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23세, 오케하자마의 전설
1560년 봄, 북방 미노의 우군이 일순간에 적군으로 변해버린 것에 더하여, 동방에서는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3국에 걸쳐 광활한 영지를 장악하고 있던 이마가와 가문이 마침내 거병했다. 2만이 넘는 군세를 이끌고 오다 가문이 지배하는 오와리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으로 둘러싸인 오다 가문은 멸망의 기로에 들어섰다.
오다 노부나가는 겨우 5천 남짓한 군세로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이마가와 군을 맞았고, 난전 속에서 벌어진 한번의 돌격에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살해되는 충격적인 이변이 벌어졌다. 그는 해도 제일의 무사(海道一の弓取り)로 불리던 희대의 위인이었으며, 치열한 후계자 암투에서 승리해 가독의 지위를 계승한 당대의 효웅이었다. 그런 그가 어이없이 일격에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마가와 측 선봉에 있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는 곧장 세력을 이끌고 미카와 오카자키 성에 할거, 독립해버리며, 이름 또한 요시모토의 '모토'를 빼버리고는 마쓰다이라 이에야스(松平家康)로 개명하기에 이르렀다. (개명은 1563년) 그가 바로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다.
나가야의 모습. 전국시대의 나가야는 열악한 컨테이너 하우스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이 이상하게 바뀌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때에,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원숭이 하나라도 소중한 실정이었던 오다군의 하급 무사로서, 일단의 아시가루를 이끄는 하급 지휘관의 책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무사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허우대뿐, 도키치로는 동료 무사들과 함께 초라한 나가야(長屋)에 들쥐들처럼 모여사는 신세였다.
에이로쿠 4년(1561년) 24세, 혼인
1561년,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같은 나가야에서 동고동락하던 무사, 아사노 나가카쓰(浅野長勝)의 양녀 '오네'와 혼인했다. 초라하고 궁색한 모습, 좋게 말해도 뛰어나지 못한 변변찮은 외모에 왜소한 체구, 게다가 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오네의 어머니는 딸이 이런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을 당연히 반대했다. 그러나 의외로 당사자인 오네는 누구보다 이 혼인에 적극적이었고, 도키치로의 뛰어남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본 나가카쓰가 혼인을 주재해주었다. 이제 갓 혼인한 도키치로에게 곧바로 기회가 주어졌다. 아비를 죽인 미노의 지배자 사이토 요시타쓰가 지병으로 급사한 것이다. 새로이 가독을 상속한 사이토 다쓰오키(斎藤龍興)는 겨우 열 넷에 불과했다.
1564년, 27세, "내가 천하를 제패한다면..."
미노의 중신들이 볼때, 어린 주군 사이토 다쓰오키는 용렬한 자는 아니었으나 빼어난 자도 되지 못했다. 사이토 가문에 암운이 드리웠고, 흔히 서미노삼인중(西美濃三人衆)( 이나바 요시미치(稲葉良通) , 안도 모리나리(安藤守就) , 우지이에 나오모토(氏家直元) )으로 불리던 일군의 유력가들은 은밀히 오다 노부나가가 침공하면 안에서 도우리라 약속하는 서신과 인질을 보냈다.
어린 후계자의 가독 계승, 그리고 내부 분란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전국시대 가문 몰락의 레파토리였다. 자신도 이런 식의 경험을 어릴때 먼저 해보았던 선배격의 오다 노부나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주저없이 미노로 진격하는 오다군에 '대머리쥐' 기노시타 도키치로 또한 종군해있었다.
사서는 이때의 기노시타 도키치로가 미노 지역의 유력 중신 여럿을 회유하는 공을 세웠다고 간략하게 서술한다. (『坪内系譜』)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능력이 있었고, 이는 전국시대의 무사로서는 갖기 힘든 능력이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훗날의 어느 무장은 도키치로의 사람 대하는 태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신겐공과 겐신공은 중후하고도 엄하셔서 좌중을 압도케하셨다. 가히 위인이셨다. 그러나 공께선 달랐다. 나를 보시자마자 '여어~' 하고 추임새를 넣으시며 매우 친근하고도 따스한 말투로 반겨주시면서도 존중감을 잃지 않으셨다. 그야말로, 감개무량하였다."
.
오다 노부나가는 도키치로의 이 능력을 시험해보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먼저, 이름난 철포술의 달인이자, 오와리와 미노의 경계 요충지에 있는 마쓰쿠라성(松倉城) 의 성주인 쓰보우치 '겐바' 도시사다(坪内 '玄蕃' 利定) 가 도키치로에게 설득되었다. 대대로 오다 가문을 모셨던 그였지만, 경계 지역의 군소 영주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한쪽에 완전히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고 언제든지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부동층이라 할 수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를 만난 도키치로는 이렇게 농담했다고 한다.
도키치로: "귀공께서는 나름 쓸만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내가 천하를 제패한다면 친히 벼슬 한자리 내어서 써주도록 하지요."
겐바: "허튼 소리. 내가 네놈을 쓰게된다면 모를까."
도키치로: "사람 일, 어찌될 지는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일화가 사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1565년)의 쓰보우치 도시사다 앞으로 발행된 지행안도장(知行安堵状)에는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 (木下藤吉郎秀吉)라는 서명이 남아있다. 겐바는 새로이 '히데요시(秀吉)'를 칭하기 시작한 이 '대머리쥐'의 주재 하에서 오다 가문의 협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겐바는 훗날 히데요시와 사이가 틀어지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