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1/12/14 18:51:31
Name PoeticWolf
Subject 수제비는 역시 고추장 수제비
취재를 핑계대고 회사를 일찍 나와 엄마 집으로 향했습니다. 인터뷰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전화 인터뷰로 대신하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엄마만 할 줄 아는 고추장 수제비를 먹은 지 두 달을 훨씬 넘긴 시점이었습니다. 상상만으로도 혀끝에 감칠맛이 돌고, 뽀빠이 시금치 먹은 것 마냥 발걸음도 가볍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던져놓고 큰 아들 포즈로 마루에 등을 댔습니다. 엄마 입장에서야 분가한 아들만한 손님이 어디 있겠느냐, 라는 당당함을 스스로 확인하는 자세였습니다. 물론 아침부터 연락을 해 놓은 터라 엄마는 수제비 반죽이며 멸치 국물까지 다 만들어 놓으신 상태였습니다. 배 깔고 리모콘을 들어 TV를 켜자,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목 먼저 축이라고 물까지 떠다 주십니다.

익숙한 퐁당퐁당 소리에 뒤돌아보니 엄마는 수제비를 손으로 떼서 붉은 엄마표 국물에 넣고 계십니다. 아참, 지난 달 수제비 먹고 싶어서 왔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땐 항암 주사를 막 끝내고 손이 저려 도저히 반죽이 안 되겠다며 미안해 하셨었는데, 지금 보니 어머니 손 움직임이 많이 살아났습니다. 한 달 정도 찾아뵙지 못한 죄스런 마음이 조금 있었는데,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죄책감이 못내 가벼워지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다정하게 입 밖으로 이런 생각들을 조금 꺼내 요즘 좀 어떠시냐 물으면 좋으련만, 큰 아들놈은 다음 주에도 꼭 집에 들려야지,라는 결심까지 그냥 전식처럼 꿀꺽 삼켜버립니다. 마침 재방송으로 나오는 유재석이 재미있습니다. 참, 엄마가 유재석 좋아하시지, 생각이 나서 사죄의 의미로 채널을 고정시켜 놓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냄비 안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아내가 처음 집에 인사 왔을 때 제 밥그릇을 보고, 자기 상식으로 이건 국그릇, 그것도 2~3명이 같이 공유해서 먹을 때 쓰는 국그릇이라며 공포 영화 보는 눈으로 절 쳐다본 적이 있었는데(아내는 공포 영화를 좋아합니다), 지금 엄마가 수제비 담아 준 그릇이 바로 그 그릇입니다. 저희 집에서는 저만 밥을 담아 먹던 제 전용 그릇이었습니다. 아마 고등학교 때 운동을 하면서부터 그 그릇을 썼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밥을 많이 먹고 자랐다는 것 정도만 확실하죠.

희한하게 엄마는 절 보고 매일같이 살 좀 빼라고 닦달을 하시면서도 늘 그 그릇에 밥을 주셨었습니다. 타지에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장례식엘 못 가 자식들 몰래 화장실에서 물 틀어 놓고 꺽꺽 우시고 나서도, 암 때문에 복수가 차올라도 값싼 6인실 아니면 안 가겠다고 집에서 미련하게 버티실 때도 어머니는 그 그릇에 2~3시간에 한 번씩 음식을 채워 ‘내가 너 배고플 때를 안다’시며 제 방으로 꼬박꼬박 배달을 하셨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분가할 때 제 짐을 챙기시면서, 그래도 집에 와서 밥 먹을 일이 있지 않겠냐며 그 그릇은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던 기억도 있네요. 어디건 한 군데 이상 내 밥그릇이 있다는 건 든든한 일입니다.

드디어 수제비가 식탁에 올랐습니다. 엄마가 식탁에 반찬까지 다 해서 차려주면 수저와 수제비만 쏙 들고 와 TV를 보면서, 혹은 컴퓨터를 하면서 얄밉게 먹었었는데, 지금도 보다 만 TV를 보러 수제비와 숟갈만 쏙 들고 빠집니다. 그냥 여기서 먹어라, 라고 하시지만, 나 알면서 뭘, 하며 소파에 앉습니다. 오늘은 엄마도 그냥 수제비 그릇을 들고 따라 오십니다. 역시, 이 맛이야, 감탄을 하고 수제비를 식도 안쪽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제가 또 음식에 대한 칭찬만큼은 인색하지 않습니다. 엄마 역시, 엄마 수제비 먹고 싶어서 어떻게 살았누, 하십니다. 익숙한 수제비 한 그릇에 갑자기 전 총각 시절로 돌아갑니다.

시원한 국물과 함께 밀려드는 상상 이상의 만족감에 수저가 속도를 높입니다. 수저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손이 그릇을 더듬습니다. 탁자에 놓여있는 걸 턱 밑으로 가져오기 위함입니다. 입과 가까우니 수저가 제 세상입니다. 후룩후룩 소리가 절로 납니다. 찰진 밀가루 조각들이 매운 국물과 매우 잘 어울려, 유재석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뒤로 엄마의 웃음소리가 그저 아직 유재석이 웃기고 있다는 걸 알려줄 뿐입니다. 손 자국 밴 흰 조각 둥둥 떠 있는 붉은 색 멸치 국물은 순식간에 바닥이 납니다. 총각 때였으면 빈 그릇을 엄마한테 내밀었겠지만 지금은 효도한답시고 제가 부엌으로 가서 한 그릇을 더 퍼옵니다.

뜨거운 국물을 담자 그릇이 뜨거워집니다. 조심스럽게 손끝을 번갈아 대며 그릇을 나릅니다. 그런데 아주 미묘하게 거친 느낌이 지문에 걸립니다. 엄마 옆에 일단 그릇을 내려놓고 보니 이가 조그맣게 빠져있습니다. 하긴, 이 녀석도 갈 때가 됐지,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내 밥그릇 하나 이제 세상에서 없어지는 건가, 괜히 생각이 전 세계를 아우르는 스케일로 발전합니다. 대낮에 센치해지려는 스스로가 이상해, 엄마, 이거 이빨 빠졌네? 물어봅니다. 어디 보자. 그렇구나. 엄마가 눈을 한껏 찡그린 채 그릇을 노려보더니 말씀하십니다. 늙은 게 꼭 나 같구나, 엄마가 요즘 말로 자학 개그를 던지시는데, 어쩐지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가 늙었다고 하는데 아들이 어디 박장대소를 하겠습니까.

수제비를 들이키고 회사로 복귀해야 합니다. 음식도 마셨는데 후식도 마시면서 가라고 사과까지 갈아주시는 엄마를 뒤에 놓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그 그릇이 떠오릅니다. 라면, 떡국, 부추전, 육개장, 카레라이스, 냉면... 엄마가 채우고, 내가 비워냈던 우리만의 대화법을 맛있게 떠올립니다. 남편 복 지지리도 없었을 뿐인데, 그걸 자기 죄라고 생각하고 있는 엄마의 미안한 마음은 그 밥그릇에 오래 전부터 깔린 밑 양념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안 먹을거야!’라고 쉽게 말하는 건, 사춘기 이후 자꾸만 멀어지는 자식들을 향한 엄마의 말 걸기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깨달은 때부터 서서히 복받쳐오던 체중을 배 주위로 느껴봅니다. 어쩌면 그 그릇은 엄마가 아들에게 말을 거는 가장 익숙한 인사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휑하니 빈 방만 남겨두고 장가를 가 없어진, 어쩌면 남편 대신 의지하던 장남 그 자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작 일 때문에 밥만 얻어먹고 바삐 집을 나가야 했던 아들 눈에 그 이 빠진 밥그릇은, 어느 덧 아들이 빠져버린 집구석을 남은 날들 동안 마주해야 하는 늙은 우리 엄마와 더 닮아 있었습니다.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2-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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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11/12/14 19:17
수정 아이콘
매운 수제비는 처음 들어보네요.
개인적으로 어릴때 부모님이 만들어준 "감자 수제비" 맛있게 먹은 기억은 있는데
맛은 기억이 안나네요.
진중권
11/12/14 19:25
수정 아이콘
PoeticWolf님 글 역주행 한번 한 이후로 자꾸 '아끼는 마음을 온갖 텍스트로 다다다'가 떠올라서.. 킄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11/12/14 19:36
수정 아이콘
뜨끈한 수제비 한 그릇 잘 먹었습니다. 옛 생각에 엄마께 억지로 먹고픈 음식 부탁해 보지만 이젠 너무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기억하던 그 맛이 안나오더군요. 엄마 손맛은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자취생들 이 글 보면 잘 차려진 어머니 밥상이 그립겠군요.
sisipipi
11/12/14 19:37
수정 아이콘
님글은 언제나 추천이네요!^^ 타지에 나와있는 처지에 어머님 손맛이 그립습니다. 흐윽 [m]
11/12/14 19:58
수정 아이콘
당산동에 김치수제비를 파는 허름한 식당이 있습니다.
메뉴명은 얼큰수제비인데 김치를 듬뿍 넣어서 얼큰수제비이지요.
술먹고 다음날 아침에 먹으면 진짜 맛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문앞의늑대
11/12/14 20:02
수정 아이콘
지하철에서 로그인하게끔 하는 글이네요. 글만 봐도 짠하고 따듯해지는 그런 글이네요. 몇번씩 다시 읽고 생각에 잠기게하는 문장들의 내공이 ... 어머니가 채우고 내가 비워내는 대화법이란 표현이 너무 좋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11/12/14 20:39
수정 아이콘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또래중에서 가장 어머니와 친하게, 그리고 애살있게 지낸다고 자신합니다.
그리고 말씀드리지 못한 애정이나 후회는 없다고 늘 생각도 합니다만,
흐흐. 실상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지요.

오늘까지 남기었던 밥알들을 고스란히 그러모아 마음속 어딘가에 침전시켜오신 어머니에게
남은 밥알 모아 속 시원한 숭늉 한그릇 대접하듯, 드리지 못한 마음을 모아 속 시원히 사랑을 말할 필요가,
누구에게나, 아마도요. 있을겁니다.
다시 한번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11/12/14 21:02
수정 아이콘
좋네요. 추천합니다.
내사랑 복남
11/12/14 21:20
수정 아이콘
엄마 효도할께요 조금만 기다려요... 하는 만화가 생각나네요.
그 만화를 몇번 본 이후로는 내일이란 없다 라는 마음으로 효도하고 있다고 자신하는데.
결혼을 하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어요 하아...

사소한 것 하나에 맛이 최고임~! 이라는 문자 하나에 효도를 매일같이 쏟아붓고 살아갑니다~!!!
별마을사람들
11/12/14 21:52
수정 아이콘
글을 읽다 보니 딱 제 이야기 같이 느껴지네요. 단지 결혼 못하고 혼자 산다는 거 빼곤^^
저도 나와 산 지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집으로 출발할 때 전화 먼저 합니다.
'엄마, 칼국수~~'
고향이 강원도라서 어땠는지, 어려서부터 장칼국수를 자주 먹었고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되더라구요.
혼자 오래 살다보니 수제비 반죽과 국물이야 뚝딱 할 수 있을 경지까지 되었지만...
(지금도 저는 종종 고추장수제비를 스스로 끓여 먹거든요)
집에서 엄마가 홍두깨로 미는 칼국수의 면발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역시나 그 큰 대접에...한 그릇, 두 그릇...
아 다음주엔 전화를 드려야겠어요.
엄마~ 칼국수!!
11/12/14 23:06
수정 아이콘
정말 좋네요. 볼 때 마다 글에 감탄하게 됩니다. 잘읽고가요~
김치찌개
11/12/14 23:32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봤습니다^^

갑자기 고추장 수제비 맛이 궁금하고 먹고 싶네요!
11/12/15 11:51
수정 아이콘
타지에서 엄마생각 나네요 ㅠㅜ 칼칼한 순두부찌개와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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