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2/04/03 20:38:10
Name 눈시BBver.2
Subject [오늘] 4.3 (1)


한국 역사에서 가장 특이한 곳은 제주도일 것입니다. 백제에게 조공을 바치긴 했지만 정식으로 귀순한 때는 고려 때이고, 지방관을 파견한 건 고려 숙종 때에 가서야 가능했고, 그나마 지방관과 제주의 호족이 공존했었죠. 한국의 역사가 교체기를 맞이할 때마다 제주도에서는 큰 사건이 하나씩 일어납니다.

첫째는 1374년 최영이 토벌한 묵호의 난, 이 곳의 몽고인들을 토벌하려는 것이었지만 제주도인도 고려에 맞서 싸웠습니다. 두 번째는 1901년 이재수의 난, 특이하게도 그들이 들고 일어난 대상은 선교가 허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천주교였습니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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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찾아온 건 기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의 제한이 끝나고 사람들 내에서도 과소비가 시작된 게 영향이 없진 않았지만, 문제는 미군정의 오판이었죠. 그들은 어느 정도의 쌀을 배급한 후 나머지 쌀은 시장에 내놓았지만 부족했고, 시장에 풀린 쌀의 값은 천정부지로 치솓았습니다. 해방 후 남한에 돌아온 인구만 186만여명, 미군정은 이런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죠. 일제 때는 그래도 일본 본토와 만주에서 부족한 분을 들여올 수 있었지만 미군정은 뒤를 생각하지 않고 그걸 모두 금지합니다. 마셜 플랜 후의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은 아직 있지도 않은 때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 걸 보면 무능이라고밖에 볼 수 없죠.

여기에 전국에 퍼졌던 콜레라는 민심을 더 흉흉하게 만들었습니다. 46년 8월 27일, 이 때까지 전국에서 10995명의 발병자가 나왔고 그 중 7193명이 사망합니다. 미군정은 이를 제대로 잡지 못 했고, 오히려 간염자가 많은 대구를 봉쇄해 버렸습니다. 이승만은요?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_-

그 중에 제주도의 간염자는 708명, 그 중 사망자는 369명이었습니다.

제주도는 그 위치상 일본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습니다. 재일교포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 돌아온 이들도 많았구요. 그런 그들에게 일본과의 교역이 완전히 끊긴 것은 재앙이었습니다. 돌아왔다가 일본으로 다시 밀입국 하려다 잡힌 경우도 많았습니다. 갑자기 늘어난 인구, 그걸 따라가지 못 하는 생산량, 밑도 끝도 없이 외부와 단절해 버린 미군정, 부족한 식량과 콜레라... 제주도의 민심은 흉흉해지기만 했습니다.

여기에 제주도의 특성상 "쌀"까지 밀수해 버린 놈들이 있었구요.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있다고 일본에서의 밀수품도 들어왔지만 소수가 다 가져 버립니다.

아주 자알 돌아가는 상황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선동은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흉흉한 소문이 돌았죠. 오키나와 같은 경우처럼 제주도를 미군이 상설기지화 할 것이라든가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건국을 준비하고 있던 자들은 제주도의 좌익이 70%라느니 60%라느니 80%라느니 말이 많았습니다만, 미국은 그 때까지도 제주도 내의 좌익을 여운형의 건준에서 시작된 온건 좌익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죠. 제주도 좌익의 뿌리는 소련이 아니라 일본이었고,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육지에서 일괄적으로 진행되는 남로당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꽤나 늦은 시점까지도 미군정에 비교적 협조했습니다.

47년 3월 1일, 민전의 주도 하에 기념 행사가 열립니다. 계속 가열되던 제주도의 상황, 미군정은 이들에게 가두행진과 데모를 금지하고 그 외의 행사는 읍면 단위로 작게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제주도인들은 그나마 있는 것들을 착취하고 밀수를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 여전히 억압을 행사하는 친일 경찰들을 몰아내 주길 바랬습니다만, 미군정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전국적으로 거행된 3.1절 행사에서 긴장이 계속되던 때, 기마경관이 어린 아이를 치는 사고가 벌어집니다. 이를 본 군중은 격분해 경찰서에 이를 따지러 갔고, 경찰은 습격으로 오인, 6명이 사망합니다.

+) 이 부분이 가장 엇갈리는 부분일 겁니다. 군중이 한 게 단지 항의였나 습격이었나, 경찰이 대응한 게 정말 오해였나 어쨌든 상관 없다였나 등으로 말이죠.

이후 미군정과 군경 측에서는 급히 응원병력을 파견했고, 김구의 독촉 등 우익단체도 제주도에 사람을 보내 우익 성향을 최대한 퍼뜨리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본토에서 있었던 과격한 행위를 했음은 굳이 말 할 필요 없겠죠.

"우익의 테러리즘, 경찰에 반대하는 좌익의 선동, 통상적인 노동자들의 요구 등이 3월 22일 파업의 기본적인 원인이 된 것 같다."
"3월 5일부터 15일까지는 우익 테러리즘과 좌익이 선동한 학생의 파업으로 점철되었다."
- 미군 방첩대 보고 -

47년 초, 좌우 양측의 대립은 폭발 직전으로 흘렀습니다. 기본적으로 우익이 짓누르고 좌익이 반발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미군도 저렇게 파악했듯 거기에는 우익의 테러와 생활 개선을 요구하는 정당한 요구도 들어 있었습니다. 남로당의 선전은 거들 뿐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3월 13일부터 총파업이 시작됩니다. 거기에는 모든 공장부터 시작해 학교의 교사와 학생, 군정이 고용한 인원부터 군경까지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수는 75%에 이르렀습니다.

"총파업의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3월 1일 폭동 당시 경찰의 행동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 것 같다. 이 증오심을 남로당의 선동으로 고무되어 왔다."
- 미군정 보고서 -

근본적인 원인은 두 가지로 나뉘었죠. 하지만 사람들이 집중한 건 언제나 후자였습니다. 파업을 일으킨 측에서는 남로당에 대한 얘기는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고 3.1 사건에 대한 보상과 그 책임자를 해임하라는 것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도, 경찰도 거기에는 관심 없었습니다.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 - 경무부 최경진 차장


3월 14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직접 와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주모자들을 검거하라고 명령합니다. 포고문을 굳이 옮길 필요 없을 겁니다. 경찰의 발포는 정당했고 대다수의 선량한 제주도민들은 곧 건국될 대한민국을 정부를 믿고 경찰을 믿으라는 거였고 "일부" 과격한 놈들은 잡아야 된다는 거였죠.

그 동안 제주도 내의 좌우 대립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조병옥이 온 그 날에 우도에서 경찰관파견소 간판이 파괴되는 일이 벌어졌고 제주도가 안정된다고 떠들어대는 신문들과 달리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300여명의 경찰이 도착합니다. 파업이 정리되고 있다는 발표와는 달리 3월 22일, 남로당은 다시 전국 총파업을 전개합니다.

이 사건으로 전국에서 2176명이 검거됐고, 제주도에서는 230명이 검거됩니다. 후에 조병옥은 경찰관으로서 파업에 가담한 66명을 징계합니다.

그나마 이 때까지는 파업 주동자에 대한 처벌이 엄하진 않았습니다. 2차 미소공위가 시작되고 있었으니까요.

47년 6월, "종달리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이전에 이미 "미제를 타도하라"는 삐라가 뿌려졌고 이를 살포한 중학생 20명이 검거됩니다. 민청에서는 이를 단속하던 경찰관 3명을 집단 폭행했죠. 6월 6일이었습니다.

이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새로 제주도에 온 김영배 제주경찰감찰청장은 "제주도만은 좌우가 손을 잡고 나가도록 합작운동에 노력할 심산이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좌우익의 화합을 원했습니다만, 결국 실패합니다. 한편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은 계속되는 우익의 탄압에 3월 14일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후에 그는 제주도 민전 의장에 추대됩니다. 이렇게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이들이 힘을 잃으면서 극우 인사들이 제주도의 일을 맡기 시작했고, 좌우익의 대립은 극으로 치닫습니다.

8월 7일, 미제 타도 및 극우 인사들을 암살하라는 삐라가 뿌려지면서 이른바 "8.15 폭동음모"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는 박경훈 전 제주도지사도 포함됐습니다.

미군정은 배급을 위해 전국의 수확을 거두려고 했습니다만, 제주도에서는 목표량에서 1%, 나중에야 22%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47년에는 13%에 불과했죠. 민심은 미군정을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제주도 출신 및 민심을 어떻게든 챙기려 했던 관리나 경찰은 쫓겨난 지 오래였습니다. 이것이 제주도민들이 원했던대로 "부패 및 억압을 저지르는 이들"을 자른 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 대신에 온 건 제주도민들을 토벌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극우와, 서북청년단이었습니다.

미소공위가 결렬돼 가면서 이들은 힘을 얻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좌익으로 분류한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계속하면서 힘을 합쳐 "대동청년회"를 발족합니다. 이들은 제주도를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보고했습니다.

이렇게 제주도민에 대한 대응이 진압 일변도로 가면서 제주도 내의 남로당도 궁지에 몰렸습니다. 특히 1월 중순에 조직의 연락책이 검거되면서 제주도 남로당의 조직 체계도가 노출돼 버렸죠.

48년 1월 22일, 경찰은 신촌리에서 남로당원들의 회의장을 급습했고, 106명을 검거합니다. 이후에도 115명이 체포됐고 총 221명 중 63명이 방면됐죠.

2월 1일, 김익렬 소령은 9연대장에 임명됩니다.

제주도 남로당은 조직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고, 동시에 그 무엇보다 막아야 될 일이 닥쳐버렸습니다. UN에서 한국의 총선거를 결정했고 "UN이 관할할 수 있는 지역에서 우선 선거를 치른다"고 하면서 한국에 들어온 것이었죠. 소련이 이를 거부하면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됐습니다. 전국에서 남로당의 공격이 시작됐고, 제주도에서도 곳곳에서 이들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이들이 수면에 노출된 덕분에 군경은 목표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됐고, 이 때문에 제주도에서도 남로당을 탈퇴하고 우익 대동청년단에 입단하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몰릴대로 몰린 제주도 남로당, 그들의 마지막 수단은 총공격이었습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김달삼, 만주군 소위로 복무했던 경험 덕분이었습니다.

그렇게 4월 3일이 밝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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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초, 좌우익은 물론 미군정도 무언가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코 앞으로 다가온 총선거였죠.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에서 제주도에는 2개 선거구가 예정돼 있었습니다.

남로당에서는 이를 방해하기 위한 여러 공작을 행했지만, 제주도의 남로당이 한 건 그들의 지시를 넘은 것이었습니다. 좌도 우도 몰랐던 게 있었죠. 제주도는 섬이었습니다. 육지에서야 실패하면 도망가면 그만이었지만 제주도에서는 탈출하려면 바다를 건너야 했고, 인구도 적었던만큼 군경의 진압도 더 날카로웠습니다.

김달삼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남로당은 독단적으로 일어납니다.

4월 3일, 350여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새벽 2시에 제주도내 12개의 지서를 공격합니다. 이후 이들은 4월 내내 공격을 지속해 경찰관과 그 가족, 선거사무소 등에 대한 총공격을 가합니다.

제주도에서 선거를 위해 등록된 인원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65에서 70% 가량, 하지만 선거 당일까지 양측의 전투가 계속되면서 투표소 40여개 소가 마비됐고, 투표율이 과반수를 넘지 못 하면서 제주도에서의 선거는 연기됩니다.

이 때까지도 양측에서 피해자가 어느 정도 나오고 있었고, 4월 29일까지 경찰 사망 9, 남로당 무장대 12, 양민 25, 신원 미상 19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후의 지옥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는 만주군 소위 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 1기 수료 후 9연대장에 임명돼 있었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전혀 다른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22일부터 그는 무장대에 삐라를 퍼뜨리면서 평화 협상을 주도했죠. 4차례에 걸친 시도가 실패한 후 5차 협상에서 그는 김달삼과 직접 만나 72시간 내에 모든 전투행위를 중지하기로 합의합니다. 또한 군경 관련자들도 설득하면서 24시간 내에 모두 귀순할 수 있게 하겠다고 설득했죠. 4월 28일의 일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비극만은 막아보려 했던 김익렬, 하지만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5월 1일, 귀순자들이 수용돼 있던 오라리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납니다. 군경은 이를 배신자에 대한 좌익의 응징이라 발표했지만, 그 실상은 서북청년단의 공작이었죠. 이렇게 평화협상은 깨집니다.

5월 5일, 급히 파견된 조병옥 경무부장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 합니다.

"너부터 빨갱이다. 네가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은 이 반란사건을 더 조장시키는데 불과하다."

김익렬은 군경의 기강이 문란하고 진압이 너무 과격하다면서 전권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지만, 조병옥은 그가 제출한 증거물을 모두 조작이라고 하며 빨갱이로 밀어붙입니다. 흥분한 김익렬은 조병옥과 몸싸움을 벌입니다.

잡으라는 빨갱이는 안 잡고 그들과 타협하려 한 "게으른 군인" 김익렬, 그는 다음 날에 해임됩니다. 그리고 이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립니다.

결국 제주도의 선거는 실패했고, 미군은 구축함 크레이그호를 투입하며 해상을 봉쇄합니다. 수원의 11연대가 증원됐으며 경찰 역시 450명이 증원됩니다. 이 상황을 보다 못 한 41명의 군인도 탈영했구요. 후에 잡힙니다만.

그래도 이 때까지의 상황은 나은 편이었습니다. 제주도는 섬, 육지에서 병력이 계속 증원되면서 무장대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한라산으로 들어가 밤에만 나오는 게릴라전을 계속하고 있었죠. 상황은 비교적 안정됐고, 8월에는 김달삼이 북한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갔다 올 정도였습니다. 그 동안 8월 15일, 대한민국의 정부는 수립됐고 9월 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습니다.

이 때까지 억울하게 죽은 양민이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억울하게 잡혀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오긴 했지만, 13살의 어린 소년이 경찰서에서 고문으로 죽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았습니다.

앞으로 있을 지옥에 비한다면요.

10월 5일, 제주경찰감찰청장에 제주 출신 김봉호 대신 평남 출신 홍순봉이 임명됩니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제주도 출신들은 모두 물러났고, 본토 출신, 그것도 강력한 반공 성향을 가진 이북 출신들이 대거 기용됐으며, 서북청년단의 행동은 극단으로 치닫았습니다.

10월 17일, 토벌군은 제주 해안 5km를 제외한 모두 지역을 봉쇄합니다. 이 범위를 벗어나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것이었죠.

무차별 학살의 제도적인 배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직후, 무차별 학살의 명분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죠.

10월 19일, 제주도에 증원하기로 한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사건이 발생합니다. 여순 사건입니다. 제주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됐던 김상겸은 파면, 송요찬이 임명됩니다. 군 전체에 가해진 숙군과 함께 제주도는 다른 국면을 맞이합니다. 빨갱이가 어디 있을지 모른다, 모든 제주도민은 잠재적인 빨갱이이며 무장대와 내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11월 1일에 무장대와 내통한 경찰들이 체포되기도 했구요.

후........

현재 교과서에서는 제주도 중산간 일대에 마을이 없는 것을 제주도의 환경 탓으로 적습니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화산 섬이기에 물은 해안가에서나 볼 수 있고, 그래서 취락이 집중돼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중산간 일대에서도 물이 솟아나오는 곳은 많고, 4.3 이전만 해도 많은 취락이 분포돼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해안가 중심으로 개발돼서 이 일대는 골프장 등의 들판 이외에 쓰이지 않지만요. 이 때부터 중산간의 모든 마을은 소개됐고, 주민들은 해안으로 몰렸습니다. 그걸 거부하거나 제대로 대응을 못 해 남은 사람들, 무장대의 가족으로 차마 그들을 버릴 수 없었던 이들, 혹은 그저 군경이 원한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 한 사람들은 모두 공격의 대상이 됐습니다.

11월 7일, 구좌면 행원리 가옥 20여채 방화, 주민 10여명 총살. 남원면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 서귀면 서귀리에서도 노인과 어린이를 비롯한 피난하지 못 한 주민들 학살 및 민가에 방화

"CIA는 훌륭히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9연대장 송요찬 중령은 강력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 로버츠 주한미군사단고문단장

11월 13일, 애월면 하가리 25여명 집단총살, 소길리 원동마을 50~60명 집단총살


11월 17일, 대통령령 제 31호,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 선포. 구좌면 하도리, 종달리 주민 10여명이 숨어 있던 다랑쉬굴 발견, 바깥에서 불을 질러 질식사

12월 22일, 표선면 가시리에서 소개된 주민들 중 "도피자가족"(가족 중 빠진 사람이 있는 경우 무조건 포함) 76명 집단 총살

12월 31일, 제주도지구 계엄령 해제

1월 1일 무장대, 제주읍 오동리의 군대 기습, 무장대 10명 2연대 7명 전사

1월 3일, 무장대 제주읍 삼양리, 남원면 하례리, 한림면 협재리 기습 군경을 도운 주민 살해
같은 날 경찰과 특공대원들이 무장대로 위장, 제주읍 도평리에서 주민들의 반응을 본 후 이틀 동안 70여명 총살

1월 4일, 제주읍 화북리 곤을동 주민들 총살

1월 12일, 무장대 남원면 의귀리 주둔군 기습, 이후 의귀국민학교에 수용한 중산간마을 주민 80여명 집단총살

1월 13일, 무장대 성읍리 공격 주민 38명 학살


너분숭이 애기 무덤

1월 17일, 마을 인근에서 기습 받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조천면 북촌리 방화 및 이틀 동안 주민 400여명 집단총살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미국)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 대통령 이승만


1월 22일, 안덕면 동광리, 상창리 주민 80여명 서귀포 정방폭포 부근에서 집단총살

2월 4일, 감녕리 부근에서 무장대의 기습, 군 15명과 경찰 1명 전사, 그 보복으로 합동작전 전개하여 주민들 수백명 총살

2월 12일, 관음사 등 도내 15개소의 사찰 방화, 스님 16명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


"제주읍 도두리에서 민보단원들이 군경의 감독 아래 76명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 미군사고문단

2월 27일,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39명 사형 집행

"9연대는 모든 저항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고, 1949년 3월까지 제주도 인명피해 15000명이며, 게릴라들이 본토나 북한으로 부터 병참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4월 16일, 신성모 국방장관과 로버츠 군사고문단장 회합, 군경과 서청 회원들을 순차적으로 제주도에서 철수시키기로 합의

5월 10일, 재선거 실시

5월 1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해산


10월 2일, 군법회의 결과 사형이 선고된 249명에 대한 총살형, 암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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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명칭을 무엇으로 할 지는 역시 문제입니다. 남로당계 공산주의 무장대들의 폭동으로 시작했으니 폭동으로 하는 게 그리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반면 항쟁이라 볼 여지는 적습니다. 47년 3.1 사건부터 시작된 파업은 당시 제주도의 문제에 대해 들고 일어난 것이 맞고, 이는 항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미군정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감도, 남로당을 위한 주장도 들어 있지 않거든요. 제주도민들이 좌익으로 기울긴 했지만, 이 때의 파업은 우익에서도 찬성한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9월 총파업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시작이 된 4.3은 다릅니다. 이는 궁지에 몰린 남로당 무장대의 공격이었으니까요. 설령 제주도민들이 여기에 동조했다 하더라도 이것을 제주도민 전체의 항쟁이라 부르기엔 약합니다. 분단을 막기 위한 항쟁이니 뭐니 하지만 이것이 이미 북한에서 김일성 밑에 들어간 남로당계에서 저지른 것이었고, 북한이 딱히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 것도 없이 이북에서 지들 세상 만들고 있엇던 상황, 그러면서도 남한의 단독 선거는 방해하기만 한 상황에서 큰 의의를 줄 수도 없습니다.

이들이야 순수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합니다. 이후 여순 사건 후 "빨치산"의 시작이 됐던 이들은 정말 남한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기 위해, 통일을 위해 힘 썼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라면 당시 공산당의 지도부보다 정말 순수한, 진정한 공산주의자였을지 모르죠.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서청 같은 청년 단체들도 공산주의가 없어져야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순수하게 믿었을 것이거든요.

이들이 직접 죽인 수가 적다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했다고 이들이 옳았다고 할 수 없으며 이들에게도 큰 책임을 물어야 됩니다. 4.3 당시에는 육지에서의 지령이 없이 궁지에 몰린 그들이 발악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일이 진행되면서 김달삼이 직접 북한에 갔다 오는 등 북한과 확실히 연결됐으니까요. 제주도라고 좌익만 대세인 것도 아니었고, 군경부터 그 가족들을 죽이는 걸 넘어서서 군경에 협조했다고 이들을 죽인 수도 그리 적진 않습니다. 직접 만나보진 못 했습니다만, 친척 중에 무장대와 군에게 한 명씩 당한 분도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이 때 항쟁한 이들을 "북한 주민"들이라 칭하고 있죠.

그럼 뭐냐구요? 그럼 그렇게 죽은 분들은 그냥 개죽음이었냐구요?

네.

차라리 그들이 진성 공산주의자였거나, 진짜 남한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었다면 이들을 적으로 보든 열사로 보든 그나마 마음 놓고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최소한 그랬다면 신념을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이니까요.

대체 그들이 무엇을 했다는 겁니까?

그냥 자기 마을을 떠나기 주저했던 이들, 가족이 무장대고 남로당이라서 차마 버릴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엮여 들어간 이들, 단지 군경의 "눈"에 띄였을 뿐인 이들, 하필 바로 근처에서 무장대가 나와서 그 보복으로 끌려갔던 이들.....

저는 기본적으로 이승만의 친미 노선은 옳았고, 반공 노선 역시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같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공산당이 쉽게 퍼질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반공도 반공 나름이죠.

무엇을 위한 독립이었습니까? 한국인들이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기 위한 독립 아니었나요?

무엇을 위한 건국이었습니까?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이제야 좀 제대로 살아보자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들이 공산주의를 외쳤습니까? 아니예요. 그들은 미군정이, 정부가 자신들의 사정을 제대로 알고 좀 도와주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극우의 대대적인 탄압 뿐이었습니다.

아, 예. 이해는 되요. 선거가 제대로 안 되고 여순 사건으로 대체 누가 빨갱이인지, 우리 안에 빨갱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퍼졌겠죠. 조금이라도 빨리 사태를 안정시켜야 한국이 평화적으로 정부를 세웠다는 것을 전세계에 선포할 수 있었겠죠. 예,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으니 빨갱이들은 빨리 죽어주십시오 한 것이겠죠.

그래서, 국민이 그렇게 쪽팔렸습니까?

정조는 정도가 바로 세워지면 사도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당시 공산주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해도 이게 모든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순 없어요.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해방 후 어지러운 국면을 틈 타 온갖 부패를 저지르며 국민의 생활고를 더 악화시킨 것은 누구였습니까? 한국에 대한 무지와 무시로 사퇴를 악화시킨 것은 누구였죠? 네, 그런 어려운 시절 아무리 잘 해도 국민들을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했겠죠. 그래서, 잘 했습니까? 그 모든 것을 공산주의 때문으로 돌릴 자격이 그들에게 있을까요?

대체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은 겁니까? 그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죽인 건 누굽니까? 빨갱이는 죽이고 강간하고 때려 패고 가지고 놀아도 되는 겁니까? 그들이 정말 빨갱이일까, 대체 왜 내가 같은 민족, 같은 국민을 죽여야 되나 하는 의심을 품진 못 했을까요?

친일파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했는데, 역시 이 모든 걸 친일 청산이 안 되는 것으로 돌리는 것 역시 "확실한 적"을 찾기 위한 물타기일 뿐이예요. 친일파가 문제가 아니예요. 김익렬은 친일파였고, 그를 빨갱이로 몬 조병옥은 그래도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아니, 그 대가리인 이승만은 당시 해외파 독립운동가 중에 가장 명망이 높은 자였어요. 그래서, 김익렬이 옳았습니까 이승만이 옳았습니까? 김익렬은 그 후에도 계속 빨갱이로 몰리다 한국전쟁 때 참전해서 싸웠으면서도 지금까지 심심하면 빨갱이로 몰리고 있습니다.

단지 반공이 문제가 아니예요. 그 당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었던 사람 중에 반공을 무시하는 사람은 앉아 있을 수 없었겠죠. 문제는 단지 반공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을 낙인 찍고 고문하고 몰아 죽이고 그런 빨갱이들을 한반도에서 지워버려야 한민족이 평화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미친 놈들이 득세할 수 있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친일파든 독립운동가든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든 이 정도의 반공을 외쳐야 제대로 해 먹을 수 있었던 세상, 친일파는 그 안에 들어있는 요소일 뿐입니다. 미쳐 돌아갔던 일제 시대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미친놈일 가능성이 아닌 사람보다 더 높았을 뿐이죠.

제주도 출신일 경우 더 그렇고,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 군경에서 그런 "게으른" 이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타 지역으로 전출됐고, 역시 빨갱이로 몰려 잘립니다. 속내야 어땠을지 몰라도 이들도 반공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그저 조금 더 억울한 피해가 없게, 조금이라도 더 세밀하게 보려 했을 뿐이었죠.

6.25로 이어지는 이런 미쳐 돌아가는 세상, 그러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없다고 여겼던 이들, 4.3은 폭동에도 항쟁에도 포커스를 맞추면 안 됩니다. 이런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좌우의 대립 속에서 희생되었던 분들, 그 분들과 그 후에도 연좌제에 시달리며 억울하다 한 마디 못 한 분들을 봐야죠. 이들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이었고, 국민인 분들입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4-16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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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몽래인
12/04/03 20:47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티레브
12/04/03 20:50
수정 아이콘
휩쓸림 감정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무서운거같아요
그리고 글 막바지 부분은 처절하게 공감합니다
그나저나 요즘 글들이 장난아니시네요 *.*

관련다큐 캡쳐한게 다른커뮤니티에있길래
지금 계속밖이라 집에들어가서 조금 첨언한다음 글쓸까 했는데
그럴필요가 사라졌네요 ;)
12/04/03 20:55
수정 아이콘
제주도민으로써 4.3 관련 글을 pgr에서 보니 기분이 오묘합니다.

광주의 5.18은 알아도 제주도의 4.3은 몰라주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밝혀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참고로 글 중간에 '중간산'이라고 하셨는데, 잘못된 표현으로 제주도에서는 '중산간' 이라고 합니다.
12/04/03 20:57
수정 아이콘
새롭게 안 사실들도 있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념과 종교 어떤것이 더 무서울까요?
아키아빠윌셔
12/04/03 21:29
수정 아이콘
참 복잡했죠. 개인적으로도 참 복잡했던 시대입니다. 할아버지는 4.3 때 경찰에 끌려갔다가 겨우 살아오셨고, 외가쪽으론 증조부께서 남로당 제주도당의 한 지역 간부셨고... 또 무장대를 이끌었던 김달삼은 대정중학교(모교입...) 교사이기까지.
왼손잡이
12/04/03 21:42
수정 아이콘
글보다 울었어요.. 아 오늘 왜이러지 기분이..
12/04/03 23:43
수정 아이콘
...반복되어선 안 될 끔찍한 역사군요.



그나저나 근현대사로 넘어오면서 보다 피부에 와닿는 얘기들인지라 그런지
눈시님의 글도 무언가를 마구 토해내는 느낌이고 저 역시 울컥울컥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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