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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3/11 19:32:09
Name Bar Sur
Subject [소설] 삶은 달걀, 그리고 블랙홀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유감스럽게도 LA의 게이 바(Bar)였다. 아니, 뭐, 유감스럽다고 할 것 까지는 없다고 치자. 어차피 그녀와 나는 센티멘털한 감정 따위를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니까. 게이 바라고 해서 내가 게이인 것도 아닐뿐더러, 그녀 역시 사람보다는 이런 공간의 분위기 자체를 좋아하는 내 취향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각자의 교제 상대 정도는 공인하듯 미리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녀에게 그런 감정을 가질 수가 없게 된 것은 그녀가 내 친구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한때 주변 모두가 인정할 정도의 방탕아 기질이 있었던 나는 지금도 물론 여자를 가리면서 사귀지는 않지만, 친구 부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유부녀만큼은 절대적으로 예외다. 차라리 이곳에서 마약에 찌든 창녀를 사는 편이, 식사를 하든, 안마를 하든, 위기감이라고 할까, 불필요한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단순히 그 관계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건전한 교제든지, 향락적인 여자관계든지, 모든 연애란 언제나 다소의 위험성을 필수불가결한 대가로서 고교생이 명찰을 달 듯 항상 감수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위험성이란 나 자신 혼자서 감당하고 처리할 수 있는 정도여야만 한다고 정해두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것은 오랜 기간 나 자신의 좌우명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의도하지 않은 타인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관계는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이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의 조율을 위한 설정일 뿐, 남을 위한다든가 하는 허울 좋은 이유 따윈 없다. 내게 있어서 연애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개인적인 활동이다.

  LA에까지 와서 그녀를 만나게 된 것까지는 단순한 우연의 선물이겠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그녀와 내 친구와의 관계가 과거형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듣게 된 것은 유감이라면 확실히 유감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 과거의 예측이 틀렸다는 것에 대한 유감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나는 이들 부부의 관계가 적어도 요즘의 사회 전반적인 이혼율 증가라든가 하는 추세 따위와는 하등의 관계없이 앞으로 30년쯤은 무난하게 지속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이라면 30년쯤은 지나야 연애나 사랑의 얄팍한 일면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 혼자서 가늠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은 그림처럼 맺어진 커플이었다. 대학 캠퍼스 커플로 적당히 열정적으로 연애, 졸업 후에는 서로 간의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결혼에 골인. 결혼식을 보면서 유치한 시기심조차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그림처럼 잘 어울렸고 초혼 특유의 미묘한 위태로움과 불안도 침범하지 못할 신뢰와 안정감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아직 이혼수속 다 끝난 건 아니에요. 귀국해서 끝맺음을 해야죠. 하지만 여지는 없어요. 완벽하게, 깨끗이 끝났다는 거죠.”
  그녀는 방 안의 먼지를 쓸어 담아 버리고 나서 손을 털어버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놀라움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7년이나 무사히 지속되던 결혼생활을 끝마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평온함이 감돌았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식으로 결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겨날 정도였다. 내 주변에 이 정도로 남녀 관계에 확실한 끝맺음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 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 나와는 엄연히 최초의 태도부터가 달랐을 이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이번 일은 내게는 전혀 새로운 발견임과 동시에, 평소에 확고하다고까지 생각했던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나 자신의 통찰력까지도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하는 사이 언뜻 언뜻 드러나는 이상할 정도의 무감각함.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중립성을 통해 나는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직감할 수 있었다.

  “혹시 이혼을 먼저 요구한 사람은……….”
  “예. 저에요.”
  “아, 역시……….”

  ‘저에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메마른 바다 내음 같은 웃음기가 묻어 있었던 것도 있지만, 나로서는 단지 그 대답만으로도 자신도 모르게 ‘으음.’하는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평소 같으면 몇 가지 단서만 있어도 카운슬러라도 되는 양 내가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을 테지만, 지금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그녀의 표정은 남편의 바람기라든가, 부부싸움 따위의 결론으로서 기분에 떠밀리듯 선택한 이혼을 통해서는 쉽사리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 내딛었다는 성취감이 엿보였다. 그건 내가 알고 있던 그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부부’ 사이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부류의 감정이었기에 나로서는 더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일단 같이 나갈까요?”
  “네. 그러죠. 동생에게 말 좀 하구요.”

  그녀와 함께 이곳에 온 사촌 동생 역시 여성이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시원스럽게 퇴폐적인(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분위기를 좋아해서 사촌 언니의 기분전환을 위해 거의 끌고 오다시피 한 것이라고 한다. 좀 전에 잠깐 인사를 나누었던 것뿐이지만, LA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교민치고는 한국어를 서울토박이처럼 아주 매끄러운 발음으로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적지 않게 감탄했다. 다부진 성격이 잘 드러나는 여성으로, 저 매끄러운 발음도 굉장한 노력의 성과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듣자하니 남성관이니 이상형이니 하는 애매한 그림을 그리기보다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파악한 취향을 털어놓곤 한다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그녀와 잘 통할 것 같기도 했다.

  아쉽지만 그곳에서 함께 놀 다른 친구들을 불렀다는 그 동생 분을 남겨두고, 우리는 그 게이 바에서 나와서 차이나타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적당히 시간도 알맞다고 생각해서 대만과 필리핀 노동자들이 대거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중화풍의 가게를 찾았는데, 그런 소문을 미리 접해서인지 안에 들어가서도 한국인이라고는 우리 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도 LA를 찾은 것은 6년 전쯤 모 영화사의 촬영스텝으로 와 본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이곳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고, 그녀도 차이나타운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쿵저러쿵해도 자리를 정하고 앉는데 어색함 따위는 없었다. 차이나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중국인 미녀가 주문을 받았는데,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메뉴 자체도 꾸밈이 없었고 가격도 저렴하다는 느낌이었기에 우리는 부담 없을 만큼 음식을 주문시켜 놓고 아까의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툭 터놓고 말하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두 사람이 헤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저는 두 사람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친구라고해서 바람을 피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폭력을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특히나 최근 들어 젊은 나이에 더 이상 성장을 생각할 수 없게 된 사회적 남성이라면 더더욱 그런 면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것과 헤어지는 것과는 분명 별개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남녀에게 있어서 ‘헤어질만한 이유’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에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특히나 당신 부부의 경우에는 말이죠.”
  “그것도 그러네요. 후후.”

  그녀는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요리 이전에 먼저 나온 물을 살짝 들이키며 침묵을 가졌다. 물에서 약간 씁쓸한 맛이 났지만 물 자체에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나는 자꾸만 눈에 띄는 그녀의 기묘한 여유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주문한 요리가 나올 즈음해서, 그녀가 먼저 내게 질문해 왔다.
  “결혼 전, 우리 셋이 많이 만나던 시절에 자주 말했었죠? 연애는 아주 훌륭한 오락으로 복권과도 같다고, 또 같은 이유로 돈이 된다고.”
  “내가 그랬나요? 뭐,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시절도 있었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요, 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생략했다. 여전히 나는 연애를 그럴듯한 오락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른 관점이겠지만, 또 연애 쪽이 복권보다는 높은 당첨 확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것들은 서로를 관통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인기가 높아진 오락은 점점 그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거기로 끌어들이고 그 사이로 마치 의도된 것처럼 이미지의 확산이 끼어든다. 비슷비슷한 종류의 오락들도 늘어나게 되는데, 제대로 된 방식으로 그것을 향유할 줄 아는 부류는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단지 분위기에 편승하듯 그 사실 조차 잊어버리고 거기에 빠져들게 된다.  

  물론 나라고해서 사랑이라느니 연애라느니 하는 것, 그 당시의 감정이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비합리적 가능성까지 그 실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연애 같은 것, 해도 안 해도 그만입니다.’라고 말해봤자 누구에게도 설득력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애에 있어서는 학습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은 주전자에 손을 데었을 때처럼 비명을 지르고 나서, 그것이 화산이 폭발했을 때처럼 아주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평생 연애 한 번 변변히 해보지 못한 사람도 TV나 소설에서 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돈을 꼬이게 할 때, 그 너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리 떼처럼 몰려들기 마련이다. 그들은 게임의 고수에게 개인적인 매뉴얼을 전수받듯, 믿을만한 모델을 찾고 싶어 하지만 그건 누군가에게 속아도 좋다고 하는 동의를 암묵적으로 하고 난 뒤의 이야기이다. 무언가에 의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연애가 누군가에게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장갑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다시금 맨손으로 뜨거운 주전자를 만지려 할 것이다.

  난 내 주변에서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그들의 비명 소리를 듣는 일에, 솔직히 진저리가 나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경우는 결혼 직전까지 적당히 유희를 즐기면서도, 놀랄 만큼 자립된 형태의 관계였다. 물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더 큰 문제이며,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더군다나 결혼 생활에 있어서 까지는 내 짐작이 닿을 수가 없기에, 어떤 변화가 그들을 갈라서게 했는지 당사자의 입을 통해 직접 듣기 전에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굴 요리를 먹으면서 다시 말을 시작했다.
  “결혼 생활은 결혼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우리는 여전히 자립심이 강했고 서로에게 필요 이상 기대지 않았죠. 하지만 그건 어떤 조건의 하나를 충족한 것뿐이었죠. 애정이 있다는 것에 자만한 건지도 몰라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린 노력하는 법을 잊어버렸죠.”
  “그래요. 하지만 그건 비단 부부나 가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학생들이나, 정치가나, 직장인들도 노력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죠. 그들에게 확고한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정도의 어중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그들은 일말의 의심 없이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사물들을 통해 오해와 후회를 거듭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죠. 물론 축 늘어진 노인들이 늘어놓는 과거가 더 나았다는 말 따위는 새빨간 거짓말이 분명하지만, 요즘 젊은이는 현재를 극복할 필요를 스스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들은 정보와 TV를 통한 영상이 현실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 단면입니다. 그들은 로맨티스트가 아니면서도 사랑과 연애는 청춘을 바쳐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길게 떠들어 대기는 했지만, 나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와 만남으로 구멍이 막힌 듯 답답해진 마음에, 나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만큼은 고정되지 않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고 싶어졌다. 지금 테이블 위의 춘권과 만두, 닭찜요리를 한꺼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는 것처럼, 준비되지 않은 이야기를 단번에 쏟아내는 건 약간은 힘겹기도 했지만, 어떤 주제를 관통하려기보다 머리 속에 어지럽게 울리는 소리들을 그대로 털어놓듯,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닭의 살을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늘게 찢어서 입 안으로 넣고 있었지만, 나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들은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동기, 목적이 없다. 그래요. 그이는 젊은 나이에 높은 위치에 올랐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이상의 승진이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죠. 그이에게 있어서 자기 발전은 사회적 지위의 상승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나 역시 마찬가지에요. 잠시 회사를 쉬면서 주부 생활을 꿈꿔 보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라고 해도 제게는 크게 다르지 않았죠. 아이도 없는 집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고정된 직장인의 생활에서 우리에게 노력이란 거의 요구되지 않는 것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생활 자체가 굉장한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연애를 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죠. 그 생활에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두드러지는 문제점이 있었느냐고 하면 또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일반 기준에 따르면 드믈 정도로 화목한 맞벌이 부부의 범주에 들어갈지도 몰라요.”

  “난 당신 부부를 같이 만난지가 오래되었지만, 두 사람의 태도가 함께 일 때나 각자일 때나 나와 만날 때 전혀 변함이 없음을 보고 언제나 감탄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변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 그대로일지도 몰라요. 분명 그건 아주 중요한 부분이죠.”
  그녀는 웃으며 내 말에 동의해 주었다.
  “사실 누군가가 지금 제게 그이를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전 ‘예. 사랑해요.’라고 대답할 거예요. 사실 한 발 물러나 보면 그런 정도인 거죠. 사랑이라는 감정도. 스스로도 놀랐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보다 중요한 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법이죠. 중요한 건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기포가 다 빠져버린 사랑이 허상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으려는 자세에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들은 단면적인 현실을 드러내기 이전에는 오히려 다른 커플들보다 긍정적인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난 아직도 모르겠군요. 당신의 말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또 포기가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가능성을 여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희망 자체가 전무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후후,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신은 포기하는 것을 그리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요. 우리 부부에게 지나치게 관대하시군요.”
  그녀의 웃음소리는 가느다란 손톱으로 심장의 표면을 살짝 긁어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나는 부적절한 자존심에 기대어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을 뿐, 나조차 설명하기 힘든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경력이 쌓인 의사가 아무리 끔찍한 사고를 당한 부상자를 접해도 동요를 하지 않듯이,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어떤 커플의 이별 이야기를 들어도 좀처럼 동요하지 않을 거라고 자만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나 자신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라고 있는 것이다.

  식사는 사실상 주문된 음식의 양만큼 원활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욕구에 의해 당장의 위장을 채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것들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는 아닐지도 몰라요. 문제는 아주 사소한 싸움에서 발단되었죠. 대부분의 커플 간의 다툼이나 부부싸움이 그렇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어요. 어떤 경향이나 정도의 차이라기보다는, 좀더 깊은 의미에서 ‘뒤틀려’ 있었죠.”

  그녀는 의식적으로 ‘뒤틀려’라는 부분을 강조해서 말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의 불안의 형체가 점점 딱딱하고 푸르스름한 빛으로 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깊은 곳의 이름모를 감정만으로 푸른 색 유리를 뽑아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이가 출장을 다녀온 날 밤이었어요. 필리핀, 싱가포르, 2개국을 비즈니스로 다녀왔으니 정상적으로 피곤할 거라고 생각했죠. 확인해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이는 그런 곳에 가더라도 퇴폐적인 술집을 출입하거나 창녀를 끌어들이는 짓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동행한 사원들이 그런 식으로 몸을 축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거든요. 성격상의 문제니까 굳이 제가 넘겨짚듯 단정할 필요도 없죠. 집에 돌아와서는 평소처럼 목욕부터 하고 그 다음은 식사를 했죠. 난 그 때 월경 중이었고 신경이 예민해져서 잠자리를 일부러 같이하지 않았어요. 그도 피곤하다면서 괜찮다고 했죠.”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고, 감정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늦은 밤이었어요.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죠. 그런데 옆자리에 그이가 없었어요. 조금 놀랐지만, 화장실에라도 갔나보다 싶었고 저도 목이 말라서 일단 방을 나와서 부엌으로 갔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보게 되었답니다.”
  “……….”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무언가가 검은 실루엣이 넘실거리는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이는 삶은 계란을 먹고 있었죠. 어두운 부엌 식탁에서, 후줄근한 속옷 차림으로, 팔꿈치는 식탁 위로 올려서 쪼그리듯 앉아서 말에요. 언제 삶은 건지도 모를 삶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산처럼 쌓아놓고 하나하나 껍질을 까서 먹기를 반복하고 있었답니다.”
  순간, 웃음기가 싸악 사라진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이 점점 석고상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난 그 장면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어요. 근원을 알 수 없었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분노였죠. 평생 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분노의 허용량의 대부분을 단 번에 배출한 것처럼 격렬한 분노였고, 지금도 마치 문신처럼 또렷이 몸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싸움이 났나요?”
  “만약 그 때 그 분노를 참았다면 전 좀 더 근본적인 것들을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아주 깊숙이에 있는 것들, 이를테면 나라고 하는 인간을 형성하는 에고, 모럴. 말했듯이 전 아이를 낳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마치 막 낳은 갓난아이의 죽음을 목격한 어미처럼 미쳐 날 뛴 것 같아요. 그이는 깜짝 놀라 저를 말렸지만, 전 그 자리에서 거기에 있는 모든 계란을 사방에 던져버렸죠.”

  그리고 그녀는 다음 날, LA에 왔다고 한다.

  “LA에 오면 마음이 진정돼요. 모든 여성에게 친정이란 그런 걸지도 모르죠. 전 이곳에서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제 행동을 돌아보기로 했어요. 그리고 화해하기 마음먹었죠. 난 왜 내가 화를 냈는지 조차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요. 화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보다 먼저 도덕적 이성이 작동하면서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무언가에 떠밀린 듯이 홧김에 LA까지 오기는 했지만, 도착하고 나서는 왠지 여유가 생겨서 어머니와 동생들만 만나고 며칠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죠. 그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날 내버려 두는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나 보죠?”
  나는 그렇게 거의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무엇이 그녀를 ‘헤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일까. 어느 샌가 나는 그것이 견딜 수 없게 알고 싶어졌다.

  “LA에 와서 3일째쯤, 동생을 떼어 놓고 오랜만에 혼자서 LA시내를 거닐었죠. 보고 싶은 영화도 실컷 봤고, 쇼핑도 했죠. 한국에서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어요. 다만 그 날, 한 극장에서 열린 이벤트 행사에서 제 눈길을 끌게 한 것이 있었어요. 한쪽 구석에서 틀어주었던 이름모를 단편영화였죠.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한 남자가 그 당시 자신이 강간했던 베트콩 여성을 오버랩시키면서 끊임없이 맥주를 마시는 장면 나왔어요. 그걸 보고 전 왠지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블랙홀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그날의 일을 생각했죠. 아마 그날 그이가 먹고 있던 삶은 달걀들은 그의 내부 깊숙이에 있는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 간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
  나는 삶은 달걀이 목을 ‘콱’ 하고 거칠게 틀어막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나 자신까지 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분명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식당에서 헤어졌다. 그녀는 데려다주겠다는 내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나는 혼자 남아서 아까의 차이나 드레스가 잘 어울리던 중국인 웨이트리스를 꼬셔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동안 했지만, 문득 블랙홀과 심장을 긁는 듯했던 그녀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그만 두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두 사람이 쭈욱 같이 있을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30년 따위는 우스울 정도로. 그녀의 앞에서 나는 블랙홀 따위는 망상이고 당신이 무리하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하기에 난 너무 늙어버렸고, 내게도 블랙홀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뱃살의 비계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ps. 스타 이야기가 아닌 글만 게시해서 죄송합니다. ^^;; 가진 재주가 이것 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양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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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gogo~
04/03/11 20:02
수정 아이콘
삶은 달걀이 키포인트인가요? 삶은 달걀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봐야 할듯하네요. 평소에 연상력 키우기좀 할 것 그랬습니다. :)
Return Of The N.ex.T
04/03/11 20:12
수정 아이콘
흐음.. 조금은 알듯 하지만..
글쓴이의 의도와는 다를수도 있으니 함부러 적기는 뭐 하군요..^^;;
굉장히 흥미 있었습니다.
전 이런 글을 좋아 하거든요..^^
04/03/11 21:3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일반 소설이 올라온 걸 읽은 건 처음이네요.^^
Godvoice
04/03/11 21:42
수정 아이콘
이 분은 일반 소설을 꽤 자주 올리십니다.
...저같이 라이트노벨 작가(...)나 꿈꾸는 사람과는 격이 다르군요.
안전제일
04/03/11 22:34
수정 아이콘
으음...현재 소화불량 상태인지라.. 토할것같군요.(으응?)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지극히 보수적이고 낭만적이기도 한 사람이라서...
하긴, 세상에 저같은 사람만 있다면 참 흉악스럽겠지요.으하하하

잘읽었습니다.^_^
주적자
04/03/11 23:45
수정 아이콘
회색 잿빛느낌이었습니다.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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