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10/07/31 05:29:08
Name Becker
Subject 자존심
2004년 메이저리그의 최고 마무리투수는 당시 최다연속세이브 신기록을 계속해서 작성해나가고 있는 LA 다저스의 에릭 가니에였습니다. 그 전해 마무리투수로는 이례적으로 사이영 상도 수상했으니 최고의 마무리 투수를 넘어 당시 최고의 투수라고 평해도 모자람이 없을것 같습니다. 특히 그의 실력을 증명해준 역대 최고기록인 86연속 세이브를 기록했는데, 한 시즌 반 내내 단 한번도 불지르지 않는 마무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롯데팬들은 그게 가능하기는 하냐고 되묻겠지만, 가니에는 그걸 해냈습니다. LA의 수호신으로 가니에가 있었다면 다저스의 앙숙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는 두말할것 없는 전설적인 타자 배리 본즈를 내세울 수 있었습니다. 6할이 넘는 출루율에 2004년 당시 고의사구가 무려 120개(...)나 됐던, 그 누구도 상대하기 꺼려하는 공포와 전율 그 자체의 히터였습니다. 볼넷이 120개도 아니고, 고의사구가 120개라는건 정말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기록입니다.  하지만 본즈의 공포는 상식 그 이상이였습니다.



그 해 4월 13일, 저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팀 전력에서 비교적 앞선 다저스가 자이언츠에게 3:0으로 리드를 하고 있던 9회말 원 아웃. 선두타자 볼넷으로 출루한 주자가 1루에 있는 상황에서, 배리본즈는 홈팬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고 타석에 등장합니다. 첫 2구를 스트라이크 이후 2개의 유인구. 투수에게 여전히 유리한 볼카운트 입니다. 어쨌든 당시의 샌프란시스코는 배리본즈가 아니면 가니에에게 득점을 뽑아낼 재능도 없었고, 가니에가 아무리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고 있을지 언정 상대는 세상 모든 공을 때려 담장을 넘길수 있는 선수입니다. 계속해서 존에서 하나정도 떨어져서 공을 보낼법도 한 상황에, 가니에는 96마일 포심을 정중앙에 꽂아넣습니다. 스윙이 늦을뻔 했던 본즈가 겨우 커트. 그리고 또다시 한번 99마일 포심. 본즈는 풀스윙으로 홈런을 노려보지만 파울폴대를 살짝 못넘겨 파울홈런이 됩니다. 서로 한번씩 상대에게 실력을 증명하고 난 후의 7구째, 가니에는 자신이 보여줄수 있는 최고의 공이라고 생각될수 있을정도의 무지막지만 공을 던집니다. 한복판 100마일 포심. 배리본즈는 그 공을 쳐내 중앙 담장을 훌쩍 넘기는 두점짜리 홈런.



다저스와 자이언츠의 뿌리깊은 라이벌사, 순위경쟁을 위해서 한발짝이라도 앞서갈려는 두 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봤을때 가니에의 정면승부가 과연 승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였냐고 묻는다면, 결과론이 아니라도 그렇지는 않았다라고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두 선수의 저 4분여간의 짧은 승부에는 뭐랄까, 저 순간 만큼은 팀의 승패도, 시즌의 향방도 다 필요없이 투수와 타자, '야구선수'로서의 두 선수의 자존심을 건 정면승부였습니다.




제가 딱히 프로리그 비관론자, 개인리그 예찬론자는 아닙니다만, 개인리그에서의 승부를 지켜보면 마치 저러한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9회말 2아웃 상황, 한점차 승부, 내가 최고라고 외치는 투수-타자간의 대결. 엄재경 해설은 스타리그를 정글에 비유한적이 있습니다만, 제가 느끼는 스타리그는 정글보다는 그야말로 외나무다리에 더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속임수도, 요령피움도 없는 솔직한 승부에서 두 게이머들간의 진검승부. 프로리그에서는 팀의 승리를 위해 싸워야만 하기에, 개인적인 자존심은 잠시 버리고 팀의 승리에 가장 가까운 지름길을 택하는것이 우선이고 또 그것이 정답입니다. 하지만 개인리그에서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걸고, 프로게이머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싸우는 것이기에 때로는 무지막지해 보이더라도 그것이 본인의 스타일이라면 마음껏 펼칠 수 있고 또 그것이 인정받는 장소인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특색 있다," "스타일리쉬하다"의 80~90%는 개인리그에서부터 나온것만 보더라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김명운과 이제동의 경기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더더욱 받았습니다. 김명운은 이미 지난시즌에서 정명훈의 레이트 메카닉을 상대로 순수 회전력만으로 잡은 기억이 있는 선수입니다. 이제동도 있겠지만, 저런식의 수비형 테란을 정면 힘싸움, 가장 저그스럽게 뚫어낼 줄 아는 선수가 '쥬니어 대인배' 김명운입니다. 프로토스전에서나 볼수 있을법한 무한 저글링과 입스타에서나 실현된다던 플라잉 디파일러의 운영. 수비형 메카닉을 가장 잘 구사한다는 이영호를 상대로의 김명운의 대병력은 그 긴 전투 끝 항복 선언 후에는 마치 불속으로 뛰어들어가는 나방무리 처럼 보였을지 언정, 김명운의 의식속에는 현존 최강의 플레이어를 가장 김명운답게 잡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했다고 생각됩니다.



직후 경기에서 보여진 이제동의 온니뮤짤끝 패배에서는 꽤 많은 비판이 있습니다. 염보성을 얕봤다부터 해서 왜 온니 뮤탈만 갔는가, 왜 체재변환을 하지 않았는가, 센터멀티는 왜 먹어서 화를 자초했나. 저는 이제동이라는 사람이 모니터를 뚫어라 쳐다보고 키보드를 부술것 같이 게임을 하는 그 순간부터 누구를 얕잡아 본다는건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거기에 상대가 염보성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쇼맨쉽이라고 말한다면 쇼맨쉽이라고 얘기할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제동의 생각은 그런것 보단, 지난 1시즌 프로리그에서 팀의 승리를 위해 참아야만 했던 그의 본능. 애초에 스타크래프트에 재미를 가지고 결국에는 가장 큰 장기가 되어버린, 끓어오르는 파괴의 본능을, 저그원탑으로써의, 뮤짤의 제왕으로서의 자존심을 많은사람들 앞에서 내세우고 싶었던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16강의 첫 경기에서 두 선수는 졌습니다. 그들의 팬들은, 이제동/김명운의 승리를 예상했을 이들은 어쩌면 결과만 놓고 봐서는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명운에게는 왜 뮤탈리스크/가디언으로 전환하지 않았냐라고 물을수 있겠고, 이제동에게는 왜 뮤탈리스크에만 집착하였느냐라고 아쉬워 할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선수에게 어떠한 불만도, 일말의 안타까움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상급 프로게이머로서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믿음, 강한 상대이니 만큼 자신의 방법로 꺾고 싶다는 소망... 뭐 이런것들이 잘 버무러진 게임들이라, 맨날 연습실에서 주어진 빌드에 적절한 운영만을 고집한것이 아닌 열정의 냄새가 나는 게임을 본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자신의 색깔로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킬려 했던 두 선수에게 격려를 보냅니다.




두 선수 뿐만 아니라 이렇듯 결과만 좇는것이 아닌, 많은 선수들로부터 프로게이머로서의 책임감과 자신의 스타일을 마음껏 드러낼수 있는 승부를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길을 선택하였을때 결과로 보여지는 것만 비난하지 않고 선수들의 선택을 이해하고 존중해줄 수 있는, 성숙된 팬의 자세도 함께 말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화이트푸
10/07/31 05:42
수정 아이콘
너무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0/07/31 05:49
수정 아이콘
이영호,염보성 선수가 너무 잘 막은 것 같아요. 저그들은 공격만 하고 테란들은 방어만 하고 두 종족의 특징을 잘 보여준 것 같네요.
여간해서
10/07/31 05:50
수정 아이콘
해 올라오는 무렵에 좋은 글 읽었네요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어제 이제동 선수의 경기에서 굉장히 마초 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아 저 자식 남자다 싶더군요 흐흐
10/07/31 06:22
수정 아이콘
김명운대 이영호 경기에서는 김명운선수도 잘했지만

역시 이영호 눈치가 끝내준 경기였죠

김명운의 플레이를 꿰뚫어보고 탱크벌쳐만 무지하게뽑앗죠 베슬 골리앗은 진짜 극소수만 뽑았습니다

거의 대비를 안해논거나 마찬가지일정도로

만약 이영호선수가 뮤탈 가디언을 조금만 신경썻더라면 김명운이 뚫었을텐데 뮤탈가디언 무시하고

벌쳐탱크만 무지하게찍어낸 이영호선수의 우직함이 게임을 승리로 이끌엇다고봐여
BoSs_YiRuMa
10/07/31 06:45
수정 아이콘
이제동이 가장 빛나던 시절-마모씨의 그늘때문에 힘들어하던 그시절- 이제동은 이영호와 자신이 많이 닮아있다고 했었습니다.
기세로 상대를 찍어누르려고 하는 플레이가 비슷하다면서요.
어제 경기는 기세로 상대를 압도하고 싶었던, 그 전경기에서 이영호가 보여줬던 수비의 벽으로 상대를 질리게 만들었다면 자신은 공격의 창 끝으로 상대를 질리게 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가 개인리그는 비록 운이 없던 염선생이라지만, 프로리그에서 엄청난 경험을 쌓은 선수라는걸 간과했던게 실수라면 실수랄까요..

아직 끝난게 아니니, 이제동을 더욱 더 응원하겟습니다.
그리고,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역시 becker님 글 너무 잘 쓰시는거 같아요.(나도 이정도 필력이었으면 책이라도 내볼수 있었을텐데 ㅠㅠ)
나는 고발한다
10/07/31 07:2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전 그때 가니에를 엄청 깠습니다(...) 진정한 프로라면 자존심이고 뭐고 승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팀플레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정면승부하다 지는 것은 개인의 패배가 아니라 팀 전체의 패배로 이어지니까요. 승리수당 대신 물어줄 것도 아니고. (전 자존심 세운답시고 고의사구를 거부하는 투수나 번트를 대지 않는 슬러거들을 엄청 싫어합니다.)

하지만 스타에서라면, 개인리그에서라면 그런 로망(?)이 있어도 괜찮을법 하다고 생각해요.
10/07/31 09:2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추천한방^^
바람풍선
10/07/31 10:20
수정 아이콘
저도 좋은글, 좋은문장 잘 읽었습니다.
이제동선수 남은 경기가 있으니
다음에는 자존심 버리고 승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10/07/31 10:28
수정 아이콘
이런 좋은 글은 추천 안할수가 없네요!!
이건 제 생각이지만, 남자라면 이정도 자존심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달자
10/07/31 12:34
수정 아이콘
불을 지르지않는 마무리 투수라니요.. 글이 좋아서 다시한번 읽다가 말도 안되는 구절이 나오네요.
세상에 그런투수가 어딨나요.
이제동의 뮤탈에 대한자존심이 정말 멋지던데요. 결과론적으론 염보성도 S급 테란임을 증명했지만..
10/07/31 12:51
수정 아이콘
이제동 선수가 지속적인 뮤짤로 이익을 얻으면서 너무 신을 낸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사베는 맞는 무탈을 빼주면 되는데 발키리는 정말 무섭더군요.
센터 멀티가 아닌, 1가스 지역을 먹고(그 이른 타이밍에 5가스씩이나 필요 없으니까요.), 저글링이라도 섞어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크게 손이가는 일도 아니고 공격성을 높여줄수 있는 조합이기도 하구요.

그래도, 테란 상대로 이제 뮤짤이 안되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뮤짤은 되고 운영도 할줄안다는 것을 보여준 한판이라 생각합니다.
김명운 선수는 이영호 선수 이전에 한두선수에 공식적에서 한 다음에 붙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이영호 선수만 아니었다면, 그 누구였더라도 뚫었으리라 봅니다... (이영호, 김명운 두선수 모두 서로에 대한 파악이 아주 잘되있더군요)
Hypocrite.12414.
10/07/31 14:04
수정 아이콘
멋진글 잘 읽고 갑니다. 야구를 좋아해서 그런지 쏙쏙 들어오네요.
Winter_Spring
10/07/31 14:53
수정 아이콘
제가 늘 생각하고 있던 개인리그의 색깔에 대해 잘 써주셨네요.
매번 느끼지만, becker님 글을 잘 쓰셔서 부럽군요.
파크파크
10/07/31 19:42
수정 아이콘
저그 골수 팬으로써, 어제 김명운 선수와 이제동 선수의 아쉬운 점이 제 마음속에서 없어지지 않았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싹 다 정리됐습니다. 등골에 소름이 끼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6268 엠겜이 떠나가는데 부치다 [9] Becker7092 12/02/01 7092 1
44716 홍진호에 관한 마지막 잡설. [34] Becker11941 11/06/24 11941 57
44685 안녕, 홍진호. [26] Becker10283 11/06/18 10283 40
43987 하이브 저그, 패배하지 않았다. [16] Becker8857 11/02/20 8857 4
43907 MSL 4강 진출자를 바라보는 네 개의 시선들 [30] Becker10529 11/02/06 10529 14
43793 Storkest Song! [14] Becker6197 11/01/22 6197 9
42611 about 해설. [107] Becker11263 10/08/21 11263 27
42361 자존심 [14] Becker6818 10/07/31 6818 16
41743 경기관람, 이제 미래를 봅시다. [21] Becker5477 10/05/25 5477 15
41676 누구를 위한 이스포츠인가? [22] Becker7285 10/05/23 7285 13
41582 김윤환 vs 이제동 하나대투 4강 감상평 [20] Becker5843 10/05/21 5843 2
41421 스막을 위한 나라는 없다. [21] Becker7364 10/05/17 7364 16
41257 박정석, 부활의 횃불을 움켜쥐다. [64] Becker8685 10/05/12 8685 14
41106 분리형 5전제 삐딱하게 바라보기 [19] Becker4311 10/04/29 4311 0
41025 이제동의 업적에 대한 간단한 접근 [19] Becker6839 10/04/22 6839 2
41011 입스타의 분류와 짧은 역사에 대해 [12] Becker5307 10/04/21 5307 5
40876 승부조작설에 관한 관계자분들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132] Becker17018 10/04/12 17018 37
40809 신대근 vs 이영호 짧은 리뷰. [24] Becker7067 10/04/07 7067 0
40763 리쌍록은 오는가. [16] Becker5422 10/04/04 5422 0
40717 관록의 송병구, 열 세단계 후배앞에 서서. [25] Becker7533 10/03/31 7533 8
40579 온게임넷 해설 이야기 - 성장하는 박용욱과 안타까운 김창선 [135] Becker12541 10/03/11 12541 10
40539 꺼져가는 속도거품, 드러나는 테저전의 끝 [66] Becker12105 10/03/07 12105 25
40424 삼김저그로 보는 스타크래프트의 승리공식 [17] Becker7160 10/02/24 7160 1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