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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3/07 22:11:43
Name 폭창이
Subject [일반] [PGR에서 라이트노벨 - 정기연재] 계약(2)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야?”

노숙자 소녀라고 부르기도 애매해서 물었다. 그러자 저쪽은 입에 밥을 퍼먹는 모습 사이에, 아주 짧게 대답해 주었다.

“연아.”

이름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 아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대로 말해 주었다.

“예쁜 이름이네.”

왠지 녀석의 고개가 조금 더 숙여진 것 같다. 그렇게 밥이 맛있나? 약간 자부심이 들어 괜히 가슴을 폈다. 그러다가 연아가 나에게 이름을 말해주었다는 걸 생각해내고, 나도 내 이름을 말해 주었다. 연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밥을 먹었다.

“……잘 먹었어.”

연아는 순식간에 다 먹고는 그릇을 내밀었다. 그릇은 깨끗했다.

“많이 굶었어?”

“조금.”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물으면……. 실례일까?”

“응. 실례야.”

단호한 대답에 그저 머리를 긁적였다. 잘은 모르지만 처음부터 고아라고 해도 보육원이나 그런 곳에서 자라지 않을까. 아니, 저런 경우가 불가능 한 건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연아가 약간 애처로워 보였다.

그렇게 이리저리 살펴보다 등에 맨 가방이 눈에 띄었다. 뭔가 들어있는 것 같은데.

“혹시 그 가방에 옷 있어?”

아까부터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가리키고 물었다.

“응.”

“그럼 왜 갈아입지 않고 있는데?”

“교복이라서. 저것마저 상하면 골치 아프니까.”

머리를 짚었다. 그렇다고 피가 범벅이 된 옷을 입냐.

“옷 줄까? 우리 집은 남은 옷을 따로 보관하는데.”

“이제 시작이야? 그렇다고 옷 갈아입는 것부터 보겠다니. 싫다.”

“……아니야.”

머리를 짚으며 큰방으로 안내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가족들이 안 쓰는 옷들을 수납하는 박스가 있었다. 17년간 우리 집안에서 쓰다 만 옷들이 들어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3~4년 사이의 옷이고 오래 된 것들은 이미 예전에 친척에게 주거나 헌 옷 수거함에 넣긴 했지만.

옷장위에서 겨우 상자를 꺼냈다. 상당한 무계가 느껴졌다. 위를 여니 옷들이 역시 건재하게 있었다.

“안 입는 옷이라더니 깨끗하네?”

“여름과 겨울마다 어머니가 세탁하고 다림질 해 두시거든.”

“그래서, 어떤 걸 입어줄까?”

“……네가 입을 옷이니 네가 골라.”

“뭐야, 모처럼의 서비스인데.”

그러면서도 연아는 가볍게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조용해지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곤란한 녀석은 동생 하나면 충분하다. 제발 내 두통거리를 늘리지 말아줘.

연아는 안의 다채로운 옷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특히 동생 것 중에 쓸 만 한 게 많아 보였다. 동생은 외출할 때는 교복 아니면 코스튬 플레이용 옷만 입으니까. 다른 옷들은 결국 몇 번 입다가 이곳으로 흘러오는 운명인 것이다.

“이것도 돼?”

마름모무늬의 검은 치마에 와이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헐렁한 느낌의 티였다. 동생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나도 동생이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거지만. 지금 연아가 입고 있는 옷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찬찬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차피 이 상자 안에 건 입지 않는 거니까. 아무튼 한 번 입어볼래?”

“변태. 여기서 갈아입으라니…….”

“……그런 말 안했어.”

당장 큰방 밖으로 나가 주저앉았다.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만 어차피 안에 귀중품은 없으니까. 절대 그럴 녀석으로는 보지 않지만, 혹시나 연아가 나쁜 마음을 품더라도 걱정은 없었다.

“들어와도 좋아.”

잠시 뒤 방 안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다시 들어갔다가 순간 멍해졌다. 너무 잘 어울린다. 동생이 입었을 때에는 조금 커서 맞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연아와는 분위기도 맞고 상당히 잘 어울렸다. 누가 봐도 다른 사람이 입다 물려받은 옷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거다.

연아는 잠시 몸을 움직이다가 장난스럽게 빙글 돌았다. 머리가 펼쳐졌다 다시 사뿐 내려앉는 모습, 치마가 살짝 펄럭이는 모습, 오버니삭스 위의 다리선. 나도 모르게 머리가 멍해졌다.

“어딜 보는 거야?”

“아니, 그, 인간의 본능이니까…….”

“충고하는 데 그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아. 봤어도 모른 척 하는 게 예의. 아무튼 어때?”

“……어울려.”

녀석도 마음에 든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대강 옷을 다 고르고 가방에 챙겨 넣어줬다. 가방이나 원래 옷을 보건데 언뜻 보기에는 오래 되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험난한 산길이라도 거친 것처럼 때가 타고 상처가 나서 그런 것뿐인 모양이었다.

“산에서 노숙이라도 했어?”

“산에서 달릴 일이 조금 있었어.”

여러 망상이 들었지만 접었다. 적어도 연아의 말에 두렵거나 슬퍼하는 기색은 없었으니까. 가방을 챙기고 건네주었다. 연아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가볍게 뒤에 매었다. 벌써 헤어질 시간이 온 건가.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있나?”

“동생이 있어. 50% 확률로 게임을 하고 있고 50%확률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을걸.”

“그 방에서 왜 비명과 신음소리가 들리는 거지?”

“아냐, 제발 신경 쓰지 말아줘.”

손 사레를 세차게 쳤다. 더 이상 내 정신건강에 해가 되는 일은 싫다.

“웬 일본어가 들리고……. 어떤 내용이지? 격투? 뭔지 모르겠는데. 혹시 너 아냐? 잠시, 소리를 따라 해 볼게, 큭큭.”

“아니. 제발 관심가지지 말아줘.”

저 녀석, 지금 분명히 무슨 내용인지 눈치 채고 있다. 일부러 나에게 이러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저쪽은 아무래도 귀가 꽤나 귀가 밝은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쪽팔려서 고개를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저나 상처는 그대로 괜찮은 거야?”

살짝 배 부분을 보면서 물었다. 피가 사라졌으니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깨끗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 말라붙은 피범벅인 옷은 절대로 심상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피 냄새도 났던 것 같은데.

“괜찮아. 이런 상처는 저절로 나아.”

“사이비 교주 같은 소리하지 말고…….”

“네가 정성스러운 간호와 세심한 애무와 함께 소독해주고 붕대를 감아준다면 고려해 줄만도 하지만…….”

“중간에 이상한 말 끼워 넣지 마.”

이 녀석이 남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혹시 저쪽이나 내 동생이 남자였다면……. 대한민국 밤 치안이 위태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치료는 못해줘. 더 묻지 않을 테니까 갈 준비나 해.”

“섭섭하다. 쫓아낼 생각부터 하고. 우리 사이가 이런 사이였니?”

“사라져라 사라져.”

어서 가라며 손짓했다. 연아는 입 한쪽을 약간 아래로 내리며 가방을 고쳐 맸다. 그러면서도 어째서인지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을 약간 느리게 하고 있었다. 의아해하면서 물으려는 순간 갑자기 연아가 고개를 돌렸다.

“저기…….”

아까 전의 분위기와는 달랐기에 내 분위기도 좀 더 낮아졌다.

“오빠, 밥 줘.”

“우끼아악?”

“……그건 무슨 비명소리야?”

“아, 아니, 아니, 아니야.”

동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걸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 했다. 동생은 적어도 매번 식사시간에는 꼬박꼬박 나온다는 걸 까먹고 있던 것이다. 나와 어머니가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동생을 이정도 수준으로 만드는 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지금은 그게 오히려 위험하게 작용할 뻔 했다.

동생에게 변명하면서 살짝 곁눈질로 연아가 있던 자리를 살펴보니 다행히도 이미 그곳에 연아는 없었다. 동생을 봐도 역시 연아를 본 눈치는 아니기에 안도했다.

“뭐야. 오빠 뭔가 수상해?”

“뭐, 뭐가?”

“수상해. 말 더듬는 것도 그렇고.”

“아니, 그, 내가 무슨 말을 더, 더듬었다고 그래?”

동생이 눈을 가늘게 했다. 가슴이 찔리는 것이 못 살겠군.

“그건 그렇다고 쳐도 저기 저 프라이팬은 뭐야?”

동생이 부엌을 가리켰다. 볶음밥을 한 다른 흔적은 그럭저럭 다 치웠지만 프라이팬과 그릇들은 씻지 못했다.

“아니, 내가 요즘 배가 고파서. 아무 때나 막 먹고 싶어지더라.”

동생이 가볍게 밥솥을 열더니 말했다. 왜 이럴 때만 날카로운 거냐.

“남은 밥을 다 먹을 만큼?”

“배, 뱃속에 며칠 굶은 노숙자 거지가 들었나봐. 하하…….”

어디선가 살기가 쏘아져 오는 게 느껴졌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별 수 없었다. 옷상자의 옷을 다수 준 것만 들키지 않는다면 다른 건 변명이 가능…….

“큰방에 옷상자는 왜 내려놨어?”

본건가!

“그, 그 불쌍한 노숙자들을 위해 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기 옷 몇 개를 헌옷 수거함에 넣고 왔어. 어, 어차피 입지 않잖아……?”

“흐응. 저 상자 안에서 유독 여자 옷만 사라져 있는 건 아니겠지?”

거의 무조건반사 수준으로 몸을 경련했다. 명탐정? 혹시 방구석에서 머리만 계속 쓰다 보니 모 만화의 단것을 무지하게 많이 먹고도 두뇌 노동만으로도 열량을 소모할 수 있다는 탐정수준이 된 건가?!

“아, 그러니까…….”

“아니, 됐어.”

“그게……. 응?”

일단 동생이 주변을 살펴보다가 살짝 머리를 꼬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역시 좀 억측을 했나 봐. 여자 친구가 생겼다면 굳이 헌옷을 줄 리가 없지. 아무리 오빠라도 말이야.”

  조금 안도했다. 분위기를 보니 동생은 적당히 납득해 준 것 같았다. 나도 살짝 살펴봤지만 연아가 방금까지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나조차 아리송할 정도로 확실히 숨은 것 같았다.

“아무튼 오빠가 다른 여자를 데려올 리가 없지.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잖아?”

태연하게 헛소리 하지 마라.”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겨우 안정을 찾고 동생을 대할 수 있었다. 평소대로 되는 게 어차피 내가 당하는 형태지만.

그렇게 동생과 평소의 난장판을 연출하며 긴장의 점심시간을 보냈다. 밥이 없어서 집에 있던 봉지 우동을 꺼내 끓이긴 했지만 동생은 별 말 없이 먹어주었다. 그것보다 내가 왜 동생이 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거지. 불평을 하면서도 일단 동생이 다시 방으로 들어간 후에 한숨을 내쉬며 연아를 찾았다. 그 순간 등줄기로 무언가 살기가 스쳤다. 나도 모르게 몸을 숙인 순간 머리 위를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휙.

“오호라, 불쌍한 노숙자나 거지 노숙자? 게다가 피해?”

우왁, 바람 소리가 났어! 주먹이 바람을 갈랐어! 살짝 뒤를 돌아보니 어느 틈에 나온 건지 연아가 서 있었다. 아까처럼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살기가 감돌고 있어! 상상 이상의 기운에 뒷골이 서늘해졌다.

“자, 잠깐만 릴렉스. 진정해. 별 수 없었다는 거 잘 알잖아. 너를 보고 동생이 부모님에게 어떻게 말할지도 모르고. 너를 설명하기 곤란하단 말이야.”

“게다가 무척이나 동생과 친해 보이더라?”

“무, 무슨, 보통이지.”

또 아슬아슬하게 주먹을 피했다. 왜 더 화내는 거야?

“온정에 굶주려서 괜히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흉포한 모습 뒤의 애처로움으로 호감도를 높이는 타입?”

“이상한 말 붙이지 마!”

아니, 인간은 미디어의 확장이라고 들은 대로 말하게 되는 존재라서, 동생에게서 들은 지식을 그대로 말해버렸달까.

이번에는 정말로 아슬 하게 연아의 주먹을 피해냈다. 괜히 쓸데없는 농담을 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이게 전부 다 내 동생 탓이다.

“어떻게 피해내는 거야! 에잇!”

연아의 주먹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매섭기는 했다. 그러나 나도 무언가 접촉을 피하는 것만큼은 가장 자신 있었다. 화재 현장 때의 주부들이 내는 힘이 내 경우에는 누군가가 나를 만지려고 할 때 나온다고 할까. 연아는 재차 주먹을 휘둘렀지만 나를 치는 것은 무리였다.

“야, 바보야. 왜 피하는 거야.”

“……너야말로 왜 자꾸 휘두르는 거야. 그것보다 이제 아무런 방해될 게 없으니까 가시지.”

“혼자 노숙하는 여자애를 그대로 방치 할 거야? 저질, 변태.”

“어이, 그러니까 어쩌라는 거…….”

“잘 먹고 잘 지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아는 마지막 말을 쏘아 붙이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서둘러 따라가서 문을 열고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이미 연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빠르기도 하지.

한숨을 쉬며 문을 닫고 돌아왔다. 동생 방에서는 별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도 눈치 채지 못 한 것 갔다. 도둑이 들어서 자기 방을 털어도 모를 녀석. 저걸 보니 심란한 마음이 좀 더 심란해졌다.


동생은 다시 “오빠, 밥 줘.” 하고 나오고, 저녁을 다 먹고는 역시 또 다시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더 이상 훈계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말없이 식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오빠는 서서히 조교되고 있는 거라니까.”

“시끄러워.”

동생은 쓸데없는 말을 붙인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내 정신건강을 위해 진정하자. 식기 정리를 다 끝내고 다시 베란다로 뒤편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담요를 덮어 두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희미하지만 연아다. 그것보다 정말 이대로 노숙하는 건가? 뭔가 내려가서 말을 하고 싶지만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후우.”

저런 녀석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어. 남 말 안 듣고, 고집 부리고, 동생을 닮았고, 무뚝뚝하게 보이면서도 능글맞은 녀석 따위가 밖에서 자다가 독감이 걸리거나 상처에 세균이 옮아서 앓거나 아파트 경비에게 들켜 쫓겨나 주변 노숙자들 텃세에 밀려 좁은 곳에서 새우잠을 잔다거나 한참을 굶다 어떻게 되도 난 몰라!

“……으으, 모른 척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머리를 숙이고 좌절했다.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도 끝내는 상대를 배려해 주고, 무뚝뚝하면서도 능글맞게 사람을 대하는 게, 그러면서도 위태해 보이는 게 꼭 동생을 닮았다. 그런 아이를 그대로 놓아 둘 수 있을까.

……결국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그냥 알아서 잘 될 거라고 치부하면서 넘기는 게 가장 편했을 텐데 나는 결국 자폭을 선택했다. 동생도 그렇고 내 미래가 훤히 보이는 것 같아 씁쓸하군.

머리를 긁으면서 큰방에 들어갔다. 가계부와 계산기를 꺼내 숫자들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식비, 그리고 여러 세금, 특히 가스비랑 수도세가 늘어나는 건 각오하자. 동생에게 들킬 확률은 낮지만……. 들키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조심해야지.

“……아슬아슬한데.”

기본적으로 나와 동생의 생활비가 큰 편은 아니지만 그만큼 부모님이 주신 돈도 크지 않다. 사람 한 명이 더 끼게 된다면 가스비나 수도세, 식비 등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

그냥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게 사실이다. 그렇게 하면 나는 편하겠지만 연아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대로 둘 수는 없다.

동생은 능글맞으면서도 그 외톨이 기질 때문에 언제나 남들과 떨어져 있고, 위태롭다. 저 녀석도 일면은 밝지만 그 배의 상처나 쓰레기와 함께 있던 모습은, 너무나 위태롭다.

오빠로서 어떻게 동생을 그냥 둘 수 있겠는가? 동생은 내 접촉공포증에 해당하지 않는 세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내 소중한 동생이다. 연아 또한 그대로 둘 수 없다.

동생의 말대로 정말 S성향의 애들이 없으면 못 사는 타입으로 조교……. 아니, 이건 그냥 헛소리고.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잠시 밖에 나오게 될 거란 짧은 생각에 옷을 두껍게 챙겨 입고 나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몸을 움츠리며 아파트 뒤편에 다가왔다. 발소리를 나도 모르게 죽이게 되었다. 아파트 뒤편은 약한 조명과 주변의 이따금씩 들리는 차 소리와 바람소리에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쓸쓸한 공간에서 구석에 담요를 두르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왜 왔어?”

순간 심장이 멎는 듯 놀랐다. 말을 걸려던 순간 나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역시 남을 놀라게 하는 녀석이다. 연아의 잘못은 없지만 마음속으로 괜히 불평했다.

“그러니까……. 여기.”

품에 꼭 챙겨왔던 가계부를 펼치고 계산기와 함께 내밀었다.

“……이게 뭐야?”

“가계부와 계산기.”

“내 말은 이걸 왜 내놓느냐고 물은 건데……. 아, 가정을 나에게 맡기겠다는 거야? 결혼 고백이 너무 빠른데?”

“……아니야.”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강하게 연아의 말을 부정했다. 연아의 표정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시작부터 놀림 받다니. 겨우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겠냐고 물으러 왔어.”

“아, 일단 동거부터 차근차근?”

“……일방적으로 재워주겠다고 하면 혹시라도 기분 나빠 할까봐 그런 것뿐이야!”

연아가 키득키득 웃는 게 보였다. 해명을 해 봤자 역효과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야. 에, 그러니까 여기 가계부랑 계산기 보이지? 그러니까 우리 집 생활비가 마침 약간 남아서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 집이 여러 봉사활동에 소홀하기도 했고……. 사회 공헌이 부족하다고 할까. 그, 그래서 너를 한동안 먹이고 재워주기로 한 거야. 다른 이유는 결코 없어.”

‘그러니까’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한 걸까? 몇 번 준비해 온 말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떨렸다.

“집에 여유가 많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가계부랑 계산기를 직접 들고 나왔다?”

“그, 그래.”

모기소리로 수긍한 다음 연아의 시선을 외면해 고개를 붉혔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그리고 어째서인지 잠시 조용히 있나 싶더니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하하하하, 그런다고 가계부랑 계산기를 들고 나오냐!”

“비웃지 마!”

“비웃는 거 아니다. 꺄하……. 크하하하……!”

연아는 거의 자지러지는 목소리로 ‘대놓고’ 웃고 있었다. 얼굴에서 자꾸 열이 올라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매력적인 푸른색의 저녁 하늘이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꺄하하하……. 동네 사람들……!”

“베란다에 대고 소리치지 마!”

그리고 연아를 말리느라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오랜만에 유쾌한 시간이었어.”

“올해 최악의 순간이었다.”

동생도 그렇고 내가 사람 때문에 고생하게 될 사람이 동생 말고 한 명 더 나타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까 제안을 철회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살짝 연아를 살폈다. 뭔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은 편해지고, 밝아진 모습. 저 녀석의 모습을 밝게 만든 장본인으로서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니까, 어때?”

“좋아.”

너무도 흔쾌한 부탁에 내가 오히려 더 놀라고 말았다.

“뭔가 문제점 같은 거 생각해보지 않고? 너한테 피해가 갈 수도 있는데?”

“생각은 너를 놀리는 동안에 다 했어.”

“……아, 그러셔?”

괜히 볼을 부풀리며 연아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또 약간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쿡쿡…….”

“…….”

“뭐, 노숙보다는 낫겠지. 게다가……. 나보다는 네가 더 손해 보는 거잖아? 나와는 달리 너는 잃을 게 더 크니까.”

연아의 시선을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외면했다. 괜히 볼의 공기를 양 볼에 왔다갔다 거렸다.

“……그걸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결국 네가 손해 보는 결정이 맞는 거네?”

실수했다.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전혀 나는 손해 보지 않는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연아를 보니 다시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아무리 나라도 민폐를 끼칠 수는 없어. 미안하지만 사양할 게.”

“내가 무릎 꿇고 부탁해도?”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데?”

그건…….

말을 할 수 없었다. 동생과 닮아서라는 명제는 내가 이런 생각에 이르른 것에 대한 필요조건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아까 전에도 고민했지만 답을 내지 못했던 문제가 아닌가. 왜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저 녀석을 재워주고 먹여주는 일을 자처하려 하는지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이유는 몰라. 그렇지만 왠지 무릎까지 꿇을 수 있을 것 같아.”

계속 시선을 외면하던 고개를 틀어 연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이번에는 연아가 깜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멍청이.”

“너야말로. 굴러 들어온 잠자리를 차려고하냐, 바보.”

그렇게 서로를 힐난하다가도 다시 서로 동시에 침묵이 시작되었다. 싸늘한 날씨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너무나도 한 가지를 기대하고 있기에 다른 것을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며칠 동안만, 실례할게.”

몸의 긴장이 풀렸다. 너무도 기다렸던 말이었다.

===

덧글을 주셨던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무시무시한 질타가 달려있는 게 아닐까 걱정해서 한동안 덧글도 보지 못했습니다

글은 꾸준(..)하게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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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Sniper
09/03/07 22:13
수정 아이콘
즐감상 하겠습니다.
선리플후 감상!
09/03/07 22:48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정기연재 어기시면 안됩니다..(2)
09/03/07 23:08
수정 아이콘
재미있어요~(2화째인데 이러면 설레발인가...;;)

그냥 연재게시판으로~
폭창이
09/03/08 18:31
수정 아이콘
Red Sniper님//언제나 리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란테님//....[....외면]
별비님//설레발입니다![...] 기대 감사합니다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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