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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7/02 11:35:51
Name 아케르나르
Subject [일반] 1984년, 그 골목. (수정됨)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은, 우리 가족이 살던 다가구주택의 공동출입문에 서서 땅에 떨어지던 빗물을 바라보던 것이었다. 아마도 너덧살때쯤 되지 않았을까. (최신 연구에 따르면 유아가 태아일 때도 기억하는 경우가 있지만 뇌의 성장에 따라 어릴 때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잊혀진다고 한다.)

당시에는 어린이 유괴 범죄나 미아 사례가 잦았던 것 같다. 최초의 기억들 중 하나는 살던 집의 주소를 외우던 것이었다. 지금이야 당연히 까먹었지만. 하여튼 이 글이 배경이 될 곳은 안양시 수리산로 인근의 어딘가이다.

당시만 해도 차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던 데다가 큰 도로가 아닌 곳들은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흙길이라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었다. 그래도 흙길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어서 아이들이 놀기에는 좋았지만.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은 그런 골목의 한쪽에 있는 2층짜리 다가구주택이었는데, 1층엔 대충 여섯집, 2층엔 주인집 정모씨댁을 포함한 두 집이 살았다. 우리집은 1층에서도 공동 출입문과 가장 먼 구석이었는데, 그나마 1층에선 다른 집들보다 큰 방 하나와 작은 마루, 연탄불로 취사/난방하던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었다.
집에서 나오면 한 켠에 다른 가구들이 복도식 아파트처럼 늘어서 있고, 통로 옆에는 공동 수도가 있었다.  마중물을 한바가지 넣고 펌프질을 해야 쓸 수 있었다가 조금 뒤엔 수도꼭지를 틀면 되도록 개선공사를 했던가?.. 거기까진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펌프질했던 건 확실하다.
다른 집들을 지나서 공동현관문 옆에는 재래식 공동화장실이 한 칸 있고, 그 옆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과 이어진 벽을 거쳐 공동 출입문 뚜껑?으로 올라갈 수 있었어서 종종 올라가 놀았다. 또래들끼리는 그 계단의 얼마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지 내기 비슷한 것도 했었다. 당시 아이들 놀이란 게 보통 그런 것이었다.

이 다가구주택은 윗골목과 아랫골목을 잇는 길의 중간에 있었는데, 나는 아랫골목에서 놀았다. 언젠가는 윗 골목의 어느 잘 사는 집 아이를 따라 집구경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기억은 없고, 그 집 침대에서 뛰어놀고, 공기총을 만져봤던 기억은 있다. 나름 텃새가 있어서 '너는 못 보던 앤데 왜 우리 골목에서 노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이후로는 아랫골목에서만 놀았다.

그 골목의 또래집단에는 내 동갑이 너덧, 그외 대부분은 형, 누나였던 것 같다. 위로는 5,6학년, 아래로는 서너살 정도의 연령대.  전체 인원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보통 놀 때는 열 명 안쪽이었던 것 같다. 아직 포장되지 않은 골목의 흙길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그 짧은 유년기동안 많은 놀이를 배우고 즐겼다. 땅따먹기, 술래잡기, 얼음땡,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다방구, 오징어, 비석치기, 1234, 열발 뛰기, 한발 뛰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등.

언젠가는 골목 구석에 폐차직전의 버스가 방치돼 있어서 거기 들어가서 놀기도 했고, 또 언젠가 수많은 송충이가 벽을 타고 기어가는 것을 막대기로 잡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언젠가는 수많은 잠자리 떼가 파란 하늘을 날아다니는 걸 구경하다 빨랫줄에 앉은 놈을 잡으려고 몰래 다가가다 놓치곤 제 풀에 놀라기도 했다. 언젠가 겨울엔 눈이 엄청나게 와서 연탄재를 굴려가며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엔 어둑어둑한 골목에서 가로등을 배경삼아 놀다보니 너무 늦어서 부모님께 혼나기도 했었다.

콘크리트로 골목길을 포장한다고 한켠에 쌓아둔 모래에서 조개껍질을 찾아 조개싸움을 하며 놀았고, 갓 포장된 길을 은근슬쩍 밟아 자국을 내며 놀았다. 하나 둘 골목길에 들어온 승용차 사이로 낡은 축구공을 차며 놀고, 혼자 골목에 나오면 친구집을 돌아가며 '누구야 놀~자' 불러가며 모여 놀았다.

어딘가 다친 동생을 업고 골목에서 집으로 향하던 날, 그 골목에서 유독 따돌리던 아이 집에 놀러가 바둑, 장기, 오목, 알까기 등을 배우고 놀던 일, 추적추적 비오던 날에 느껴지던 뭔지 모를 감정, 동생과 함께 가까운 슈퍼마켙으로 심부름 가던 일...

그런 추억들이 유독 많던 그 골목을 떠난 것은 국민학교 2학년때쯤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해서 그 골목으로 자주 놀러갔었는데, 골목대장격인 누군가가 '넌 이제 너네 골목으로 가서 놀아라' 고 해서 서운해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 왠지 거기 가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혼자 놀게 된다. 이사온 골목에는 그런 또래집단이 없었기도 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그 다가구주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계량기가 집집마다 달려있지 않아서 전기/수도요금을 주인집이 달라는대로 줘야 했던 것이 이유였다. 그래도 당시 옆집에 살던 이웃들 몇몇은 이후로도 꽤 오래 알고 지냈고, 지금도 그때를 추억하시곤 한다.

성인이 되어 그 골목을 다시 가 볼 일이 있었다. 인터넷 지도로 재 보면 폭 5m에 길이도 백여 미터 남짓 되는, 어디나 있을법한 짧은 길이었다. 어릴 때는 그 길이 참 길고 넓어보였는데...
그 골목은 군데군데 있던 공터까지 빽빽하게 건물로 들어차, 이제는 옛날 그 골목의  흔적이라곤 그때부터 있던 단독주택 몇 채뿐.
우리 가족이 살았던 다가구주택 자리는 새로 지어져서 현재 복지시설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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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11:52
수정 아이콘
비슷한 나이대의 비슷한 경험이네요.

예전 한지붕세가족 드라마에 나오는 집과 같은 구조에서 순돌이네와 같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83년 8살즈음이었는데...
문을 열면 곱등이가 뛰어다니는 주방이 있고, 거기서 문을 하나 열고 들어가야 나오는 방 하나에서 3식구가 같이 살았네요. 화장실은 건너편에 푸세식이 있었는데 밤에 이용할때면 무서워서 찬송가를 부르곤 했네요.

친척집에 갔다가 밤에 도착하게되면 대문 열쇠가 없어서 안에서 누가 열어줘야지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엄마는 꼭 제 이름을 불렀죠. 주인집 아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요.(저와 동갑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그건 뭔가 불평등하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주민등록초본등을 떼어보고 안 사실이었지만 거기서는 불과 6개월밖에 안 살았더라구요. 어릴때의 추억이 정말 많이 남아있는 곳이었는데 말이죠...
아케르나르
24/07/02 14:05
수정 아이콘
곱등이, 그리마... 이런 벌레들 많았죠. 요즘은 다들 빌라나 아파트 같은 데서 살고 정기적으로 소독을 하니까 보기가 힘들어졌지만요.
서린언니
24/07/02 14:39
수정 아이콘
(수정됨) 부모님이 맞벌이라 1년인가 할아버지댁에 있었는데
다들 일하러 나가면 지금은 없어진 안성선 철길을 걷곤 했습니다.
녹색 양철판으로 지어진 방앗간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깨냄새가 기억나네요
24/07/02 16:4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잘봤습니다.
80년대초 이제 막 걷기시작하던 어린시절 장마철 빗물이 흘러 들어오는 수유리 지하단칸방에서 부모님이 절 들어 서랍장 위로 올리던게
기록된 인생 첫 기억인거 같아요. 그 이후로도 대여섯살까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일만 생각 나는거 보면 그 순간이 강렬했던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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