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07/29 08:01:10
Name 수금지화목토천해
Subject [일반] 이름이 궁금해서
그 일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쉬는 날 낮에 웹툰을 봤는데 여주인공 이름이 전 여자친구와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내 첫 연인이자 가장 오래 사랑한 사람으로 이름은 강다혜였다.
오랜만에 떠오른 그녀 생각에 그녀의 카톡 프로필을 확인했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함께 찍은 사진이 배경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전에는 고양이가 없었던 것 같은데 새 친구가 생긴 걸까? 강아지는...... 우리 집 해피처럼 무지개다리를 건넜을까.

다혜네 집과 우리 집은 둘 다 강아지를 길렀었다.
둘은 나이가 같고 견종도 코카스파니엘로 같았다.
19살까지 살았던 해피도 벌써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3년이 되어가니 다혜네 강아지 역시 아마도 무지개다리를 건넜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다혜네 강아지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혼란에 빠졌다. 개를 기른다는 공통점 덕에 우리는 안지 얼마 되지 않아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고 그녀의 개는 우리를 이어준 오작교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또한  개를 사랑하는 나는 한 번 들은 지인의 개 이름은 절대 까먹지 않는다는 하찮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혜네 개 이름을 까먹다니, 이러다 언젠가는 해피의 이름마저 까먹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까먹은 것을 기억하려 하면 오히려 생각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별안간 떠오르는 것처럼 다른 일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한 번 숨어버린 이름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고 무엇을 해도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개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쓸수록 이름 대신 다혜와의 오래된 추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나를 웃겼던 일, 내가 그녀를 웃겼던 일, 처음 받았던 손편지와 내가 써준 답장...... 신기하게도 싸웠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것이 미화일까.

즐거웠던 추억이 떠오를수록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너무 슬퍼서 마침내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밤이 된 지금 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며 다혜에게 통화를 걸지 고민하고 있다.

휴대폰 화면에는 그녀의 연락처와 수화기 아이콘이 떠 있다.

기르던 개 이름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다혜에게 전화를 걸 것인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잘 지내고 있지? 그나저나 기르던 강아지 이름이 뭐야? 물었을 때 얼빠진 표정이 될 그녀 얼굴이 눈에 선하다.

우리가 만날 땐 MBTI가 유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다혜의 MBTI를 모른다. 스몰 토크 주제 국밥이라는 MBTI부터 물어야 할까?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고 있다.

곧 있으면 밤 11시고 지금도 이미 늦었지만 더 늦은 밤에 전화를 걸면 다혜가 나를 '자니?' 메시지를 보내는 전 남자친구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는 않았다. 10초만 더 고민해 보고 생각나지 않으면 통화를 걸어보자.

금동이라는 이름이 떠오른 것은 10초가 지난 뒤 '한 번만 더 10초 세보고...'같은 생각을 할 때였다.

다혜가 길렀던 강아지 이름은 금동이다. 정겨운 이름으로 더 귀여웠던 암컷 강아지였다.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동시에 놀랐다.

다음에 떠오른 생각이 '다혜에게 전화하지 않아도 된다' 가 아니라 '다혜에게 전화 걸 수 없다' 였기 때문이다. 금동이의 이름도 떠올랐으니 이제 그녀에게는 용건이 없는 것이다.

그녀의 카톡 프로필을 봤다. 금동이와 고양이를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홀린 듯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혜는 통화를 끊었다. 10년 전 마지막 연락을 끝으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던 것이다.
그는 오랜만의 전화가 어색한지 안부를 묻다 금방 화제를 돌려 MBTI를 묻거나 몇 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금동이 이야기를 꺼내는 등 두서없이 근황을 물었다.

그러던 그가 이상하리만큼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은 내가 기르는 고양이 ○○의 이름이었다. ○○를 기른 것은 그와 헤어지고 한참이 지난 후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의 이름을 포함해서 지난 10년간의 이야기를 하려면 통화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밥을 사주면 고양이 이름을 가르쳐 주겠다는 장난스러운 제안으로 그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밥 약속을 제안했을 때 그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만날 그의 얼굴이 사뭇 궁금했다. 하지만 더욱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름 대신 '자기'라는 호칭으로 그를 불러서였을까? 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만나기 전까지는 떠올라야 할 텐데......

--------------------

이 글은 사실 1% 픽션 99%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Pluralist
24/07/29 08:29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실시간 대화에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을 때 고민과, 상대도 나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것 같다는 안도감을 떠올리게 해주네요.
수금지화목토천해
24/07/29 16:31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及時雨
24/07/29 09:29
수정 아이콘
10년이면 깜빡할 나이가 된다
수금지화목토천해
24/07/29 16:31
수정 아이콘
예비군 훈련에서 만난 동창이 절 반가워했는데 저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진땀뺐던 기억이....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2143 [일반] 행복의 나라 리클라이어관 후기(거의노스포) 욕망의진화3257 24/08/25 3257 0
102144 [일반] [팝송] 알렉산더 스튜어트 새 앨범 "bleeding heart" 김치찌개2141 24/08/25 2141 0
102142 [일반] 술 맛있게 먹는 법.jpg [9] insane5428 24/08/24 5428 1
102141 [일반] [서평]《불안 세대》 - 스마트폰에 갇혀 실수할 기회를 빼앗긴 아이들 [21] 계층방정4081 24/08/24 4081 8
102140 [일반] 『바른 마음』 - 한국인의 역사관을 다시 생각하다 [4] meson3587 24/08/24 3587 8
102138 [일반] 카멀라 해리스, 美 민주당 대선후보 확정 (바이든-오바마-클린턴 찬조연설) [92] Davi4ever12861 24/08/23 12861 1
102136 [일반] 부천 호텔 화재 에어매트 영상 (심약자주의) [52] 그10번17259 24/08/23 17259 5
102135 [일반] 솔로가수 초동 판매량 순위 보면 트로트 시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죠. [18] petrus7522 24/08/23 7522 0
102134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26. 연이을 련(聯)에서 파생된 한자들 [4] 계층방정2167 24/08/23 2167 4
102133 [일반] 악보 지옥.......ㅠㅠ [12] 포졸작곡가4343 24/08/23 4343 18
102132 [일반] 침잠과 부유. [9] aDayInTheLife2822 24/08/23 2822 3
102131 [일반] 여름 느낌 가득한 SISTAR19 'MA BOY'를 촬영해 보았습니다. [2] 메존일각3297 24/08/22 3297 12
102127 [일반] 뉴욕타임스 8.12. 일자 기사 번역(바닷물을 식수로 만드는 기술) [17] 오후2시6324 24/08/21 6324 2
102126 [일반] 중학생 때 미국을 처음 갔던 이서진 [112] petrus12861 24/08/21 12861 3
102125 [일반] 지휘자는 2차 전직에 가까움..... [76] 포졸작곡가10711 24/08/21 10711 47
102123 [일반] 삼국지 관련 웹소설 몇개 보고 느낀 감상평 [27] 아우구스투스5323 24/08/21 5323 3
102121 [일반] 전기차 화재별 차종 정보 [79] 자두삶아6284 24/08/21 6284 2
102120 [일반] 멀어져간 사람아~ [10] 카아6526 24/08/20 6526 6
102119 [일반] 성우 다나카 아츠코 별세 [20] Myoi Mina 6277 24/08/20 6277 1
102117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25. 젖을 습(溼)에서 파생된 한자들 [4] 계층방정4077 24/08/20 4077 4
102116 [일반] 부천 중동 아파트의 센스있는 현수막 [49] 버들소리15300 24/08/19 15300 0
102115 [일반] [서평]《손쉬운 해결책》 - 아직은 자기계발 심리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엔 미숙하다 [39] 계층방정6136 24/08/19 6136 16
102113 [일반] 데스메탈계의 거장 일러스트레이터를 소개합니다:댄 시그레이브 (Dan Seagrave) (스압) [8] 요하네즈5091 24/08/19 5091 1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