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NG는 여러모로 유명한 팀이고, 이 팀의 최고 스타는 단연 '우지' 긴 하지만 단 한번의 결장도 없이 팀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선수 중에 한 명이 바로 서포터인 '밍' 선수 입니다.
아프리카 프릭스의 기인 선수가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 최고의 바텀 듀오' 로 우지와 함께 뽑은 선수가 밍이기도 했고, 젠지의 룰러 역시 이번에 전지훈련 갔을때 붙어보고 "원래 잘하는 선수인건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붙어보니 실력이 더 늘었더라." 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꾸준하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항상 웃는 상에 인상이 귀여워서 기억에 남은 선수네요.
우지가 이미 18년 무렵부터 결장이 잦았기 때문에 사실 어떻게 보면 강호로서 RNG를 유지하는 가장 핵심이었던 선수가 밍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실력에 비해 개별적인 이야기는 별로 알려진 게 없던 편입니다. 그런데 웹을 보다가 밍 이야기를 다룬 글이 있길래 번역 소개 해봅니다. 써진 시점은 작년 롤드컵 직전 무렵이네요.
"자신이 가진 직업에 대한 태도, 그리고 온순한 성격 말고도 시썬밍이 여전히 바뀌지 않는 부분은, 바로 그 천진난만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는 문득 자신의 생활 그리고 자신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꿈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쩌면 시썬밍은 웃을 때 멍청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웃는다. 여전히 웃는다. 그의 미소는 경기장 안에서, 밖에서, 숙소에서, 클럽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사진사의 렌즈 안에서 항상 존재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그의 이런 미소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고 그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이 사람이 늘 행복해 하고 있다는 신호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경우엔, 확실히 그랬다. 그 옛날 시썬밍이 자신의 프로 커리어 첫번째 보스였던 PDD를 마주했을 때, 시썬밍을 보는 PDD의 마음에는 늘 '달콤하다'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훗날 시썬밍이 RNG에 갔을때, 그는 인생에서 또다른 중요한 인물이 된 '파이어폭스' *를 만났고 파이어폭스의 마음 속에서 그 글자는 '온순' 으로 바뀌었다.
* (17년 RNG 이끌던 파이어폭스. 18년 RNG가 광폭횡보를 보이기 이전 리빌딩을 대략 끝내고 팀의 근간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5연갈' 로 국내 팬들에게 유명한 해당 경기 당시 RNG의 감독이었고,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RNG에서 사임했습니다)
늘 그는 좋은 성격을 유지했고, 그의 이런 면모는 경기장에서의 냉정함과 맞물리고 부딫혔다. 많은 성공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RNG의 금색 로고 밑에서 영광스러움을 느꼈고, 덕분에 그가 흘렸던 땀과 많은 노력들이 다소 생각이 안났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썬밍은 분명 최초의 YM 팀에서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고, 일년 간의 수련 끝에 휘황찬란한 곳으로 나아갔으며 그 와중 큰 슬럼프를 겪기도 했으나 그와 그의 팀은 결국 다시 일어섰다.
이제 돌아보니 LPL 무대에 오른 지 어언 3년. 시썬밍은 조그마한 사람에서 "구비' * 가 되었고,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선수에서 어느새 '호국신우' * 라는 말을 듣는 선수가 되었다. '올 해 최고의 신인' 에서 '올 해 최고의 서포터' 가 되는 동안 그의 플레이에서 단단함은 더욱 단단해졌고, 그 와중에 부드러움까지 겸비한 선수가 되었다.
* (구비狗妃 : 개 구, 왕비 비 즉 '개새끼의 왕비' '개의 배필' 같은 뜻입니다. 왕비, 황비가 아니라 구비. 여기서 말하는 개새끼는 당연히 우지. 우지가 개이기 때문에 우지의 역대 서포터를 구비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 (호국신우护国神牛 : 장인급 알리스타 플레이를 펼치는 사람들에게 중국 팬들이 붙이는 칭호. 원래는 올해 은퇴한 서포터인 'Pyl'의 별명이었던 같은데 지금은 알리스타 잘하면 다 붙여주는듯)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분명 전혀 바뀌지 않는 것도 있었다.
미소는 그저 그 중에 하나일 뿐이다.
"만약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뭘 했을 것 같나요?"
"알바를 했었겠죠. 아버지 차를 대신 운전해주면서요."
1998년생인 시썬밍은 광동 혜래현의 작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트럭 사업을 하는 창업주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에게는 형제가 많다. 형과 누나가 있었는데, 반면 어린 시절 같이 놀았던 동네 친구는 많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웃이 전부 여자 아이들 밖에 없었다." 라고 한다. 여자 아이들과 고무줄 놀이 하는 게 싫었던 시썬밍은 두 살 많았던 형과 형의 친구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그들은 전부 저보다 키도 크고 나이도 많았기 때문에, 제가 좀 유치하게 느껴졌겠죠."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그의 아버지는 집에 컴퓨터를 사두었다. 다른 집에는 전부 컴퓨터가 있었는데, 시썬밍의 집에만 컴퓨터가 없었기에 그가 형을 따라 PC방이나 쏘다니고 다닐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컴퓨터로 게임을 할때면 시썬밍은 옆에서 그걸 구경하곤 했다. 학교가 끝나면 시썬밍은 한시간 정도 앉아서 컴퓨터를 하곤 했고 그 뒤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간단한 이유였다.
"형이 오면 비켜줘야 했거든요."
처음에 LOL이라는 게임을 접하게 된 것은 형의 친구 집에서였다. 그들은 QQ * 아이디가 생긴지 얼마 안된 시썬밍을 위해 체험 번호를 신청해줬고, 일전에는 '서든어택' 같은 게임만 해본 시썬밍은 이런 팀전 형식의 게임을 처음 접해보게 된 셈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이 게임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QQ : 중국대표 메신저. 이게 국민 메신저 수준으로 히트해서 텐센트가 지금의 공룡 규모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랭크 게임을 하게 되었고, 제일 아래서부터 플래티넘으로 올라갔으며, 다시 플래티넘에서 다이아까지 올라갔다.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을때 시썬밍은 잠시 LOL을 접고 다른 게임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LOL로 돌아오곤 했다. 다이아가 되고 나서는 상위 50위 안에 드는 아이디 하나하나에 친구 추가를 신청하고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의 친추를 받아줬으면 하곤 했는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존경심이었죠. 그냥 그 사람들 전부 하나하나가 다 너무 멋있어 보였기 때문에 제 친추를 받아줬으면 했어요. 하기야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친추를 받아 줄 수 있었겠어요?"
그 후 시썬밍은 443점이 될 때까지 게임을 했고, 또 이후에 그의 랭크는 10위 안에까지 들게 되었다. 처음 챌린저가 되었을때는 우상이었던 사람들과 비슷해진 게 너무 기뻐서 QQ 스토리에 올리기도 했었다고한다.
시즌 4 롤드컵 직전까지, 시썬밍은 프로 시합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그가 블리츠크랭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서포터를 천직으로 여기기 이전에 그가 아는 프로 서포터라고는 국내 선수로는 'FZZF', 국외 선수로는 '매드 라이프' 밖에 없었다. 그러다 14년 롤드컵 때, 우연히 OMG의 경기에서 CLOUD가 서포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영감이 들었다고 한다.
"저도 저 자리에 앉고 싶더라구요."
시즌 5 무렵, 은퇴한 선수 PDD는 자신의 팀인 MGB(영 미라클의 전신)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여러 선수를 모집 했는데 시썬밍 역시 모집을 보게 되었다.
"이게 기회일지 아닐지는 잘 몰랐지만, 여하간 정말 긴장 되더라구요."
이력서를 제출받은 뒤, PDD는 시썬밍의 랭크 게임을 아침 8,9시부터 오후 5,6시에 이르기까지 계속 살펴보았다.
"제 기억에는 이겼던 게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게임이 끝난 뒤, 기억에 따르면 대략 이런 내용의 메세지가 왔다고 한다.
"플레이 제법 괜찮았던 것 같은데, 같이 훈련해 볼래?"
시썬밍은 당연히 무척 기뻤다. 그러나 시썬밍의 부모님은 어린 아들이 사기 당할까 싶어서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부모님들에게 PDD의 생방송을 보여주었고, '전 저기에 가서 할거에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님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을 투자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자 한번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형이 시썬밍을 데리고 광저우로 직접 떠나게 되었다. 일단은 광저우에서 일하던 누나에게 놀러간다는 식이었지만, 실제로는 광저우에 가서 MGB 팀을 자세하게 관찰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특별히 아무런 문제도 발견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고민만 남게 되었다. 미래는 여전히 미지수였는데 부모님이라는 가장 맨 처음의 문턱마저 그는 넘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시썬밍은 광저우에서 부모님에게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중국 LOL 팀들이 경기하는 상하이에 가고 싶다고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전화를 내려놓은 시썬밍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이 진짜 사기를 당할 수도 있는거고, 그리고 사기를 당한 자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슬퍼하는 모습도 상상되었다.
"야, 가고 싶으면 그냥 가버리면 되잖아?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여름, 고교생이었던 형은 단 한마디로 혼란에 빠졌던 동생을 구해줬다.
여름이 지나고, 시썬밍은 마침내 상하이로 향했다.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열어가기 위해서.
사실 YM에 들어간 것에는 PDD와 엮인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어처구니 없지만 당초 이력서 단계를 통과한 선수들 중에서, 시썬밍에게는 스태프의 작업 실수 때문에 합격 처리가 안되서 메일이 안 갔던 것이다. 때문에 시썬밍은 자신이 직접 PDD의 팬클럽을 찾아서, 그곳에서 PDD의 여자친구와 연이 닿은 뒤 그녀를 통해서 겨우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달콤하고, 귀엽하고, 좀 멍청한듯하고, 그러면서 수줍기도 한' E-스포츠의 초창기 황량하고 거친 시절을 겪었던 PDD는 자신이 이런 타입의 선수를 뽑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 친구는 모든 게임단 사장들이 좋아하고 귀여워할 타입일 것 같아. 왜 연봉이 좀 너무 낮은걸 보면 좀 더 올려주고 싶은 그런 느낌의 선수 말야."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 YM 선수들은 모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명의 한국 선수와 바이퍼라는 이름의 미드라이너, 시즌 5의 랭크에서 10위까지 들어갔던 밍과 닝. 다만 당시 프로무대에서는 이들의 이름은 그렇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고, 그 당시 그들은 "어떻게 해야 유명해질까" 가 중요한 문제였다.
"사실 YM이 경기를 할때 나는 항상 이런 말을 하고 했어. 난 솔직히 말해서 너희들이 이기는 것 마저도 그렇게 중요하진 않아. 그것 뿐이라면 이길 필요조차 없어. 중요한 것은 이 경기를 통해 너희들이 무엇을 얻느냐, 긴 선수 커리어 중에 바로 지금의 1,2년을 투자해서 무엇을 얻고 싶으냐, 도대체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점에 대한 부분이지."
15년 말, YM은 LPL 진입을 목표로 그 돛을 올렸으나, 그 후 몇년간 몇차례나 극적인 아까운 순간을 연출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무수하게 많은 훌륭한 프로 선수들이 이 팀에서부터 걸어 나와 더 큰 무대로 진출해 빛을 발휘했다. *
* (닝, 밍, 나이트, 티안 등이 모두 YM 출신)
2016년 봄, LPL 해설 밀러는 LSPL 스프링 결승을 해설하게 되었고, 당시 두 팀이 바로 YM과 EDE *였다. 한쪽은 신예의 패기가 눈부셨고 다른 한 쪽은 노장의 노련함이 빛을 발했다. 이 5전제에서 밀러는 처음으로 ID가 밍이라는 선수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의 머릿 속에 떠오른 단어들은 '노련, 성숙, 신예답지 않음' 같은 말들이었다.
* (당시는 EDG의 2군 격 팀이었고, 이후 승격하면서 1부리그에 EDG와 같이 공존하는 상황이 되자 스폰서가 바뀌어 I MAY, 약칭 IM으로 이름을 변경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시썬밍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인생에서 마주한 가장 중요한 경기가 그 순간이었고, 2부리그의 챔피언이 되는 동시에 LPL로 향하는 직통 티켓이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팀을 만든 첫 시즌에 바로 1부리그에 간다? 이 말도 안될 것 같은 꿈이 곧 현실이 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경기는 YM이 완패했고 상대가 큰 차이를 내며 이겼다. 두번째 경기는 PDD가 팀원들 뒤에 섰지만 상황을 바꾸진 못했고 YM은 상대의 노련하고 안정적인 운영 때문에 0대 2라는 절벽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YM의 공격적인 스타일이 EDE 앞에서는 전혀 펼쳐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YM이 태세를 정비하지 못하면 정말 끝나고 말 겁니다."
3세트를 앞두고 있던 해설 밀러의 판단이었다.
게임의 흐름이 바뀐 것은 3번째 경기부터였다. YM은 상대를 공격하기 힘든 리듬으로 몰고 갔고 24분 경 폭풍 같은 러쉬로 승기를 잡아 YM은 겨우 벼랑 끝에서 한 경기를 만회 할 수 있었다. 그 뒤 4번째 경기에서 YM은 초반의 열세를 만회하고 상대의 실수를 틈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는 이제 마지막 결승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결승전은 여전히 시썬밍이 YM에 있던 시절을 기억할때 가장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던 경기였다. 경기전에 선수들이 해설위원 석을 지나가자 밀러는 감탄하며 말했다.
"기세가 좋네요. 이 자리의 모두가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경기장에서의 형세도 그가 생각한 대로였다. 30분 후 YM은 일만이 넘는 엄청난 격차를 벌렸고 굉장한 우세가 YM의 5인 앞에 놓여졌다.
--국내 기사에 나온 손대영 감독이 기억하는 이날 경기
LSPL 1위를 따내고 포스트 시즌 결승에서 만난 팀은 YM.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PDD' 리우 모우가 구단주로 있는 팀이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내리 두 세트를 따내면서 LPL행 티켓이 눈 앞에 왔다. 하지만 YM도 결승에 올라온 만큼 저력이 있는 팀. 2대0으로 앞서고 있던 스코어는 금세 2대2가 됐다.
"1세트를 지니까 'PDD'가 직접 밴픽을 하더라. 그래서 기도했다. '샤이'야, 형을 도와다오(웃음)."
5세트 전황은 상당히 불리했다. YM은 기세를 타고 있었고, EDE는 벼랑 끝에 몰렸다. 심리적으로도 YM이 우세한데, 경기가 초반부터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YM이 초반부터 탑 라인을 후벼파면서 격차를 계속 벌린 것이다. 팀의 에이스 '어메이징J'가 집중 공략 당하면서 EDE는 처음부터 힘들게 경기를 풀어나갔다. 문득 손대영 코치의 머리 속에는 아주부, CJ 시절 겪었던 '승승패패패'의 악몽이 떠올랐다.
"결승전만 가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나, 내가 재수가 없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솔직히 경기를 보면서 이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럴만도 한 게, EDE는 경기 내내 YM에게 끌려다녔다. 글로벌 골드는 항상 7000 이상으로 뒤쳐져 있었고, YM은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EDE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버티면서 레벨과 아이템 격차를 좁혀나갔다. 그리고 대규모 전투에서 이득을 보면서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배미' 강양현의 라이즈가 바론을 치던 상대에게 뛰어들어 엘리스를 끊어냈다. 그리고 다른 선수 들의 백업이 이뤄지면서 에이스를 띄우고 바론을 챙겼다. 상황을 엇비슷하게 만든 EDE는 48분경 YM의 정글러 엘리스를 끊어내고 바론을 챙기면서 억제기 2개를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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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좀 더 어색하게 플레이하게 되더라고."
그날 경기를 회상하는 PDD의 말이다.
30분 전 무렵 가지고 있었던 압도적인 우위는 이미 상대방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EDE는 큰 기회를 잡았고, YM을 전멸시켰을때 이미 골드 차이는 1,000원 안팎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어메이징 J는 흥분해서 일어났고 EDE 팀원들은 서로를 얼싸 앉았다. 그들은 2016년 '3등급 점프' * 의 첫 걸음을 뛰쳐나간 것이다. 그 옆에 있던, 패배한 YM 팀원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 16년 손대영 감독이 이끌던 EDE는 스프링 2부리그에서 1부리그로 진출하고, 섬머 IM으로 이름 바꾼 후 바로 플레이오프 나가고, 선발전을 뚫어서 가을에는 롤드컵까지 진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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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국내 기사) 상대 정글에서 펼쳐진 마지막 전투. EDE의 서포터인 탐 켄치가 YM 5명에게 얻어맞았지만 살아나왔고, 곧바로 라이즈, 그레이브즈, 시비르의 공격이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에이스가 떴다. 선수들은 물론 해설진, 관중들 모두 흥분의 도가니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경기가 끝난 후 '어메이징J'의 인터뷰다. '어메이징J'는 격양된 목소리로 "우리 팀에는 손대영이라는 훌륭한 코치가 있다. 그가 그랬다. 아무리 차이가 나도 괜찮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는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래서 내가 초반에 계속 죽어도 상관없다, 우리는 전투를 잘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코치님을 항상 믿었다"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어메이징J'가 인터뷰를 하는데 들리는 단어는 '메이콴시'(괜찮다) 밖에 없었다. 나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전해 듣긴 했지만 '어메이징J'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가슴으로 알겠더라. 정말 감동적이었다. 내 코치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경기다. 이길 수 없는 경기를 이겨준 선수들에게 정말 고맙다."
후반 50분 마지막 한타 승리 한 후 적팀 넥서스로 진군하며 경기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서 헤드셋도 던져버리는 EDE의 어메이징 J.
... 시간을 좀 더 되돌려보자. 최후의 다섯번째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한 명의 사람이 EDE 진영에서 조용히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옆에는 대만에서 이제 막 대륙으로 건너와 코치를 하고 있던 신임 코치 Dog8이 있었다. Dog8은 팀이 승승 패패를 하며 절망적인 분위기에서 5번째 경기가 시작하자 거의 소리내어 울뻔하며 말했다.
"풍형(风哥), * 우리 아직 할 수 있을거야, 우리 아직 싸울 수 있을거야!"
그 역시 대답한다.
"그래. 그러니까 그냥 계속 지켜보자구."
* (풍형은 파이어폭스의 중국내 별명. 이유는 모르겠음...)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해설자 밀러 말고도 밍이라는 선수를 주목하는 한 명이 더 생기게 되는 순간이었다. 알리스타와 모르가나, 이 굉장한 숙련도를 가진 두 챔피언을 바탕으로 밍은 5세트 내내 끊임없이 상대를 괴롭혔다. 5전제가 끝나고 양팀의 모든 선수들이 감정의 도가니에 휩싸였지만, 밍 만은 비교적 차분한듯 보였다.
그 당시 밍은 EDE의 파이어폭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둘의 운명이 어떤식으로 이어질지도 몰랐다. 16년 말, 파이어폭스는 IM을 떠나 RNG의 코치로 입단하게 된다. 당시 다른 포지션은 모두 자리가 차 있었지만 서포터만은 비어 있었다. 문득 파이어폭스는 그 자리에 씨선밍이 생각이 났다.
"오직 이 서포터만 원합니다."
풍형은 17년 RNG 팀이 결성될 무렵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만약 이 서포터 못 데려오면 코치 못하겠다고 요구했었죠."
(18년 LPL 올해의 서포터로 선정된 후 PDD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밍)
PDD에 있어 씨선밍을 포기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6년 말 쯤이 되었을때 선수의 기량과 잠재력은 이미 명확해보였고, 성격 역시 온순했으며 태도까지 흠잡을데 없이 반듯했었다. 이적을 앞두고 PDD는 시썬밍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권유했다.
"이봐, 난 네가 RNG에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완강하게 싫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 친구가 말하길, 계속 나를 따라오고 싶었다는 거야."
사장으로서 PDD는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나 역시 프로게이머를 했었고, 사장과 선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알아. 그리고 이런 중요한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나는 계속 그가 그런 말을 할때마다, 내가 그 대신 결정을 내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
최종적으로 PDD는 YM에서 시썬밍을 보냈고 그는 17년 시즌을 앞두고 RNG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2017년 초의 RNG는 완전히 미지수의 팀이었다. 16년 최강의 탑이었던 루퍼가 없었고 그 자리는 이제 막 올라온 렛미로 뒤바뀌어 있었다. 마타라는 최강의 두뇌가 사라졌고 LPL 경기 경험이 없는 시썬밍이 왔다. 그리고 이들 뒤에 서 있는 더더욱 알 수 없는 파이어폭스 였다. 스프링 시즌 첫 경기는 RNG 대 IM 이었는데, 파이어폭스는 새로운 팀을 데리고 이전에 있던 팀에 0대2로 완패하자 3일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구비." 다소 우스운 이 말은, 우지를 서포터 했던 선수들을 표현하는 말이다 - 중국 내 천만 명의 LOL 플레이어들과 유저들에게 그는 아주 큰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시즌 3 때의 타베, 시즌 4 때의 제로, 시즌 5때의 OMG와 PYL, 시즌 6 스프링 시즌의 MOR와 여름의 마타 그리고 현재의 시썬밍까지. 17년부터 19년까지 그는 우지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산 서포터가 되었고, '최강구비'의 유력 경쟁자이다.
17년 초 RNG에 들어온 시썬밍에게 있어 우지의 파트너가 될지 안될지는 달콤한 고민이었다. 우지는 많은 서포터들이 마음 속으로 인정한 최강의 AD였고, 이런 선수를 서포터 하는 것은 분명 평범한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엄격하고, 솔직하고, 승부욕이 강한 우지의 개성은 자명했다. 풍형이 보기에, 이전 소속팀이었던 IM의 '진쟈오-로드' 콤비가 강한 서포터가 약한 AD를 도왔다면 17년 RNG의 상황은 정반대ㅔ였다.
"당시 강아지는 라인전을 할때 일반적으로는 주로 자신이 밍을 강력하게 지휘했습니다."
이런 지휘와 동시에 만들어지는 케미가 어려운 시기의 가르침인 동시에 성장하는 밑거름이었다.
"새로운 팀에 들어오게 선수라면 많든 적든 이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정말로 서로의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면,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으려 한다면, 단지 순풍에 돛 단 것 같은 때 말고도 꼭 이런 시기를 겪어야 하는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PDD가 시썬밍을 보낸 것은, 그에게 있어 우지의 서포터가 되는 경험을 하게 하기 위한 점도 있었다.
"솔직히 그는 많은 고생을 했지만, 요 몇년간은 그에게 있어서 프로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으로도 종합적인 성장을 이루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어."
17년은 RNG에게 있어 비바람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그러나 역으로 수확도 적지 않았다. 물론 결과는 완벽하진 못했지만 --- 롤드컵 상하이 대회에서는 RNG가 SKT와 5전제로 격돌했으며, 결국 패배했다. 당시 해설은 PDD였고, 그는 자신의 옛 멤버가 용감하게 맞서는 것을 보았다. 경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서는 우연인지 차에서 구슬픈 노래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 1년 간 RNG는 어떤 우승도 하지 못했다. 스프링 결승에서는 WE에 0대3 완패, 섬머에서는 또 EDG에게 졌고, 아이보이가 갑작스레 떠올랐으며 우지는 배경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롤드컵이 열리자 많은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기대했고, 경기장 옆에는 'Keep your dreams & Never give up' 이라는 문구가 세워졌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청춘' 의 막을 내렸다.
시썬밍과 우지의 케미 그리고 샤오후와 MLXG의 정교해지는 플레이, 여기에 더해 렛미의 점진적인 '중생평등' * 스타일의 발전... 이 모든 것이 2018년의 가장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17년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그 뒤 1년간의 경기에서 그토록 안정적인 우세와 뛰어난 케미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시썬밍에게 있어서 각성이라고 할만한 가장 큰 전환점은, 바로 SKT에게 패배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런 느낌은 제가 처음으로 느꼈던 건데, 무언가 이런 세계적인 서포터들과 맞상대 하는데, 나와 그들과의 그 차이라는게, 그렇게 많이 나는 느낌이 아니지 않나? 싶은 느낌이 들더군요."
* 중생평등(众生平等 현역 시절 렛미의 플레이를 일컫어 중국 쪽에서 자주 쓰는 표현. 상대가 얼마나 강하건 약하건 어떤 상대를 만나도 반반을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중생이 전부 평등하다는 의미)
물론 연초부터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 동안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7년 롤드컵을 앞둔 전지훈련 기간 동안 RNG 바텀 듀오는 완전히 컨디션을 잃어버렸고, 스크림을 돕는 다른 팀들의 바텀 듀오를 거의 이기지 못했다. 지면 질수록 부담은 더욱 더 커져갔고, 마침내 버티지 못한 시썬밍은 어린애처럼 풍형의 손을 잡고 밖에서 산책을 하다가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말했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풍형이 기억하기로는, 그때가 이 아이의 눈물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위로를 한 뒤, 그들은 다시 훈련실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해설인 밀러에게 있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순간은 다른 장면이었다. 17년 섬머 결승에서 RNG가 몰리는 순간, 그는 정말 갑자기 문득 당혹스런 부조리함을 비슷한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건 설마 정말로 우지는 평생 우승할 수 없다는 말일까?"
모든 게 끝나고, 대기실을 들린 뒤 다들 차에 타서 떠나려고 할때, 순간 밀러는 밍이 슬픔에 빠진 강아지를 위로하며 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뭐라고 할까요. 그렇게 마른 사람이, 저리 뚱뚱한 사람을 저렇게 꽉 안아주고 있다니."
그는 AD와 서포터 사이의 그러한 상호간의 호응을 순간 느꼈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이, 제가 오랫동안 강아지와 그 파트너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더군요."
"사실 그래도 수확 같은건 있었어요. 그런데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네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18년 롤드컵의 패배 이야기만 나오면 시썬밍도 조용해진다. 몇 분이 지나자, 그는 붉어진 눈시울을 힘껏 누르기 시작했고 화제를 잠시 돌려야 했다. 이 대화를 나눌 때는 아직 2018년 말이었고 롤드컵은 벌써 두 달이나 지나가버렸으며 RNG 팀은 하이난에서 워크샵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팀원 모두는 마음 속에 있는 대화를 서로 허심탄회 하게 나누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상처는 그리 빨리 아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시썬밍 뿐만 아니라 RNG의 모든 멤버들에게 이것은 잔인한 이야기다 -- 팀이 가장 상승세였던 시점에 갑자기 슬럼프를 겪고, 모든것이 수직 하강하고 종내에는 18년이 이들에게 있어 과연 좋았던 해였는지 나빴던 해였는지 정의하기도 어렵게 되어 버렸다. 새로운 해가 시작 되었고, 쯔타이와 렛미, MLXG는 모두 은퇴했다. 이제 이 팀은 자의 반 타의 반 큰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밍은 여전히 우지와 함께 경기장에 남아 있다. 그 해 4월 10일, PDD는 예전의 멤버들을 자신의 생방송에 초대했다. 방송이 다 끝나자 그들은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밍과 닝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던 선수들에 불과했으나 점점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다른 길을 걷게 되었으며 둘 다 세계 최정상급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PDD는 큰 감명을 받았다.
밍과 RNG는 2018년에 졌다. 그 모습을 보며, 가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생각날 때가 있다. 13년 PDD는 수 많은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탑" 이라고 인정했지만, 정작 시합에서 '샤이' 라는 이름의 한국 선수에게 졌다.
"나 같은 경우는, 7개월이 걸렸어. 난 7개윌 뒤에 싱가포르 IEM에서 샤이와 다시 경기할 수 있었지. 그리고 나에게는 그 순간이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기회였어. 난 그 경기를 주목하는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에 대해서는 정말로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중요한건 내가 다시 만난 그를 이길 수 있느냐는 점이었지. 그를 이길 수 있다면, 내 실력이 나쁘지 않다고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었을 테니까."
아마도 프로들에게 있어서, 곤경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아마도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 길을 다시 도전해서 넘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프로게이머니까 난 더 잘 이해할 수 있어. 이런 실패를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고? 그들의 유일한 기회가 롤드컵이었지. 그러니 그 경기에서만 그들이 진정으로 재차 기회를 얻는 셈이야."
19년 스프링, RNG의 성적은 그저 그런 수준에 불과했고 많은 포인트를 얻지 못했다. 섬머 시즌이 되자, 그들은 점차 안정적으로 실력 발휘를 시작했고 결승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 새로운 시대의 강호 FPX의 등장을 보여줌과 동시에, 19년 롤드컵에 나갈 수 있는 자격도 얻어낼 수 있었다.
"롤드컵에 나가려면 아무래도 저희가 섬머 우승을 해야 가능할것 같아요."
섬머 시즌 직전 베이징에서 만난 시썬밍은 운명의 장난을 생각하지 못했던 듯 하다.
시간은 다시 18년 말의 만남으로 되돌아간다. 슬픈 주제 때문에 두 눈이 모두 빨갛게 되었지만, 시썬밍은 금세 감정을 조절했다. 그가 대신 마주한 주제는 바로 미지의 19년이었다.
"내년 경기에 대해 자신감은 좀 있으신가요?"
"그야 당연하죠. 자신감이 없으면 어떻게 게임을 하겠어요?"
-- E 스포츠의 철인. 아마도 시썬밍의 이미지와 전혀 부합하지 않을듯한 별명이 작년의 그에게 지어졌다. 따로 후보 선수도 없는 상태에서 시썬밍은 18년의 촘촘한 스케줄, 즉 스프링과 섬머의 정규 경기는 물론이며 플레이오프, MSI, 리프트 라이벌즈, 아시안컵까지 모두 다 소화해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시썬밍이 비단 18년 만이 아니라 그가 직업을 가지고 지금까지 견지했던 것이다. 그의 직업에 대한 노력은 변한 적이 없었다. 이런 변하지 않는 것들은 그의 몸에 난 상처들과 손에 든 트로피로 바뀌었다. 18년 MSI에서 우승을 따내었을때, 사진사는 시썬밍의 파스가 덕지덕지 붙은 등을 찍을 수 있었다. 그는 '이 팀에서 부상을 안고 있는 사람은 우지 뿐만은 아니군.' 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PDD는 시썬밍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큰 느낌은 '선량함' 이라고 표현했다.
"그 친구 목표가 무엇이건, 그 친구 평소의 삶이 어떻건 간에 그 친구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항상 초창기 때의 그런 변하지 않는 모습이 있는 것 같단 말야."
파이어폭스는 시씬밍이 가장 해야 할 것은 '유지' 라고 말했다.
"좋은 마음가짐과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그가 지금까지 성장한 관전포인트였다. 그래서 그가 계속 상태를 유지하고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을 너무 풀어주지도, 반대로 너무 과한 부담을 주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직업에 대한 태도, 그리고 온순한 성격 말고도 시썬밍이 여전히 바뀌지 않는 부분은, 바로 그 천진난만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는 문득 자신의 생활 그리고 자신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꿈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이렇게 직업으로 프로게이머를 하고 있지 않았을떄, 제가 프로게이머를 하고 있는 모습을 꿈꾼 적이 있었어요."
"한국에서 열린 시즌4의 롤드컵 결승에서 제가 제로의 자리에 앉아 있고 옆에 우지가 있는 꿈을 꾼 적이 었어요."
"그리고 시즌 7의 스프링 결승에서 패배한 후의 대기실, 작년 MSI 4강을 앞두고 누가 상대가 될지 팀원들끼리 이야기하는 그런 분위기의 꿈을 꾼 적도 있었구요."
"하지만 제가 꾸는 가장 진실한 꿈은 아직 못 이룬 것 같아요."
"작년에는 하마터면 이룰 뻔 했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