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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2/05/23 20:28:34 |
Name |
예니치카 |
Subject |
[LOL] 지금 T1의 상태에 대한 감상. (수정됨) |
(EG 전보고 글을 썼는데, 바로 G2 전을 주도권 잡고 이겨서 색이 바랬네요. 그래도 제목 수정하고 글은 남겨두겠습니다.)
1.
럼블 스테이지의 T1 게임을 보다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씁니다.
개인적인 감상이므로 동의가 안 되시는 부분이나 논리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을 수 있으리란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 생각에, 지금 T1이 흔들리는 이유는 선수 개개인의 기량 때문은 아닙니다. 선수 각각의 기본적인 메카닉과 라인전 단계의 판단력, 소규모 전투에서의 컨트롤 등은 여전히 최상위입니다. 그런 면에서의 제우스와 오너의 기량은 오히려 절정에 달해있다 해도 좋고, 페이커와 케리아 역시 주요 장면에서의 날카로운 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마유시가 약간 쳐져있는 느낌이긴 해도 많이 쳐져있다는 느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선수들이 본인 입으로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듯 전체적인 전황에 대한 판단 문제입니다.
그 판단이 왜 흔들리는가? 중후반 한타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서두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후반 한타에 왜 두려움이 있는가? 라인전이나 국지전보다 훨씬 변수가 많은 중후반 대규모 한타에서 그 변수들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과 반응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신들을 믿지 못하는가?
2.
LCK 정규 시즌에서 T1이 전승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기에 가까운 정확하고 신속한 전황 판단과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교전각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규시즌 T1은 대국적으로나 국지적으로나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보기 힘든 것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고, 그걸 바탕으로 항상 스스로 게임을 주도해나갔습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려 할 때 그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주체인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적인 결과입니다. 자신들에 대한 확신이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고(케리아가 보는 각을 팀원들이 믿고 함께 들어가 주기 때문에 슈퍼플레이가 되는 것이지, 그게 아닐 때에는 쓰로잉이 되는 것처럼요), 성공적인 결과가 다시 자신들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주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이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달리 말하면 ‘자기들만의 게임’에 대한 근거는 이 두 가지 말고는 없습니다. 자신들만 보는 각이 실패하게 되면 자신들의 시선을 믿지 못하게 되고, 자신들의 시선을 믿지 못하게 되면 다시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제 생각에는 이게 지금 T1의 상태입니다.
원인은, 럼블 스테이지 1경기 G2 전이리라 생각합니다. 초중반은 LCK에서 T1이 하던 대로 독보적인 전황 판단과 움직임으로 6000 골드까지 차이를 벌렸습니다. 그리고 그 6000 골드를 바탕으로 “이 정도 골드차면 조합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는 판단을 가지고 G2의 야이애나와 맞붙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죠.
그 판단이 틀린 이유는 제가 롤알못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G2 선수들의 개인 기량이 T1이 상상하던 이상이었을 수도 있고, 35핑이 미세한 움직임 차이를 만들었을 수도 있으며, 그 외에 저로서는 알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판단이 틀렸고,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저는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T1은 정규전에서도 그런 식으로 몇 번 졌고, 다음 경기에서(빠르면 그 경기 내에서도)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그 빗나간 지점을 곧바로 수정해서 다시 자기들의 게임을 했으니까.
근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불신이 믿음을 이겼고, T1은 평소 하던 것처럼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빗나간 지점을 수정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MSI 시작 전부터 험악하게 달아오른 분위기 때문에? 유관중 국제전이 주는 압박감 때문에?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위에 말한 불신과 부정적 결과의 악순환이 만들어졌고, 정규전의 T1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들이 이제는 패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자신들만 보는 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 아니라 게 불신과 불안감에 쫓긴 결과로서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처럼 보입니다.
3.
여전히 성과가 나오는 - 즉 골드차를 벌려내는 - 초중반의 운영은 성과라는 근거가 있으므로 그대로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골드차를 벌립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자신들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고, 그 벌려놓은 골드차가 역으로 자신들을 짓누릅니다.
“이거 중후반 가서 한타하면 또 불안한데.”
“지금 돈으로 앞설 때 (혹은 조금이라도 우리가 유리할 때) 어떻게든 해야 그래도 한타 이길 수 있어. 안 그러면 또 마지막에 한타 지고 져.”
그래서 누가 봐도 다소 무리한 한타 각을 잡고, 집니다. 그러면 “역시 우리 지금 한타가 안 되나?” “지금 우리가 계속 판단을 잘못하고 있나?” 하는 결론으로 이어지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실현적인 예언입니다. 각자가 원래 한타 능력이 떨어져서, 판단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불안에 쫓겨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T1이랑 거의 똑같은 느낌을 받았던 게 2019 월즈의 T1이었습니다. 그해 LCK를 지배했고 충분히 그럴만한 개인 기량을 가졌음에도 MSI에서 G2에게 일격을 당함으로써 국제무대에서 자신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원래대로라면 알아서 틀린 지점을 포착해 충분히 수정할 수 있음에도 자신들의 능력을 믿지 못해 불안에 쫓겨 게임을 서두르다가 한타에서 그르치는. (그런 점에서 저는 당시 김정균 감독의 “실력은 우리가 뛰어났다”는 말에 동의는 못해도 - 실력은 그런 요소들을 다 포괄하는 것이라 생각하므로 - 그래도 대충 무슨 맥락에서 한 말인가는 이해하는 편입니다)
4.
어쨌든 이렇게 되면 이건 다른 요소로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설령 밴픽에서 한타가 강한 조합을 꾸려도 결국 불안에 쫓겨 판단을 실수해 한타에서 그르칠 수 있고, 한 번이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조합을 이렇게 짜도 안돼?” 하는 불신과 불안감만 더해집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에 대한 그 믿음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 밑도 끝도 없이 ‘그래 내가 맞아’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봤자 믿음이란 게 쉽게 회복될 리는 없고 불안감도 사라질 리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자기 판단에 대한 근거를 만드는 겁니다. 지금까지 T1이 그래왔던 것처럼 먼저 주도권을 잡고 게임을 뒤흔들려다 자멸할 게 아니라 우선은 상대를 먼저 찬찬히 보면서 상대를 읽어내는 겁니다. 여러 해 동안 부대껴온 LCK의 팀들과 달리 해외 팀은 여전히 미지의 상대입니다. 그렇게 상대를 찬찬히 보고 난 다음에 그걸 근거로 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즉, 몇 번 정도는 한숨 돌려서 여유롭게 게임을 보고 후수를 쥐는 겁니다.
“그럼 또 예전 T1처럼 무조건 장기전 늪롤 하면서 수동적인 게임하라는 거냐” 라고 하면, 저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 T1은 자신들의 근거가 섰을 때 주도권을 잡는 방법을 알 뿐더러 거기에 꽤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 자신들의 근거란 것을 기존 LCK 정규 시즌의 경험을 토대로 세웠다면, 지금부터는 조금 숨을 돌려서 상대 해외팀들을 보고 근거를 찬찬히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5.
올 시즌의 T1은 강한 팀입니다. 막강한 팀이라고 해도 좋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올해의 t1이라면 짧은 단기전 기간 동안에도 상대를 관찰해 파악할 수 있는 역량이 있고, 그를 바탕으로 다시 능동적으로 자신들만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G2나 RNG의 움직임을 봤을 때, 물론 잘하지만 뭔가 ‘차원이 다른’ - 그러니까 예전의 해외 강팀들이 몇 번 그랬듯 게임 패러다임 자체가 다르다거나 팀 전체의 라인전이 천외천 수준이라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캡스나 샤오후, 갈라 등 스타플레이어가 이따금씩 장면 장면에서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주지만 그건 T1도 마찬가지고요. 그 경기에서 오히려 눈에 띄는 건 불안에 쫓겨 자멸하는 T1의 모습이지, 한 차원 높은 팀으로서의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T1의 멤버들은 아직 젊고 다재다능합니다. 페이커는 늙었(?)지만 그만큼 풍부한 경험이 있고 마찬가지로 다재다능하죠. 그는 즉 팀 전체의 적응력이 빠르다는 뜻이며, 그 빠른 전략수정과 신속한 적응능력, 폭발력을 T1는 이미 정규시즌에서 여러 번 증명했습니다.
일단 한 두 번 정도만이라도 후수를 쥐고 상대를 지켜보세요. 상대의 리듬을 읽고 그에 맞춰서 다시 게임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들의 역량을, 그 기량과 판단력을 믿으세요. 아마 엄청난 수정이 필요한 것도 아닐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 상대를 먼저 똑바로 보는 것이고, 그 상대가 보는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T1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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