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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7/23 18:20:33
Name nickyo
Subject [일반] 질럿을 닮았던 그녀#2
"야 임마, 거기는 좀 더 혼을 넣어서, 역정을 낼때는 화를 내야지 화를."

"야 대사틀렸잖아~ 매번 이렇게 대사가 틀려서 어떡할래 아 돌겠네.."

"야야야야! 곰돌이 아직안왔어? 아 야 빨리 전화해봐! 장난치나 진짜..."

질럿을 닮은 그녀와 연극을 함께 준비한지도 벌써 2주가 지나고 있었다. 연극이란걸 처음 해보는 우리로서는 매일매일이 바쁘고 재미있었지만, 그만큼 고된 일이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두꺼운 대본을 어떻게 메모하고 표시해가며 외웠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어쨌든, 10여명이서 만드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나는 오히려 질럿을 닮은 그녀보다 다른 여자들과 더욱 친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이제는 남중 남고에서 벗어나 여전히 동정에 여자친구도 없지만 어엿한 남여공학 대학생 다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한 남자동료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자신이 꽁꽁 숨겨두었던 마음을 내게로 털어놓았다. 나 사실은 너를 좋아해.. 배경음으로는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알렉스를 끼얹나? 같은건 아니었고, 안타깝게도 그와 나는 둘 다 철저한 이성애자였다. 305호의 사람들과 실제 대학생간의 괴리감이랄까.


"야, 나 질럿녀가 좋아, 이번에 고백하려고."

"어? 헐.. 진짜?"

"응, 이번에 농활가서 꼭 이야기 할거다.."

"어...그래 와 대박 진짜 몰랐는데.."

"아 씨 근데 차이면 어떡하냐 연극 완전 어색해지지 않을까"

"에이 잘 되겠지.."

기분이 묘했다. 뭐랄까,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하고 궁금하기도 한데, 어쩐지 모르게 순수히 기쁘지만은 않아서 이런 내가 묘했다. 질럿을 닮은 그녀와는 이미 인사정도를 주고받는- 그러나 가끔 고개를 돌리면 눈이 자꾸 마주쳐서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그런 사이일 뿐이었는데, 친한 동료 하나는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버스안에서 그 친구의 용기에 감탄하고, 응원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뒷문으로 그 폭풍같은 감정을 데리고 함께 내렸을때, 어쩐지 나는 굉장히 허탈한 기분이 되어있었다. 어쩐지 차악 가라앉는 기분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그런 내 모습을 숨기려 버스의 좌석에 깊게 몸을 파묻고는 창밖을 지나가는 가로등의 불빛을 보며 애꿎은 핸드폰만 열고 닫았다.


그 후 며칠 뒤, 아이들이 농활을 가서 땅파고 삽질하고 고기먹고 자는 동안에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던 나는, 농활이 끝난 며칠이 지나고서야 그 이야기의 결말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아르바이트야 쉬면 되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그 친구의 용기있는 고백을 그 자리에서 순수히 응원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그런 모습을 보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속 구석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적당한 핑계를 댔을 뿐이다. 그러나 역시 인간에게 가장 재미있는건 남여간에 정분나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나는 농활을 다녀온 연극 동료중 한명을 몰래 불러내어 그 대형사고의 결과를 넌지시 물어보았다.

"쟤 차였대."

"아 정말?"

"근데 지금 쫌 그런게.. 차이고 나서 완전 자기 성질 못죽이고 여기저기다 험담하고 다니고 막 길에서 욕하고 시비걸고.."

"헐 그래? 그렇게 안보였는데.."

"솔직히 지금 우리 연극도 아슬아슬한게.. 지금 분위기 완전 구리잖아.."

평소에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건만, 역시 남여상열지사 lv1인 노비스직종인 나에게 그런 미묘한 공기의 움직임은 캐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쩌면 눈치가 많다고 생각했던건 내 착각이었을지도.. 아, 어쨌거나 그 고백이 술에 취해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안나 불안해 할지도 몰라아아~ 그리고 그는 장렬히 산화하였다 따위의 것보다는 조금 고난이도의 '롤링페이퍼 고백'이었다고 하던데, 이게 바로 사랑 액츄얼리라는 외국산 러브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현대적이고 뿅가는 프로포즈 법이라고 전해진다. 아, 물론 거기에 동반되어야 할것은 훤칠한 키와 깔끔한 옷매무새와 훈훈한 느낌의 인상. 그리고 그 롤링페이퍼를 든 남자뒤로 보이는 BMW정도만 있다면 되는 것이다. 어..물론, BMW는 간혹 앞 조건들이 좋으면 BUS METRO Walking 으로 이해해도 좋다. 어쨌거나, 그 친구는 자신이 생각한 필살기를 실패했고, -아마도 그 친구는 동반하는 조건을 생각하는 것을 깜빡 했었나 보다- 나는 또 다시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는 점이다. 이런 다재다난한 것들 속에서도 우리는 연습을 계속했고, 결국 2개월 뒤 무사히 연극을 끝마칠 수 있었다.

으례 행사라는 것이 끝나면 뒷풀이가 있기 마련, 우리는 우리의 관객들 중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술집에서 술판을 열었다. 뭐 여기서 술자리의 추태를 다 묘사하려면 끝이 없겠다 싶어서- 신데렐라가 집에 가야할 시간쯔음이 되었을 때, 난 질럿녀의 호위무사로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이어로 가는길은 조금 무서웠지만, 그곳은 코랜드 파일날이 열리는 곳은 아니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직 발업이 안되어있었고, 구두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7호선 지하철 좌석의 내 허벅지와 질럿녀의 허벅지가 붙어있는 감각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거리감을 물리적으로 지니고 있었고, 그녀와 나는 약간은 홍조를 띈 채로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연극이 즐거웠다거나, 추억으로 남겠다거나 하는 것들. 그리고 그것과는 무관하게, 나는 붙어있는 허벅지에서 땀이 줄줄 날 것 같은 더위를 느껴서 적당히 다리를 오므려 약간 옆으로 몸을 뺐다. 그리고 그때서야, 질럿녀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내게 포러 과잌 미.....는 아니고 "내 옆에 앉는게 싫어?" 라고 묻는 것이었다. 오 지져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배틀넷에서 프로토스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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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허구와 80%의 실화. 그러나 20%가 사건의 맥을 바꾸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잡담입니다.

아마 #5정도에 끝이나지 않을까 싶군요.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드립니다. 재밌게 쓰고싶은데 이런 류의 글을 참 잘쓰시는 몇몇 분들에비해 워낙 딸리네요.(제 바로 아래에도 올라와있듯이..)

그럼, 다음편에서 또 뵈요.

P.S:짝사랑하는 누나가 조금씩 먼저 말도 걸고 궁금한것도 물어보고 그러네요. 이번에는 컴퓨터를 맞추고싶어해서 물어보길래 정확한 용도랑 가격대를 말해주면 적절히 맞춰준다고 했지요. 혹시 운영체제같은걸 설치할 줄 모른다면 가정방문기사 전략도 있겠다 싶은 즐거운 망상중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싸이월드도 안하고 페이스북도 안하고 트위터도 안하고 관심사라곤 커피와 제과제빵밖에 없는 그녀와의 커뮤니케이션 타임은 주에 2회 만날 수 있는 직장뿐이라서 아쉽네요.


아, 아직 이름도 모르는구나 흑끄흑끄흑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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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23 18:51
수정 아이콘
화이팅! 힘내세요!
잘 읽고 가요~
10/07/23 19:19
수정 아이콘
마남님// 감사합니다 크크 힘내겠습니다
아침엔삼겹살
10/07/23 19:41
수정 아이콘
글쓴이 센스 만점이네요
중간중간에 빵빵 터졌습니다~크크
포프의대모험
10/07/24 01:40
수정 아이콘
크크 노비스 저는 캐릭생성이 안돼요..
10/07/25 05:05
수정 아이콘
오호~ 글 내용이 점점 훈훈해지는군요~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

아,.. 그리고 [뵈요 → 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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