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나이차가 있어서 pgr21분들 중에 94년 월드컵을 기억하는 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대부분은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전후셨을 거 같은데 말이죠.

지금까지 최고의 성적을 올렸고,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 건 역시 2002년 한일월드컵입니다. 이건 절대 부인할 수 없어요.
그런데 말이죠... 한일 월드컵 전경기를 dvd로 "차가운 가슴"을 안고 두 번 정도 시청해봤습니다.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말이죠.
당시에는 "와~ 우리 선수들 너무 잘한다."하고,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잘했는가 하고 감탄에 감탄을 했었는데...
그런데 다시 보니, 이탈리아/포르투갈 등 최고 강호들을 이기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행운과 어드밴티지 판정이 상당했더군요.
그러니까 폴란드/미국 전을 제외하고는 강호들과 보통 4:6 정도로 밀렸지만, 경기는 이겼던 극적인 순간들을 연출했어요.
그게 더 우리 한국 국민들을 열광하게 만든 거 같구요.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걸 뒤집는 아슬아슬함이라고나 할까요?
그 것이 공은 둥글다는 시쳇말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고, 더불어서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심어준 계기가 된 거 같아요.

하지만,
94년 월드컵에서 우리 국대에겐 행운이란 건 없었고, 어드밴티지 판정 또한 없었어요. 오히려 그 반대였지요.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벌어진 당시 경기를 녹화된 비디오로 다시 봐도, 그때 국대 경기력이 후덜덜했음이 느껴집니다.
분명 당시 국대팀의 단점도 있어요.

"슬로우 스타터"

초반에는 그렇게 큰 무대가 익숙지 않은 "전형적인 신인"같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듯..
너무 얼어들 있었고, 따라서 제대로 된 움직임도 못 보여줍니다.
만약 지금의 국대같은 경험을 가진 팀이었다면 훨씬 좋은 성적이 나왔을텐데 말이죠.
해외파 선수들이 지금처럼만 있었어도 처음에 그렇게 얼지는 않았을텐데... 쩝.

그러니까, 일단 어느 정도 적응된 중반부터는.... "세계 최강이라지만, 이 정도면 별거 아닌데?"하는 자심감과 함께
폭발하기 시작해서 경기를 압도하며 운동장을 지배합니다.

스페인과 5:5 백중세의 막상막하의 경기를 보여주면서 무승부를 일궈냈고,
지역예선에서 브라질을 잡았던 볼리비아를 완벽히 압도했지만, 아쉽게도 역시 무승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대회 우승팀 독일.
3골을 먹고 2골을 따라가는 장면은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전반전에 어이없이 너무나도 쉽게 연속 3골을 먹고 자멸하는 듯 했지만,
후반에는 완벽하게 독일을 압도하며 2골을 따라갔지요.
특히나, 후반 20분 정도 남기고는 독일팀은 거의 뛰지 못합니다.
한국의 일방적인 공격이었지요. 산소탱크를 단 무쇠체력이라는 독일이 이렇게 맥을 못추는데,
한국 선수들의 투지는 정말 눈물이 절로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어요.

20여 분을 남겨놓고는 독일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기는데,
나중에는 클린스만까지도 수비에 가담해서 11명 선수 전원이 자기네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수비.
경기는 하프라인 건너편 독일쪽 진영에서만 벌어지면서
독일 선수들은 두다리를 운동장에 딱 박아놓은채, 뛰는 걸 거의 포기한 상태였고,
우리 선수들은 계속해서 부지런히 뛰며 독일 문전으로 대쉬했어요.
정말이지 넣을 듯 말 듯.... 안타까운 순간을 계속 연출.

그것도 전대회 우승팀을 상태로 말이지요. (제 평생에 독일팀이 이렇게 맥 못추는 경기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독일 선수들이 너무 자꾸 쓰러지고 그래서 "루즈 타임"이 꽤 적용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때 월드컵 경기 중에 5분까지 루즈타임이 적용된 적도 있는지라...
3~4분만 더 주어진다면 충분히 최소 동점 정도는 되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거의 독일선수들이 탈진해서 자꾸 쓰러져 5~10 분 정도를 까먹었음에도
심판은 단 1초의 루즈타임도 없이 후반 45분이 되는 순간 종료 휘슬을 붑니다.
심판은 당시 살인적인 더위 아래에 뛰고 있는 선수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 혹은 강팀에 대한 예우(or 어드밴티지)로
그냥 끝낸 거 같은데... 두고 두고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당시 독일 선수/코칭스태프는 지옥문 앞을 다녀왔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을 정도로
후반전에서 한국이 보여준 경기력은 마치 저 일개 동남아시아 국대를 몰아부치는 듯한 정도였어요.

여하튼, 아래 스페인대표팀 글 읽고...
상대방을 압도했던 94 월드컵 국대가 생각나서 몇자(?) 길게 적어봤습니다.





ps.
경기력이라는 단어를 빼고 다른 표현을 쓰고 싶지만,
이미 댓글이 달린 상태에서 그걸 수정하는 건 "반칙"(?)인 것 같고,
그러니... 아래에 제가 단 리플을 읽으시고, 제 본 뜻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