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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9/19 11:13:56
Name happyend
Subject (08)임진왜란은 화약전쟁
1.
1543년 8월 25일. 필리핀 앞바다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던 포르투칼 상선은 뜻하지 않은 태풍을 만납니다. 그들은 지독한 악천후와 사투를 벌인 끝에 표류하다 일본 남쪽 다네가시마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 낯선 이방인을 만난 일본인들이 세상을 뒤바꾸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실, 이런 기회는 조선에게도 있었습니다.1591년에 말이죠. 하지만 두 나라의 대응은 극과 극을 달렸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겠지요. 같은 상황에 대한 다른 대처,그것이 가져온 수많은 다른 결과들...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가지 선택을 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일본,특히 규슈지방은 애초부터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 뒤늦게 편입한 까닭도 있겠지만 매우 개방적인 곳인가 봅니다. 섬마을 해양민족 특유의 호기심을 가진 이곳 주민들은 즉시 포르투칼 상인들을 자신들의 도주인 도키타가에게 인도합니다.
도주 도키타가는 벽안의 상인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도주답게 새롭고 낯선 물건에 눈길을 멈춥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그것이요?그것은 화승총이라고 합니다.”
물론,이 대화는 손짓 발짓을 섞은 바디랭귀지였겠지만 세계사의 운명을 바꾼 대화였습니다.왜냐하면 도주는 즉시 두 개의 총을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포르투칼 상인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만나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으니 아마 도주가 천국의 사자정도로 여겨졌나봅니다.한껏 상기되어 내친김에 ‘화약만드는 법’까지 알려주었으니까 말이죠.

그동안 일본은 백방으로 이 ‘화약제조법’을 배우려 노력했습니다.그러나 동아시아에서 화약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나라인 중국과 조선은 모두 이 제조법 자체가 국가의 일급비밀사항이었습니다.
‘중앙집권형 왕권국가’라는 두 나라의 공통점은 그만큼 반란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제조법이 일급비밀이었고, 국가가 지정한 곳에서 국가가 지정한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도록 한것도 그것때문이겠지요.경쟁없는 기술개발.그것은 정체 그 이상의 무서운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을 이 ‘화약’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요?

화약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아시다시피 중국입니다. 중국의 도교 선인들은 ‘불로장생’의 명약을 만들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했는데 이것이 이후 동양의 화학이 서양을 수천년간 앞서나가게 한 비결이었습니다. 이때 우연히 만들어진 ‘화약’제조비법은 다시 ‘금’을 만들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하는 서양의 연금술사들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들도 도교의 선인들처럼 ‘비법’은 숨겨질 때 제맛이라는 금단의 열매에 대한 규칙을 잘 지켰습니다.

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은 1242년,영국입니다.
기록을 남기려는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그 파괴력에 괴로워했던 영국의 승려 로저 베이컨은 이 화약의 제조비법을 감출수도 드러낼 수도 없는 딜레마에 괴로워합니다. 인간적 고뇌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암호였습니다. 그것은 꽤 괜찮은 타협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화약이란 ‘이단적 연금술’의 증거를 숨김으로써 종교재판의 칼날도 피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1313년에 호기심 많은 독일사람 베르톨드 슈와르츠가 암호를 풀면서 서양은 순식간에 화학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동아시아처럼 지정학적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은 서양은 수많은 왕가와 성주들이 자신들의 힘과 위엄과 명예를 뽐내느라 날 새는 줄 모를 때였기에 ‘화약’은 너무도 소중한 보물이었던 것이지요.

세상을 지배할 열쇠를 손에 쥐려는 그들에게 상인들의 유혹은 달콤했습니다. 상인과 성주의 후원아래 어두침침한 실험실에선 날마다 새롭게 화약성능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불과 100년도 못되어 서양의 화약기술은 동양을 뛰어넘었습니다.화학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중국과 조선에서 그토록 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화약제조비법을 일본이 갖게 된것은 우연이었지만 그들로서는 오히려 행운이었던 셈입니다. 서양의 앞선 기술을 전수받은 셈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임진왜란은 동서양의 ‘화약전쟁’이라고 부릅니다.

2.
도주 도키타가는 두 자루의 총을 앞에 두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언제나 재앙만 가져오던 태풍이 데려 온 이 선물의 가치를 잘 알았기 때문이겠지요.때는 바야흐로 막부시대 말기.게다가 일본은 철의 나라라고 할만큼 풍부한 철광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산이 가져다준 보상품이라고나 할까요?

도키타가는 즉시,눈썰미 좋은 대장장이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총이란 것이다.만들 수 있겠느냐?”
대장장이는 수대에 걸쳐 내려온 장인집안의 후계자답게 날카로운 감각과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해보겠습니다.”

대장장이는 총을 즉시 분해해서 그 구조를 연구했습니다.다시 조립하고 분해하고를 거듭한 끝에 총의 제작에 성공했을 무렵엔 일본 본토는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전쟁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총은 즉각 도키타가가 충성을 맹세한 시마즈 가문에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시마즈 가문은 곧 전국시대의 유력가문으로 발돋움했고, 칼과 활의 싸움이었던 내전은 화약전쟁으로 변했습니다.
이 전쟁은 화약무기의 성능개발과 대량생산체계를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평지 전술’도 개발시켰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조선을 초토화시킨 전술로 평지에선 절대무적이었습니다.

(제가 자료를 넣어둔 노트북이 수리중이라,정확한 기술명칭을 적지 못했습니다.죄송합니다.  이 전술은 조총이 장전할 때 걸리는 시간동안 상대의 공격에 무력하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세열이 한조로, 각각 앞열이 쏘는 동안 뒷열이 장전하고,뒷열이 쏘는 동안 앞열이 장전하는 방식입니다. 이 조총부대는 연발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약점이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영민한 곽재우는 조총의 발사간격을 계산하여,수풀속에 숨었다가 장전하는 동안 냅다 뛰고,다시 수풀속에 숨었다가  벌떡 일어나 화살을 쏘는 방식으로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이 화약무기와 전술에 대한 자신감은 곧 조선출병을 결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벌어졌던 것이지요.하지만 조선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정확하게 똑같지는 않지만 1591년에 대마도주는 두 나라 사이의 전쟁으로 시달릴 일이 걱정되었던 터라 일본에 들렀다 돌아가는 통신사편에 ‘두자루의 조총’을 바쳤습니다.

선조임금과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이 두 자루의 조총을 앞에 두고 근심했습니다. 새로운 이 무기가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경험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3.

1555년,을묘왜변은 변화된 세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 앞에 백기를 들었고, 세종임금의 유화정책에 따른 공식무역로의 개설로 명분을 잃었으며, 일본 내부의 상황으로 겨를이 없었던 왜구들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나타난 왜구들은 놀랄만한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당연하게도 시마즈 가문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조총이었지요.

태종시대까지도 왜구는 극성이었지만 그들의 공격을 막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빠른 배를 몰고 있긴 하지만 고작해야 활과 칼을 들고 설치는 그들을 향해 해안가에 미리 준비한 ‘화포’만 펑펑 쏘아대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총을 든 왜구는 달랐습니다.날렵하게 요리조리 포탄의 둔중한 움직임을 피한 뒤 해안가에 무사히 상륙하거나 느린 조선의 배위에 가까이 다가서기만 하면 화포는 무력해졌습니다. 조선으로서도 새로운 무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지요.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화포를 대량으로 탑재할 수 있는 판옥선이었습니다.그리고 화포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크기순서대로 ‘천지현황’총통이 만들어져 사거리와 속도를 다양화하였습니다. 왜구에게 시간차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사실,왜구는 더 조선을 괴롭힐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조선도 화약무기를 더 개발할 수 있었겠습니만 역설적이게도 왜구의 활동은 여기까지였습니다. 남해안을 무대로 동아시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왜구 대장 오초쿠는 명나라에서 안락한 삶을 보장받아 귀화해버렸던 것입니다. 물론,오초쿠의 안락한 삶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명나라는 시간을 두고 오초쿠의 부하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버렸고, 바다사나이 오초쿠가 명나라의 기름진 음식에 익숙해져버렸을 무렵,그에게 덧없는 형장의 칼날만이 남겨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일본과 외교를 단절해버림으로써 일본의 변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1591년,통신사가 갈 때까지 말입니다.

대신 골칫덩이들은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들이었습니다.이들은 두만강에 얼음이 끼기 시작하는 겨울만 되면 넘어와 식량을 뺏아가고 마을을 불질렀고,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모든 조선의 장수들은 무과에 합격하면 두만강변에서 근무해야 하는 의무 규정이 생겼고, 이곳에서 공을 세운 이일,신립은 국민적 영웅 취급을 받았습니다.

말탄 날쌘 여진족을 물리친 무기,그것도 역시 화약무기인 ‘승자총통’이었습니다.화포따위는 그 날렵한 여진족을 상대할 수 없다고 여긴 김지는 1579년에 개인용화기인 승자총통을 개발합니다. 이 총통은 옮기기 쉽기 때문에 여진족의 뒤를 쫓으면서 사용할 수 있었고,총통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는 그 소리에 놀란 말이 날 뛰는 바람에 떨어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찌되었건 이 총통은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전멸시키며 북방의 주도권을 압록강 이북의 여진족,즉 만주족의 누르하치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하였으니,바야흐로 ‘화약무기 전성시대’가 아닐 수 없지요.(만주족이 명나라를 무너뜨린 무기는 포르투칼에서 만든 대포인 홍이포였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를 알턱이 없는 조선은 두자루의 조총을 앞에두고 근심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그때,이 모든 근심을 한방에 날려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바로 ‘신립’장군입니다.

“조총이 쏜다고 다 맞는건 아니지요!”
이 호방한 말에 모두의 얼굴이 펴졌습니다.여진족이 그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린다는 ‘신립’장군이 아닌가.그 공로로 부마의 자리까지 오른 국민적 영웅의 자신감은 모두를 안심시켰습니다.

이 소문은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혹시 싶은 마음에 성채를 다시 복구하려는 지방관들은 목이 달아날 위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신립장군이 있는데 왜 성을 고치느라 백성들을 고달프게 한단 말이오?”

이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버렸습니다.그 뒤는 아시다시피....임진왜란!

4.

임진왜란이 화약전쟁이란 것을 미리 깨달은 사람들은 있었습니다.이순신과 같은 사람들....또,임진왜란이 벌어지자 화약전쟁이란 것을 깨닫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바로 변이중과 권율,그리고 이장손입니다.

아시다시피 변이중은 화차를 이용하여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인물입니다.바로 요즘 영화 <신기전>으로 화제가 된 ‘화차’와 거북선의 원리를 결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신기전은 엄밀히 말하면 살상무기는 아닙니다. 그 소리의 요란뻑적지근함에 비해 파괴력도 적고 화약소모도 많은 편이라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구에게 신기전을 쓴다는 것은 놀래키려는 목적이외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고,그나마도 한두번이지 곧 면역이 됩니다. 그래서 신기전은 통신용으로 쓰거나 궁중에서 불꽃놀이를 할 때 쓰는 지극히 주변무기입니다.

화차는 말그대로 이동식 다연발탄입니다. 특히 행주산성과 같이 공성전에 유용한 무기로 거북선처럼 든든한 방패막이를 위에 둘러놓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쏘아대면 조총부대는 혼비백산했습니다.
조총부대는 장전시간의 약점외에 평지용무기로 개발되었다는 약점이 있었지요.평지에 오도카니 모여있는 그들에게 화차공격은 매우 손쉬운 표적에 대고 쏘는 명중률높은 공격이었습니다.

조총부대의 세 번째 약점은 바로 화약의 장전법에 있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화승총은 심지를 총위에 꽂아놓고 그곳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그러니 당연하게도 비가 오면,조총은 무용지물입니다!

영리한 권율은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수차석포’라는 특수 투석기에 ‘진흙덩이’를 장전해서 쏘았습니다. 진흙덩이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조총부대위로 날아갔고,이리저리 그 찰진 흙을 흩뿌렸습니다. 순식간에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임진왜란 최대의 발명품은 ‘비격진천뢰’라고 생각됩니다. 경주의 화포장인이었던 이장손은 조총부대의 두 번째 약점을 너무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습니다. 화차는 화약이 많이 들고,위험합니다.하지만 파괴력이 크지요.이런 파괴력을 고스란히 가진 효율적인 무기.그것이 바로 비격진천뢰입니다.

말그대로 벼락치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날아가 터지는 비격진천뢰의 발사에 필요한 화약의 양은 대포한알과 같습니다만, 그 효과는 화차한대 이상입니다.
커다란 공안에 뾰족한 철조각을 넣고,그 안에 화약을 심은 뒤 발사하면 그 화약이 날아가다가 혹은 날아가서 터지면서 철조각 파편을 사방으로 튀게 합니다.고속으로 튀어나온 철조각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조총부대에게 가장 치명적이었지요.사실상, 비격진천뢰의 개발과 함께 조총부대는 평지전술을 포기,결국 왜성에 웅크린 채 게릴라전술로 변경해야 했습니다.

5.

<신기전>이란 영화가 소위 ‘장안의 화제’인가봅니다. 저는 사극은 드라마건 영화건 잘 보지 않는 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스포일러’가 두렵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래서 <신기전>도 보지 않았고,고작해야 인터넷이나 잡지에 실린 기사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영화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이 없습니다.다만, <신기전>이 정말 명나라가 두려워할 무기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영화 <신기전>은 은유,그 이상은 아니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세종임금이 명나라와 ‘자주성’을 놓고 싸운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매우 격정적인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논리적이고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내심을 가진 방식을 썼습니다.

가령, 명나라에서 매해 얻어와야 하는 달력의 경우,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걸 함부로 만들기 어려운 것이 중세국가에서 ‘달력을 만들 자격’은 천자만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회루 뒤쪽에 달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천체관측기구인 ‘간의대’를 버젓이 만들어버렸으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신들은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안절부절이었습니다. 명나라에서 정식으로 이 문제를 제기했다는 공식문서는 보지 못했습니만.

결국,간의대는 명나라 사신들의 눈에 띄지 않는 북서쪽 구석으로 이전하라는 세종임금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그러나 아무도 세종임금을 자주성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왜냐하면,결국은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달력인 ‘칠정산 내편’을 완성 했으니까요.

자주외교,실리외교....그 모든 중심은 결국 ‘백성의 삶의 질’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신기전’이란 영화가 은유하는 것이 이런 게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것이,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힘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09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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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_Knight
08/09/19 11:2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흥미롭네요. ^^
와이숑
08/09/19 11:2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
08/09/19 11:28
수정 아이콘
이야 좋은글이네요.
나두미키
08/09/19 11:40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새로운 것을 (이라기보다는 이미 알았어야 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Eternity
08/09/19 11:4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대마도주가 선조에게 조총을 준 것은 1591년이겠지요? 1391년이면 조선건국 전이니 말입니다. :)
폭주유모차
08/09/19 11:45
수정 아이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저에겐 어떤글보다 반갑고 재밌네요. 보통 추게로를 안누르는 편입니다만, 이글만큼은 추게로를 누르게 되네요.

좋은글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켈로그김
08/09/19 11:47
수정 아이콘
세계 최초의 파편탄이었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happyend
08/09/19 11:47
수정 아이콘
Eternity 님//수정했습니다.^^감사합니다.
08/09/19 11:51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는 고발한다
08/09/19 12:10
수정 아이콘
중간에 말씀하신 3열 교대발사전술은 '테르시오(tercio)'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스페인 보병군단에 의해 실전화되었고, 스페인의 명장 알레산드로 파르네스가 이 전술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사실 스페인의 진정한 힘은 파르네스의 육군이었습니다. 아르마다니 뭐니 하지만 해군은 허접이었죠).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즐겨 사용했고, 다케다군과 격돌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08/09/19 12:14
수정 아이콘
와, 잘 읽었습니다. 흥미있게 봤네요. ^^
08/09/19 12:21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점이 있는데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염초란것이 필요한데 염초를 대량생산하는 제조비법을 세계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라고 들은거 같습니다.

요 부분이 임진왜란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 싶어요~.
A_Terran
08/09/19 12:31
수정 아이콘
나는 고발한다님// 단순한 3열 교대 일제사격 아닌가요? 제가 아는 테르시오는 장창병과 총병의 혼합배치하여 총병이 쏜 다음 장창병이 돌격하는 전술인데요. 쏘고 뒤로 돌아가서 장전하고 다시 나와서 쏘는 것은 카운터마치라고 한다는군요.
snowstock
08/09/19 12:4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좋네요.
sungsik-
08/09/19 12:42
수정 아이콘
진짜 재밌게 봤어요~
A certain romance
08/09/19 12:4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FantaSyStaR
08/09/19 12:56
수정 아이콘
재밌게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글 자주보고싶어요 ^^
별이될래
08/09/19 12:59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08/09/19 13:1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밀가리
08/09/19 13:23
수정 아이콘
이런 한국사의 야사만 모아놓은 책은 없나요? happyend님이 한번 써보시는게 어떨지. 재미있네요~
The MAsque
08/09/19 13:38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조금만 덧붙이자면,
당시 동북아의 상황을 살피면 조선은 그럴 법 했습니다. 일본은 내란과 더불어 신식 무기의 필요가 급증했고 좋은 기회도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설명하신 조총의 입수 배경이요. 중국 역시 토이기(土耳其: 오스만투르크 제국)를 중심으로 한 유럽 대륙의 치열한 전쟁에 영향을 받아 수석식(부싯돌로 격발하는 방식: 비나 외부환경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격발 속도도 빨랐습니다.) 조총을 들여오게 되지요. 그러면서 화기를 계속 발전시켜 나갑니다. 당시 동북아 시대의 세력은 묘하게 균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재면서 당분간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믿을 만큼 평화스러웠죠. 조선은 조총의 개발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오군영이나 삼군의 전법은 활을 중심으로 하여 재편되기까지 하죠. 안일한 안전의식이 무기의 발전과 국력의 증진의 기회를 동시에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임진왜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으로 조총의 기술을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격변을 읽지 못하는 붓은 국력의 쇠퇴를 가져올 뿐.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08/09/19 13:47
수정 아이콘
삼단격(三段撃ち:さんだんうち)을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나가시노 전투에서 실제 사용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시 되는 부분도 있는 모양입니다.
happyend
08/09/19 13:49
수정 아이콘
opscv 님//여기서 말하는 화약은 '흑색화약'으로 유황,목탄 즉 숯,그리고 염초(초석)을 배합하여 만들어냅니다.유황은 일본에 많고 구하기도 쉬우며 숯이야 말할것도 없지만 이 염초가 문제였습니다.염초는 자연상태로 존재하지 않고,오로지 화학적 방법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가령,산소와 수소를 아무리 오랫동안 같이 두어도 물이 되지 않잖습니까?그래서 물리변화와는 달리 화학적 변화는 지극히 어려운 까닭에 화약의 비법은 오랫동안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고요.최무선도 결국은 알아내지 못하고,배웠으니까요.

이순신은 염초의 대량생산법을 개발한 것은 아니고,그 휘하의 군관이었던 이봉수가 대량생산했습니다만,그것은 최해산의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어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다만 화학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빠른시간내에 만들어낸 일만은 높이 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수많은 전투에 쓰인 화약을 감당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봉수의 공로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대량생산체계를 갖춘 것은 인조시대인 1635년으로 군관 성근이 실험을 통해 알아낸 것을 당시 병조 판서인 이서가 <신전차취염초방>에 기록한 뒤 부터라고 합니다.

덧붙여,<천지현황>총통의 이름은 세종임금시대 만들어진 것입니다.그러니 명종대에 새롭게 개발한 무기는 아니고,다만 판옥선에 탑재한 것을 강조하다보니,글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듯하고요....

이글은 그냥,한국사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추길 바라고 공부하는 사람의 가벼운 산문일 뿐이니,가볍게 읽어주시고요,책으로 출판할 계획은 없으나,저작권을 침해받는 것은 절대로 아니될줄로 압니다.

여러분들의 좋은 지식을 보태주셔서 감사합니다.쉽게 쓰다보니,오타도 많으나...일일이 수정 못하는 점도 양해바랍니다.^^
happyend
08/09/19 13:50
수정 아이콘
나가시노 전투에 사용되었다는 그 전술은 육군사관학교 교수님(당연히,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는)의 논문에서 본 것이라...기약없이 병원신세중인 노트북을 되찾아오면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에궁....
콜록콜록
08/09/19 13:56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매번 좋은 글 고맙습니다!
아우디 사라비
08/09/19 14:05
수정 아이콘
재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막연히 '조선 왕조'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서 세종대왕의 '자주성'부분은 립서비스로 생각됩니다
늘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하늘하늘
08/09/19 14:09
수정 아이콘
우와 정말 글잘쓰시네요.
재미도 있고 읽기도 쉽고 얻는것도 많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08/09/19 14:16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앗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non-frics
08/09/19 14:20
수정 아이콘
우와~~ 너무 재밌는 글이에요. 이런 글 자주써주셔요~~
나는 고발한다
08/09/19 14:34
수정 아이콘
A_Terran님// 앗 죄송합니다 카운터마치 맞아요ㅠㅠ 님의 설명이 모두 정확합니다. 테르시오랑 헷갈렸네요.
데보라
08/09/1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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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겁게 잘 보았습니다.
펠쨩~(염통)
08/09/19 14:48
수정 아이콘
임란전 축성과정에서는 글의 재미를 위해 약간 과장이 들어 있는 듯 합니다. 사실 조총 두자루 때문이라기 보다는 대마도를 통해서 꾸준히 일본이 침략한다는 첩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남부지방에 축성을 지시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200년 평화는 길었고 일본군이 그리 강대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죠. 힘든 부역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일이고 당시 전쟁은 역사속에서나 나오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제법 진지구축이 이루어 졌고 그 덕에 여러 전투들, 특히 1차 진주성의 승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08/09/19 14:59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앞으로 자주자주~
누렁쓰
08/09/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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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지식 감사합니다. 단순히 민족의 아픔과 극복 전쟁으로만 접근했었는데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보니 흥미롭네요.
信主NISSI
08/09/19 16:22
수정 아이콘
재밌고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대세는탱구
08/09/19 16:45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재밌게 잘 쓰시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Legend0fProToss
08/09/1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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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이 쏜다고 다 맞는건 아니지요... 역시나 제일 위험한건 무식한데 용감한사람이군요
Zakk Wylde
08/09/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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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end님// 매우 흥미있게 보았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혹 제 블로그에 이 글을 올려도 될까요? ^^
08/09/1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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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글쎄요.

서양사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포라면 모를까 개인용 소총이 전쟁에 영향을 많이 줄 정도로 쓰인 것은 거의 18세기 되어서 아닌가요?

대포를 공성전에서 쓰게 되면서 효과를 톡톡히 봤던 전투는 콘스탄티노플 공략전이었구요. 그에 맞추어 변화된 성벽의 효과를 보여줬던 것은 로도스도 공략전이었구요. 해전에서 기존 갤리선끼리의 싸움에서 포격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은 갤리아스(대항2에서 베네치안 갈래아스라고 나오죠?)라는 배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레판토 해전이죠. 다 임진왜란과 비슷한 시기지만 이때까지도 총보다는 활을 사용했습니다. (총은 장거리 무기라기 보다는 근접전 무기였죠.)

심지어 영국해군과 스페인 해군이 싸웠던 전투에서도 바다위의 대포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아는 상식. 영국 해군의 대포 사정거리가 스페인 해군보다 길어서..영국이 승리했다지만, 실제로는 워낙 쓸데없이 규모만 컸던 스페인 함대가 바다에서 제대로 전투 한번 치뤄보지 못하고 영국 해군의 화공과 어설픈 보급으로 공동묘지가 되었던 것 뿐이었죠. (이건 디씨 해전갤에서 본 내용임..) 그 시절까지만 해도 장거리 포격전으로 상대방을 이긴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재수좋게 저쪽 배 화약고에 불이 붙지 않는 한.

임진왜란때도 이순신장군님의 대포로 일본 해군을 뽀작낸게 아니라 상대를 함정으로 몰아넣어서 승리한 경우구요.

당시 왜군이 사용한 그 전술이 조총을 순전히 상대방을 겁주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시대 당시 사격 전술이란 사람들끼리 여러줄로 겹겹이 모여서 대충 조준한 후 한번에 여러발을 쏘는 한마디로 탄막을 형성해서 맞으면 다행 안맞으면 말고.. (이게 그 '보링머신-총신에 길을 내서 탄도가 회전하도록 만드는' 나오기 전의 총기 사용 전술이었습니다.)였기 때문에.. 한 줄씩 쏘고 나머지 두 줄은 재장전하고 있는 전술로는 탄막이 어설프게 형성될 수밖에 없기때문에 상대 밀집 대형에 피해를 주기 힘들겠죠. 그래서 위의 A_Terran님 말씀이 맞습니다. 카운터 마치는 근세기에 나온 전술이죠. 그 전에는 우선 근접한 후 창병끼리 붙기 전에 3열로 서있는 총기부대가 상대방에 한 방 쏜 후에는 더이상 할 일이 없었죠.

활이 총기에 비해 단점은 적어도 그 시대에서는 '기술'이 필요하다 뿐이었습니다. 총기는 아무나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활로 멀리있는 무언가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훈련이 필요했거든요. 그나마 공성전에서는 확실히 화약을 사용한 전술이 많이 개발되긴 하였습니다만, 야전이나 해전에서는 역사를 바꿀 정도의 이펙트를 보여주진 못했었죠.

아무튼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 화기는 장거리 무기로는 활이나 석궁보다 못하였습니다. 근접전 무기였죠.
happyend
08/09/19 19:03
수정 아이콘
펠쨩~(염통)님//^^언제나 흥미로운 댓글 감사하고요,
제가 현재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임진왜란과 관련된 글들은 5년전에 읽어 기억도 잘 나지 않아,날짜와 명칭은 부정확합니다만....

임진왜란에 대해 조선에서 낌새를 알아챈 것은 왜관이 텅텅 빈 뒤부터라고 합니다.그제서야 이일과 신립을 축으로 하는 전시체제에 돌입했고,각지방의 무기고를 점검했습니다.물론,그결과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는 안봐도 비됴입니다만...

이순신의 경우는 그 점검단이 떠난 바로 직후인 2월 19일에 각 포구와 진영을 순시 다시 한번 점검합니다.장계에 잘 되었다고 보고서가 올라간 사도포구는 그 보고서가 허위란 것을 알고 징계를 내리기도 하였고,전시체제에 들어갔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순신의 경우일 뿐이었고,대부분은 축성과정에서 지방 토착 양반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목민관'이란 상소문에 목이 간당거리기도 했습니다.

김시민의 경우...개인적으로 가장 연민이 가는 인물이라...다음에 다룰까 생각중이었습니다.기회가 된다면(이번 여름에 진주성을 다녀왔고요....)

그러므로,제글은 다소 과장은 있으나 '왜곡'은 아닐 것입니다.

Zakk Wylde 님//네....
(이글의 목적은 그냥,역사를 즐기자...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그러나,출처는....혹시 모르니 밝혀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나이트해머
08/09/19 20:29
수정 아이콘
소총은 16세기때부터 활용되기 시작해 17세기엔 이미 대세를 잡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화력이 매력적이었죠. 조준사거리는 짧지만 일단 사거리 안에 들어온 적에겐 확실한 데미지를 가할 수 있으니까요. 중세 기사들로 대표되는 기병돌격이 무너진 것도 저 소총의 등장입니다. 최대한도로 발달된 활로도 반복되는 기병돌격에 맞서 확실한 데미지를 가하진 못했습니다. 그만큼 기병돌격을 버텨줄 보병대가 강해야 했죠. 대표적 케이스가 스위스 용병대지만, 근성의 스위스 용병대도 수십차레의 기사돌격에 무너진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소총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었죠. 사거리 자체는 짧지만 일단 사거리 안에 들어온 기병은 확실하게 쓰러집니다. 이게 반복되는 랜스차징때마다 누적되면 결국 보병보다 기병이 먼저 무너집니다. 그 결과 기병은 돌격해 적진을 충격효과로 무너뜨리는 창기병에서 총을 들고 카라콜 전술로 적을 살상하는 킬링효과 중심인 총기병으로 전환됩니다. 총병의 살상효과가 궁병보다 사거리 면에서 밀림에도 불구하고 두배 정도 됐죠, 아마.

17세기 유럽의 보병전술이라면 스페인에서 유래한 테르치오와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오렌지공 모리스가 개발한 선형진인데, 테르치오의 경우,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26열의 총병대가 존재하며, 카운터마치 전술 역시 이미 쓰고 있었습니다. 연속사격을 위해서 필요한 최적열수는 15열인데 26열이나 갖춘 이유는 속도 때문이었죠. 15열로 배치될 경우 총병들은 분당 30m 속력이 한계였지만 창병들은 분당60m 전진이 가능했고, 이 속도에 맞추기 위해 화력 효율 감소를 감수하면서 26열을 유지했습니다. 원거리에서는 총병이 창병 좌우와 앞에 배치되어 사격전을 펼치고, 근접전시에는 창병 안으로 들어가거나 주위를 돌면서 각자 사격을 하는 식이었죠. 테르치오, 특히 스페인 테르치오는 무적전설을 150여년간 유지합니다. 치가 떨리는 방어력으로 측면 기병돌격이든, 고지 위에서의 연속사격이든, 심지어는 네배 이상의 적의 포위공격마저도 버텨내는 괴력을 보였죠.
선형진은 이 테르치오를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전술로, 테르치오와 비교한다면, 선형진은 총병의 화력효율을 최대로 발휘하게끔 조직된 전술이란 게 특징입니다. 당대 최정예군이었던 네덜란드 군에 맞춰서 개발된 전술로, 숙달된 네덜란드군 총병들의 연속사격을 위해서는 10열이 필요했는데(이는 총기차이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페인군은 화력이 강한 대신 연사속도가 느린 중 머스킷, 네덜란드군은 균형을 맞춘 표준 머스킷이니까.)이에 맞춰 총병을 10열로 배치하고, 2000명 단위인 테르치오 연대 대신 800~1000명 단위의 소규모 연대와 이 연대 넷을 합친 여단을 만들죠. 한개 연대는 총병 두개대대(10열)와 창병 두개대대로 편성되어 있고요. 자유로운 사격을 선택한 테르치오와는 달리 엄격한 화력통제를 통한 일제사격을 선택합니다. 카운터마치와 일제사격의 조합은 특히 한 횡렬식 물러나면서 사격할때 극대화됩니다. 창병 속도에 총병 속도를 맞추기 위해 화력 효율을 포기한 테르치오와는 달리 화력 효율을 위해 총병 속도에 창병 속도를 맞춰 분당 30m 전진이 가능했던 전술입니다.
펠릭스~
08/09/19 21:03
수정 아이콘
저도 조총에 대해서는 별로라고 생각했다가
역사 스페셜에서 의외로 나무토막을 말 그대로 아작내버리는 화력에 깜짝 놀랐죠
일본 박물관에 남아있는 주먹만한 관통 흔적이 있는 갑옷이라던지

활과 뇌가 여러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 조총의 화력도 실제 전장에서는 상당히 공포스러웠을꺼 같더군요
문제는 평지에서 싸우려고 깝쳣다는거
포는 확실히 조선이 앞서있었는데 그걸 이용하지 않은게 참...
껀후이
08/09/19 21:30
수정 아이콘
와~~이런 글 너무 좋아요~~~~~
고홍석
08/09/20 00:03
수정 아이콘
이런 류의 글 계속 써주셧으면 우왕!.
율리우스 카이
08/09/20 02:06
수정 아이콘
일본사 전공하시는 분들이나 혹은 일본학자들 가운데에는 오다노부나가가 3단철포로 '화망'을 구축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시거나 정설로 받아들이시는 분들이 많은데,

반대로 서양전쟁사 쪽 분들은 약간 코웃음 치는 분위기죠. 네덜란드의 마우리츠공에 의해 제안되고 노르웨이의 구스타프 아돌프가 백년전쟁에서 카톨릭리그군을 격파한 선형진에서나 라인배틀에 의한 화망구축의 개념이 유럽에 정착되었는데, 이게 1620년대거든요. 일본애들이 주장하는 노부나가의 3단철포 화망구축설은 당연히 임진왜란 전이니 유럽의 그것보다 40년전이죠. 포르투칼로부터 총포를 들여온 일본이 유럽보다 40년먼저 선진적인 철포 전술을 개발했다는 이야기이니, 어느쪽이 좀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판단하시기 나름입니다.

조총이 당시 강력했던 물건임에는 확실합니다만, 갑옷에 대한 관통력이 뛰어나다는 점과 활이나 석궁보다 훈련기간이 덜 필요하다는 점외에는, 활보다 크게 뛰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연사력이나 살상력, 기후에의 적응도, 보급문제(화약/총알 보급)등에서는 활이 더 유용한 무기였으니까요.

신립장군의 기마대를 무찌르는데 조총이 큰역할 을 했을거라는데에는 크게 의심하지는 않습니다만, 전체적으로 공성전이나 전면전에서 위력을 발휘한건 조총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대규모의 조총부대를 보유한 일본군대는 노부나가군을 제외하고는 많지 않았고, 왜란당시의 기록에도 조총수의 비율은 10%정도라고 하더군요. 왜란 일본 육군의 주력은 긴창이나 큰칼을 쓰는 근접전 부대였다고 합니다. 일본 전체가 조총이 주력이 된 시기는 17세기가 되어서야 찾아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화약전쟁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는 될 수 있지만, 약간은 과장 (^^)이 끼어있긴 하죠. ^^

좋은글에 감히 덧칠해서 죄송합니다만, 재밌게 잘읽었다는 감사의 말 또한 드리고 싶습니다.
08/09/20 03:29
수정 아이콘
정말정말정말 재밌네요 이런 글 어디서 또 읽을 수 있을까요 ㅠㅠ 너무 재밌었어요
08/09/20 07:29
수정 아이콘
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비격진천뢰...맹꽁이서당이었나 윤승운님의 작품에 나온 적이 있는데
최초의 시한폭탄이었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나네요.
happyend
08/09/20 09:56
수정 아이콘
율리우스 카이사르님//^^
짝복님//블로그 주소 지웁니다.보셨으리라 여기고....
성야무인
08/09/20 11:14
수정 아이콘
율리우스 카이사르님// 전 오히려 전국시대때 3단 철포로 화망을 구축했을지도 모를것이다라고 생각은합니다. 다만, 그게 정말 전황을 뒤집을 만큼 혹은 전술적으로 효용성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일본사에 나오는 오다노부나가식전술을 보면 공세때 3단철포술을 주된 전략으로 썼다고 나옵니다만, 제가 아는 지식으로 3단철포 혹은 4단철포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앞에 방어벽을 세우고 뒤에 철포를 격자로 배치시켜 적을 요격하는 전술인걸로 아는데, 실제 이런식으로 공격전에서 병참을 구축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일이고, 이런식으로 인원을 배치시킬려면 넓다란 평야에서로 적을 대치된 상태에서 먼저 자리를 잡아야 되고, 만약 적이 기마위주라면 (일본의 기마병은 몽고의 기마병과는 달라서 말타고 싸우는곳까지 가서 내려서 싸우는 -_-!!) 오히려 선수를 빼앗길 가능성이 높아, 도저히 대규모로 썼을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소규모의 (100 혹은 200개의 조총) 병력으로 적의 기선을 제압할때 썼을 가능성은 높고, 이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 나오는 환상적인 철포대는 저도 없었을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또하나 일본의 철포대는 일본성곽의 간격으로 인해 (높고 넓은) 방어전에는 괜찮은 효과를 발휘했을것으로 보이지만, 임란때 조선의 성을 점거하고 지킬때 철포의 효과는 일본성과는 다른 조선의 성의 구조때문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수비병이 성위에서 지키는 공간은 일본성에 비하면 좁아서) 전혀 유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3단철포는 존재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술, 전략적 가치는 미비하고, 오다 노부나가도 이점을 이해하고 기선 제압의 용도로 썼지 대부분은 보병과 창병의 탁월한 운용이라고 봅니다 (아 외교술도 뛰어났죠~~)
Eternity
08/09/23 03:10
수정 아이콘
율리우스 카이사르님// 구스타프 아돌프는 30년 전쟁에서 활약했던.. 스웨덴 국왕 아니었는지요?
A_Terran
08/09/24 16:44
수정 아이콘
Eternity님// 스웨덴 국왕 맞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가 선형진을 더욱 가다듬고 발전시켜서 장창병과 총기, 대포의 조합으로 진정한 의미로서의 테르시오를 격파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SperoSpera
11/09/11 20:36
수정 아이콘
삼단철포는 이순신이 철쇄 그러니까 쇠사슬로 왜선을 뒤집었다는 애기에 버금가는 낭설 아니던가요?.

그 근원을 보자면 오제 호안의 신장기인데 신장기라는 것은 에도시대의 군기물로써 사료적 가치는 거의 없는 논픽션 소설 정도의 물건이라 신용도는 없다고 봐도 좋은 서적입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저격한 오케하자마 기습설(.....)등을 비릇한 오다 노부나가 떡밥들의 진원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당시 민중의 입맛에 딱 인터라 널리 퍼진데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 정부 차원에서 마치 사실인냥 교과서등에 기록해서 전 일본을 떡밥에 몰아넣은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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