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올린 글들의 지도 그림을 모두 수정했습니다.
7. 시흥의 여섯째 딸, 광명
8. 그때 그랬다면? - 시흥 있는 시흥
9. 시흥의 일곱째 딸, 안산
통진, 죽산, 진위, 풍양… 모두 1914년 부군현 통폐합 때 사라진 군들이다. 지금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그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부군면 통폐합으로 사라진 옛 군들의 중심지는 그 전의 성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쇠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시흥에 병합된 안산과 과천은 1985년, 제 이름을 되찾아 돌아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본디 시흥군은 1914년 시흥·과천·안산 3군을 합해서 만들어졌는데, 차례차례 구 시흥군 땅을 서울시에 내주더니 1980년 광명시 분리 독립으로 인해 구 시흥군 땅은 한 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다 옛 안산과 과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안양까지 이미 독립해 동쪽의 구 안산군 영역과 서쪽의 구 과천·광주군 영역은 단절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시흥군청은 동쪽이나 서쪽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 지대인 안양시에 있었다.
영등포, 동면, 안양 등 옛 중심지를 차례로 잃어버린 시흥이었지만, 안양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이 발달하고 있어서 1979년에는 안양 남쪽의 과천군 잔재인 군포면이 군포읍으로 승격했고, 1980년에는 원래는 시흥군이 아니긴 했지만 안양 동쪽의 광주군 잔재인 의왕면도 의왕읍으로 승격했다. 이해에는 마찬가지로 원래 시흥군이 아니었던 소래면 역시 소래읍으로 승격했다.
이렇게 시흥을 잃은 시흥군의 각 지역이 제각기 도시화되고 있는 동안, 구 안산군 지역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지금의 안산군은 간척을 거쳐서 바다로 뻗어나간 땅이다. 지금은 내륙 지역에 있는 ‘포구’가 들어간 성포동과 ‘곶’이 들어간 고잔동이라는 이름에 간척 이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의 안산군 중심지는 관아와 안산향교 자리인데, 지금에는 안산군 동북쪽 끝자락에 있는 수암동에 안산향교 옛 터가 있다. 이곳은 나중에 안산시가 분리 독립할 때에도 시흥군에 남았다가 1995년에야 안산시로 편입된 곳일 만큼 현대 안산의 발전에서는 한걸음 떨어져 있었다.
1907년, 전국의 월경지와 땅거스러미들을 정리하면서 안산군은 광주군이 길게 쭉 뻗어나온 땅인 북방·성곶·월곡 3면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군세가 미약하다는 이유로 과천군과 함께 시흥군에 통폐합되었고, 광주군에서 넘겨받은 3면은 반월면으로 통합되어 수원군에 넘겨주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까지의 구 안산군의 변천.
일제강점기 시흥군의 구 안산군 영역은 대부분 농촌이었고, 현 안산군과 관련된 유명한 인물들이나 사건도 하필이면 한 번도 시흥에는 들어간 적이 없는 대부도 방면이나 반월면 쪽에서 많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현 안산시 동부 상록구의 이름이 유래한 심훈의 소설 상록수도 반월면을 배경으로 하고, 일제에 반항하는 소년들을 교화(?)하기 위한 시설인 선감학원도 지금은 대부도와 연결된 선감도에 있었다.
다만 안산은 예로부터 소금의 산지로 유명했는데, 원래 전통적인 소금 생산 방식은 농축된 소금물을 모아 끓여서 소금을 분리하는 자염 방식이었다. 1908년 일본이 중국에서 수입해 온 천일염 제염 방식이 저렴한 생산 비용을 무기로 자염을 밀어내었고, 이에 따라 구 안산군에도 천일염 방식으로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 곳곳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것조차 지금의 안산시 영역 밖인 군자염전, 소래염전 등이다. 어찌 됐든 이렇게 시흥의 구 안산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인천으로 나르기 위해 수원에서 출발해 시흥, 부천을 지나 인천으로 가는 수인선이 1937년 8월 5일에 개통되었다. 현 안산시에 있던 안산염전은 해방 후인 1950년에 설립되었다.
해방 후에도 안산 일대는 비교적 한산한 농촌으로 남아 있었으며, 거듭된 간척을 통해 옛 항구의 모습은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바뀌어 갔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는 서울 재수복을 위해 진격하는 유엔군이 강력한 수색작전인 “선더볼트 작전”을 펼치면서 수리산 일대의 중공군과 1월 31일부터 시작한 5일 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목표를 점령한 수리산 전투가 있었다. 작전의 서전인 수리산 전투의 승리로 유엔군은 작전을 유리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었고, 마침내 2월 20일에는 서울의 관문인 관악산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전쟁 후 다시 조용한 농어촌으로 돌아간 구 안산이 완전히 탈바꿈하는 것은 1976년이었다. 당시 서울에 집중되는 인구와 산업으로 인한 도시문제를 해결하고자, 박정희 대통령은 7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수도권에서 100만 평 규모의 공업단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신산업단지 두 군데를 보고하도록 했다. 이에 지금의 안산 동부인 반월과 아산만 연안의 세 지역, 화성군(현 화성시)의 발안, 조암, 평택군(현 평택시)의 안중, 합쳐서 네 곳이 후보로 올라왔다. 이 중 박 대통령이 서울과 가장 가까운 반월을 고르면서, 반월국가산업단지가 탄생했다. 10월 2일, 김재규 건설부장관이 반월에 20만 명 규모의 새로운 공업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고, 1977년 3월 30일에는 반월면 반월2리에서 장차 안산의 새 역사를 쓰게 될 역사적인 반월국가산업단지의 첫 삽을 떴다.
반월국가산업단지와 반월신도시를 담당하는 반월출장소의 관할 지역
반월국가산업단지는 시흥군 수암면, 군자면과 화성군 반월면에 걸쳐서 조성되었고 전체 개발 면적은 약 5천 7백만 제곱미터(1750만 평)에 달했다. 반월국가산업단지와 함께 조성된 반월신도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도시계획이 적용되어, 단순한 공업도시가 아니라 한 도시 내에서 생산과 소비가 모두 충족되는 자급자족형 도시로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주거지역과 공업지역을 분리하고 배후도시를 건설해 주거, 교육, 상업 등의 수요를 해결할 수 있게 했다. 그 예로 1978년에는 한양대학교가 반월공단에 분교를 세웠고, 이 분교는 현재의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가 되었다. 산업단지 내에는 자체 항만이 없지만 수인선을 통해 인천으로 화물을 날라 수출할 수 있었다. 용수는 뚝섬수원지에서, 전력은 안양변전소에서 공급받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름은 반월이지만 공단의 중심지는 반월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초지·성곡·원시·목내·신길·고잔동 일대로, 대부분은 군자면에 속했고 고잔동은 수암면에 속했다. 그런 고로, 화성과 시흥 양쪽에 걸친 이 공단은 이름은 화성 쪽에서 가져왔지만 원래부터 중심지는 시흥 쪽에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 한 가지는 처음에는 이 터가 거의 빈 땅과 같은 한적한 농어촌이었기 때문에 공단을 개발하러 온 사람들이 머물 곳이 없었고 그나마 숙박업소와 음식점이 있는 반월면에서 숙식을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전 반월면 면장인 민병무는 다른 주장에 더 힘을 싣는데, 땅 투기를 막기 위해 일부러 실제 공단이 들어서는 곳과는 거리가 있는 반월면의 이름을 썼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토지 보상 문제 때문에 산업단지 개발은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쳤고, 그럼에도 개발 과정에서는 원주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반월국가산업단지는 1978년부터 시작된 부동산 경기 침체로 초기에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1979년에는 석유 파동이라는 악재까지 겹쳤다. 1980년대 초반 가동업체의 수는 200여 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79년 첫 가동에서 58억 원 수준에 불과한 생산액은 1980년 563억 원, 1981년 1499억 원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1982년부터는 경제 상황이 호전되어 반월공단은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고, 매년 100여 개 업체가 늘어나 1985년에는 594개 업체가 가동에 들어갔다. 영등포 편에서 나왔던 경성방직도 1984년 5월 반월공장을 준공했고 이 반월공장은 경성방직이 국내 방직 생산공장을 폐쇄한 2024년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운영되고 있다.
반월지구 출장소 건물. 참고문헌: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1999). 출처: 반월지구출장소 - 디지털안산문화대전 (grandculture.net)
반월신도시를 지원하기 위해 1977년 1월 11일 시흥군 군자면 거모리에 반월신도시개발지원사업소가 생겼고, 1979년 8월 10일에는 경기도 반월지구출장소로 승격했으며 산하에 반월지소·수암지소·군자지소를 설치했다. 안산시의 인구는 1977년 3월 반월신도시 건설 당시에는 약 2만 5천 명이었으나 1985년에는 96,487명, 1987년에는 127,231명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러한 큰 도시의 행정을 임시 기구인 출장소로 언제까지 관할할 수는 없는 바, 1986년 1월 1일, 마침내 반월지구출장소가 안산시로 승격하면서 1914년 사라진 안산시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런 한편 원래는 20만 명 규모로 예상한 신도시는 1985년 계획을 수정해 2001년에는 30만 명 규모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 계획을 짰는데, 실제 안산시의 2001년 인구는 590,598명으로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한편, 이 과정에서 수암면의 옛 안산군의 중심지는 개발을 비켜나갔고, 반월출장소에도 속하지 않았고, 결국은 안산시 독립 과정에서도 함께하지 못했다. 이 지방이 변두리로나마 '안산동'이라는 이름으로 안산시로 돌아오는 것은 1995년 4월 20일로, 시흥군이 사라지고도 세월이 더 흐른 후의 일이다.
1986년, 시흥의 여덟 딸들 중의 안산시.
안산시가 이름을 되찾은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당초에는 반월출장소에서 관할하는 지역이니만큼 반월시가 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반월신도시의 핵심 지역은 반월이 아니라 시흥군의 구 안산 지역에 있었다. 유천형과 이승연 등이 1천년 역사를 가진 안산이라는 지명을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고, 일제가 안산의 지명을 의도적으로 지워내려고 했다고 주장한 것이 공감대를 얻어 마침내 새 시는 옛 안산의 이름을 회복할 수 있었다.
※ 이 글은 밀리로드의 “시흥의 열두 딸들” 연재글을 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