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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9/02 12:03:07
Name kimera
Subject [스타1] 그래 한번 들이받아 보자.
“애초에 태어난 유전자가 그런데 어쩌라고요!”

친구의 아들이 처절하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고민하다가 무척이나 오래전 이야기를 하나 꺼내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자가 보여준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친구의 아들이 제게 저 이야기를 한 이유부터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희한하게 제 친구들은 자녀가 없는 제게 자기 자녀들의 문제를 물어보고, 또 종종 상담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친구의 아들이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고, 그 때문에 답답하단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만나기로 하고,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녀석은 태어났을 때 제가 이름을 지어준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자녀가 여럿인데, 그 이름을 모두 제가 지어준지라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습니다. 이름 지어준 애들이 좀 많아서 신경 써야 할 사람이 좀 많아지네요.)

아이와 이것저것 한참을 이야기합니다. 마인크래프트, 로블록스 같은 게임 이야기에서부터 웹툰 이야기 등을 하다가 요즘 우울한 이유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유전자 이야기를 하더군요. 공부를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유전자에서부터 정해지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그렇고, 게임을 하는 것도, 음악을 하는 것도, 무엇을 하든 간에 결국은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데, 자기는 어차피 뭐를 해도 안 될 거란 거였습니다.

최근에 자주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팟캐스트에서 자신도 공부를 안 했으면서 자녀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를 비판하기 위해서 툭 던진 말이 이상하게 와전되더니 유전자 만능론이 되어 버리더군요. 그게 최근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사실 제가 아주 싫어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친구 아들에게 한 프로게이머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프로게이머가 했던 한 경기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말했던 프로게이머는 강민 선수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했던 이야기는 박성준 선수와 했던 경기에 관한 것입니다.

다행히, 제 친구 덕에 친구의 아들은 스타크래프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제가 종종 스타를 하기도 했고,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가 게임 하는 걸 보고 자랐고, 그 친구도 다른 게임보다 스타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야기가 조금 쉬었습니다.

강민이란 프로게이머를 설명할 때 무조건 나오는 이야기는 몽상가란 이야기입니다. 그의 전략적인 게임 운영에 대한 일종의 찬사입니다. 그리고 그에 관해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나오는 것이 그가 손이 일반인 수준으로 느리단 겁니다. 물론 그것은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초기에 손이 느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03년에는 동시대의 프로토스 중에서 그렇게까지 느린 편은 아니었습니다. 뭐, 과거에 돌던 그의 리플레이 파일에는 APM이 80정도까지 떨어져 있는 것도 있었으니 아예 없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그가 그냥 느리다고만 할 수는 없었죠. 여하튼 전 강민이란 프로게이머에 대해서 친구의 아들에게 이야기했죠.

저는 강민이란 프로게이머가 가지고 있던 단점들을 친구의 아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느린 손, 나쁜 시력,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공장 등에서 일하느라 남들보다 늦은 프로게이머로서의 시작까지 말입니다. 강민에 대해서 한참을 설명하고, 그가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을까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아이는 한참을 듣다가 이렇게 판단하더군요.

‘노력은 가상하지만, 한계 때문에 그저 그런 선수였을 것 같다.’

아마도 이곳에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헉’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강민이 어떤 선수였는지 많이들 아실 테니까 말입니다. (아시는 거 맞죠? 저만 아는 거 아니죠?)

그리고 그 선수와 게임을 하게 된 다른 선수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그 박성준, 빠른 손, 빠른 눈(이 친구도 사실 시력이 안 좋긴 합니다만, 눈이 빠른 건 사실이라서요.),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무엇보다 타고난 승부사 기질에 프로토스의 천적이라고 불릴만한 압도적인 전적까지 가지고 있었죠. 강민 선수보다 모든 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선수의 스펙을 이야기해주고 두 사람의 경기가 어떨 거 같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별 고민도 안 하더군요. 박성준의 압도적인 승리일 거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한 경기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민과 박성준이 했던 게임이었죠.

박성준 선수는 경기가 있기 얼마 전 강민 선수가 포지 더블 넥 전술로 팀의 후배인 서경종 선수를 이겼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어 했었습니다. 당시 서경종 선수가 박성준 선수에게 당했던 포지 더블 넥 전술에 대해서 괴상하다고 이야기했었고, 박성준 선수는 그런 이상한 전술에 왜 당하냐면서 핀잔을 줬었거든요. 경기전 채팅에서 박성준 선수는 강민 선수에게 포지 더블 넥 전술을 언급했었고, 강민 선수는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응 너도 당해봐.”

재미난 것은 강민 선수는 보통 이런 류에는 심리전을 잘 걸지 않는 단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 한다고 하면 했었죠. 이걸 박성준 선수도 여러 번 연습게임을 하면서 잘 알고 있었고요.

피지컬에서 앞서고, 종족 상성에서 앞서고, 상대방의 전략에 대해서도 이미 잘 아는 상황.

모든 것이 강민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만, 이야기의 흐름 상 강민이 이겼겠지요.

당연히 강민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쉽게 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민은 정말 처절한 혈투 끝에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이긴 강민의 인터뷰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주 내용은 이거였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친구의 아들은 되게 어이없어했습니다. 그리고 강민이란 선수의 커리어에 대해서 말해줬죠. 다시금 놀라더군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게임을 할 때 무조건 최고의 캐릭터를 선택해서 하냐고요.

아니라고 하더군요. 재미있을 거 같은 캐릭터를 선택하기도 하고, 그냥 마음에 다는 캐릭터를 선택하기도 한다고요.

아이에게 게임하고 세상이 뭐가 그리 다르냐고 했습니다.

왜 한 번 들이받아 보지도 않고, 유전자 탓하면서 포기하냐고요.

그냥 재미있게 살아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걱정을 좀 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하기엔 좀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그 나이 때에 느꼈던 재미있다는 감정은 enjoy 보다는 fun에 가까운 것인지라 말초적인 것만 찾으란 의미로 들릴 거 같아서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조숙해서인지, 그 아이가 조숙해서인지 잘 알아듣더군요.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찌 되었든, 미리부터 포기하는 건 하지 말자고요.

나이가 들어가나 봅니다(이미 40대 후반이긴 하네요.)

from kimera

사족: 늙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제가 설명한 저 경기가 언제 무슨 대회 경기였는지가 기억이 안나요. 유튜브 검색에도 안나오고, 전적 검색을 해보면 나올 거 같은데 검색할만한 것도 안나오고요. 성준이가 첫 우승을 한 다음의 일이고, 경종이가 개인리그 예선전에서 민이에게 진 다음의 일이고, 경기전 체팅에 대해서 해설하시는 분이 언급도 했었거든요. 엄재경해설 위원이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개인리그 경기 였던 거 같은데요. 혹시 아시는 분 계시나요? 맵도 기억이 안나요. 기억나는 건 포지더블넥이었다는 거고, 민이가 그걸로 저그잡으러 다니기 시작한 초기였단 거였습니다. 성준이가 저그 상대로 플토가 게이트를 안가는데 어떻게 지냐고 하면서 경기 들어갔거든요. 실상은 커세어 날라다니고, 리버 드랍당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요. 여하튼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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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맛썬칩
23/09/02 12:09
수정 아이콘
한창 게임 좋아할 나이의 아이에게 게임과 프로게이머에 빗대어서 이야기하는 건 좋은 방법인 것 같네요
해바라기
23/09/02 12:2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유전자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아 존재하는 것일뿐, 유전자를 발현시켜 단백질로서 기능하게 만드는 것은 본인 스스로죠. 한글로는 후성유전, 유전 뒤에서 완성시키는 작용이라고도 하고, 영어로는 Epigenetics, on the top of genetics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생물체 스스로가 하죠.
강민 선수가 박성준 선수를 항상 이기지는 못했지만 저 순간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서 유전자를 조절하는 후성유전에 힘쓴 것 같습니다.
두 선수 경기나 보러가야겠습니다 흐흐
23/09/02 12:27
수정 아이콘
강민 선수가 포르테(네오버전?)에서 한 두 경기 정도를 포지더블넥 이후 커세어리버+캐리어 전략을 통해 엄청난 장기전으로 이긴 기억들이 갑자기 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흐흐
23/09/02 12:34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글쓴분 같이 좋은 멘토가 있어서 아이가 큰 도움을 받은 것 같네요.
서린언니
23/09/02 12:37
수정 아이콘
간만에 김애라님 글 보니까 좋네요
저도 일본가서 그림그릴거라고 하니까 다 말렸죠
김연아
23/09/02 14:45
수정 아이콘
강민 박성준은 애리조나 똥......이 먼저 떠오릅니다 읍읍
한국안망했으면
23/09/02 15:00
수정 아이콘
대충사는 자기 인생 합리화하려고 도는 말이 애들한테도 퍼지는군요ㅠㅠ

유전자가 어쩌고 얘기는 진짜 할 수 있는거 다해본 분야별 탑급에서나 나올말인데
평범하게 먹고사는거에서 뭔 유전자 얘기가 나오는지..
세이시로
23/09/02 16:1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언급하신 경기는 강민 박성준 몬티홀 경기 아니었을까요?
데몬헌터
23/09/02 16:49
수정 아이콘
스포츠 전체로 보면 카잔의 기적이나. 스타판 역대 본좌라 불리던 선수들도 무너질 때가 있었죠. 좋은 글이네요
노련한곰탱이
23/09/02 19:06
수정 아이콘
며칠 후 아들이 아리조나 경기를 들고 오는데…

(강민 팬입니다ㅠㅠ)
도뿔이
23/09/02 20:51
수정 아이콘
전 재능만능론은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 재능의 한계를 테스트해볼 일이 없어야 된다고 봅니다. 노오력이 대세가 되었다가 그 반동으로 노력도 재능이다란 말이 만연하는 이유도 우리나라 사회 자체가 모든 분야에 못해도 상위 10퍼센트에 들길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밥과글
23/09/03 05:50
수정 아이콘
그렇죠...그리고 아무리 유전자 만능이라도 설마하니 노력으로 평범한 50%에 못들라구
승률대폭상승!
23/09/02 23:25
수정 아이콘
근데 박성준이 만날때마다 패긴했는데 크흠
리츠야
23/09/03 00:52
수정 아이콘
현실은 강민:박성준 상대전적이..........

농담이고 좋은 조언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그렇게 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이기는 날도 왔으니까요.
23/09/03 18:19
수정 아이콘
강민은 그렇게 위대한 선수가 되었죠.

하지만 평범한 롤 해설은 되지 못한 크크크크
백년지기
23/09/04 12:28
수정 아이콘
강민이 타고나지 못했을까요...소위 피지컬은 몰라도, 소프트웨어는 누구보다 타고난거 같은데.
게임에 대한 노력이야 그시절 누구나 다 비슷했을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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