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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7/04 14:41:18
Name Poe
Subject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18
24. 잠들면 안 돼! 일어나!
지난번에는 아이 혈관을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수없이 주사 바늘로 찌르기만 하고 정작 뇌 MRI 촬영에는 실패했었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언젠가 꼭 성공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이가 왜 더디게 자라는지 알아야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치료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입원 기간 동안 한국에서 첫 손에 꼽히는 병원들에 문의를 넣었고, 그중 한 곳에 예약을 잡아두었다. 단 이번에는 주사가 아니라 먹는 마취약을 쓰고 싶다고 강조했다.

막내처럼 어린아이들에게 먹는 마취약을 쓰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했다. 너무 어려서 독한 약을 쓸 수 없으므로, 사실 말이 ‘마취’약이지 실상은 수면을 조금 더 유지시켜 주는 약에 가까웠다. 즉, 병원에서 주는 약을 아이가 뱉지 않고 잘 삼킨다 해도, 그것 먹고 곧바로 곯아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아기가 잠들기 직전에 약을 먹이고, 촬영실 근처에서 재우는 데 성공해야 한다. 그렇다는 건 아이가 막 졸려워서 애쓰는 시간에 딱 맞게 병원에 도착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 전날부터 아이가 아침에 푹 자고 일어나되, 너무 자지는 못하게 시간을 정교하게 조정하고, 또 병원에 오기 전까지 아무리 졸려워해도 잠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모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이게 얼마나 까다로운 조건인지.

그래도 우리에게는 도전해 볼 만한 일이었다. 막내가 집, 즉 충주에 있었다면, 딱 졸려워할 시간에 서울에 있는 병원에 도착한다는 걸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주사로 마취하는 방법을 택해 그 고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이와 아내가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출발지와 도착지가 모두 서울이었다. 내비로 찍어보니 두 병원은 30~40분 거리에 있었다. 어떻게든 차 안에서 놀아주면 아이를 깨워둘 만한 시간이다. 특히 나는 아이랑 놀아주는 데에 자신이 넘치는 아빠였다.

촬영 예약 시간은 점심이 조금 넘은 2시였다. 입원 생활에 익숙해진 아이는 12시~1시 사이에 낮잠을 자곤 했다. 즉 버티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2시는 아이가 매우 졸려워할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유롭게 오전 일찍 충주에서 출발해 점심쯤 재활 병원에 도착했다. 그동안 아내는 아이가 오전 수업을 받으면서 지나치게 피곤해하지 않으면서 또 지나치게 느슨해지지 않도록 컨디션 조절을 하고 있었다. 수업 내용까지 조정할 수는 없었으니 중간중간 주는 간식으로 긴장의 끈을 죄고 있었다. 너무 배부르면 식곤증이 올 것이고, 너무 배고프면 날카로워질 것이니, 딱 적당한 양만 먹이면서 잠들지 않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까지 적당히 먹이고 1시에 길을 나섰다. 길이 막히는지 40분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내비는 예고했다. 그런데 막내는 이미 졸려웠다. 차에 타자마자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카시트에 앉히면 곧바로 잠들 태세였다. 평소 같았으면 잽싸게 재웠을 텐데, 그래서 조금은 평화로운 드라이빙을 즐겼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뒷자리에서 아이와 같이 타고 아내가 운전하기로 했다. 아내는 스스로를 카레이서로 부를 정도로 속도감 있는 운전을 하는 편으로, 본인보다 10년 먼저 면허를 따 이제는 유치한 속도감보다 고급스러운 승차감을 우선시하게 된 남편의 완숙한 운전 스타일을 매우 답답해했다. 이렇게 급하게 어디로 가야 하는 날 건방지게도 대선배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못했다. 게다가 차 뒷좌석에서 아이를 40분 동안 정신없게 만드는 것도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중노동이었다.

아내는 막힌 서울 대로들을 지그재그로 달렸다. 그렇지만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시간 단축이 된 건 아니었다. 핸들 운영은 분주했는데, 내비의 시간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뒤에서 나는 아이가 어떻게든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느라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먼저는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자고 싶어 칭얼거리던 막내는 잠시 정신이 팔렸다. 장난감을 쥐고서 신기한 듯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집중 시간이 길지는 못했다. 금방 싫증이 난 아이는 장난감을 바닥에 던지고서는 다시 뒤로 벌러덩 누웠다. 재우라는 제스처였다.

몇 가지 다른 장난감들로 2차, 3차 시도를 했지만 이미 꺼진 아이의 관심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 입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 눈앞에서 얼굴을 돌리고 도리도리 까꿍을 하고 숨바꼭질을 하면서 왁! 욱! 껙! 꾹! 까!와 같은 소리들을(아니, 비명들을) 냈다. 제발 아빠에게 시선을 돌리고 잠을 깨라,라는 부탁에 가까웠다. 몇 가지 소리가 아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가 헤에 하고 웃기 시작했다. 오, 통한다, 통한다, 아내가 앞을 보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왁욱껙꾹까를 반복하며 신명 나게 뒷자리에서 푸닥거리를 이어갔다. 땀이 슬슬 나기 시작했고, 아이의 웃음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벌써 질렸나 싶어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는데 출발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고 있었다. 장난감과 ‘아빠 장난’이라는 비장의 아이템을 썼는데도 10분을 채 못 보낸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시간의 흐름이 더욱 더디게만 느껴졌다. 땀이 삐질삐질 나면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가, 뭘 더 해야 하는가... 열기를 식힐 겸, 여유를 좀 찾을 겸, 창문을 살짝 열었다. 살짝 열린 사이로 바람이 휙 들어오는데, 그게 꽤 강렬했다. 더운 날, 차도 속도를 못 내는데 그 바람이 왜 그렇게 강력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바람이 아이 얼굴을 직격 했고, 아이가 상반신을 들썩들썩할 정도로 즐거워했다.

오, 횡재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아이를 깨워둘 수 있게 됐다. 나는 창문을 내렸다 올렸다 하면서 아이가 바람을 맞을 수 있게 했다. 아이가 반응을 보였다. 창문 쪽으로 가까이 가고 싶어 했다. 창문을 잡고 아이가 설 수 있도록 했다. 아이가 바람을 맞으면서, 열린 창문 사이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꺄아 꺄아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잠이 확 달아난 눈치였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이대로 쭉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제발 이렇게만 있어다오,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아내도 백미러로 힐끗 뒤쪽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내의 마음도 나와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발... 이렇게만...

앞으로 25분 정도 남았다고 내비에 표시돼 있었다. 하지만 나나 아이의 집중력이 25분이나 유지될 리 없었다. 나도 어느새 창문 조작을 기계적으로 하고 있었고, 아이의 웃음도 잦아들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여보!”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막내를 확인하니 창문에 시선을 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개를 까닥까닥하면서 조는 게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으려 했다. 아내가 이번에는 앙칼진 버전의 “여보!”를 외쳤다. 아, 맞다. 깨워야지. 아이를 흔들었다. “잠들면 안 돼! 일어나!”

아이가 화들짝 눈을 떴다. 잠이 잠깐 들었던 듯했다. 아이가 졸린 눈 너머로 상황을 살피려는 듯 앞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다시 꾸벅 고개를 떨궜다. “잠들면 안 돼! 일어나!” 나는 아이를 위로 번쩍번쩍 올리며 헹가래를 쳤다. 아이가 다시 눈을 떴다. 막내는 원래 위로 던졌다 받는 놀이를 좋아한다. 내가 자기를 높이 올릴수록 기뻐한다. 아이 셋이 다 그랬다. 나는 아이 저글링 선수다. 하지만 여기는 자동차 안. 막내를 던질 수 있는 높이는 극히 한정적이다. 아이에게 평소의 즐거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는 한두 번 기대에 찬 눈치로 잠을 쫓는 듯하더니, 이내 싱거움을 느끼고 졸려했다.

내가 얼마나 “잠들면 안 돼!”를 외쳤는지 앞에서 아내가 혀를 끌끌 차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게 애랑 할 게 없어? 왜 계속 똑같은 것만 하고 똑같은 말만 해? 내가 다 졸릴 지경이네.” 그러더니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막내야, 엄마 어딨 게?” 그러더니 순간 얼굴을 뒤로 확 돌렸다가 다시 앞을 봤다. 아이가 엄마 얼굴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니 놀랐다. 아내가 그 행동을 반복하면서 아이가 잠시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운전자가 20분 넘게 그렇게 운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목에도 상당한 부담이 가는 동작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아까 한 거였다. 차 안은 어색하게 조용해졌다.

나도 위기를 맞았다. 막내를 깨워야 하는데, 나도 졸렵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차에 엉덩이만 붙이면 잠드는 체질이었다. 내비를 확인하니 아직 한 15분 남았다.
“여보. 우리 15분 정도는 재워도 되지 않을까? 어설프게 잠들다 깨면 더 졸렵잖아?”
“절대 안 돼. 이번 예약 어렵게 잡은 거야. 혹시 잠이 깨기라도 하면 낭패야.”
“아... 15분이면 잠 안 깨.”
“안 돼. 당신도 자지 마. 다들 일어나, 얼른!”

남은 15분 동안 아이와 나는 비몽사몽 끌어안았다가, 창문으로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가, 장난감을 던지고 받았다가, 왁욱껙꾹까를 여러 번 외치면서 필사적으로 일어나 있으려 노력했다. 그 사이사이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아이는 여지없이 까무룩 졸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나는 전우를 살리는 군인처럼 “일어나! 잠들면 안 돼!”를 외쳤다. 하지만 지금도 그 15분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고, 뭔가 뿌옇다. 그 시간의 더딤 역시 감각적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1분 1초가 그렇게 느렸던 적은 내 삶에 없었다.

주차장에서부터 나와 아내는 촬영실까지 내달렸고, 미리 준비된 마취약을 아이는 무사히 삼켰다. 그리고 촬영실 옆에 마련된 작은 방에 우리 가족은 전부 들어가 소등했다. 완전히 깜깜한 공간에서, 막내는 기절한 듯 뻗어버렸다. 미동도 없었다. 새근새근 코 고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고대하던 뇌 MRI를 찍는 데 드디어 성공했다. 오랜만에 성취감이 느껴질 정도로 기뻤다.





25. 결국 밝혀진 병
어렵게 뇌파 검사를 마치고 약 한 달이 지난 시점, 우리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결과를 듣기 위해서였다.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잠을 못 이룰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우리는 아이를 있는 그 자체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결과도 상관이 없었다. 나의 지식 부족도 도움이 됐다. 최악의 경우를 아무리 상상해 보려 해도, 아는 게 없으니 머릿속 시나리오는 늘 빈곤했다. 빈곤하니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바보가 왜 감기에 걸리지 않는지 궁금하면 나라는 사람과 몇 분만 이야기 나누면 된다.

병원으로 가면서 나와 아내가 바라던 건 ‘제발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가 아니었다. ‘제발 이번에는 시원하게 답을 들었으면 좋겠다’였다. 병원들을 다니며 우리는 단 한 번도 명쾌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기만 한 ‘가능성’의 사슬들 속에 점점 엉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현대 의학의 한계에 봉착한 것이 자명해 보였는데, 의사들은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검사 끝나면 저 검사 권해주고, 저 검사 끝나면 또 다른 검사를 언급하는 것의 반복. 질병의 뿌리에 도달하려는 노력이고, 그러므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절차였기 때문에 의사들이나 의학 분야를 원망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결과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검사의 과정 자체에 지쳤었던 것이다.

새벽부터 충주에서 출발해 서울의 교통 체증을 뚫고 병원에 도착했고,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긴장도 되지 않고 기대감도 없으니 졸려웠다. 발달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의 부모가 맞나 싶을 정도의 느슨함이 스스로 우스웠다. 그럴 때면 대기실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본다. 막내와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도 있고, 더 아파 보이거나 멀쩡해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 너희들, 일반 소아과에서 봤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아이들과 여기 아이들이 분출하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니 나오는 소원이다.

‘특수’나 ‘특별’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여기 아이들이, 일반 소아과에서 볼 수 있는 아이들과 다른 점은 눈 마주침이다. 일반 소아과에 첫째나 둘째를 데리고 갈 때면, 기다리고 있는 동안 대기실의 다른 아이들과 눈 인사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끔은 말을 섞을 때도 있다. 통통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내 다리에 부딪힐 때 귀엽게 수그리며 사과하는 아이도 있고, 엄마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다가도 내가 ‘그거 뭐니?’하고 물으면 자기 캐릭터 자랑하는 아이도 있다. 내가 어지간히 신기하게 생겼는지 멀리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 마주치면 배시시 웃는 녀석들도 가끔 있다. 어떤 경우든 ‘눈을 마주칠 줄 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막내도 그렇지만 이 특수 병원 분과에서 만나는 아이들 중 눈을 마주칠 줄 아는 아이들은 드물다. 이런 형태로나 저런 형태로 부모와만 꼭 붙어서 다른 이와 소통하는 법을 아직 익히지 못한 존재들이다. 내가 나의 시선으로 아무리 아이들의 눈을 더듬어 찾아도 올려다보지 않는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그 눈빛에서 ‘속이 꽉 찼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무언가 공허하다. 그 빈 공간을 채우려 여기 부모들은 인생을 투자하고 있을 것이다. 난 몇 시간, 몇 킬로미터, 몇 그램을 더 보충해야 할까. 우리 막내 뇌 속에 그것들이 도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를 안고 궁둥이를 토닥이면서 나는 아이 귀에다 대고 ‘사랑해’를 여러 번 넣어줬다. 내가 아는 건 이것뿐이다.

차례가 되어 진찰실로 들어갔더니 뇌 사진 두 개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우리 아이의 것, 다른 하나는 정상 아이의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가운데를 탁 짚으시면서 “여기가 문제였네”라고 진단하셨다. 가만히 보니 정상 뇌에는 없는, 희끄무레한 점들이 보였다. MRI가 아니었다면 흔한 사진 노이즈 아닌가 반문했을 정도로 사소해 보였다. 아니었다. “회백질이 퍼지질 않았어요. 원래 가운데 있다가 아이가 커가면서 점점 뇌 바깥쪽으로 퍼져야 하는데, 자녀분의 경우 아직 가운데에 조금 남아 있어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설명을 대략 이어가셨다. 회백질이 뉴런의 신호 전달에 중요한 것이며, 그게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신호 체계가 엉키므로 당연히 신체를 움직이거나 뇌를 쓰는 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 의학으로는 이 회백질의 위치를 바꿀 수 없다고도 못을 박았다. 약을 쓸 수도, 수술을 할 수도 없다고 했다. “회백질 이소성이라고 하는데, 흔히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에요. 자료도 많이 없어요.”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린 것일까. 일단 여러 번 반복된 검사 후 모처럼 진단다운 진단이 나왔고, 심지어 병명까지다 나왔으니, 마음 한 편으로는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현대 의학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말까지 들었다. 수확이 적지 않았다. 이제 온갖 진찰과 검사와 작별하고 재활에만 전념하면 되겠다 싶었다. 아니었다. 선생님은 끝을 선언하지 않았다. “회백질 이소성은 결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지, 이유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유를 찾아야 하죠. 회백질 이소성이 왜 나타나는지를 한 번 더 검사해서 알아내야 해요. 유전자 검사를 할 테니 예약 잡아놓고 가세요.”

또 검사라니! 유전자 검사하고서 뭔가 나와도 또 그 이유를 찾겠다며 검사하려나. 이 검사의 굴레는 언제 끝날까. 힘이 탁 풀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날 막내와 나, 아내가 피를 뽑아 제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채혈을 위해 따로 상경하지 않아도 되었고, 6개월 뒤 검사 결과를 들으러 올 때까지 내방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좀 아쉬웠지만, 그만큼 병원에서 깊이 파헤쳐볼 계획이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셋은 피를 뽑힌 채 6개월 동안 오지 않을 병원을 나섰다.

재활을 하다 보니 6개월은 눈 깜짝할 새 흘렀다. 병원에 가는 날이 당도했다. 익숙한 고속도로를 지나, 익숙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익숙한 분위기의 대기실에 도착했다. 익숙한 문을 지나, 익숙한 선생님 앞에 앉았다. 선생님은 아이를 계속 주시했다. 당시 아이는 옹알이도 하지 못하고 소리만 꺅꺅 지르던 때였다. 그 소리 지르는 것에 선생님은 주목하셨다.
“소리를 좀 많이 지르네요?”
“네, 요즘 좀 그래요.”
“역시...”
‘역시?’

뜸을 들이시던 선생님은 컴퓨터 화면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우리 부부에게 설명을 시작하셨다. “드디어 찾았어요. 염색체 쪽에 문제가 있었어. 염색체라는 게 대단히 정교한 순서로 정리돼 있는데, 그중에 아주 작은 것 하나가 바뀌어 있었어요. 엄청나게 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서 돌아가는 게 뇌라면, 이 아이는 톱니바퀴 딱 하나가 잘못된 거예요.”
“그게... 없나요?”
“아냐. 있긴 있어요. 톱니바퀴가 아닌 다른 게 있어서 그렇지. 비어 있는 것보다는 나은데, 그래도 톱니바퀴가 아니니까 삐걱대면서 돌아갈 수밖에 없죠. 그래서 느리고, 뭔가 다른 거야.”

그러면서 선생님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외쳤다. “원인을 알게 되니까 이제 속이 좀 시원하네.” 그건 의학자로서 한 말이었다. 못내 아이의 상황이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서는 곧바로 의사로서, 나와 아내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은 위로였다. 그 선생님 방식의 위로.
“이건 누구 잘못도 아니에요. 돌연변이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시선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을 향한 채였고, 말투는 빠른 편이었다. 그분의 의료 행위 중 상당히 껄끄러운 지점을 지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병을 탐구하고, 의학 지식을 쌓고,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 방법을 택하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유독 낯 간지럽게 위로하는 데 약한 유형인 것이 눈에 보였다. 유전자 검사 후 많은 부모들이 서로를 탓하며 원망하고 결국 갈라서기까지 한다는데, 그걸 염두에 둔 말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속사포처럼 저 짧은 위로를 끝낸 선생님은 곧바로 조언을 이어갔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설명을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이 아이와 비슷한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200명도 되지 않아요. 2015년에 처음 관련 논문이 발표됐을 정도로 새로운 케이스죠. 아직 연구 중이고, 우리도 그래서 아이가 어떻게 될지 잘 몰라요. 병명도 따로 없을 정도죠. 의학 코드만 있고. 다만 그 200명도 안 되는 환자들의 경우 폭력성과 비만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 해요. 아까 소리 막 지르는 것도 연관이 있을 거야. 그런데 그건 어렸을 때부터 잘 가르치면 완화될 수 있다고 봐요. 먹는 것도 식단 조절하면 비만을 피할 수 있고.”

쓴 약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음식은 다 잘 먹는 우리 슈퍼스타 둥글둥글 퉁퉁이가 왜 그런 무난한 식성을 가졌는지 납득이 됐다. 요 근래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도 떠올랐다. 선생님의 위로는 어설펐지만, 가이드라인은 가장 실용적이었다. 의학자들이 병에 대해 더 밝힐 때까지 시간이 한참 걸릴 테지만, 그동안 우리가 뭘 주의해야 할지가 분명해졌다. 아이를 안고 궁둥이를 토닥이면서 나는 아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둥둥아. 너 내일부터 다이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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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4 14:50
수정 아이콘
요즘 유전자치료가 많이 발전 하고 있던데 얼른 의학이 발달해서 부디 선생님 아이같은 친구에게도 효과가 좋은 약들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25/07/04 14:57
수정 아이콘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아빠로서 많이 배웁니다.
25/07/04 15:04
수정 아이콘
막내는 그냥 그맘때 아가처럼 귀엽고 예쁘면서도 200명도 안되는 특별한 존재네요. 어릴때 잘 파악하셨으니 잘 대처하실 수 있을겁니다. 유전자 연구가 빠르게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플리퍼
25/07/04 15:17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족 모두가 항상 행복하길 기도합니다
가이브러시
25/07/04 16:17
수정 아이콘
아이키우기 있는 독자로써, 화이팅입니다. 아내분 추진력이 장난 아니세요! 진심 멋집니다. 항상 행복하시길
맘대로살리
25/07/04 16:50
수정 아이콘
매번 올려주신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막내와 행복한 시간만 계속되시길 기대합니다.
혜정은준은찬아빠
25/07/04 18:22
수정 아이콘
화이팅입니다!!!
그럴수도있어
25/07/04 20:37
수정 아이콘
함께 커가는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에이치블루
25/07/04 21:07
수정 아이콘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 아빠와 엄마를 만난게,
선생님의 아이들에게 미래에 큰 자산이 될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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