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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3/30 18:39:17
Name 계층방정
Subject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6) 시흥의 여덟째 딸, 과천 (수정됨)

시흥의 열두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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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1)
 서문. 작은 세 고을에서 시흥이 시작되다
 1. 시흥의 맏딸, 영등포

 2. 그때 그랬다면? - 영등포부 승격

 3. 시흥의 둘째 딸, 안양
 4. 시흥의 셋재 딸, 관악
 5. 시흥의 넷째 딸, 구로
 6. 시흥의 다섯째 딸, 동작
 7. 시흥의 여섯째 딸, 광명
 8. 그때 그랬다면? - 시흥 있는 시흥
 9. 시흥의 일곱째 딸, 안산

10. 시흥의 여덟째 딸, 과천

1914년 시흥군에 흡수 합병된 군은 안산군 외에도 과천군이 있으며, 과천군 역시 1985년 안산시와 함께 과천시로 부활했다. 과천군은 안산군보다도 먼저 시흥군과 인연을 맺었는데, 1414년(태종 14)에 당시 금천군이었던 시흥군과 합쳐져 금과군을 이루었다가 두어 달 만에 예전으로 돌아갔고 세조 때에도 합쳐졌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이때의 짧은 인연을 제외하면 조선 시대까지 과천은 시흥과는 별개의 고을로 계속 존재해 왔다.

과천이란 이름은 고려 초 과주에서 비롯했는데, 신라 때 쓴 율진이란 이름을 ‘과일이 풍부한 고을’로 재해석한 이름으로 보인다. 옆동네 시흥이 본디 금주였다가 금천이 된 것처럼,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를 설치하지 않은 군현 이름의 주(州)를 일괄적으로 산(山)·천(川)으로 바꾸면서 지금의 과천이 되었다.

이때의 과천군은 북으로는 한강에 닿고 남으로는 지금의 군포까지 이르러 수원과 안산과 접경했으며, 관악산 동부 산기슭을 전부 아우르는 군이었다. 그러나 구한말 과천의 논밭 90% 이상은 서울 사람들의 소유였고, 과천 사람들은 가난한 생활을 영위했다. 과천은 논보다 밭이 많았고, 지금은 번화한 대도시인 서초구와 동작구가 된 과천군의 한강 유역 상북면과 하북면은 잦은 범람 때문에 3년에 한 번 겨우 평작을 거둘 뿐이었다. 과천에서 가장 많이 키우는 작물은 콩이었고, 그 외에도 담배풀 생산량이 경기도에서 손꼽을 만큼 많았는데 대부분의 판매용 담배는 지금의 안양과 군포 일대인 상서면, 하서면, 남면 일대에서 키웠다. 상북면과 하북면은 담배풀을 키우지는 않았으나 조선인 대상으로 각연초를 많이 제조했다.


과천군 지역은 구한말 일제의 침탈 과정에서 경인선·경부선 토지 보상 문제, 수도저수소와 송수관 토지 수용 문제, 관악산과 청계산의 산림 침탈 등으로 인해 일제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다. 과천은 서울에서 삼남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의병 활동이 쉽지 않았고 일제의 횡포도 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침탈을 견디다 못해 주암동 일대에서 여러 차례 의병이 일어나 일진회 회원들과 일본인들을 살해했고, 마침내 과천군청과 순사주재소 등 행정기관까지 의병들이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의병 활동은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6651c41231128.png?imgSeq=24533

1914년, 시흥군에 편입되기 전의 과천군과 과천군의 다섯 딸 도시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을 통해 과천군의 일곱 면은 신북·신동·과천·서이·남 다섯 면으로 정리되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비록 군의 이름은 시흥군이고 군청도 시흥군의 영등포에 있었지만, 시흥군의 열 면 중 구 과천군의 비중은 절반에 달해 구 시흥군보다도 더 높았다. 그래서인지 군청과 함께 근세·근대의 군 중심지 기능을 한 향교는 시흥향교가 아니라 과천향교로 통폐합되었다. 통합 직전 1913년 조선인 인구수도 시흥군 17,162명, 과천군 21,138명으로 과천군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일제시기 1등 국민인 일본인 인구수는 시흥군 1,220명, 과천군 503명으로 시흥군 쪽이 더 많았는데, 영등포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정착해 도시를 이뤄나간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저 다섯 면 중 나중에 과천시로 부활하는 것은 원래부터 과천군의 중심지인 과천면뿐, 나머지는 전부 제 갈 길을 가게 된다. 시흥의 열두 딸 중 안양, 동작, 과천, 군포, 서초 다섯은 과천의 다섯 딸이기도 하다.


광복 이후, 한국에서는 극한의 좌우 대립이 일어났으나 과천은 그 소용돌이를 벗어났다. 우익청년단체와 경찰 활동이 두드러질 뿐 눈에 띄는 좌익 활동은 없었다. 6.25 전쟁 때에도 북한군이 과천이 아닌 양재-판교-풍덕천으로 진군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큰 충돌은 없었고, 1.4 후퇴 후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러 북진하는 과정에서 과천지구 전투와 관악산 전투라는 대규모 교전이 있었으나 과천의 피해는 경기도 여타 지역과 비교하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소규모라지만 민간인 학살과 납북 등 전쟁의 아픔은 과천도 피해갈 수 없었다.

한국은 6.25 전쟁 때 많은 사람이 피란을 가고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는 등 대규모 이주를 겪으면서, 지역에 기반을 둔 신분 질서가 파괴되고 현대적인 평등 의식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천은 전쟁의 피해를 비교적 비껴간 곳으로, 1.4 후퇴 때에야 정부 지시에 따라 후퇴했을 뿐 1950년에는 대부분 이주하지 않고 그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과천시 갈현동 가루개의 토박이 이용진 씨의 증언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도 양반과 상민이라는 계급 의식이 다소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과천은 농업 외의 생업이 거의 없는 농촌이었고, 전근대 교육의 상징인 서당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다만 1950년대 후반 시흥군의 국회의원 이영섭 의원의 주도로 생긴 막계저수지와, 비슷한 시기 결성된 수리조합 등은 과천군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과천면의 인구는 1960년에는 6,147명이었으나 1969년에는 7,945명으로, 본격적인 개발이 되기 전에도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으며, 텔레비전 등 근대 문물도 들어오고 있었다.

종교 방면에서도 시흥군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구한말에 설립된 교회를 찾아볼 수 있는 반면 과천면 주암동에서는 1956년에서야 교회가 생겼고 그나마도 얼마 못 가 팔렸으며 지금까지도 교회가 들어설 여력이 없다고 한다. 비록 새마을운동 때문에 전통 신앙은 미신으로 치부되어 쇠퇴를 겪었지만, 지금도 과천에서는 당제나 산신제 등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류재열이라는 사람이 기독교 계열 신흥종교인 장막성전을 과천면의 막계리 일대에 만들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과천시와 악연을 맺고 있는 신천지로 이어지고 있다.


안양읍을 거쳐 안양시로 독립한 서이면, 1963년 서울로 편입된 신동면과 신북면과 달리 과천군의 구 중심지인 과천면은 그렇게 조용한 발전을 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 상황이 180도 바뀌게 된다.

6607db37e892e.jpg?imgSeq=19148과천시를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만든 정부과천청사.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File:과천청사_전경1.jpg

원래는 1963년 신동면과 신북면이 서울로 편입될 때 과천면도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으로 추가되어, 현대적인 도시계획의 수혜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71년 7월 30일 과천면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하면서 과천의 발전은 몇 년 더 늦춰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앙정보부장인 김재춘이 1967년-1968년 박정희의 지시로 신무기 생산 단지를 만들기 위해 막계리 땅을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신무기 생산 단지가 대전에 자리를 잡았고 설상가상으로 과천이 개발제한구역이 되면서 김재춘의 처지가 난처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땅은 나중에 서울대공원으로 활용되게 된다.

서울시의 인구 집중과 비대화가 가속되면서 1971년에는 과천면을 포함한 서울 주변 일대를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하고 1973, 1976년에는 서울 도심과 불량 주거지역을 재개발하는 등 여러 가지 수도권 관리 정책을 폈다. 그러나 서울의 집중화와 과밀화를 이 정도 정책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서울의 기능을 서울 외부로 분산·이전시키는 정책수단이 추진되었다. 이 정책으로 만든 신도시가 바로 반월(지금의 안산)과 과천이다. 반월은 서울 시내의 중소기업을 이전해 기업 종사자와 관련 서비스업자를 이주시키고 수도 서남부의 거점이 될 자급자족 도시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과천은 정부제2종합청사(지금의 정부과천청사)를 건설해 행정기능을 분산하는 한편 전원주거환경을 갖춰 고급 주택 수요를 분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과천은 반월과는 달리 많은 도시기능을 서울에 의존하도록 짜여졌다. 그와 함께 서울대공원을 과천 신도시에 만들어 서울시민들의 휴식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있었다.

한편 손정목은 논문 과천시의 탄생에서 과천 신도시 개발에 대해 다른 의견도 제시하는데, 당시 북한이 서울은 물론 대전까지도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포를 개발했다는 소문에 정부제2종합청사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정부제2종합청사는 관악산 기슭에 있어서 북한의 장거리포를 피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과천시의 규모가 5만 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과천시지는 공식적인 증거는 없어도 손정목의 주장을 지지했다.

따라서 과천 신도시 건설은 자연 경관을 보존하고 녹지를 설치해 도시민들이 쉴 수 있도록 하고, 행정·주거 도시로서 생활편익시설을 잘 갖추는 것을 기조로 삼았다. 건설부는 도로와 도시환경 등 신도시의 핵심 부문을 맡았고, 정부 총무처는 안보 문제 때문에 비밀리에 정부제2종합청사 건설을 추진했다. 서울시는 과천에 서울대공원을 건설할 것을 일찍부터 계획한 바 이쪽을 담당했고, 경기도는 공공기관 유치와 운영을 맡았다. 체신부는 통신, 한국전력은 전력 공급을 맡았다. 이 중에서도 핵심인 신시가지 건설을 맡은 것은 대한주택공사였다.

과천 신도시 개발 면적은 총 296만 1천제곱미터(89만 6천평)이었는데, 이 중 정부제2종합청사 터가 22.3%를 차지했고 나머지 77.7%가 개발지구였다. 과천시 면적이 35.86 제곱킬로미터 즉 3,586만 제곱미터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체 과천시 면적의 10%도 되지 않는 것이다. 과천시가 지금도 구리시 다음으로 좁은 시인데 그 중에서도 정말 작은 부분만 차지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반월국가산업단지의 면적이 5,775만 제곱미터로 과천시 전체 면적보다도 넓은 것과 비교해보면 과천 신도시가 얼마나 작은지 더 잘 느껴질 것이다. 계획 인구도 총 1만 30가구, 4만 5,000명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과천 신도시 계획은 1978년 9월 25일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10월 25일 도시계획시설결정고시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파트 조성 사업은 1980년 11월부터 착공되어 1984년 9월 10단지 조성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아파트가 과천 신도시 주택의 약 90%를 차지했다. 그 외에도 상업지구와 교육시설 역시 4단계에 걸쳐 확충되었다. 정부제2종합청사는 1979년 4월에 1단계 공사를 시작해 1982년 12월에 준공했고, 이후에도 1983-1985년, 1990-1993년의 2단계 공사를 거쳐 1993년 12월에 최종 준공했다.


과천 신도시 계획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제2정부종합청사를 끼고 있던 요인도 있지만, 과천이 인간 위주의 도시공간을 창출할 수 있게 한 치밀한 도시계획과 도시설계 하에 계획도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과천 신도시 건설 후 유입인구 중 80% 이상이 서울시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며, 생활환경 만족도에서도 과천이 일산과 반월을 밀어내고 가장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과천시로 이주해 온 동기 면에서도 쾌적한 주위환경이 절반에 가까운 43%를 차지했다.

6607db86aa500.jpg?imgSeq=19149서울대공원 개원 당시. 서울대공원은 과천신도시와 서울시의 휴식공간이 되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File:서울대공원_개원.jpg


과천에는 신도시뿐만 아니라 서울대공원도 있다. 서울대공원은 신도시 개발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는데, 이때 서울의 주요 휴식공간은 창경원이었으나 지나치게 협소하고, 원래 역사 유적인 땅을 유원지로 운영하고 있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 서울시에서는 공원을 1968년,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외곽으로 옮기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이러던 차에, 위에서도 설명했듯 원래 다른 용도로 쓰려고 김재춘이 구매한 과천 땅이 놀고 있었다. 박정희는 현지 시찰에서 이 터에 대공원을 세우도록 지시했으나 1973년 석유 파동 때문에 이조차도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김재춘과 서울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1977년 서울시장 구자춘이 김재춘과 협의해 그 땅 136만 평을 모두 서울시에서 인수하게 된다.

서울대공원 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정부의 이주대책을 받아들이고 협의보상을 받았으나, 문제는 알박기를 노린 무단 이주민들과 터 안의 전체 가구 중 90%를 차지하고 대개 무허가 주택에 살고 있던 장막성전 신도들이었다. 그래서 서울대공원 건설고시일인 1977년 5월 27일 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위해 공원시설보다 먼저 이주단지 조성공사를 문원리에 조성해 1979년 9월 17일에 완성했다. 이렇게 오랜 기간이 걸린 보상과 이주였지만 당시에는 꽤나 개선된 것이었다.

구체적인 서울대공원 건설 계획은 1976년 서울시에서 홍익대에 용역을 주어 수립되었어, 동·식물원(창경원 시설 이전), 레저시설, 호수, 청소년문화, 주차장, 녹지 등이 포함된 163만 5,000평의 대단위 종합공원 기본구상이 만들어졌다. 1977년 1월 5일 대통령에게 보고된 이 계획이 승인을 얻었다.

당초에는 레저시설이 주였고 동물원은 부가 되었으나, 구자춘 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1977년 세계 동물원을 시찰한 결과, 또 이 무렵 보고된 평양동물원의 거대한 규모에 자극을 받아 동물원이 주가 되고 레저시설이 부가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78년 6월 1일에는 대공원 건설을 전담하고자 남서울대공원건설사업소가 만들어졌다.

기공식은 1978년 10월 30일에 열렸고, 동·식물원 외인 제1공구는 한양건설, 동·식물원인 제2공구는 삼환기업, 이주단지인 제3공구는 삼호주택이 맡았다. 사업비는 총 985억 원, 시행기간은 1977-1986년으로 계획되었다. 이 계획은 63빌딩 수족관 건립 등 외부 요인에 따라 몇 번의 수정을 거쳤고, 사업비도 317억 원이 증가된 1,317억 원이 되었다.

제2차 석유 파동,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1980년 비상계엄과 마이너스 성장 등으로 인해 대공원은 수차례 위기를 맞았다. 새로 들어선 전두환 대통령도 대공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박영수 시장의 의지로 인해 제1차 개원 예정일인 1983년에는 맞출 수 없었지만 1984년 5월 1일 드디어 서울대공원은 개원했고, 첫날 방문객만 무려 100백만 명에 달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정부제2종합청사 제2동이 완공되자 정부는 선발대 보건사회부를 시작으로 10개 부처를 과천으로 옮겼다. 이런 정부 발표가 있자마자 과천에는 투기 바람이 밀어닥쳐 왔다. 이와 함께 1982년 6월 10일에는 과천면 6개 리를 관할하기 위해 경기도 과천지구출장소를 설치해 과천의 행정업무를 강화했다. 개발 당시 개발지역에 살고 있던 인구는 5천여 명이었으나, 1983년에는 5만 4천여 명으로 10배 이상 늘어났고 1979년의 계획인구 4만 5천명을 훌쩍 뛰어넘었다.

6607dba003d50.png?imgSeq=191501986년, 시흥군과 여덟 딸 중 과천시.


과천의 인구가 5만 명을 넘어서면서 시 승격이 논의되었으나, 아직 신도시 개발이 완료되지 않아 더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이 승격의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12단지까지 입주가 마무리되면서 1984년 7월에는 과천 인구가 7만 명에 육박하게 되어, 시 승격을 더 늦출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985년 8월 19일 과천을 포함한 전국 11개 읍·출장소를 시로 승격하기로 확정하였고, 9월 정기국회에서 법률로서 통과해 1986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구리, 안산과 함께 과천지구출장소는 과천시로 승격했다. 시흥군의 아홉째 딸이자, 사라진 과천군의 정신적 후신인 과천시가 이렇게 태어났다.


※ 이 글은 밀리로드의 “시흥의 열두 딸들” 연재글을 묶은 것입니다.


참고문헌


開發制限(개발제한) 지역설정에 反撥(반발) 경향신문 | 1971.09.01 기사(뉴스)
https://seoulsolution.kr/ko/content/3182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B%A7%89%EC%84%B1%EC%A0%84
http://ansan.grandculture.net/ansan/toc/GC02500989
https://gbmo.go.kr/HTML/sub0103_06.html
https://memory.library.kr/dext/file/view/resource/115385
https://memory.library.kr/dext/file/view/resource/104385
https://memory.library.kr/dext/file/view/resource/104389
https://memory.library.kr/dext/file/view/resource/115417

특히 이 과천시 글은 아래 4개의 링크로 연결되는 과천시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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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방정
24/03/31 22:05
수정 아이콘
글을 쓰고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과천군의 원 중심지인 과천시가 아니라 안양시가 먼저 발전하게 된 계기는 정조가 원래 한양에서 수원 가는 길인 과천시 지나는 길에 사도세자 죽음에 관여한 김상노의 형 묘가 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서 길을 바꿨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과천을 지나지 않고 안양에서 광명, 금천 방향으로 꺾는 길로요.
24/04/01 08:53
수정 아이콘
좋은글감사합니다. 과천거주중이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계층방정
24/04/01 20:27
수정 아이콘
과천이 그다지 크지 않아서 과천 주민 분을 만나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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