와 다들 제각각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홀로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바람은 싸늘하고, 밤하늘은 어두운데 가로등 불빛만 훤하다. 애꿎은 전화번호를 계속 찾고, 지우고, 찾고, 지우고, 찾고, 지운다. 그 사람은 볼 일도 없는 트윗에 애원을 한다. 제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마치 어제 만났던 것 처럼, 화도 짜증도 서운함도 슬픔도 말하지 않고 그저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여보세요 라고 말할테니, 그렇게 그냥 제발 전화 한 통만 오라고. 전화 잘못걸었다는 실수라도 좋으니까, 그렇게 딱 한번만 딱 한번만이라고. 이렇게 쌩 깔수 있는거냐고, 그럴 수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당신도 나와 분명 행복했을 꺼라고 그게 전부 거짓이나 위선 가식이었을리 없다고 그렇게 계속 계속 계속 듣지도 보지도 읽지도 않을 그 사람은 모를 그곳에서 끝없이 되뇌였다.



결국 그 사람에게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나는 홀로 편의점에서 술을 조금 더 사서 집에와서 마시고있다. 술 한잔이 몸에 들어올 때 마다 선명해지는 그 사람이 자꾸 아른거린다. 내가 정말 필사적으로 쎈 척 하고있는건데, 진짜 쿨한척 하고있는건데, 그렇게 그냥 연락안할거면 그만하자고 한게 괜히 후회된다. 그냥 기다릴걸, 그냥 연락안되면 안되는대로 그냥 무슨일이 있나보다 바쁜가보다 힘든가보다 언젠간 할꺼라고 그냥 그렇게 참는게 나았을걸, 내 손으로 그 사람을 밀어내겠다고 보낸 마지막 편지가, 그 사람이 수신을 확인했다는 메세지가 또 생각난다. 제발, 그게 내 진심이 아니라고. 그날 만우절이었다고. 제발. 제발.



수십번 다진 마음은 한 줌 재마냥 스러졌다. 이래서 술을 안마시려고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사람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더불어 이것을 위로해달라고 부를 사람도 없다. 아무도 모른다. 그 사람의 친구들을 내가 모르듯, 내 친구들도 그 사람을 모르듯 아무도 몰라서 그저 나 혼자 술을 꼴까닥 꼴까닥 넘겨본다. 이렇게 칼 같이 끝날 리 없다고 되뇌이지만, 조용한 핸드폰은 여전히 원망스럽다. 정말로, 모든 나쁜 마음을 지나니 그저 보고싶다는 생각뿐이다. 이렇게 된 내가 밉다. 그렇게 떠나간 그 사람도 밉다. 그러니까, 제발 다시.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가치파괴자
11/04/09 01:21
수정 아이콘
정말 새벽에 바이준 음악을 들으면서..듣기에 넘 좋은글이 군요,
pgr에 로그인 하고 싶게 만드는 글쓴이중에 한분이에요,

이런글 너무 좋아하거든요
자주 연재해도 구박 안할테니
많이 많이 해주세요

좋은글 보고 또 봅니다.
Saussure
11/04/09 01:27
수정 아이콘
하하, 저도 괜히 옛날 생각나고 그러네요.
11/04/09 01:36
수정 아이콘
아이고...
촉호파이
11/04/09 02:45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지금의 제 심정과 너무 같아서..

이별은..학습이 안되네요..
11/04/09 03:06
수정 아이콘
제발 전화 딱 한통만...아 완전 떠올라버렸습니다. 그 감정이. 무력함을 직면해야 했던 시절과 그녀가요...아...그래도 전화 안 하신거 잘하셨어요. [m]
11/04/09 10:06
수정 아이콘
역시 간밤에 술먹고 싼 글은..
아침이되면 손발을 없애고..
삭제하고싶어서 하이킥하게만드네요.......................
스웨트
11/04/09 16:26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은 읽고 나서 그 글에 담긴 감정이 읽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읽은 시간대가 낮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다가 가슴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뜨거운 사우나실에 갓들어갔을때의 그 먹먹함을 느껴버리는 이것은
좋은글입니다.. 제발.. 다시.. 의 여운은 정말....
11/04/09 17:09
수정 아이콘
아마 전화가 온다거나 목소리를 듣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을때쯤에서야 연락이 올겁니다.(물론 정말 안올수도 있구요.)
놓게 됐을때 바라던 것은 온답니다. 사람일 경우엔 더더욱..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1863 [일반] 그 때 그 날 - 과거 (3) 우리 세자가 달라졌어요 [14] 눈시BB5887 11/09/22 5887 2
31617 [일반] 안철수 42.4% vs 박근혜 40.5% 지지율 대격변이 오고있습니다. [182] 마빠이8991 11/09/07 8991 1
31473 [일반] 단종애사 - 3. 계유정난 [19] 눈시BB6233 11/09/01 6233 1
31400 [일반] 단종애사 - 1. 준비되었던 임금 [37] 눈시BB8591 11/08/29 8591 1
31226 [일반] 숨이 턱 막힌, 여름의 마지막 날. [8] nickyo4072 11/08/20 4072 0
30938 [일반] fake 수필 [7] 누구겠소4188 11/08/08 4188 4
30813 [일반] [연애학개론] 남자들과 여자들의 속마음 [48] youngwon9942 11/08/03 9942 1
30512 [일반] 소녀시대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20] 세우실5904 11/07/25 5904 0
30002 [일반] [자랑질]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야구 우승 기념 방망이 [35] Artemis14859 11/06/28 14859 0
29427 [일반] [펌] 너희들은 모른다 [19] 모모리5182 11/05/29 5182 0
29424 [일반]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다?! [52] LOPTIMIST3682 11/05/29 3682 0
29310 [일반] [일부스포가능성]나가수 PD가 김어준의 라디오에 나왔다고 합니다 [34] 궁상양7496 11/05/25 7496 1
29081 [일반] [망상] 나는 가수다 듀엣 특집 - 우리는 가수다 [21] SCVgoodtogosir6029 11/05/12 6029 0
29062 [일반] 일본 방사능, 더 이상 가만히 지켜봐선 안될 것 같네요. [15] 계란말이7271 11/05/12 7271 1
28874 [일반] 아이돌 문화, 과연 이대로도 좋을까? [73] 잘난천재6670 11/05/04 6670 0
28738 [일반] 소녀시대, 장근석 그리고 나가수 [92] 산타7388 11/04/28 7388 0
28495 [일반] [아이돌] 오늘 큰일날뻔한 소녀시대 태연 [57] 타나토노트9671 11/04/17 9671 0
28486 [일반] 혜화동 대학로 스타벅스 2층 구석진 자리에서 다시 만난 날. [15] nickyo5658 11/04/17 5658 0
28276 [일반] 수십번 다진 마음위에 쏟아진 술 한잔 [8] nickyo4451 11/04/09 4451 0
28172 [일반] 대체 왜 웃었니? 난 궁금하다. [11] nickyo5602 11/04/05 5602 0
27846 [일반] [Fm] 개초보의 FM이야기 - 12부 리그 [24] 잠잘까10423 11/03/18 10423 1
27832 [일반] [쓴소리] 게임을 짐승같이 여기니 짐승으로 보이는 겁니다. [36] The xian6758 11/03/17 6758 2
27607 [일반] 후삼국 이야기 - 2. 후삼국의 명장들 [31] 눈시BB11501 11/03/04 11501 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