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라는 이름을 위하여 4. Manner in Bnet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은 스타크래프트를 열심히 하며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스타크래프트는 서로간의 대화와 게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공간으로서이 Battle Net이라는 형태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그공간은 불특정 다수를 포함하려는 형태의 개방형 사회이고, 그곳에 모든 프로게이머들 역시 존재하고 있다. 이 순간, 그리고 또 언제나.
딱딱한 서두였다. 어쨌거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들을 스쳐 지나간다. 무한대의 속도로 걸어다닐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 여의도 광장에 수십만 명을 모아 놓은 꼴이 될지도 모른다. 같은 서버에, 우연히도 같은 채널에 스쳐 지나가는 그들은 우리가 길거리에서 연예인을 만나는 것 만큼이나 색다른 감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West서버 그리고 게임벅스 서버, 이 두 서버에는 프로게이머들이 우글거린다. 프로게이머 위주의 게임벅스 서버와는 달리 West서버에는 수만 단위의 접속자가 있으므로 프로게이머들이 우글거린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내가 아는 한에서는 모든 게이머들은 West 서버를 들락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방송에서, 까페에서, 그리고 여러 공간에서 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게이머들의 아이디를 알아 내고는 배틀넷에서 그들에게 열심히 귓말을 날린다. 또는 몇몇 유명 길드의 채널을 귀신처럼 알아내고는 그곳으로 쫓아가서 프로게이머들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기도 한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말을 나누고 어떤 게임을 하고 있을까.
게이머들은 대부분 그들을 무시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도망간다. 몇몇 게이머들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기도 하지만, 긴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전에 사라진고 만다.
어쩌면, 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상황은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연습 상대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귓말을 날리고 있고, 동시에 팬들로 부터 날아들어오는 많은 귓말에 시달리고 있다. 어쩌다가 채널에 극성 팬들이라도 나타나면 몸이 힘이 쭉빠진다고 하니 사랑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열병을 앓게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런지.
어느 날인가, 친한 게이머 동생에게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은 채, 끊임없이 그의 패배와 경기의 내용을 질책하고 있었다. 게이머는 참고, 참았다. 그리고 공손히 대답할 뿐이었다. 나에게 "어쩔 수 없죠. 이젠 익숙해요"라는 귓말을 날리면서.
나는 황급히 그 채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걱정스러워 녀석에게 귓말을 날려 주었다. "다른 아이디를 만들어, 애들 보니까 아이디 서너개도 더 되던데." "괜찮아요. 이런일에 익숙해요. 요즘 제가 좀 떴나보죠.ㅋㅋ"
나는 녀석이 더 유명한 선배 게이머들처럼 팬들에게 데이거나 놀라서 홱 돌아서지나 않을지 걱정 될 뿐이다. 배넷에서 게이머들은 잦으면 하루에 한번, 뜸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시비에 휘말린다.
어느 날인가는, 나는 게임벅스 서버에서 채널지기를 하다가 두 사람의 싸움을 말려야 했다. 한 선수와, 그리고 그의 팬이라고 하는 한 사람. 팬은 자신의 친구를 무시했다며 게이머가 왜 귓말에 대답해 주지 않느냐고 했다. 선수는 너무 바빠서 그랬다고 대답했고,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팬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쉬웠다. 그 게이머는 너무 어렸고, 그를 부드럽게 물러나게 하거나, 자신이 잠시 물러나 있을 생각을 하기에는 조금 모자랐다.
그 팬은 너무나 일방적이었고, 결국 그 게이머가 무시했던 친구는 자신의 다른 아이디 임이 밝혀졌다. 나는, 너무나 씁쓸해 둘 모두에게 경고를 했고, 접속을 끊어버리고 잠을 청했다.
그들은 분명 어리다. 그리고 종종 자신들이 프로임을 잊게 되고, 팬들이 자신을 오른손이 마우스로 이루어진 우주전사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어느 새 유명해진 자신의 아이디를 자각하지 못한 채, 친구들과 편안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사람들 눈에는 거슬리게 되고 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의 위치는 스스로 만들어버린 것이고, 돌이킬 수는 없다. 순응한다는 것은 어린 나이에 너무 버거운 일일수도 있지만, 프로라는 이름에 뒤따르는 씁쓸한 뒷맛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해야 하는 맘도 무겁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달래야 하는 것은 역시 우리다. 우리는 그들의 위치를 나와 그의 일대 일 관계로 생각하고 마는 것일까. 사람들은 지나친 관심을 그들에게 쏟아 붓고 만다. 개개인에게는 수없이 기다려온 시간이 있겠지만, 그들에게 들려오는 귓말의 더미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짐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프로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한, 프로라는 이름을 조금 더 사랑하기 위한 배려, Manner in Bnet은 프로들을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