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11/17 04:54:43
Name 글곰
Subject (삼국지) 조위의 인사제도 (2) - 구현령 (수정됨)
1편 : https://ppt21.com/?b=8&n=78872

  그러면 조조는 왜 뜬금없이 구현령을 반포하며 구태여 능력 위주 인사를 강조한 것일까요?

  저는 구현령을 선포한 시점이 조조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기였다고 봅니다. 자. 조조가 승상에 오른 건 원씨 일가의 토벌을 마무리한 208년의 일입니다. 그 전까지 조조는 천하의 지배자가 아니었어요. 원소와 더불어 천하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사이였지요. 다시 말해, 원소가 죽고 그 자식들을 모조리 족친 다음에야 그는 비로소 진정한 천하제일인이 되었습니다. 폐지된 지 오래였던 승상 지위를 복원하고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른 건 자신이 당금 천하의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걸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위에 오른다는 건 그만큼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는 뜻도 됩니다. 관할해야 할 영토도 넓고 관리해야 할 벼슬아치의 수도 많았지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인사(人事)에 충분한 시간을 투입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죠. 후한 말기의 인재 채용은 기본적으로 추천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때때로 추천제를 죄악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추천제가 딱히 나쁜 제도는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제도가 그러하듯이 장단점이 있는 제도예요. 특정한 임무를 담당할 소수의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야 할 때 추천제는 특히 그 위력을 발휘합니다. 반면 이미 언급했다시피 특정 계층에 그 혜택이 쏠리는 부작용도 크지요.

  사백 년 후 등장하게 되는 과거제는 그 반대입니다. 일정한 기준을 넘는 다수의 인재를 뽑아야 할 때 적합하지만 반대로 특정한 재능을 지닌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쯤 되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실 만도 한데, 사실 추천제와 과거제의 관계는 대입으로 치면 학생부종합전형/수능이고 취업으로 치면 특채/공채와 엇비슷합니다.  

  그런데 추천을 받았다 해서 무작정 그 사람을 쓰는 건 아닙니다. 일단 검증을 해야 합니다. 진짜 인재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봐야 하죠. 그러면 그 일을 누가 합니까? 바로 그 세력의 군주 자신이 합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사촌형이 와서 우리 집안에 꽤 똘똘한 조카애가 있다고 추천합니다. 혹은 부하가 와서 누가 능력이 있다고 천거하지요. 그러면 일단 와 보라고 부릅니다. 불러서 이야기 좀 해 보는 거예요. 말하자면 CEO가 최종면접을 보는 거죠. 야.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어떠냐? 나쁜 놈들 어떻게 때려잡으면 좋겠냐? 백성들을 안돈하려면 어찌 하는 게 상책이겠냐? 손자병법 읽어보니까 죽이던데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순자랑 맹자랑 어느 쪽이 옳다고 보냐? 요즘 무슨 주식에 투자하면 좋겠냐?

  이렇게 한동안 대화를 나눈 후 결론을 내립니다. 얘는 훌륭하다, 혹은 쓸 만하다, 아니면 글렀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적절한 벼슬을 주는 거지요.

  사실 이게 조조만의 특별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유비도 손권도 똑같은 일들을 했습니다. 기타 다른 군웅들도 마찬가지였죠. 정사를 뒤져보면 지겹도록 나오는 대목이 ‘아무개가 누구와 만나 대화를 나눈 후 어쩌구저쩌구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타인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었어요. 오직 자신의 안목에 의지해 그 사람의 능력을 면밀히 살피고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임명하는 것. 그것이 난세의 군웅으로써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었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는 놈들은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오래였습니다.

  물론 조조의 인재 보는 눈은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최대한 활용했지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애당초 그 자리에 올라서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본질적으로 임용권자인 자신의 안목에만 의존한 것이었기에 물리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상 조조. 이미 허수아비가 된 지 오래인 천자를 제쳐두고 실질적인 천하의 지배자가 된 조조입니다. 그렇잖아도 할 일이 많은데 수천 명이 넘는 하급 관료들까지 일일이 확인해 볼 시간이 있을 리 만무하잖습니까. 최염이나 모개 같은 우수한 신하들에게 그 일을 맡겼지만 조조로서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저는 구현령이 그런 조조의 현실인식을 반영한 결과라고 봅니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부하인 너희들도 신경을 좀 쓰라는 거죠. 하지만 구현령을 내린다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었습니다. 특정한 집안이나 가문 출신만 천거받게 되는 건 추천제가 지닌 고질적인 문제였죠. 아무리 아랫사람들에게 유재시거 네 글자를 강조해도 여러 단계를 거쳐 자신의 책상까지 올라오는 인물들은 이른바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었습니다. 결국 조조의 벼슬이 높아질수록 역설적이게도 그의 능력 위주 인사 정책은 퇴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걱정도 되었을 겁니다. 일부 특정한 집안이 계속해서 벼슬을 대물림한다는 건 결국 그 집안의 세력이 커진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면 그런 세력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조조가 잘났다 해도 천하는 넓습니다. 지역에서 할거하는 호족들을 죄다 족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한중에 있었던 장로는 수십 년간이나 실질적인 왕 노릇을 했고, 송건 같은 작자는 군(郡)도 아니고 현(縣) 하나만을 차지한 채 정말로 왕을 자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30년 동안이나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죠. 중앙정부에서 그런 변방까지 군사력을 투사할 여유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잘 주목받지 않는 일입니다만 당시는 그야말로 반란의 시대였습니다. 과중한 부세로 인해 툭하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자신들의 지역에서 군림하다 중앙의 통제를 받게 된 자들의 불만도 많았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변방에서는 이민족들마저 중원대륙을 넘보고 있었습니다. 유비와 손권처럼 여전히 조조에게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조조의 그 엄청난 권력과 군사력으로도 일일이 전부 대응하기는 벅찬 형편이었습니다. 천하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향거리선제를 통해 수백 년간 세력을 구축해 온 명문거족들은 조조에게 있어 자신을 지원해 주는 세력인 동시에 잠재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고작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수십 명의 군웅들이 천하를 놓고 쟁패를 벌였습니다.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에 구현령에는 그런 호족들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명백히 엿보입니다. 오직 능력만으로 사람을 쓴다는 명분하에, 기존의 인사 제도 하에서 나날이 강성해져 온 명문대가들을 은근슬쩍 견제하고 자신의 친위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겁니다. 아무런 빽이 없는데도 능력을 인정받아 벼슬을 하게 된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조조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구현령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 조조는 무언가 대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조조의 군사 관련 친인척 우대 정책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다음 편에는 별 재미도 없는 벼슬 이야기만 잔뜩 나옵니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4-24 10:02)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김연아
18/11/17 07:32
수정 아이콘
글 올린 시간대 크크

추천은 많지만 첫플
18/11/17 07:53
수정 아이콘
술을 많이 마신 지라 실수 방지를 위해서 댓글은 못 달고 추천만.
멍멍머멈엉멍
18/11/17 08:05
수정 아이콘
삼국지 이야기만 알고있었는데 흥미롭네요.
18/11/17 08:46
수정 아이콘
조 가의 가장 큰 패망은 조비와 조예가 빨리.죽었다란 게 컸죠... 황위찬탈 과정을 본 애들이 아직 그 과정을.잊기도 전에 굳건히 지켜야할 조씨일가의 수장들이 나가리되었으니 크크
강미나
18/11/17 11:22
수정 아이콘
거기다 조예는 죽기 직전에 수많은 조조의 혈통을 놔두고 아무도 몰랐던 출생도 모호한 놈을 갑자기 아들이라고 내일부턴 니가 왕이다 앉히고,
그 후견인도 무능했으며, 무능하면 가만히나 있었어야 했는데 대패해서 조씨일가의 군사적 기반을 다 날려먹질 않나....
근데 다 날려먹고 얼마 안되는 군사를 몽땅 데리고 사냥까지 가(....)

위나라의 멸망과정을 보면 하필 그 시기에 안좋은 일만 이렇게 겹겹이 쌓였다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하긴 그러니까 중원의 대부분을 먹고 외정 내치 다 그렇게 탄탄대로였던 나라가 한순간에 망하는거겠죠.
펠릭스30세(무직)
18/11/17 12:22
수정 아이콘
왕이 빨리죽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대표적인 두가지 예가....

바로 조비와 문종이죠.
18/11/19 14:57
수정 아이콘
그래도 조비는 적어도 죽었을 때 장남 조예가 성인은 되어 있었지요. 조예가 후계구도를 그렇게 개판쳐 놓은 채 죽으면서 누구 자식인지도 모를 아홉 살배기에게 나라를 떠맡긴 건 진짜 직무유기라는 말밖에 안 나올 지경입니다. 물론 자식들이 요절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말이죠.
界塚伊奈帆
18/11/17 09:02
수정 아이콘
절단신공 무섭습니다;;; 길게 써주세요오오오~~~~(?!)
18/11/17 11:02
수정 아이콘
다른 군주들보다 조조가 치고 나간건 결국 친인척중에 능력있는 사람이 많은 덕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뽀롱뽀롱
18/11/17 11:14
수정 아이콘
순욱이 유재시거 때문에 죽었다는 이미지가 잘못이었나 싶었는데

그럴수도 있겠군요
18/11/19 14:58
수정 아이콘
그런데 순욱이야말로 가문빨은 둘째치고 그 자신의 능력이 엄청났던 양반이라... 유재시거든 가문빨이든 추천이든 간에 무조건 채용될 사람이죠.
뽀롱뽀롱
18/11/19 17:46
수정 아이콘
순욱 자체야 대단한 분이죠

대신에 유재시거로 대표되는 정책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조조가 내치고 자결을 받아들였다

이게 잘못된 생각인가 싶었는데
다시 그런가? 싶었습니다
시나브로
18/11/17 14:20
수정 아이콘
거를 문단 하나 없는 진짜 좋은 글입니다. 현세도 같아서 적용할 수 있는 유익함도 있고요
18/11/19 14:59
수정 아이콘
역사란 그래서 재미있죠? 굳이 억지로 지금에다 과거를 대입하지 않더라도, 과거를 배우다 보면 자연스레 현대사회와 연결이 되는 걸 느낍니다.
一言 蓋世
18/11/17 14:30
수정 아이콘
글 잘 읽고 갑니다.
Ryan_0410
18/11/17 14:43
수정 아이콘
아 재밌다
지탄다 에루
18/11/17 15:56
수정 아이콘
좋은 군 항상 감사합니다.
지금뭐하고있니
18/11/17 18:51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확실히 전투 전쟁 이런게 없어서 덜 집중되지만 담백한 맛이 있어서 좋네요 담편 기대중입니다
18/11/19 14:59
수정 아이콘
결코 다시 전쟁!
사실 전쟁 글 쓰면 지도 만들기 귀찮아요.
지금뭐하고있니
18/11/19 16:54
수정 아이콘
전 컴터를 잘못해서 지도 볼때마다 아 귀찮겠다 생각하며 감사히 읽었습니다 크크
폰독수리
18/11/17 21:1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68 톰켓을 만들어 봅시다. [25] 한국화약주식회사1654 22/03/19 1654
3467 밀알못이 파악한 ' 전차 무용론 ' 의 무용함 . [62] 아스라이2437 22/03/17 2437
3466 그 봉투 속에 든 만원은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19] 숨결1558 22/03/17 1558
3465 철권 하는 남규리를 보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38] 초모완2461 22/03/16 2461
3464 우리네 아버지를 닮은 복서... [12] 우주전쟁1719 22/03/15 1719
3463 콘텐츠의 홍수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의 생활 [52] 설탕가루인형형2649 22/03/14 2649
3462 서울-부산 7일 도보 이슈 관련 간단 체험 [141] 지나가는사람1388 22/03/14 1388
3461 [테크 히스토리] 청갈적축?! 기계식키보드 정리해드립니다 / 기계식 키보드의 역사 [64] Fig.12025 22/03/14 2025
3460 화장실 청소 팁 [92] 김홍기2395 22/03/12 2395
3459 [일상] 제사를 지내며 [18] DavidVilla1284 22/03/11 1284
3458 임신하기 힘드네요! [135] 보리차2394 22/03/07 2394
3457 지수추종 ETF 적립식 투자는 과연 진리인가? (SPY vs QQQ vs KODEX 200) [32] 사업드래군2110 22/03/07 2110
3456 나에겐 세 살 터울 여동생이 있었다. [12] 단비아빠1666 22/03/06 1666
3455 만원 신발의 기억 [21] 시드마이어1201 22/03/06 1201
3454 [스포일러 주의]스파이더맨 실사영화 정주행 후기 [30] 눈시BB2258 22/03/04 2258
3453 [테크 히스토리] 전두환이 만든 K-전기밥솥?! / 전기밥솥의 역사 [44] Fig.11729 22/02/28 1729
3452 유게보고 10km 걸어봤습니다 [91] 2004년2311 22/02/26 2311
3451 "37년 싸움을 마칩니다" - 김진숙, 명예롭게 퇴직하다 [61] 일신2457 22/02/25 2457
3450 "유화정책"과 "소련": 어떻게 같은 것을 두 번 당하겠는가? [76] Farce1345 22/02/24 1345
3449 2등 홍진호 [23] 할러퀸2450 22/02/22 2450
3448 40대 아재의 백수 이야기 [63] 간옹손건미축2350 22/02/22 2350
3447 "욥기": 이해할 수 없지만 충분히 우리에게 자비로운 우주 [131] Farce1741 22/02/21 1741
3446 나도쓸래성경) 끝까지 추했던 남자, 요나 [29] 토루1260 22/02/21 126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