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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02:31
자려고 누웠다가 엄청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대체 역사물의 유행에서 보여지듯 사람이란 게 역사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그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심리가 소현세자에 대한 이상한 과대평가(?)로 이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래도 왕을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기대감을 가지는 건 이해하지만 그 이상의 해석은 지양해야할텐데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효종이 어떤 의미로 소현세자보다 더 나은 인물이라 평가해서 과연 소현세자가 정말 왕을 했다고 효종보다 나았을까에 무척이나 회의적이긴 합니다. 조선의 근대화 실패를 인조와 소현세자에서 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생각하고요. 출판하신 책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다음 책 주문할 때 같이 주문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4/08/05 05:52
조선의 실패에는 조선의 폐쇄성이 있는게 맞습니다. 일개 몇몇 학자들의 서양문물 일부 수용 정도로는 개혁하기에 불충분했다는 거죠. 심지어 청나라도 서양 세력과 교류를 조선보다는 훨씬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개혁에 실패했잖아요.
그리고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가 소현세자 가족(강빈 등)에 대해 무자비한 숙청을 한 것 때문에 소현세자에 대한 동정의 시선이 더 가는 것도 있어요. 소인배 같은 행보를 보이는 인조랑 비교했을 때 대비 효과를 받는 것도 있고요.
24/08/05 06:57
강빈이 진짜 불쌍한 유가족인 인조에게 대들었다, 봉림의 정통성이 필요했다, 다 대봐도 소인의 행태이긴 하죠. 그때도 다들 그리 생각해서 뒷날 주자학원리주의가 역사 바로세우기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인조에 비하면 영조는 그냥 일을 철저히 한 냉혈한.
24/08/05 08:31
제 공부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가는거라 망설여지기는 하는데 개인적으로 서양문물 수용을 통한 근대화는 19세기 제국주의 세력과 어느 시점에 조우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일본이 1850년대 포함외교로, 청이 1860년대 2차 아편전쟁으로, 조선이 1870년대 포함외교로
저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10년의 차이가 훨씬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강빈과 가족 문제는 봉림을 후사로 결정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지로 보여집니다 가뜩이나 적장자 계승의 원칙이 무너진 이상 정통성은 박살나고 시작하는건데 소현의 아들들까지 무탈하게 장성한다? 엉망진창 되었을겁니다 그렇게 숙청해도 예송논쟁 벌어지는데요 여담이지만 청(도르곤)에서도 봉림을 밀었습니다 재밌는건 봉림이 세자된 이후에 청에서 계속 소현의 세 아들은 어찌 살고 있나 추적을 합니다 청에서도 아는거죠 얘네들이 문제의 씨앗이 될 수 있는거를
24/08/05 09:04
일본은 1853년 쿠로후네 사건으로 페리 제독에게 강제로 개항당하기 이전에도 네덜란드랑 교류하면서 어느 정도 서양 세력에 대해 많이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조선은 진짜 세계 정세에 대해 상당히 몰랐다고 보고요.
그리고 대중들은 향후 정통성 때문에 엉망진창 될거를 생각해서 인조가 소현세자 가문을 잘 숙청했구나 그렇게까지 생각 안해줍니다. 잔인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하지요. 인조가 엄청 명군이었으면 정상참작 되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잖아요.
24/08/05 09:33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국가의 정책 방향이 서구화로 정해진 시기입니다
한중일 모두 그 이전까진 교류하고 정보를 얻어도 서구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보다 못 사는 나라를 굳이 배울 필요 없으니까요
24/08/05 09:35
일본 식자층에서 이미 서양 문물에 대해 상당히 많이 접하고 알았기 때문에 국가의 정책 방향이 향후 바뀌었을때 그나마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거라는 거죠. 기본적인 내공이 다르니까요.
24/08/05 09:39
그걸론 설명이 안됩니다 일본은 식자층이지만 중국은 황제까지 서양인 선교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심지어 과학 분야에서 서양인들을 수백년간 책임자로 선정했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근대화 논쟁은 굳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24/08/05 09:43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지만 한 요인은 되죠. 일본 개항 이후에 미국이 시빌워 터지는등 운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고 뭐 여러가지 많은 요인이 있죠.
24/08/05 07:23
본문의 논지대로 인조독살설이 오해일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친명배금정책의 노선을 선회하지 않아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자초했고 전쟁패배의 원인중 이괄의 난때문에 군사훈련을 못하게 감시했다는 점에서 소현세자가 큰 병을 얻어서 온건 인조책임입니다. 물론 이 주장에는 이견이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if지만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효종보다 낫지 않을거라는 설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그가 밀었던 북벌론이 이완에게 어영청 대장을 임명하고 군사 10만을 모을려고 한걸보면 진심인데 이 인원을 다 채우지도 못한걸로 보입니다 강빈과 혼인관련해서는 원래 윤의립의 딸과 하는건데 부모님도 아니고 친척이 이괄의 난과 관련됬다는 이유로 서인들이 반대하여 무산된거라 그쪽에선 억울했겠네요 그 외 조강례에서 책을 30번 읽는다는 말에 김상용이 100번은 읽어야 한다등의 에피소드가 나오네요.
24/08/05 08:35
정묘 병자호란을 인조가 자초했다는 것은 지금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 책에도 관련 내용을 일부 적어놓았지만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을 읽으면 그쪽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아실 수 있을 겁니다
24/08/05 09:07
병자호란을 인조가 자초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도발은 도발대로 해놓고 이괄의 난 때문에 북방이 뻥 뚫려서 전쟁 준비는 제대로 못한 게 사실 아닌가요.
24/08/05 09:36
인조는 후금을 도발한적 없습니다
전쟁준비도 했습니다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의 시차가 10년이 넘습니다 다만 홍타이지가 크로스카운터를 제대로 친거죠 자세한 사항은 위에 이야기한 책을 봐주세요
24/08/05 09:39
병자호란 직전에 사실상 선전포고인 격문을 청에 올리면서도 별 전쟁 준비도 안하고 병력이 적었는데 보충도 제대로 못하고 그렇다고 선조처럼 도망을 잘 간것도 아니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24/08/05 09:45
인조가 전쟁 준비 잘했는데 병자호란 때 그렇게 당했다고 주장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네요. 당장 실록을 살펴봐도 군사 병력이 제대로 준비 안된 게 드러나는데 본인의 기존지식 운운하시면 저도 대화의 가치를 못 느끼겠습니다.
24/08/05 09:50
https://sillok.history.go.kr/id/kpa_10203014_001
인조와 정충신이 서로 대화하는 것만 봐도 이게 제대로 된 방비가 잘 안될 집안이라는 게 그냥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전쟁 방비가 잘 되었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24/08/05 09:57
1623년부터 1636년까지 시간이 13-4년입니다 1624년 실록기사 한 편 들고와서 인조대 군사정책을 퉁치시면 어떻게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24/08/05 10:00
그래서 인조가 전쟁 대비를 잘 했다고 주장하시는 거냐고요. 그리고 전쟁 대비 책임자들이 김경징, 김자점, 김류 등등인데 이들이 제대로 된 인사라고 보시는지요? 이 작자들이 병자호란 시에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굳이 제가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저 기사의 의의는.. 인조는 병법에 굉장히 무지했다는 걸 저 실록 기사로 보이는 거 아닙니까?
24/08/05 10:04
전기쥐 님// 잘하지도 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정석적인 대응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제 나가야해서 더이상 답변은 어렵습니다
24/08/05 10:07
더미짱 님// 김경징, 김자점, 김류 등의 인사가 차마 잘한 인사라고 말씀하시지는 못하시는군요. 님이 무슨 말씀으로 옹호해도 병자호란은 인조의 실책이 맞아요. 전쟁 과정도 엉망진창이었고 전쟁 이전에도 충분한 대비가 안 되었구요.
24/08/05 09:10
소현세자의 병에 인조 책임이 얼마나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괄의 난 때문에 북방이 뻥 뚫린 거에는 확실히 인조 책임이 있죠. 선조처럼 잘 도망간 것도 아니고요.
효종도 나름 괜찮은 왕이었다고 생각해서 if 소현세자가 과연 효종보다 나은지는 의문이긴 하네요.
24/08/05 14:33
북방의 뚫린 이유가 이괄의 난 때문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괄의 난에 대한 인조의 책임 여부는 생각해볼 거리가 많습니다. 일단 논상행공에 이괄이 불만을 가졌다는 실록 기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승정원 일기에 비슷한 내용이 딱 1건 있는데 이건 아주 나중에 명나라에 이괄이 난을 일으킨 이유를 설명하려고 적당히 만들어낸 것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걸 연려실기술에서 차용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게다가 실록만 보더라도 이귀와 더불어 사헌부와 사간원이 이괄이 역적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국문해야한다고 할 때도 인조는 그럴리 없고 현재 부원수의 일은 이괄만이 할 수 있다고 끝까지 신임했고요. 다만 이괄의 아들 이전의 경우 반역의 정황이 구체적이어서 한양으로 송환하려고 했을 때도 인조는 이괄은 딴 맘을 품지 않을 거라고 끝까지 믿고 있었습니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이괄을 멸시하거나 무시해서 일어난 게 아니라 인조가 이괄을 너무 믿어서 생긴 일에 가깝습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못 믿었다고 비난 하면서, 아이러니하게 인조는 왜 순진하게 이괄을 그렇게 믿었냐라고 욕하고 있죠. 뭐 우리야 역사의 결과를 아니 누굴 믿고 안 믿고를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 뿐이고 개인적으로 당대 사람이 우리보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인사로 까는 건 좀 그런게 그럼 대체 그때 누구를 뽑아야 했을까요? 인사는 선조도 모두가 반대하는 이순신을 중용했지만 동시에 원균을 중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제갈량조차 유비조차 반대했던 마속을 중용하다가 몇 년간 준비했던 북벌을 실패했고요. 과정을 까는 건 이해가 가지만 전쟁에서 인사를 까는 건 매우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
24/08/05 14:39
차라리 이괄까지 체포했으면 몰라도, 이괄의 아들만 압송하도록 명령한 것이 최악이죠. 아들만 건드리는 게 최악의 정치적 판단이었구요.
그래서 선조도 원균을 중용한 걸로 까이죠. 그리고 선조, 제갈량은 특정 몇몇 인사들 빼고는 대체적으로 괜찮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지만, 인조가 어디 이들에 비길 만 한가요. 인사가 만사인데 결과론적이라고 까지 말라고 하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24/08/05 14:59
그때 이괄까지 체포하는 것이야 말로 북방을 아예 내팽겨 치는 거죠. 오히려 이괄까지 압송하게 하는 건 이괄을 더 자극하는 것이고 그거야 말로 100% 난을 일으키라는 소리고요. 인조의 행위보다 훨씬 더 북방을 망하게 하는 길을 제시하셨네요. 그리고 인사가 만사라는 건 정치에서나 통용되는 말이고 하나의 전쟁에 누굴 투입했느냐로 까이는 건 그냥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제갈량이 북벌을 그렇게 잘 준비하고도 마속의 기행 하나를 예측하지 못해 그르쳤는데 그럼 제갈량도 인조급이겠네요.
그리고 정충신이나 이원익 최명길 김육 같은 인사는 인조의 의지 없이 그냥 인조대에 중용된 인물인가요.
24/08/05 15:07
애초에 이괄을 거기에 임명하지 말던가요. 원균급 최악의 인사가 한 명이 아니라 3~4명 이상 되면 그건 인사권자가 문제죠.
인조가 잘못한 건들은 다 결과론적이고 어쩔 수 없었다고 치부하면 당연히 잘한 건만 남겠죠. 그게 그렇게 억울한 평가라고 생각하면 본인이 왕 안 하면 될 일 아닙니까? 본인이 원해서 선택한 왕좌인데 무슨 그렇게 변명할 것들이 많아요.
24/08/05 15:16
애당초 이괄을 임명하지 말라니.. 인조는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려면 미래를 봐야하는 지경에 되어버렸군요. 애당초 평가라는 게 본인의 실책도 있고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겁니다. 특정 부분을 매우 부각해서 전체 결론을 지어버리는 건 쉽지만 오답에 가까울 확률이 높죠. 전 그냥 이런 측면도 있다라는 걸 말쓴드린 건데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인조가 아닌데 왜 왕을 했냐고 떠지셔봐야...
쓰신 댓글을 잘 보니 애당초 본 글쓴분에게도 거의 싸움을 거는 수준으로 댓글을 다시던데 전 그만 지나가겠습니다.
24/08/05 15:19
그게 왕좌의 무게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다보면 세상 모든 일이 다 어쩔 수 없는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관대하게 안 봐주고 그냥 그걸 "핑계"라고 봅니다. 인조는 재위 기간 하는 행보를 볼때 그냥 왕이 될 자질 자체가 없는 자라 이런 작자가 반정을 일으켜서 왕이 된 자체가 조선이라는 나라에 큰 불행이었구요. 지나가려면 지나가세요.
24/08/05 08:24
책 소개라는 제목이라기엔 정성스럽게 엄청난 정보를 적어주셨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이덕일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같이 드러나는군요. 한때 저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대중서적도 많이 써주세요 흑흑. 커리어에 도움 안 되시겠지만 역사 관심 많은 일반인은 이런 책들 너무 좋습니다. 응원을 위해 위시리스트에 책 담아두고 다른 책 쌓이면 구매해서 보겠습니다.
24/08/05 09:34
전혀 몰랐던걸 배우게 되었습니다.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만주어 배우는 역사학자들이 왜 배우나했더니... 어떤 사건을 우리의 기록과 청의 기록을 대조할 수 있어서 그랬군요.
24/08/05 12:14
인문학은 지금보단 더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덕일과 설민석을 학술적으로 비판하는것도 의미있지만 기존 사학자들의 대중 파급력이 왜 그에 미치지 못했는지 성찰해볼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흥미유발요소와 재미, 정보를 다 갖췄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유명해지시기만 하면 될듯
24/08/05 16:03
사실 중국사 최고의 황제로 꼽히는 강희제도 선교사들덕에 목숨구하고 수학, 역사, 음악 등등 서양학문을 다방면으로 섭렵했지만 그게 근대화로 이어지지않았죠. 소현세자가 좋은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대중들이 생각하는 방향은 전혀 아니었을겁니다. 사실 효종도 그당시 기준으로 깨어있는 임금이었죠.
24/08/08 09:08
조금 늦은 댓글이지만 책도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도 읽어봤는데 본문 주제에서 좀 많이 벗어난 논쟁이 된 거 같아 아쉽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기엔 정해진 역사의 길(가령 명청교체라든지.. 근대화라던지...)이 있고, 거기에 벗어난 과거 사람들의 행위가 답답하고 미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결과를 아는 현대인들의 오만 아닐까요? 현재의 지나친 열망이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본문의 구절을 다시한번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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