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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6/15 18:30:37
Name Arata
Subject [일반] [본격 까야 제 맛 - 1탄] 대한민국 대표 역적 1위 '을사오적'
안녕하세요, 아라타입니다.


오늘은 기분도 찝찝하고, 날씨도 꿉꿉하고, 눈꺼풀도 무겁고, 이상하게 밥맛도 없고..
늘 마음만은 해맑은 제 인생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네요...


우리나라 속담 중에 친일파는 까야 제 맛이라는게 있죠.

그런 김에 나름대로 여러분들에게 을사오적에 대한 정보도 드리고, 같이 씹어보자는 의미로 그 선두에 선 을사오적을 거론해 봅니다.







Section 1.




친일파
-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 각국을 침탈할 무렵에 그에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 및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하여 추종한 무리



즉, 친일파는 우리나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일본의 침력을 받은 각 나라마다 그들 침략을 선도적 발길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야합해서 같은 국민, 민족들을 기만하며
매국 행위를 일삼은 무리들이 존재했으며, 중국 역시 수많은 친일파가 일본과 손을 잡고 침략을 도왔습니다.





그럼 어디까지 친일행위라 부를 수 있으며, 어느 기준으로 친일파를 구분해야 하느냐는 것은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주장하는 지일파, 학일파, 극일파등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적극적인 친일행위 행한 자와 한일합병당시 고위 관직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지 혹은 창씨개명자, 소극적 친일행위자,
불가피한 선택에 의해 저지른 친일행위, 생존의 갈림길에서 택한 친일행위 등등은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학자와 그들 역시 결과적인
친일행위자로써 그 행위의 경중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야 한다는 학자등등으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1. 해방 후 1948년 반민특위가 지목한 친일대상자
2. 1990년 이후 임종국에 의해 발굴된 친일대상자
3. 2005년 참여정부시절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거론한 3,090명
4. 2006년 참여정부시절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거론한 106명


을 친일파로 간주합니다.
물론, 거론된 친일파의 유족들에게서는 끈임없는 반발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Section 2.


을사조약 (제2차 한일 협약)
- 1905년 11월 17일, 한국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
- 을사년에 체결되어 을사조약, 을사오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 일컬으며 강제 협약이라 하여 을사늑약이라고 부르기도 함
- 체결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임

- 이 조약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무효로 선언됨

-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되는 첫번째 조건




이 조약은 고종황제의 제1차 한일 협약 무효를 위한 밀사파견이 일본에게 들통나자 일본에서 이를 빌미로 삼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2차 협약을 강요하여 체결됩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당시 일왕의 특사로 파견된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체결을 거부합니다.
이 당시 궁궐은 일본군에 의해 완벽히 봉쇄되어 고종황제는 거의 격리수용된 조치로 조약 체결을 강요받고 있었고,
무슨 짓을 해도 고종황제로부터는 서명을 받아낼 수 없다는 걸 알아챈 이토 히로부미는 작전을 변경하여,
조정 대신을 상대로 회유와 협박, 강요를 번갈아가며 작전을 폅니다.

결국 이러한 회유에 어느정도 지지를 얻게된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체결당일 대신들을 궁궐(중명전)로 불러 회의를 가지게 합니다.



고종황제는 일찌감치 강요에 의한 서명을 거부할 목적으로 모든 결정권을 대신들에게 위임하게 됩니다.
아마 대신들은 황제에게 다시 위임하여 황제가 최종 결정을 하게 할 모양새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죠.

회의는 5시간동안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즉, 당시에 보기에는 조약 체결 처음부터 얼씨구나~하고 오적들이 찬성한 것은 아니란 말이죠.
회의가 결론나지 않자 초조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헌병대를 이끌고 직접 궁궐 회의장으로 들어가서는,
연필과 쪽지를 들고 대신 한명한명에게 다가가 찬성과 반대를 물으면서 적었습니다.

그 때 총리대신격인 참정대신 한규설이 소리내어 통곡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계속 시끄럽게 굴거든 죽이라'고 헌병들에게 지시하고는
한규설은 헌벙에게 다른 방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를 썼고,

1. 학부대신 이완용,
2. 군부대신 이근택,
3. 내무대신 이지용,
4. 외무대신 박제순,
5.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적습니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부릅니다.

특히 이완용을 비롯해 이 오적의 마음속에는 이토가 따라가면서 찬성반대를 적기전부터 일본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법무대신 이하영은 불가였던 자신의 의견을 바로 뒤집고 그 후로 오히려 오적보다 더 활발하게 찬성하였으나,
처음에 반대한 사실 때문에 을사오적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이 을사오적은 이 때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전반에 걸쳐 그 후로도 아주 악한 짓을 저지르며 지위를 이용해 갖가지 협약과 합의를 체결합니다.
이 중 이완용은 총리대신역으로써 기유각서(사법부, 교도행정권 전권 이양)을 체결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완용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을 일제에 완전히 편입시켜 버립니다.
우리들이 현재 '경술국치'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이 조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8명 중 5명이 찬성했으니 가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외무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곤스케간의 협약서명을 진행합니다.
물론 한국내에서는 이 조약의 불합리성에 대한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발이 있었으나 일제군부에 의해 억압되었습니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마자 한국에는 통독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게 됩니다.
왜 안중근 의사께서 이놈을 그리 죽이려 했는지 100%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죠.



고종은 이 조약의 부당성을 외국으로 알리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영국으로 전달된 고종의 친서입니다.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에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등이 있으나 당시 '밀서'의 효력은 국제적으로 약했습니다.


이 늑약은 일본으로부터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무효임을 확인 받았습니다.






Section 3.




을사오적
- 매국노의 대명사
- 1905년 을사조약을 찬성한 5인의 대신
- 숱한 암살에 시달리나 끈질기게 살아남음

1. 학부대신 이완용
2. 군부대신 이근택
3. 내무대신 이지용
4. 외무대신 박제순
5.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1> 이완용


- 1858년 경기도 광주 출생
- 이린 시절 가난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친구였던 이호준 고위관리의 양자로 들어가 호위호식하며 출세길을 보장받음
- 25세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세자 순종을 가르치며 사제관계를 맺기도 함
- 그 후 온갖 공직을 겸하며 미국을 다녀오기도 하면서 미국의 선진문물을 접하며 친미주의 개화파가 됨
- 그러나 고종을 러시아공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으로 인해 미국보다 러시아를 택하고 친러파로 변신함
- 이 때 외부대신등을 역임하며 고종황제로부터 신임을 얻게됨
- 이 때까지는 이완용도 일제와 친일파관료에 맞서 대항하던 대한독립주장관료들 중 한 명으로 제2대 독립협회장이 됨
- 그러나 러시아가 각종 이권 이양을 요구면서 독립협회와 갈등을 맺자 중재자역할을 하다가 양쪽 모두에게 배척당함
- 그 후 관직에서 좌천되어 전북 관찰사로 부임하지만, 직무태만 공금횡령등으로 독립협회에서조차 제명당함
- 이 후 고향으로 낙향하여 칩거함
-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을 기회로 삼아 관직에 복귀하면서 친일파로 변신함
- 이 후 1905년 학부대신이 되어 을사조약 때 오적 중 대장격으로 찬성을 하며 매국노의 대명사로 등극함
- 1907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며 친일행동의 절정기를 보냄
-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 이 후 일진회 회장이었던 송병준과 함께 고종에게 찾아가 책임을 추궁하며 양위할 것을 강력히 권유함
- 이와 동시에 대한민국 군대 해산을 주장함
- 또한 매일같이 일본제국 육군대장인 하세가와에게 찾아가 항일의병퇴치에 대해 의견을 교환함
- 마침 그의 집은 민중에 의해 불타버림
- 그리고 벨기에 황제 추도식이 있던 명동성당에 가다가 이재명에게 칼을 맞았으나 가까스로 살아남
-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날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회를 주도함
-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스승이다'라고 공언하고 이토를 죽인 안중근 의사를 아주 맹렬히 비난함
-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음
- 1912년 조선인의 일제식민지화를 공식적으로 주장하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냄
- 1919년 고종황제 승하에 따른 독살설 배후 중 한명으로 강력히 지목됨
- 당시 3.1운동 진압방법을 편지로 작성해 일본으로 수차례 보냄
- 1920년 일본에 의해 3.1운동 진압의 공로로 후작으로 승급함
- 그 후 계속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며 온갖 친일단체 고문으로 역임함
- 1924년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 직위를 받으며 조선인 중 유일하게 부자귀족이 됨
- 1926년 68세의 나이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함
- 장례도 고종황제 못지않게 일본인들에 의해 화려하게 장식됨
- 전북 익산에 묻혔으나 지속적으로 묘가 훼손되어 그의 후손들에 의해 유골이 화장되고 묘는 사라짐
-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손자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함
- 손자 이병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고 1962년 일본으로 밀행해 귀화함
-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직계후손은 뿔뿔히 흩어진 상태임


그는 권력을 이용한 축재로 막대한 재산을 모아 조선에서 제일 가는 부자로 손꼽히기도 했으며,
당대 최고로 인정받을 정도의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독립문의 현판을 쓰는 등 독립문설립에 앞장섰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친일파의 대명사, 이완용.








<2> 이근택


- 1865년 충북 충주 무인집안에서 태어남
-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날마다 신선한 생선을 진상한 공으로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공직에 발탁됨
- 1884년 무과에 합격해 병조참판까지의 관리로 있다가 1897년 정부전복혐의로 제주도로 귀양감
- 1885년 돌아와 관직에 복귀한 후 관리로 지냄
- 1905년 군부대신에 복직하다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을사오적이 됨
- 당시 독립투사들은 이근택 5형제를 일컬어 '5귀'라 불렀음
- 이근택은 을사오적 중 가장 교활하고 악랄한 놈이라 소문이 나있었음
-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협조한 공으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작위를 받음
- 형 이근호, 동생 이근상 역시 일본으로부터 남작작위를 받음
- 조선총독부 중추관 고문으로 임명되며 일제시대동안 일가 전체가 아주 부유한 생활을 누림
- 그 후 1919년 사망함
-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근택과 동생 이근상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림
- 2006년 이근택은 형 이근호, 동생 이근상, 아들 이창호와 함께 친일자명단에 선정됨
- 2005년까지 이근택의 후손들은 선대 친일 재산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5차례 소송을 냄



이근택은 친일활동으로 얻은 부유한 재산으로 당시 아주 호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용인민속촌내 99칸 기와집이 일제시대 이근택의 집이라고 합니다.
또한 아주 악랄하고 교활하여 양지 음지를 가리지않고 독립투사를 억압하며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지용과 함께 도박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즉, 나라판 돈으로 도박에 심취한 셈이죠.




<3> 이지용


- 1870년 전북 완산에서 태어남
-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로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오촌조카가 됨
- 1887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고 1901년 주일공사를 지냄
- 1903년부터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데 힘씀
- 1904년 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를 주도함
- 그 후 법무대신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므로써 을사오적이 됨
-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 후 민중의 비판과 위협이 거세지자 눈에 띄게 친일활동을 자제함
- 1910년 한일병합조약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작위를 받음
- 그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됨
- 경술국치 후 도박에 빠져 가사를 탕진하고 1928년 사망함


- 아내 이옥경은 1906년 친일여성단체 한일부인회를 청설하고 친일활동을 했으며 일본인 간부들과 숱한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음
- 이옥경은 본래 홍씨 였으나 서양식 교육을 받은 후 서양을 따라 성을 남편의 이씨로 바꾸어 버림






<4> 박제순


- 1858년 경기도 용인 상도촌에서 태어남
- 1883년 병과로 급제하여 관리가 됨
- 이런 시절부터 김윤식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한 이유로 그의 지도하에 청나라와의 외교상 업무를 주로 담당함
-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충청감사로써 농민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움
- 이 때 "새야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박으로 너를 치자"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이 박이 박제순을 일컬음
- 1898년 외부대신이 될때까지 중요한 관직에 두루두루 역임을 하여 화려한 경력을 가짐
- 본래 유순하고 온건한 성격을 가진 박제순은 부지불식간에 친일파의 거두가 되어버림
- 을사조약 체결당시 목숨을 걸고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입장을 수 분만에 "에라 모르겠다"로 바꾸어버리고 찬성을 함
- 즉, 이완용과 닮았으나 이완용이 가진 자신만의 강한 소신과 철학은 없었음
- 1905년 전권대신으로 을사조약을 주도하여 체결하고 을사오적이 됨
- 그 후 이완용 내각이 설립될 때까지 총리대신으로 내각을 이끌었음
- 1909년에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어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협조함
- 그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거액의 은사공채를 받음
- 그러나 강한 반일항전으로 인해 목숨에 위협을 느끼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음
- 그러나 그 후 계속해서 친일활동을 한 결과 상속자 박부양과 함께 당시 아주 부유한 생활을 했음
- 상속자 박부양은 10대의 나이에 일본으로부터 자작작위를 받고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음
- 1916년 사망함


[박제순 어록]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 이토의 을사조약 요구에 목숨 걸고 반대하겠다는 비장한 뜻을 보이며

"본 협약안에 대해 단연코 거부하기로 한 것인데, 이를 외교 담판으로 본인에게 타협하라고 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는가."
- 비장한 결의는 온데 간데 없고 막상 이토 위협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박제순.
  이에 이토는 고종의 "명령"이 있으면 조약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 박제순이 도장을 찍게 만든다.

"내가 가장 감격한 바는… 위로는 천황폐하로부터 일반 문무백관, 아래로는 서민 제군이 모두 충심으로 신부한 우리들을 대함에
극히 간독함이라. 이러한 이상에는 금후 일선 양민 간의 친화는 오래되지 않아서 이룰 것이오,
수년을 지난지 않아 일선이 일단이 될 것은 우리들이 확신하는 바로다."
- 일본 시찰을 다녀 온 뒤 일본인들의 거짓 친절에 감격해서  
(블로그 지식닷컴 참조)







<5> 권중현


- 1854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남
- 일찍부터 일본어를 습득하여 일본 정계 사정에 정통하였으며 개화파 중에서도 일본통으로 인정받음
- 1883년 부산감리서 서기관으로 관직에 임명되어 관직의 길을 걸음
- 1888년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선 일본의 문물에 크게 감명을 받아 일본에 감화되기 시작함
- 1892년 주일 공사에 재직 중 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 및 항해에 관한 조약도 체결함
- 1894년부터 일본의 신임이 두터운 이른바 왜당으로 알려져 고위 관직을 두루 겸함
- 1899년 법부와 농상공부 대신을 겸임했음
- 1904년 러일전쟁시 육군부장으로 위문사가 되어 전장을 순방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팔괘장을 받음
- 1905년 농공상부 대신의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을사오적 중 일 인이 됨
- 1907년 박제가와 같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관직에서 물러남
- 시종일관 일본과 가까이 지낸 덕에 오랫동안 아주 순탄한 고위관직을 두루 섭렵하고 물러나게 되었음
- 그 후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을 부여받고 또 다시 친일활동을 이어감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남은 인생을 아주 순탄히 지내다가 1934년 사망함
- 한 때는 국가개혁을 위한 개화파, 한 때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종의 황제등극을 추종, 그리고 을사조약 찬성등
   전형적인 대세 영합론자의 삶을 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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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우리나라 친일파의 선두주자격인 을사오적의 요약을 마칩니다.
제가 여기 적은 내용들은 정말 글로써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축소해서 적은 것일겁니다.

이들이 당시부터 나라의 5대 역적이라 불리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당시 이들의 역적행위로 인해 돌아가신 우리의 수많은 독립투사분들이 당했던 그 고통스런 나날들이
이 글속에는 아마 새발의 피로도 묘사되지 않았으리라,
또한 그 어떤이가 글을 쓴다해도 새발의 피 이상으로는 쓰지 못할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겪어보지 못하고서는 그 시대가 주는 암흑속의 고통을 짐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암흑스런 시대에 희망의 불씨마저 빼앗아가는 동족의 잔인하고 악랄한 친일활동.


그 때 그 사람(같지도 않은 사람)들을 우리 후손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되며,
언젠간 진정 제대로된 정권이 더시 들어선다면 국운을 걸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친일파의 잔재들을
하나하나, 티끌하나 없이 청소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독도는 물론 간도협약까지 파기해 나가야 합니다.
이미 시효가 지나 파기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정권에서 다시금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고 진정한 부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편향된 민족주의도 아니요, 왜곡된 국수주의도 아닌,
진정한 주권회복과 진정으로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후손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재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와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 위원회는
한시적인 대통령 직속기구로써 빠르면 내년에 시한이 만료됩니다.

이번 정권에서 다시금 그 시한을 연장하는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구요.
참여정부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직속기관으로 아주 많은 일을 해 온 기구들이 존폐의 위기에 설 그 때,
과연 국민들의 반응은 어떨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쓰다보니, 4시간째.


갑자기 열받아 쓴 글인데, 저도 모르게 4시간이 금방가네요.





자료 찾아가며 정독해가며 옮겨적는데, 어찌나 헛웃음이 나오던지요.
이런 느낌이 드는 글은 생전 처음 써보는 것 같습니다.

이상,

아라타였습니다.




대부분의 내용과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발췌하였고, 부분적으로 네이버, 야후 블로그 검색으로 발췌하였습니다.

참고로, 사실이 아닌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은 답글로 진실을 가르쳐주세요.







<이 글은 1년 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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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IPER-SOUND
10/06/15 18:36
수정 아이콘
저 놈 시키들 자손이 하는 짓 보면 더웃김 ..

귀싸데기를 그냥!!
진리는망내
10/06/15 18:48
수정 아이콘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자손도 뭐 같은 피 받았는데 비슷한게 나오는거겠죠..

용인민속촌에 99칸 기와집 진짜 크던데...
10/06/15 18:54
수정 아이콘
권중현 내용에서 10번째 줄에
박제순 대신 박제가로 표기되어 있네요~


죽일놈들
장군보살
10/06/15 19:10
수정 아이콘
민족의 대역적 짐승들이군요. 커리어도 참 눈부시네요.
멀면 벙커링
10/06/15 19:19
수정 아이콘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놈들이군요.
이지용 저 시키는 황실 사람인데 나라 팔아먹는 짓거리를 했군요.
이런 재활용도 안되는 쓰레기들
응응이
10/06/15 19:29
수정 아이콘
근데 이완용은 왜 묘를 익산에다가 했을까요....
익산에 무슨 연고가 있는지..
익산에 사는데 좀 뭔가 기분이 꽁기꽁기 하네요-_-
10/06/15 19:40
수정 아이콘
피지알에서 보기 힘든 본격 까기 위한 글이군요 크크
사실 저 을사오적들도 을사조약 당시에 위협을 느껴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이후에 조용히 살았다면 동정심 정도는 가질 수 있었는데, 이후 행적을 보면 또 그게 아니라서..
Zodiacor
10/06/15 20:09
수정 아이콘
타인에 대한 존중이 필수적인 PGR이지만, 이런 역적들은 존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친일파에 대한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나중에 또 국가의 위기가 오더라도 사람들이 애국자의 길에 많이 들어설거라 생각합니다. 옛날에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이 결국 잘 살더라 하게 되면 그건 큰 문제가 될테니까요.
coverdale
10/06/15 20:25
수정 아이콘
약간 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현재의 정치인 및 관료, 심지어 일반 사람들 중에서도 그 때 당시와 같은 상황이 되면, 친일을 할 것 같은 사람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쩔 수 없는 것은 빨리 적극적으로 수용하자, 일단 나와 내 가족이 살고 버티고 잘 나가야 되자 않냐,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거는 모르겠고 일단 나 배불리 해주라, 등등의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 아니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가 되어버리자 않았나요?
뭐.... 하고 싶은 말은, 그래서 과거 친일파도 이해해 주자 라는게 아니라, 삶의 가치와 목표가 너무 이기적이고 배금주의적인 현 사회를 말하고 싶습니다.
도달자
10/06/15 21:36
수정 아이콘
와.. 그래도 총 앞에서서 무서워서 찬성해버렸지만 후회하고 독립을 외치다 죽은 인물 하나라도 없을까 하며 봤는데....
괜히 을사오적이 아니군요.. 괜히 을씨년스러운게 아니군요.
조국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결여된 사람들이네요.. 참;;

그 자손들도 어떻게 민족을 수탈해 얻은 재산을 돌려달라고 소송할 수 있는지....
한승연은내꺼
10/06/15 22:23
수정 아이콘
제가 착각하는건지 모르겟습니다만 을사5적중에 특히 이완용이 다른4명보다 더유명하던데 그이유가 뭘까요?..
좋은풍경
10/06/15 22:33
수정 아이콘
coverdale 님 말씀에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친일파가 반드시 청산되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문제와는 별개로,
당시 사정에 처하지 않아보았던 우리들이 너무 쉽게 철퇴를 내던지거나, 우리는 다를거라 장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현 상황에서 다시금 그런 배신자들, 즉 그게 어떤 나라(일본, 미국, 중국)이든 사대주의식 기회주의자들은 얼마든지 나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게는 전쟁나면 도망칠 사람많을거라 생각하는 인식 자체가 그런 걸 증명한다고 할수 있죠.

가령 처자식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기개를 지키는게 쉽지는 않겠죠.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소수의 독립투사들과, 대다수의 일제치하의 침묵을 지키는 백성들이 있었던 겁니다.
독립투사에 대한 존경을 보낼수는 있으나... 스스로 거기 뛰어들 용기가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
그리고 또다른 다수의 일본협조자, 그리고 그중에서도 극렬한 친일파(예-조선인 경찰, 조선인 일본군장교)가 있었겠죠.

저는 최소한 독립투사는 못되더라도 침묵을 지키는 백성이라도 되자... 라는 마음입니다.
최소한 친일파는 되지 말자. 라는 그런 생각은 있으나 독립투사의 기개가 만약 내게 있을런지는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내 마음과 용기가 어떨지는 전혀 장담치 못하겠군요.
그런 용기가 내게도 있기만을 바랄 뿐... 입니다.


또 3.1절 투사들 중 2명을 제외한 30여명이 모조리 1930년대에 친일파가 되었다는 것도 상기해봐야합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탄식했었죠. 그 때문에.
저기 을사오적들도 한때 저항했으나, 신념이 꺾이자마자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열렬한 일본제국 찬양주의자로 변모합니다.


이야기를 좀 바꿔보자면, 일제의 신사참배(일본 천황에 대한 숭배의식) 위협이 만주전쟁이후 극심해지기 시작하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을 무차별 탄압합니다. 대다수 당시 조선인들은 그에 어쩔수 없이 순응하나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이유로 그에 저항하죠.

조선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당시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순교당하고 고문당하는 그 혹독한 위협을 견디었던 분들은 불과 해방후 석방된 걸 보면 20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외 많은 목사님, 장로님들 중 많은 분들이 총칼의 위협과 고문 앞에 견디어 낼 수 없었죠.

위에 말했던 3.1운동에 참여했던 분들 중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죠.(다시말해 버티지 못하고 일본에 굴복한 인물들이 많았죠)


기독교인 이외에도,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 일제시대 초창기 독립투사들이
사실상 일본의 지배가 20년을 넘기면서 상당수가 친일파 지식인으로 변모하죠.
가령 최초 근대소설로 유명한 이광수도 나중 친일행위를 합니다.
그외에 우리 국사교과서에 언급된 상당수의 인물들이 소수를 제외하고는 많이 변질했죠.
이를 단순히 지식인의 허약함 때문이라고 비난만 할수 있을까요. 오히려 기록되지 않은 많은 평범한 백성은 어땠을지요.
최대한의 반항이래봐야 침묵이었을 겁니다.

친일은 분명 나쁜 것이나,
이런 시대의 아픔을 겪어보지도 못한 저같은 후세 사람들이
그냥 너무 쉽게 제단하듯이 친일파를 천하에 가장 몹쓸 인종이라고 철퇴만 내리기 보다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또는 그런 상황에 와도 그렇게 안되도록 다짐, 또 다짐하는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모조리 무작정 비난한다면,
과연 우리의 선조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면 간접적 친일행위(즉 일본의 각종 포악한 정책에 묵인하는 행위) 조차
안한 분들이 몇명이나 있겠습니까.
독립투사들이 그만큼 존경받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너무도 힘들고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존경받아 너무도 마땅하나 그만큼 가시밭길이라 대다수의 타인들은 응원을 할지언정 동참하기는 힘든.


위에 언급된 친일파 중의 친일파들이야 물론 욕을 먹어야 마땅하나...

친일파에 대한 광의적 비난을 쉽게 하는 것 보다는
시대적 상황을 가슴아파 하며,
그런 비극적 상황조장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게끔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이글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쓴 댓글은 아닙니다.
저 역시 누구보다도 친일잔재청산에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민족정의를 다시 세우는 것은 바로 이런 개개인의 민족정신을 굳건히 하는데 중요하니까요.
다만 제가 하는 말은 그런 부분에 있어 정말 나쁜 친일행위자 몇몇을 제외한
상당수의 소극적 친일행위자도 존재하는 바이니,
그런 처절한 상황에 있지 않은 우리가 그시대에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독립운동가가 기꺼이 될 자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무조건 적인 비난은 삼가자... 라는 말입니다.


훗. 쓰고보니... 너같은 놈이 가장 먼저 변절하겠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군요. ^^;;
전혀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내 몸과 마음이 진짜 그런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제발 굳건하기를 바랠뿐이군요.
붉은악마
10/06/15 23:32
수정 아이콘
이완용에 대한 얘기는 KBS 한국사 전 에 보면 나옵니다...
익산에 왜 묻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완용묘지가 그쪽 지방에서 터가 아주 좋다고 소문난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주 훼손당하니까 증손자가 화장해서 뿌렸지요..
이완용 장남 묘지도 상당히 훼손 당했습니다..매국노 아들이라고...흐흐
윤성민
10/06/16 00:14
수정 아이콘
이완용은 상당히 여기붙었다 저기붙었다 많이 했네요. 독립협회 의장까지 맡았다가 바꾸게 된 원인은 무었이었을까요.
수선화
10/06/16 02:46
수정 아이콘
음........좋은글.좋은 댓글 잘 보았습니다...근데 전 왜 독립투사 얘기만 나오면 '아나키스트'라는 영화가 생각 날까요?개인적으로 참 잘 만든
영화라 생각하는데 흥행에 참패해서...그나저나 고등학교 시절 여자 국어선생님이 만해 한용운 선생님 시를 소개하며 내 주변에 이런남자
있으면 평생 고달프게 살아도 당장 결혼하겠다!!(이 여자 국어선생님 얼굴,몸매 쵝오!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던 것도 기억나네요...
Cazellnu
10/06/16 12:33
수정 아이콘
민족의 반역자들입니다. 보기도 싫네요
손기윤
10/06/16 18:24
수정 아이콘
그런데 무서운건 저들이 한 행위들이 '난 나라를 팔아먹어야 겠어'하고 결심하고 행한 일들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고(물론 개인의 영달도 포함) 행한 일들이라는 게 섬찟한 거죠.
아직도 우리 주변에 많이 존재하는 그런류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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