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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3/09 17:25:08
Name 폭창이
Subject [일반] [PGR에서 라이트노벨... 계약 본편] 왜 그녀는 자신을 찔렀나



“신흥종교집단입니까? 집단자살이라도 계획했어요? 사회에 혼란이라도 일으키기로 모의 했냐 구요.”

“나에게 그렇게 물어도 말해줄 건 많지 않다네.”

서창선배는 난감한 듯 웃으며 자리를 살짝 뒤로해서 앉았다. 그 반대급부로 내가 더 바짝 다가갔다. 선배는 그저 웃는지 어떤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뭐에요? 왜 연아가 자기를 찌른 거죠? 예?”

“자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쪽도 설명하기가 힘든 부분인데…….”

“결국 왜 그런지 알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책상위로 올라갈 기세로 다가가다 눈에 순간 쏘인 햇볕에 물러났다. 덕분에 조금 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분노하고 있다기 보다는 두려워하고 있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 장면을 눈앞에서 보아버렸으니 새로운 트라우마라도 생기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문제인 것은 선배의 태도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연아가 실려 갔다는 사실을 전하러 왔고, 서창선배와 가장 먼저 마주쳤을 뿐이다. 문제는 서창선배가 이야기를 하던 도중 무언가 자신들과 관계가 있다는 걸 시인했던 것이다. 그 시점에서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와 나도 모르게 울컥해 버렸었다.

“말해줄 수 없는 겁니까? 집단의 규칙인가요? 교주의 명령인가요? 이유를 알면 제 목숨이 위험해지기라도 하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약간 비꼬아서 강하게 말하는 나 앞에서 선배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선배에게도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는 추측은 하기 어렵지 않다. 그 때문에 내가 모르게 뒤에서 무언가 배경이 있어서 그들끼리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거나 그게 좀 더 진행되어 갑자기 멋대로 이사를 가버리거나 해도 좋았다.

“왜 연아가 자기를 찔렀어야 했던 거죠? 과도로? 배를?”

“으음……. 그렇다면 마법이라고 하면…….”

“지현선배 흉내 내며 말 돌리지 마시죠. 제가 묻는 건 왜 연아가 스스로를 찔러야 했냐는 겁니다.”

서창선배는 어색한 미소로 내 말을 겨우 받아넘기고 있었다. 나도 머리는 냉정하게 상황을 살펴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이 멋대로 뛰어, 마치 멋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알았어요. 저는 다른 선배들에게도 소식 전해주러 갈게요.”

“그래. 미안하다네. 그 말을 하면 다른 아이들도 자네에게는 미안해 할 걸세.”

“사과를 들어야 할 쪽은 연아가 아닙니까?”

선배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을 찾으러 본관 1층을 걷고 있는데 주변에 사람이 없다 싶더니 수업시간종이 울렸다. 연아를 보내고 난 후 양호선생님도 특별히 휴식 계를 써 주시며 집에 돌아가 휴식할 걸 권하셨었지. 어차피 서창선배가 주변에 말 해 줄 테니 그냥 돌아갈까…….

그러다 문득 사람들이 거의 쓰지 않는 교사휴게실에 눈이 닿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콜록, 롤록…….”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신발이 보였다. 그리고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러왔다. 기침을 콜록이며 문을 닫고 신발을 벗어 두고 들어갔다.

안에는 등에 몸을 기대어 담배를 한 대 입에 물고 있는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한 대 필래?”

“……농담하지 마세요.”

학교 안쪽의 문을 열려다 선생님을 배려해, 마당 쪽의 문을 열었다. 조금 트인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바닥에 앉으며 살짝 선생님이 담배를 압수하고 넣어두는 서랍을 보니 열려있었다.

“웬일이에요? 학교에서는 담배 안 피우는 거 아니었어요?”

“맞을래? 평소에도 안 피워.”

“그런 것 치고는 능숙한데요.”

“처음 피는 건 아니니까. 젊었을 때는 한창 많이 피기도 했었고. 그리고 나는 폭력을 쓸지언정 쪼잔 하게 점수 깎고 싶지는 않아. 대학이 걸려 있으니까.”

“폭력도 좋지 않아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반대쪽 문이 열리지 않았는데도 시원하고 선선한 바람이었다. 약간 트인 기분을 느끼며 한껏 숨 쉬었다.

“이상하네. 애들은 담배연기 맡으면 좋아하던데.”

“그런 애들은 담배연기에 중독된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아버지들이 피곤하잖아요. 그걸 어릴 때부터 맡으면 좋은 향기라고 느낄지도 모르죠.”

“도넛 만들어볼까? 우리 아버지처럼. 잠시만 기다려봐.”

“……그만하시죠.”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걸 느꼈지만 쉽게 꺼내지 못했다. 살짝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 선생님이 입을 먼저 열었다.

“그 아이 결국은 스스로를 찔렀나?”

“……알고 있었어요?”

“은혜에게서……. 그러니까 양호선생님에게 들었지.”

“그것보다 ‘결국은’이라고 하셨죠? 무슨 의미죠?”

서창선배와 있을 때처럼 흥분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심장이 멋대로 뛰고 있었다. 평소만큼의 마음가짐은 유지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다.”

“명령이라도 했나요? 아니면, 도대체 뭐죠?”

“……내가 그렇게 했지. 명령은 아니지만.”

이를 악 물 뻔 했던 것을 겨우 넘겼다. 선배와 선생님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이건 그냥 말장난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말이죠? 조종이라도 했나요? 명확하게 말해 줄 수는 없는 겁니까?”

그때 선생님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 들고 하아 한숨을 쉬었다. 그 숨과 함께 담배연기가 살짝 퍼져나갔다. 사실 무척이나 어울리지만 담배를 피는 것 자체가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너.”

그때 선생님이 담배를 쥐고 있던 한 손을 들었다. 검붉은 색의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이게 무엇으로 보이지?”

낮게 깔려오는 질문에 숨이 멎을 것 같다. 분명히 담배를 엄지와 검지로 쥐고 있던 손에는 어느 샌가 검붉은 색의 손바닥 크기가 될락 말락 한 작은 수리검이 쥐어져있었다. 그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해서 마치 어두운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정신병자가 그렸다고 한 그림을 봤을 때 느꼈던 공포감과 오히려 더 흡사하다. 부조리에서 오는 으슥함이 숨을 쉬다가 바로 다음순간에 죽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새기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충분히 알겠군.”

선생님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치마를 털고는 가볍게 담배를 뒷마당 쪽으로 던졌다. 멍하니 있던 나는 급히 신발을 가지고 나가 담뱃불을 껐다.

“큭큭. 모범적이네.”

“……선생님, 제발.”

“그래, 알았으니 푹 쉬어라. 출석부에 체크 해 둘 테니.”

“……네.”

선생님은 그대로 안쪽으로 나갔다. 어른 두 셋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교사용 휴게실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대로 손을 뻗어 뒷마당 쪽의 문도 닫았다. 그리고 가만히 발아래의 신발을 들어 보았다.

“…….”

밝혀 눌린 담배꽁초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바람이 불더니 담배꽁초는 순식간에 어딘가에 날아가 버렸다.

그대로 버스를 이용해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직 동생이 없다는 사실에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

졸음이 몰려왔다. 그걸 느낀 순간 마음을 다시 고쳐먹으면 얼마든지 깨어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그와 함께 시야가 멀어지고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시야가 약간 돌아오고 의식도 조금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심심한 천장뿐이고 곧이어 여러 걱정과 의문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나타났다. 다시 시야가 멀어지고 잠에 빠져든다.

다시 시야가 약간 돌아오고 의식도 조금 수면위로 떠오른다. 이번에는 주변의 소음이 신경 쓰인 것이다. 그러나 멀리에서 들린, 혹은 환청이었을지도 모르는 작은 소음은 금세 사라졌다. 다시 시야가 멀어지고 잠에 빠져든다.

조금 깊게 잠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약간의 시야와 의식이 돌아왔다. 노곤하다. 이대로 잠들어버리고 싶다.

다음에 시야와 정신이 돌아온 순간 눈에 무언가가 잡힌다. 그렇지만 별 거 아니다. 옷걸이에 건 옷을 잘못 보거나 한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고 다시 정신을 놓았다.

“연아 말대로. 차려진 밥상. 손대도 될까?”

무언가 소리가 들린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다. 졸리다. 가까이에서 누가 말한 건지 아니면 위층에서 울린 작은 소리가 크게 들린 건지 모르겠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상념이 괴로워 다시 잠들기로 했다.

“긍정이로군, 잘 먹겠습니다.”

“아냐!”

순간 내 의식이 마지막 한 줄의 의식을 잡고 급히 올라왔다! 이대로 잠들어 꼼짝없이 당할 운명을 뒤엎어버린 기적의 기사회생! 장하다, 내 의식!

“헉……. 헉…….”

“미안, 깨워버렸군. 좀 더 자야 회복되었을 텐데.”

“아니,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거든? 어떻게 들어온 거냐, 송세현?”

그렇게 말하며 침대위에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깨질듯하던 머리의 아픔도 졸음이 싹 달아나자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의 위기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뭐, 걱정하지 마 친구. 내가 편하게 해 줄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아?”

“무척 중요한 일이거든. 이건 불법 침입이라고.”

“뭐, 알아봤자 막을 방법은 없을 텐데. 창문으로 들어왔으니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펼쳐진 우산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세현이의 모습을 연상했다. 지금까지의 이상한 말들의 연속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마법이라는 거냐?

“걱정 마. 농담이야. 그저 문 열쇠를 따고 들어왔을 뿐.”

“……그건 그것대로 문제인데?”

“그러지 말고 이 모습이나 즐겨봐.”

그러면서 갑자기 치마를 살짝 펄럭인다. 생각해보니 우리학교 여학생 교복이 저렇던가? 무언가 상당히 다른 것 같다.

“중학생 때 교복?”

“……아무리 나라도 그때 교복이 지금 맞지는 않아.”

“하지만, 잘은 몰라도 키는 조금 커도 입을 수 있지 않아? 그거 조금 작아 보이고.”

“……결국 내 그게 중학교 때 이후로 커지지 않은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은 거야?”

진심과는 다르지만 일단 고개를 흔들었다. 세현이가 순간 흉흉한 감각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이게 한이라고 하는 건가? 아무튼 이상한 계산법이기는 하지만 이로서 비긴거군.

“아냐, 그냥. 예뻐서 그래.”

“……진짜?”

“응.”

그러자 세현이는 크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지 고개를 숙이며 주변을 두리번대다가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에 뭔가가 튀어나갔다. 천장과 바닥, 벽, 집안의 가구 등에 튕겨 난반사하던 무언가는 바닥에서 빙그르르 돌다 멈추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평소 곧잘 가지고 다니던 20면체 주사위였다. 눈은 15.

“휴, 내성체크 성공.”

그렇게 주사위를 회수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쉬며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을 가누었다. 나는 그저 가볍게 웃었다. 조금 남자 같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약한 녀석이니까. 그나저나 무척 매니악 한데.

“너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겼어. 하지만, 내성체크를 성공한 지금의 나는 안정되어 있어. 이제 목적을 말해야 할 때네.”

“……뭔지는 몰라도 이제야 본격적인 말을 하려는 거냐.”

세현이는 나를 배려하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속으로 할 말을 가다듬는 것인지 약간 뜸을 들이다가.

“마법을, 믿어?”

하고 말했다. 두 번을 넘어 세 번이 되면 화를 낼 기운도 사라지게 된다. 오히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뭔가 납득이 가게 설명해 줄 수 있어?”

“설명은 못해도 보여줄 수는 있어. 이십.”

세현은 그렇게 나긋이 말하며,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주사위를 들고 있었지? 그걸 자각할 때 쯤 이미 세현이는 손을 내뻗은 뒤였다.

벽을 튕겨 나오나 싶을 때쯤에는 이미 주사위는 벽을 튕겨져 내 귀를 스치고 있었다. 귀에 약간의 스침을 느꼈을 때는 벽을 튕기고 천장을 튕겼다. 분명 가볍게 던졌을 텐데 주사위는 아까같이 전력으로 던졌을 때와 같은, 아니, 오히려 더 맹렬한 기세로 사방에 튕겼다.

“…….”

뭔지는 몰라도 내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에 크게 어긋나 있다는 걸 깨닫고 어안이 벙벙할 때 즈음, 주사위는 내 앞의 침대 시트에 정확히 멈춰 있었다. 눈은 20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십이라고 했던 게, 혹시 이거?

“……뭐, 뭐야 이거?”

“마법.”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다른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했던 말과는 달리 이번은 무시하지 못했다. 차에 치이고 난 직후. 그때와 비슷한 느낌 같다.

“이게 판타지 영화라면 시간낭비밖에 되지 않는 신이 되겠지만, 한 번 더 가능해?”

“안 될 건 없지만, 더 확실한 걸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네.”

세현이는 뒤돌아서며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방을 나서서,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고, 아파트 정문을 나서 단지를 빠져나가, 주변에 사람이 퍽 많아진 걸 느꼈을 때 이마에 땀이 흘렀다.

“후우.”

사람들이 멀리서 지나가는 것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나를 보자 앞서던 세현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미안. 네가 원하는 걸 보여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네 생각을 못했네.”

“아냐. 내가 자초한 거니까.”

그러면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았다. 보통 인간의 뒤는 생각하는 것 이상의 큰 맹점이다. 단순한 접촉도 용납할 수 없는 나로서는 항상 긴장하는 버릇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대에는 보통 밖에 안 나와?”

“학교 다닐 때 빼면 아파트단지는 절대로 빠져나오지 않지.”

“……힘들겠네.”

“아냐. 이제는 익숙해 졌으니까.”

세현이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집에서는 뭐해? 게임?”

“……독서나 명상.”

“지적이네.”

“넌 운동을 잘하지? 여자에게 인기 많겠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자애들에게 남성적인 매력으로 인기가 많다고 해봤자 그다지 칭찬은 못 돼.”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군. 여자들의 심장을 두근대게 만드는 그 매력.”

“……바보, 멍청이, 개, 돼지, 그리고 또. ……으으.”

“평소에 그렇게 짧게 말하니까 어휘가 그런 거지.”

사실 욕을 못하는 건 이것과는 별로 상관 없지만.

세현이는 그대로 화난 듯 고개를 돌려 걸었고 나는 살짝 웃으며 그 뒤를 따라갔다. 내가 생각해도 난 그다지 착한 성미는 못 되나보다.

이 주변 길은 잘 몰랐지만, 번화가 방향인데도 세현이의 배려덕분에 사람이 적은 길을 골라서 향하는 것 같았다. 순간 세현이가 2층짜리 빌라건물의 외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딘가로 들어가려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세현이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에 멈추어서 벽에 몸을 기대었다. 나도 약간 옆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기대게 되었다.

그곳에는 지하철 역 근처의 번화가가 보였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긴 하지만, 몇 번 왔던 기억이 있었다. 작년에도 중학교 현장학습 때문에 한 번 왔었지? 사람들이 무수히 지나치는 모습이 나에게는 현기증마저 느끼게 할 정도지만, 저쪽 사람들이 내게 닿을 리 없다는 걸 상기하고 마음을 다졌다.

“……산월사거리는 왜? 난 또 빌라 계단을 오르니 어디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줄 알았지.”

“여기에 우리 집이 있긴 해. 원한다면 초대해 줄까? 너라면 살을 맞대는 일이 있어도 좋아.”

“무슨 농담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말 그대로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라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만 왠지 세현이가 토라져 고개를 돌렸다. 왜 저러지?

“……됐어. 저거나 지켜보고 있어.”

보고 있으라기에 보고 있기는 하지만, 번화가의 풍경은 아까부터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차도에는 많은 차들과,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스쳐지나가는,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서는 뭔 변화가 일어나도 잘 모를 것 같은데? 저기서 단체로 사람들이 멈춰 서기라도 하는 거야?”

“플래시 몹 말이야? 그런 걸해도 재미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흥미로운 광경이 보일걸.”

약간의 의구심 속에서도 결국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주변은 시원하게 그늘지고, 단풍도 주변에 피어있다. 오랜만의 바깥구경이라고 치면 괜찮겠지.

‘여행이라. 간다면 중간고사가 끝나고…….’

“야, 집중.”

세현이의 말에 반사적으로 정신을 돌렸다. 그렇지만 별로 이상은 보이지 않는데. 혹시나 하고 좀 더 신중하게 지켜보았지만 여전히 사람들만이 어지럽게 보일 뿐 다른 것은……. 응?

“……아아.”

어떤 공통점 같은 것은 없었다.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단정한 제복 차림의 남자도 있었고 교복차림의 학생도 있었고 비니 모자를 눌러 쓴 청년도 있었다. 억지로 구분하면 약간 다른 사람들보다 유행의 흐름에 벗어난 옷차림을 하고 있고,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뿐.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굳이 그들을 다른 그룹으로 지정해야 할 이유가, 원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니까. 작은 모세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된 거야?”

“모두 마법적인 무장을 잔뜩 하고 있으니까. 사실 나도 설명하기는 어려워.”

그 사람들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갈라지고 있었다. 이 복잡한 번화가에서, 멀리서도 눈에 뛸 만한 공간이 그 사람들 주위로 나는데도, 누구하나 그 공간을 침범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지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격리?”

“하하, 지현선배에게서 들은 말이지?”

세현이는 내 격리라는 말이 정말 의외였는지 순간 멍하게 있다가 남자같이 소탈하게 웃었다. 정말로 남성스럽지만, 이걸 말로 하면 혼나겠지?

“귀에 못 박힐 정도로 들었으니까. 솔직히 전혀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말이지. ……이런 느낌이네.”

“사실 격리가 정확한 표현은 아니야. 그렇지만 이보다 나은 표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 질병 감염자와 다른 사람들 간의 격리, 죄수와 일반사람들과의 격리수용, 같은 표현을 생각하면 그럴 듯하지만 말이야.”

저 번화가의 모습과 세현이의 말이 겹쳐 오버랩 되었다. ……섬뜩했다. 뇌수가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격리당하거나, 죄를 저질러 감옥에 격리수용 된다고 생각해보자. 논리적,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고 해야 하는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당하는 입장에 선다면 논리적 이성 이전에 머리가 섬뜩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전염병과 죄를 지어서 격리당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길이 있다. 그렇지만, 마법으로 인해 격리당한다고? 저렇게? 가만히 걸어 다녀도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키고 그걸 인식조차 못하는 일은 어쩌면 처음에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겪으면 겪을수록 어떤 기분이 될까? 저렇게 격리당하는 걸 이해할 수나 있을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격리당하는 입장일지도 모른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세현이를 보면 그대로 뇌수가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이런 끔직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말하는 모습이 뇌수를 얼어붙게 하는 것이다.

“뭐야. 사내자식이. 왜 이정도 가지고 표정이 그렇게 굳냐. 겁먹었어?”

“사내자식은 너고. 마법이라는 게 있다고 치고, 질문할 게, 아마 마법은 특별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거지?”

“……앞에 했던 말은 못 들은 셈 쳐 주지. 아무튼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만 마법을 보고 기억할 수 있는 건 사실이야.”

“마법을 쓰는 건?”

“원래는 마법을 보고, 기억할 수 있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른 개념이지만. 거의 일치하다고 봐도 좋아. 마법을 쓸 수 있지만 보거나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나, 그 반대의 경우도 꽤 있긴 해.”

“……그러니까 결국 마법을 쓰거나, 보거나 하는 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거야?”

“응.”

조심스럽게 한 질문이었지만 세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 그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기도 전에, 격리된다고?

“섬뜩하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되는 게?”

“……왜 그렇게 묻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저런 걸 당연히 겪게 되니까, 별 느낌이 없다고 봐.”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투의 세현이의 말에 나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 번화가의 이색적인 광경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현이가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광경을 다 보여준 후에도, 나 때문에 몇 분을 말 없이 있다가, 둘이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람은 불었지만 꽃잎이 흩날리거나 하는 영화 같은 광경은 없었다. 바람이 불 때 흔들리는 꽃이 핀 가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지만 말이다.

세현이는 두 손을 머리 뒤에 껴서 가슴을 펴게 된 상태로 앞서 걷다가 문득 한탄했다.

“남자가 뭐 그리 겁이 많아. 한심, 연약, 주변인들의 야성을 자극.”

“……그래, 너를 보면서 남성성을 익히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너를 흉내 내는 건 무리라서 말이지.”

“뭐야?”

“……잠깐. 알았으니까 건드려는 짓은 그만 둬! 잘못했어!”

요즈음에는 협박이나 폭력에 굴해 사과하는 일이 늘어난 것 같다. ……알 게 뭐냐. 일단은 내가 살고 봐야지.

그렇게 몇 번을 건드리려고 노력하다가 세현이가 문득 바닥에 무언가를 던졌다. 나를 노리고 던진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렇지만 세현이가 바닥에 무언가를 던짐과 거의 동시에 나에게 주먹을 뻗었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서다 나도 모르게 땅에 던졌던 그 물체에 약간 눈이 갔다. 역시나 예의 그 주사위였다. 주사위 숫자는…….

세현이는 주먹을 내지르다가 다리가 돌부리에 걸려서 다리를 꼬아 넘어지고 말았다.

“……펍블. 분하다.”

“……참으로 다행이다.”

참으로 마이너 한 녀석.

세현이가 일어나고 우리는 언제 다투었냐는 듯 다시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했다. 역시 사나이의 우정이란 이런 거지. ……이런 건가?

약간의 땀이 배어나오며 느껴지는 유쾌함과, 아직 뒤편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건의 복잡함, 약간의 허무함을 느끼며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나도 모르게 웃을 뿐이었다.

시원한 바람 속에서, 바람에 넘실거리는 가지의 색채를 눈으로 느끼며, 문득 의문을 가졌다.

“…….”

생각해보니, 동생이 한창 방황했을 때 말고 내가 다른 누군가와 이렇게 많이 이야기 했던 시기가 있었나? 누군가 이야기하고, 어이없어하고, 긴장하고, 이유 없이 두근거리고, 화났던 때가 있었나?

동생도 날 떠나가고 있었다. 아니, 동생은 성장할수록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지지만, 나는 함께 이야기 하는 사람이 늘 수 없기 때문이다.

“독서와 명상을 할 시간이 예전만큼 없었어. 연아나, 선배나, 너나, 선생님이 내 시간을 갉아먹었어.”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세현이 그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과 꽃가지가 세현이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는지 아까보다는 평소와 가까운 모습이었다. 약간 말 없는 남자애 같으면서도, 소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

“……말에 독기가 서렸잖아. ……미안해.”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찝찝했어. 그야, 나는 내 진심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실은, 재미있어. 즐거워. 슬퍼. 화가 나.”

“……?”

“그러니까. 밥 먹을 때만 나오는 동생이나 자주 출장을 가는 부모님을 빼면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었으니까, 만약 내가 일기를 적어왔다면 특정 시기를 빼면 온통 어떤 책을 읽거나, 어떤 명상을 했다는 내용뿐이었을 거야. 아주 지루하고, 나로서도 일기에 적을 내용이 없었겠지.”

세현이는 내 말에 알 듯 말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를 기쁘게 하고, 재미있고, 유쾌하게 만들거나, 때로는 귀찮게 하거나, 피곤하게 하거나, 지금처럼 답답하고 화가 나게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소중해.”

“……아.”

“조금은 갈피를 잡지 못했어.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고. 하지만, 이제 깨달았어. 깨달았으니 최선을 다해서 손을 뻗을 거야. ……그러니까, 마법인지 마법이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나에게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너나, 연아나, 선생님이나, 선배가 소중하니까, 손을 뻗어서 잡을 거야. 미약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아.”

세현이의 눈이 커졌다. 내 눈은 어떤 빛을 하고 있을 지 문득 궁금해졌다. 세현이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지만, 약간 무표정한 내 얼굴은 보였지만 그 눈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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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플토
09/03/09 17:37
수정 아이콘
도전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클릭했습니다!
폭창이
09/03/09 18:46
수정 아이콘
구경플토님// 반갑습니다! 평소에 팬(??)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덧글이 달리니 참(..)
탑이 되지 못할바에 전설이라도 되려고 했는데 쉽지 않네요..
09/03/09 20:57
수정 아이콘
이 글은 전설이 아닌 레전드가 될 것 같군요...(퍽)
농담입니다. 재밌게 보고 있어요오~...

미리 어느정도 써두신건가요?... 매화마다 내용이 길어서 좋네요!~ 이제 슬슬 본격적인 내용이네요.

소설을 읽으면 보통 장면을 상상하게 되는데, 이 소설을 보며 상상을 하다보니.. 소설 속 연아의 모습은 김연아 선수로군요! 쿨럭
연아야 격하게 아낀다..^^;;; ~ 연재 게시판에 연재 하셔도 될듯!!
폭창이
09/03/09 21:26
수정 아이콘
세느님// 전설을 넘어 레전드였던가요 레전드를 넘어 전설이었던가요(..)
내용은 본격적으로 들어갔는데 이제 슬슬 본격적인 시험기간..이네요.

연아 여신님(!)과 이름이 같은 건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름 생각하고 여러가지로 첫 구상할때는 연아 여신님을 알기 전이라.. 그 친구를 압박해서 얻은 그림이 있지만, 올리지는 못하겠군요. 사이가 서먹서먹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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