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3/11/10 04:43:55 |
Name |
minstrel |
Subject |
다크템플러의 추억.. |
안녕하세요.. 거의 매일 pgr에 들리면서도 글은 한 번도 올린 적이 없었네요^-^;
pgr분들이 그러시듯..
저도 언제부턴가 주위에서 스타크래프트 매니아란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생각해보면 부르드워가 첨 나왔을 무렵 립버젼으로 스타를 접한 이후
스타를 하지 않은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적었던 거 같네요.
나름대로 꾸준히 스타를 즐겨온 덕에
지금은 주위에서 고수라고 불러줄 정도의 실력도 갖추게 되었고..
TV로는 못 보지만, 온게임넷이나 MBC게임의 VOD를 보면서
좋아하는 선수를 마음 속으로 열심히 응원하는 프로게이머 열성 팬이기도 합니다..
배틀넷에 자리잡은지도 꽤 되었기 때문에(햇수론 5년째군요..)
여기저기 가입한 길드도 많고 게임을 통해 알게 된 분들도 많이 계시고..
여하튼 제게 스타크래프트는 고등학교 학창시절부터
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게임 이상의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2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프로게이머와 대전을 해보는 일이었고요..
두번째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스타크래프트를 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소원은(그 때가 고3때였으니.. 4년전이네요)
우연히 채널에 찾아오신 변성철 게이머와 연습겜도 하고
구경(당시엔 옵저버 맵이 없어서 테란을 선택해서 커맨드를 띄우는 방법으로^^)도
하고 하면서 풀게 되었습닌다.
그런데 두 번째 소원은 대학에 입학하고나서 여자친구를 몇 번 사귀면서도..
어째어째하다보니 이루지 못 했었네요.
고백하자면 정말 좋아하고 사랑해서 만난 여자들이라기 보단
그저 연애를 즐기기 위한 마음으로 가볍게 만나던 친구들이었기에..
스타를 가르칠려는 의욕이 없어서 그랬던 거 같기도 합니다^^;
시간은 흐르고.. 대학 와서 마냥 즐겁기만 할 시기는 지난 올 해..
여태껏 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스타크래프트가 삐질만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뒤늦게 찾아온 첫사랑이었죠..
한눈에 반한적 있으신가요?
저는 그녀를 보기 전까지 한눈에 반한다는 건 거짓말인줄만 알았습니다..
그녀 역시 저를 괜찮은 사람으로 봐줬던 건..
로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죠..
사랑도 똑같은 사랑이 아니고..
사귀어도 똑같이 사귀는 게 아니었다면.. 믿으시겠어요? ^-^
정말 그녀와 사귀게 된 이후의 날들은 제게 마치 꿈만.. 아니 그저 꿈이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나름대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했었지만
그녀를 만나면서.. 사랑이란 하나의 감정에만 깊게 빠져들어갔습니다..
(아..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제 사랑타령으로 새어버린 거 같은데^^;
정신차리고 다시 쓰겠습니다)
그녀는 물론 제가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데이트 비용이 달릴 때에는 피씨방에 나란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지만..
막상 스타크래프트를 같이 하게 된 건 몇 달이 지나서였습니다.
피씨방을 별로 안 좋아하던 그녀를 위해
집에 스타를 깔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게 되었고..
어느날 저녁 적지 않은 용량의 Starcraft.img 와 Broodwar.lcd 파일을 전송하고..
컴퓨터를 잘 모르는 그녀한테 씨디스페이스와 데몬,
버젼패치 윈도xp크랙 등을 설치하는 고된 작업 끝에..
드디어 드디어 그녀가 스타크래프트 배틀넷 asia 서버에 접속하게 되었습니다 ^-^
아이디는 저랑 의논해서 사이좋게 커플 아이디로 만들었었고요..
그녀의 아이디 LuckyCrane, 제 아이디 LovelyCrane으로..
험한 전장에 두 손 꼭 맞잡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배틀넷에서 /stats 해보시면 전적이 뜰겁니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의 종족 이름도 몰랐던 그녀와
당장 같이 게임을 즐기기는 무리였죠.
이후로 그녀와 데이트 약속이 있을 때 마다 피씨방에 1시간씩 꼭 들리면서
스타크래프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랜덤을 가르칠 순 없었고^^;
저그는 너무 징그럽다고 무조건 싫다고 하는 그녀에게 남은 건 테란과 토스.
저 때문에 마우스를 잡긴 했지만 스타크래프트에 별로 관심이 없던 그녀에게
처음부터 테란을 가르칠려고 들었단 질려버릴 거 같아서^^;
주저없이 토스를 그녀의 주종으로 선택하고 레슨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속성으로 중수를 만들어보자..
라고 제 나름대로 마음 먹고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쳤습니다.
가르쳤던 내용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네요..
"넥서스는 ctrl 0번으로 부대지정하고 0p0p0p0p 누르는 걸 습관화 해"
"항상 메뉴 오른쪽 상단에 인구수 살피면서 파이런 미리미리 지어주고
돈이 남는다 싶으면 게이트웨이를 늘려"
"로브와 유닛을 꾸준히 생산하면서 일정 시간 이후엔 어시밀레이터를 짓고
그 이후 테크를 올려서 여러가지 조합을 갖추는 거야"
"급한 소리가 들리고 미니맵이 깜빡이면
본진에서 얼른 전장으로 화면을 옮겨서 유닛 선택하고 어택을 눌러줘"
"그레이드는 기본이야.. 특히 드라군 사정거리, 질럿 발업,
하이템플러 싸이어닉스톰, 캐리어 인터셉터용량 업그레이드는 꼭 해줘야 해"
"본진에 미네랄이 떨어지거나 자원이 많이 남는다 싶으면 멀티를 해야되는데
안전하게 하기 위해선 넥서스만 소환하지 말고 포톤캐논을 3개 이상 지어줘야 한다"
"싸이어닉 스톰이 정말 쎈 거야..
하이템플러 누르고 t 누르고 상대유닛 모여있는 곳에 클릭해"
"팀플에선 유닛생산이 우선이니까 게이트웨이마다 번호 지정하고
1z2z3z4d5d6d 이런 식으로 유닛을 계속 생산하렴"
스타크래프트를 생전 처음해보는 사람,
그것도 여자한테 너무 가혹한 가르침이었을까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녀는 제 무릎에 앉은지 단 몇 일 만에
이 모든 것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로템이나 유한헌터에서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싶어
연습삼아 빅게임헌터 맵에서 컴퓨터를 상대로 2:2를 하면서 실전에 대비했었는데..
게임 마치고 최종 스코어를 보면 저랑 비슷비슷하게 나올 정도로 습득이 빨랐습니다..
배틀넷에 아는 사람들이 다 놀랄 정도였죠 ^-^
여자치고 승부욕이 강한 덕분이기도 하였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게임에 소질이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제 기분을 맞춰주고 싶을 땐 마치 '한 턱 쏠게'라는 식으로..
'스타 한겜 해줄까?^^'라고 문자를 날리곤 했습니다.
그녀가 어느정도 스타를 익힌 이후로는
매일은 아니지만 이틀에 한 번 정도씩은 2:2도 하고,
길드 사람들하고 팀플 할 때 깍두기로 껴서 2:3, 3:4도 하곤 했습니다.
사실 저랑 같은 편으로 게임을 할 땐 1:2 한단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고
다른 편이 되었을 땐 일부러 봐주면서 하기도 했었지만^^;
승패와 상관없이 한게임 한게임마다 일취월장하는 그녀를 보면서 느끼는 보람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우연히 저랑 다른 팀이 되어서 졌을 땐
여자친구를 보호하기는 커녕 봐주지도 않느냐면서
(제 딴엔 상당히 봐줬었지만^^;) 투덜거리기도 하고..
채널에 찾아온 다른 커플과 2:2로 붙어서 당당하게 이겼을 땐..
정말 어린애처럼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배틀넷 공방에서 게임을 할 때면 이기는 경기가 많아서인지
그녀도 재미있어 했던 거 같습니다.
하루는 떠 보려는 마음으로
"너 스타크래프트 내가 좋아하고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 아냐?"
라고 물으니까
"첨엔 좀 그랬는데.. 지금은 할만한 거 같아.. 재밌어"
라고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네요..
싸이어닉 스톰을 어떻게 써야할지 잊어버려서 끙끙대다
상대방을 거의 다 밀어버린 상황에서 애처롭게 남은 일꾼들에게
스톰을 겹쳐쓰고는
"와~ 나 방금 스톰 썼는데 이거 되게 많이 죽는다.. 잘했지?^^"
라고 묻거나
"이거 애벌레 같은 거 약한 거 같아.. 이거 안 만들래"
"그건 스캐럽이라는 공격무기를 안 만들어서 그래..
애벌레를 선택하고 r을 연타하렴"
"오~~ 된다된다 이거 한 방에 쟤네 다 죽었어"
라고 꺄르르 거릴 땐..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이외에 에피소드들도 참 많은데..
초반 저글링에 공격을 당한다 싶더니.. 금새 전화를 해서는
"저기.. 나 지금 개미 같은 애들이 공격와서
프로브 다 죽었어.. 어떻게 해?"
라고 울먹거리던 모습..
제가 다크템플러나 럴커에 당하는 걸 눈치채고
자기 유닛은 아무 것도 안 만들면서
자원을 짜내 로보틱스와 옵저버터리를 지은 끝에
힘겹게 만들어낸 옵저버 한기를 제 기지에 보내오지만..
중간에 그만 오버로드를 동반한 히드라에 터져버립니다.
그것도 모른채
"봐봐~ 나 옵저버 만들어서 보냈는데에~~"
"우와~~ 옵저버 왔네^^ 너 덕분에 막았다야 정말 잘했어 고마워~"
라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럴커에 계속 당하던 기억..
어느 날 한번도 안 해본 로템을 알려달라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다음 날 같은 과 남자 동기랑 1:1 내기했는데 이겼다면서 좋아하던 모습..
그녀는 상당히 창조적인 플레이어였습니다..
어느 정도 유한맵에서 팀플을 해보신 분이라면 실천하기 힘들수도 있는
질럿스카웃 조합, 커세어의 디스럽션웹을 이용한 드라군러쉬,
패스트캐리어 등을 구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럴커나 다크에 몇 번 허무하게 당하고 나서부터
클로킹 유닛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았나 봅니다..
언제부턴가 템플러 테크가 올라간 순간부터
거의 다크템플러를 주력으로 삼기 시작하더군요..
팀플에서 중반 이후 온리다크가 나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은 제가 채워줄 수 있기 때문에..
선호하는 유닛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반가웠습니다 ^-^
그녀와 게임을 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다크템플러..
나중엔 망토자락과 마스크(입에 두른게 두건인가요^^;)사이에 숨은
다크템플러의 정체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상상마저 들더군요.
여전히 게임VOD에서.. 배틀넷에서.. 리플레이 화면에서..
다크템플러를 봅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의 다크템플러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 aisa섭에서 1:1를 하다가
유독 다크템플러를 주력으로 사용하시는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순간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손이 멈추고.. 모니터 화면은 일렁이네요..
용케 성큰을 지나쳐 드론을 죽이는 다크템플러 한 기에게
마음 속으로 인사를 건냈습니다..
'오랜만이네.......................................
나 없다고 힘들어 하는 거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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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아직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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