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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8/03 11:36:58
Name Bar Sur
Subject [일반] 설색(雪色)의 애수.
이효석의 수필 중에 《대륙의 껍질》이라는 글은 주로 하얼빈에서의 이국적 정경과 묘한 애수를 읊고 있는데, 그는 아마 8월에서 9월로 접어드는 시기에 체류한 것 같으니 이국의 가을이 슬슬 찾아드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는 당시의 봉천(심양)과 신경, 그리고 하얼빈을 다녀왔는데, 체류 시간이 그리 긴 것은 아니고 그의 말마따나 겉모습만 휭 하니 돌아보고 온 것이라 하여 '대륙의 껍질"만을 보고 왔다 말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 껍질의 다시 얇은 껍질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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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은 각기 국적을 달리하는 수많은 외국인이 섞여 살고 있는 만큼, 그 혼잡스러운 느낌은 한층 더 했다. 그리고 이 혼잡스러운 느낌 속에 신흥의 기세와 몰락의 탄식이 뒤섞여 명암의 이중주를 이루며 특별한 거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흥청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슬픈 거리였다. 사람들을 이런저런 감상感想으로 내몬다. 귀로에 봉천에서 중앙공원을 걸어 영화관에 들어갔을 때 나도 모르게 그만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여행의 감상이 피로에 실려 폭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얼빈은 면적에 관한 한 뉴욕에 버금가는 세계 제2의 도회라고 하는데, 시 북단 송화강松花江 강변에 서면 탁류 저편의 지평선은 끝이 없고, 남쪽이나 동쪽 변두리로 나가봐도 끝없는 광야에는 시선을 막는 것이 없다. 들판 한복판에 세워진 도시인 만큼 시가의 구획은 대범하고 가로도 널찍하며 건물은 견고하다. 도로는 아스팔트 대신 돌을 깔아 세기를 견딜 수 있는 참으로 튼튼한 만듦새다. 너무나도 널찍널찍하고 대담한 구획이어서 휑뎅그렁한 느낌마저 들고 반쯤 건설하다 내버려둔 듯한 인상도 없진 않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세부에 이르기까지 아주 치밀하고 여러모로 궁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처에 울창하게 수목을 심어놓은 것도 좋고 중앙사원, 소피스카야사원 등 웅장하고 화려한 미를 다한 것이 도시의 장관을 잃지 않고 있다. 이들 대륙의 도시를 보고 조선의 거리로 돌아오면 갑자기 바라크촌으로 들어온 듯 하여 참으로 옹색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북방인의 거대한 규모에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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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하면, 김연수 씨의 소설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의 배경도 하얼빈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던 것이 1909년 10월이고, 이효석이 짧은 체류를 했던 것은 그로부터 30년 지나 1939년 9월 즈음이다. 그리고 다시 시간의 터울을 지나 김연수 씨 또한 하얼빈에 머무르며 이 소설을 썼다. '빙등제'라는 눈꽃축제가 유명한 하얼빈에서 이효석은 보지 못했던 설경의 하얼빈을 김연수 씨는 본 셈이다. 안중근은 보았을까? 혹은 우덕순은? 아마도 보았겠지. 하얼빈은 10월 중순부터 초겨울이 시작된다고 한다. 미묘한 지점이다.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을 쏘지 못하다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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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기러기 바람 타고 날아가니 가고 가다 어디에서 내려올까? 그렇게 시작하는 시가 있었다. 직회색 직사각형 편석을 깔아놓은 중앙대가(中央大街)를 빠져나오다가 문득 성재는 그 시를 떠올렸다. 거기서 보행신호를 받아 길을 건너면 완다그룹이 짓는 쇼핑몰 부지와 호텔이 나왔고 치우지 않아 눈이 얼어붙은 길을 조금 더 걸어가면 군중상(群衆像)을 드높이 세운 반홍기념탑(防洪紀念塔)이었다. 그리고 방홍기념탑 너머부터는 송화강이었다. 추위에 움츠러든 햇살이라 너무 성긴 까닭인지 오후 세시면 가로수 사이가 벌써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강이든 산이든, 보이는 그 모두가 하얀 고장에서는 석양마저도 설색(雪色)에 물드는 모양이었다. 희부옇기만 한 북쪽 하늘 아래 대안(對岸)은 얼른 그 생김새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끄무레했다. 색바랜 벽지를 닮은 그 하늘을 배경으로 날개와 머리가 검은 새 두 마리가 한자리에서 맞바람을 타고 앉아 있었다. 이쪽으로도, 그렇다고 저쪽으로도, 또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서로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조심조심.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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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 말리는 곳'. 만주족 말로 하얼빈의 뜻이라 한다.

하얼빈은 19세기 무렵까지는 불과 몇 채의 어민 가구가 사는 한촌(寒村)에 지나지 않았으나 제정(帝政) 러시아의 둥칭[東淸] 철도철도기지가 된 이래 상업·교통도시로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효석의 수필의 기록처럼 이 땅에는 만주인이 활동하는 구역인 전가전傳家甸을 제외하면 외국인이 산재하지 않은 구역이 없었으며, 대부분의 거리는 러시아식의 건물양식이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부유한 유대인과 가난한 러시아인, 호쾌한 북방의 분위기와 방약무인한 패거리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땅. 연평균기온은 3.6℃에, 1월 평균기온이 -19.7℃라고 하니, 겨울로 들어서면 북방 특유의 굉장한 추위와 함께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온 도시가 설경으로 변할 것에 틀림없다. 말 그대로 '대륙의 겨울'인 셈이다.

하얼빈이란 도시 전체가 잠기어 있는 알수 없는 애수란 앞서의 글들만으로도 폐부 깊숙히 찔러들어오는 것이면서도, 또한 직접 가보지 않고서야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과거 모교의 한 교수님께서 연변을 찾을 일이 생겨 당시 하얼빈에 체류 중인 김연수 씨에게 연락을 하자, 먼 길을 마다 않고 13시간 기차를 타고 연변까지 찾아왔다 한다. 두 사람은 술집에서 술을 대작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김연수 씨는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나라도 쐈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니 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라는 이야기였다. 눈에 잠식된 하얼빈이란 도시의 아름다움, 그 설색으로 물든 애수가 사람을 거의 미치게 만든다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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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토 히로부미의 진짜 저격범은 안중근도, 김연수 씨의 소설에 또 한명의 저격수로 제시된 우덕순도 아니라 그 정체 모를 '설색의 애수'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것들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이효석은 보지 못했던 것. 김연수 씨는 본 것. 아마도 안중근이나 우덕순도 보았을지 모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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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겨울, 설색의 애수에 잠긴 하얼빈.

여름의 한복판에서 쓸데없는 상상이 자꾸만 머리깨를 스친다.



Ps. 2006년에 6월에 쓴 글이니 3년이 족히 흘렀네요.(당시에 블로그에 적은 글이므로 어투에는 양해를 바라겠습니다^^). 도무지가 끝이 보이지 않는 여름이 찾아오면 위에 인용한 글들을 다시금 뒤적여 본답니다. 겨울이 찾아온 하얼빈에 직접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여건상 글로나마 이 설색의 애수를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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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유재석
09/08/03 11:50
수정 아이콘
어라? 반가워요 ^^
09/08/03 12:00
수정 아이콘
어라? 오랜만입니다.^^
09/08/03 12:01
수정 아이콘
언뜻 유재석님, Artemis님// 오랜만이네요. ^^ 자게에 글쓴지 이럭저럭 5개월 지났는데, pgr은 열심히 눈팅만 해도 시간이 막 지나가는군요. ㅠ_ㅜ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도 모자랄 판인데. 흐흐. 전역한지 1년이 다 되가도록 여지껏 늘씬한 민간인이 되지 못해서(=도무지가 생기지도 않고) 속세를 방황하는 중이네요. 포기하면 편할텐데, 20대 중반의 젊음이란게 이렇게 소모적이라니.
ataraxia
09/08/03 12:09
수정 아이콘
오래만에 보는 반가운 아이디로군요~^^
본호라이즌
09/08/03 15:31
수정 아이콘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이디입니다~
09/08/03 19:25
수정 아이콘
ataraxia님, 본호라이즌님// 댓글 달아주신 네분은 PGR 올드인증인가요. 흐흐. 제 아이디을 보시고 환영해주시는 것에 대한 기쁨과 함께 정작 글에 대한 반응이 없는 씁슬함이 오버랩되는군요(...) 농담이구요. 앞으로는 눈팅도 자제해야지 간만에 열중한 PGR은 시간잡아먹는 괴물이네요. Orz 다시 한 번 반갑습니다. ^^(뭐지, 이 썰렁한 환영회 분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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