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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01/16 19:05:03 |
Name |
Laurent |
Subject |
사람을 대할 때 |
그 사람은 훨씬 복잡한 얼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학을 전공한 저로써는 ‘작가주의’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습니다. 주로 영화감독을 작가의 반열에 놓고 작품들을 연역적으로 해석하는 이데올로그이지요. 영화 작품들을 기표로 놓고 그 속에 담긴 일관된 기의가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살펴보는 방식이 많습니다.
때로 의문이 들었던 것은 –물론 분석과 비평의 영역은 텍스트보다 주체자의 관점이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겠지만- 한 사람의 작가가 만든 작품들을 통해 일관된 흐름을 기본적인 틀로 상정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도 작품활동을 하고 있지만 작가의 세계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의 얼개를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것이죠.
개별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는 그 순간의 Moment가 대단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로 하여금 처해진 상황,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 그 순간의 의욕에 따라 변해갑니다. 그도 인간이니까요. 그래서 <주유소 습격사건>을 썼던 시나리오 작가가 <선물>을 쓸 수 있는 것이고 <비트>를 만든 감독이 <영어완전정복>을 만들고 <투캅스>의 감독이 <실미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기타노 타케시라는 만담가가 <하나비>, <소나티네>를 만들기도 하고, 유하라는 시인이 영화감독으로 작품을 내놓고, 저역시 애니메이션작가이면서 게임기획을 하려고 하는 것까지 인간은 시시각각 꿈을 품고 변화의 선상 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론 비슷한 경향을 띠는 작품들을 내놓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성공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가지에 일생을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변화의 선상에 있고, 입체적인 다면체라는 점입니다.
가끔 세월의 흐름 속에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이 눈에 띌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선상에서 다면체인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끝없이 살을 붙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념 속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나에게 나(자아)는 항상 그대로이고 어떤 경험을 하거나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하는 것 뿐이지요. 그렇지만 남들은 ‘넌 항상 그랬잖아.’ 아니면 ‘너 많이 변했구나’라고 대합니다. 변화의 선상에서 나를 다면체로, 유기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면 ‘너 많이 늙었다.’, ‘너 왜 그렇게 달라졌니’와 같은 대사에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물리적인 나이’라는 단어를 쓰시는 분이 있습니다. 나이란 항상 그대로 느껴지는 나를 외부에 꺼내놓을 때 항상 다른 상황을 제공해 주는 기본적인 지표이지요. 헉 서른.. 저어 아저씨. 이런 말을 듣는 순간 충격을 느끼듯이 말이지요.
부모들이 아이들을 바라볼 때도 그렇습니다. 항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늘상 아이와 함께 지내는 어머니의 경우는 더 그렇지요. 어렸을 때부터 매일 대하는 가족의 경우에는 더더욱 하루하루가 단면이 되어 격심한 변화를 겪는 나를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부대끼면서 축적된 세월로 “쟤는 어떻다”는 생각이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아 있으니까요. 더 나아가 “쟤니까 어떻게 할 것이다.”로 되고 “나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 내 말 들어.”라고 자식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매일 같이 보는 부모님 곁에서도 아이는 어떤 깨달음의 순간을 겪게 됩니다. 변하는/변해버린 순간을 잘 도와주는 것이 훌륭한 부모님이겠죠. “벌써 네가 그렇게 되었구나”라고 말하는 부모님의 가슴에는 자식의 변화가 업데이트 되고 있을 것입니다. 매일 보아왔고 가족으로 대했기에, 어린 시절을 알고 나랑 닮았다고 알고 있었기에 자식의 변화에 대처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거겠죠
다시 작가주의의 예로 돌아가면 어떤 작가가 내놓은 작품들의 경향을 논하되 다음 작품은 이래야한다는 억압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아니 이런 작품을 내놓다니. 그 사람 답지 않아. 그 사람도 현실과 타협했군”류의 논평은 제가 많이 듣던 것입니다. 작가의 예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이런 예를 더 많이 볼 수 잇을것입니다.
“저런 플레이를 하다니 프로게이머답지 않아”라는 말 속에도 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프로게이머거나 대학생이기 전에 ‘그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 사람’을 변화의 선상이라는 인생 위에 놓고 생각해 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나 실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에 대해서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자주 쓰시는/자주 쓰시지 않는 분이네요”라든가 “어떤 생각이 확고하신 분인 것 같아요”의 단정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봅니다. 분명한 것은 그 글이, 그 생각이 ‘그 사람’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글로. 순간적인 생각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기에 ‘그 사람’은 훨씬 복잡한 얼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 사람은 타인이 잘라 놓은 ‘자기자신’의 단면을 보고 상처입게 되는 것 아닐까요.
하나의 단면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너무나 필요없는 일들이 생겨나게 되고 빈정상하게 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나에 대해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라”든가 “그런 분이 왜 그런 글을 쓰셨죠?”를 대할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난폭하게 운전하시는 분을 대할 때 그렇습니다. “저런 인간들은…”하기보다 저는 “저 사람은 어떤 사정에 닥친걸까”를 상상합니다. 나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누군가를 대할 때도 그렇습니다. 가장 쉬운 예가 “급한 사정이 있었겠지”이지만 이렇게 상황으로 ‘그 사람’을 바라봐 주시는 분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번만 ‘그 사람의 동기’나 ‘그 사람의 상황’을 상상해 본다면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그 사람이 그런 글을 올리게 된 ‘동기’나 ‘상황’이 나로 인한 것은 아닌지, 그런 상황에 내가 닥쳤다면 나의 입장은?, 그 사람의 동기나 상황에서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을까의 순서로 생각해 본다면 나에게도 훌륭한 학습이며 쓸데없는 인간관계의 오해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글을 올리셨던 분으로 기억”한다면, 그것이 단편적인 것이고 작가주의와 같은 억압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기억을 그 사람의 ‘동기’나 ‘상황’을 상상해보는 순서 뒤로 미루어 두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 글을 가지고 있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과 ‘나’를 단절시킬 뿐이지요.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또 그 사람의 행동을 야기한 ‘동기’나 ‘상황’보다 그 사람은 훨씬 복잡한 얼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상에서 쓴 글이지만 오타찾기 해 주실 분들의 수고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 originally writtn by YE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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