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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6/22 05:31:19
Name   Tigris
Subject   유랑담 약록 #09 / 120610日 _ 아키타의 푸른 하늘












표준시가 같으면서도 한국보다 동쪽에 위치한 일본에서는 천행天行에 따른 시간감각이 0.5 내지 1시간 정도 빠르다.


 시계를 보았다. 4시 20분이었다. 귀마개를 뽑았다. 텐트에서 나와서 몸을 풀었다. 대체 밤새 몇 번을 깼을까. 기억은 없지만 기차가 텐트를 뒤흔들고 갈 때마다 발작하듯 깨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아마 지금 깨어난 것도 기차 탓이리라. 몸은 찌뿌듯했지만 두세 시간이나마 잔 덕분인지 기분만큼은 회복되어 있었다. 고단해도 기분만 좋으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 아직은 젊으니까.

 잠도 깰 겸 양치를 하며 오늘은 어디로 갈지 생각해보았다. 슬슬 다음 현(県)으로 갈 차례였다. 아오모리 현과 아키타 현 사이에 놓인 시라카미 산지(白神山地)가 세계자연유산이라고 하니 한 번 들러보면 좋을 듯했다. 여기가 대체 어디쯤인지 궁금했지만 e모바일 사의 전파가 잡히지 않아 인터넷은 쓸 수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도회한 곳이 나타났고,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날드가 보이기에 들어갔다.
평소 좋아하던 상하이 스파이스 치킨버거가 먹고 싶었으나, 오전 5시 30분에 파는 건 맥모닝 메뉴 뿐이었다.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골라 느긋하게 먹으면서 전자기기를 충전했다.













 도심에서 간신히 잡힌 전파로 어렵사리 구글 네비게이터 앱을 가동할 수 있었다. '시라카미 산지'로 검색된 장소는 많았다. 어딜 가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도로가 이어진 장소 중에서는 가장 깊숙한 곳인 듯 보이는 '안몬 폭포(暗門滝)'를 목적지로 찍었다. 한 시간 넘게 안내를 따라가니 어느샌가 오르막이 이어지다가 문득 길이 좁아지며 강과 마을이 나타났다. 7시 20분 경의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미 산지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흐린 날이었다.


 시라카미 산지(白神山地)는 아오모리 현 남서부에서 아키타 현 북동부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표고 1,000 미터 급의 산지 일대다. 전체 면적은 약 1,300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니 대략 제주도의 2/3 정도인 셈인데, 그 중 약 170 제곱킬로미터가 '사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너도밤나무 원시림'으로서 1993년 일본 최초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지질조사 결과로는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부터 원시림이 조성되었을 거라 한다. 그 중심부를 핵심지역, 외곽부를 완충지역으로 지정하여 출입과 개발을 규제하고 있는데, 등록 이전부터 있었던 약간의 등산로를 제외한 어떤 개척, 개발도 영구히 하지 않을 예정이다. 핵심지역은 연중 입산금지 구역인데다 완충지역을 포함한 전지역이 채집, 어획, 사냥(곰은 제외)을 금지하고 있어서 수많은 야생 동식물이 터전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굳이 산을 타가면서 입산하려면 관련행정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들어갔다가 조난당한 사례도 꽤 있는 모양이다. 요컨대 뜨내기 과객이 1만년의 시간을 느껴보겠답시고 청바지 차림으로 터벅터벅 들어갈만한 곳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나마 내가 목적지로 잡았던 안몬 폭포는 완충지역 중에서도 깊은 곳이었다.

 너도밤나무 원시림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은 사실 쓸모 없는 나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쓸모있는 것은 모두 사람의 손에 갈려나가고, 오히려 쓸모없다고 외면받던 것이 후대에서야 귀한 것이라 우대받는 아이러니는 실로 인간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야기다. 세계자연유산 등록 당시 일본에서는 당해 지역을 개발하지 않는 것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도 모자라 해당 지역에서 생업에 종사하던 이들마저 규제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실비가 조금씩 내리기에 우의를 꺼내 입고 짐에 이륜차 커버를 씌웠다. 철마도 나도 꼴이 영 우스꽝스러웠으나, 어디서 언제 몸을 덥힐 수 있을지 또 샤워는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으니 젖는 것보다는 나았다. 마을을 지나자 다시 산으로 이어지는 넓고 깨끗한 도로가 나왔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오르는데, 문득 도로변에 신사의 입구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다. 지금까지 봐온 신사에서 일장기를 걸어두는 일은 드물었기 떄문인지, 뭔가 특이한 인상을 느꼈다. 극우 스멜?








 들어가보았더니 1.5 미터쯤 되는 검 모양 조형물 외에는 별다른 건 없었다. 정확히는 신토라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상징물 같은 걸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나 봤을텐데, 그곳에는 인기척도 상주하는 궁사도 없었다. 곧 돌아나와 가던 길에 다시 올랐다.







(2배속)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뜻 밖의 더트 레이싱.


 이쪽 갈림길로 가면 된다…는 듯한 표지판을 보고 옆길로 갔던 건 실수였다. 길은 갑작스레 비포장으로 변했다. 나는 몸을 시트의 앞으로 빼고, 다리는 언제라도 땅을 찰 수 있도록 낮게 내리고, 상체를 숙여 언제든지 무게중심을 옮길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짐을 가득 실은 빅스쿠터로 비가 오는 산 속의 흙길을 달리는 건 은근히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더트 레이스 같아서 꽤 재미있기도 했다. '곧 무언가가, 하다못해 표지판이라도 나오겠지'하는 생각으로 앞으로만 달렸는데, 결국 한참 후에 길이 막힐 때까지 그 무엇도 없이 오직 흙길만이 이어졌다.








 막힌 길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저 흙길을 온 만큼 돌아가야 했다. 어째 곰이나 뱀, 맷돼지 같은 게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잠시 숨을 돌리는 김에, 저 질척한 길에서 곰에게 쫓긴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에 대해 잠깐 상상해보았다. 아마 곰에게 나는 한국산 도시락에 불과할 터였다.






《A》




 몇 번인가 넘어질 뻔했으나 그때마다 땅을 박차가며 겨우 다시 포장도로로 돌아왔다. 원래의 길을 조금 더 달려가자 안몬 폭포와 근처 관광시설의 갈림길에 안내판이 놓여 있었다. 안몬 폭포로 가는 보도는 1폭포, 2폭포, 3폭포 모두 출입금지 상태였다. 헛걸음을 한 것이다. 나는 조금 낙담했다.








 일단 차를 세우고 걸어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는 가보았다. 폭포 가는 길 입구에는 중년 여성과 청년 남성이 조를 이루어 시라카미 산지 보호를 위한 기부금을 받고 있었다. 모금함에 500엔을 내고 이런 저런 걸 물어보았다. 겨우내 출입이 통제되었고 이제 슬슬 출입가능 시기가 되었으나 아직은 관광객을 받을만큼 안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통제를 풀지 않은 것이라 한다. 아마 며칠 이내로 지역민들이 정비를 나설 것이라 했다.

- 넉넉잡고 2주 후에 다시 오시면 될 거예요.

- 2주 후면… 아마 간사이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겁니다.
















 길은 곧 막혔다. 허나 못 넘어갈 건 없었다. 웬만한 돌발상황은 대응할 자신도 있었다. 후딱 폭포 하나만 보고 오면 그나마 헛걸음은 아니게 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이곳을 와본단 말인가…. 나는 줄을 넘었다.








 불과 몇 걸음만에 나는 멈춰섰다. 내키지 않는 일을 해서 뭐가 즐겁단 말인가. 허탕 좀 치면 어떤가. 왜 나는 허탕을 두려워하나. 여정 자체가 목적이었던 거 아니었나. 그래서 이렇다할 계획도 없이 그저 '남쪽으로 간다'라는 느슨한 방침만으로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게 아니었나. 왜 '기왕 왔으니 성과를 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성과는 누굴 위한 것인가? 나? 가지 말라는 곳에 기어코 들어가서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폭포를 보면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나, 나는? "야, 답부터 묻는 습관 버려. 답까지 가는 과정이 너를 키우는 거다. 남들은 네가 낸 답에만 관심을 보이겠지만, 너만은 너한테 그러면 안되는 거야." 언젠가 사촌동생에게 훈계했던 일이 생각났다. 나도 고만고만하구나, 싶어서 홀로 겸연쩍었다.

 헛걸음을 했다며 쓴웃음 짓는 것도 나다운 길의 일부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 자리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섰다. 주위에서는 물소리, 새소리, 말벌 몇 마리가 나는 소리가 들렸다. 숲을 나오자 비는 그쳐 있었다.








 산지를 내려가기 전에, 아까의 안내판에 표시되어 있던 '아쿠아 그린 빌리지 안몬'이라는 관광시설에 가보기로 했다. 소규모 리조트인 듯했는데, 주차장부터가 사유지라는 인상을 팍팍 풍기고 있기에 안쪽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입구 쪽에 '시라카미 산지 관광 안내소'가 있기에 비치된 지도를 한 장 챙겼다.

 관광안내소에는 장년의 남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내게 무언가 말을 했다. 대략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폭포를 못 봐서 아쉽겠군'하는 이야기 같았는데, 사투리 때문에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하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관광안내소 입구에 서서 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일 양국의 정치적 관계라든지, 영토분쟁의 현실적인 해결방안이라든지, 한국의 세계유산이라든지, 한류가 어떻게 생겨나고 또 받아들여진 것인지 하는 이야기였다.

- 제주도는 한 번쯤 가보고 싶구만. 좋다던데.

- 저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가봤습니다. 좋은 곳이죠. 요즘 같은 엔고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요? 물론 저는 엔고가 힘듭니다만.









 이야기를 마치고 이륜차를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이봐, 잠깐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봤더니 방금까지 이야기를 나눈 장년이 나에게 손짓을 했다. 왜 그러나 싶어 걸어갔더니 그는 관광안내소를 걸어나와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주었다.


- 따로 줄 건 없네만 이거라도 마시고 가게. 다니다보면 고생스러운 일도 있겠지만 그래도 즐겁게 다니라구.

 나는 감사인사를 하고 단숨에 마셨다. 목이 말라 그랬는지 유독 달게 느껴졌다.








 산을 내려가는 마음은 올라갈 때보다 느긋하고 편했다. 도로 옆에 제법 큰 물이 보이기에 잠시 멈춰서 구경했다. 물결은 없었지만 얼핏 보기에 주변 지형에 고저가 분명한 만큼 고인 물은 아닐 듯 보였는데, 어째선지 물이 녹색이었다.








 물이 고여있는 것은 댐 때문이었다. 이곳 미야마 호수(美山湖)는 규모가 커서 여러 개의 소형댐을 통해 유량을 조절하는 모양이었다.








 도로 주변에는 댐 건설에 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보통 공사현장에 이런 걸 두던가, 하고 생각하니 친절함마저 느껴졌다. 안몬 폭포가 개방되는 시기에는 제법 많은 객이 오는 것이겠거니 싶었다.








 공사현장에서 불과 1분 거리에는 촌락이 있었다.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꽤 안락해보였다. 세계자연유산 곁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잠시 상상해보았다.






 전파가 잡히는 곳까지 내려온 후 구글 지도를 살폈다. 시라카미 산지의 바깥을 따라 7번 국도를 타고 오다테 시(大館市), 기타아키타 시(北秋田市)를 지나 한참을 내려가면 아키타 시(秋田市)까지 닿을 수 있었다. 오다테 시가 도쿄 시부야의 동상으로 유명한 충견 하치 공(忠犬ハチ公)의 출생지라는 정보가 있었다. 점심도 먹을 겸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B》




 아키타 현의 경계로 들어서자 하늘의 인상이 바뀌었다. 비는 조금씩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했다.








 7번 국도를 타고 순조롭게 남쪽으로 달려가던 13시 경, 도로변에 '고기 중화국수(肉中華そば)'라는 깃발이 휘날리는 가게가 있었다. 고기 육肉자에 현혹된 나는 급히 차를 세웠다. 가게는 프랜차이즈인 듯 멀끔했고 주차장도 넓었다. 사이드 미러에 비친 내 모습이 아무래도 손님으로 받고싶지 않을 듯한 꼴이었기에, 우의 상하의를 벗어 차에 걸쳐놓고 헬멧에 눌린 머리를 넘기고 몸의 물기를 털어냈다.

 가게는 넓었고, 점심시간대라 그런지 손님이 많았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휴지로 얼굴과 손의 물을 훔치고 메뉴를 살폈다. 물을 가져다준 여점원이 인상적이었다. 서구인 같았는데 인상으로는 구미 쪽이라기보다는 러시아 쪽의 사람으로 보였다. 일본어가 능숙했지만 발음에서 네이티브가 아닌 티가 났다. 아마도 10대 후반의 유학생일 듯 싶었다. 괜스레 이방인끼리의 반가움을 느꼈지만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쪽이 나를 반가워할 이유는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서 메뉴판의 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보였다. 고기 중화국수와 군만두를 시켰다.







중화국수는 처음 먹어봤다.
마라탕과 비슷하겠거니 하고 예상했는데 전혀 달랐다. 맛 자체는 제법 좋았다.








군만두도 괜찮았다.














 식사 하고 나오자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구글 네비게이션을 가동해 주변을 살피니 '충견 하치 공이 태어난 집'이라는 곳이 검색됐다. 얼마 멀지 않은 곳이기에 달려가보았는데, 뭔가 오류가 있었던 것인지 목적지는 그냥 논밭 한가운데 놓인 도로 위였다. 다시 구글 네비게이션에서 '하치 공'으로 검색된 주변 장소를 찾아다녔지만 이렇다할 기념지는 찾을 수 없었다.



하치공 장(莊)이라는 숙박업소가 있었지만 하치 공과의 연관성은 불명.








다만 하치공 장 부근의 산책로는 좋았다. 일부러 차를 세우고 한동안 걸어다녔다.














 다시 서쪽을 향했다. 기타아키타 시를 지날 무렵부터는 하늘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아키타라고 하면 '쌀' 정도의 키워드 밖에 생각나지 않았는데, 하늘 또한 명물이라 해도 좋을 듯 싶었다. 홋카이도의 하늘에도 지지 않을 듯 싶었다. 문득 「무진기행」의 안개 묘사가 생각났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훗날 나는 아키타의 이 하늘을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까. 막막한 상상이었다. 이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아내지 못하는 자신의 미숙함이 씁쓸했다.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바다 냄새가 났다. 너무 희미해서 정말 바다냄새를 맡은 것인지 아니면 바다냄새가 맡고 싶었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논두렁에 서서 하늘 사진을 찍고 있는데 등 뒤에서 요란한 배기음이 났다.
폭주족이었다. 길다란 탠덤시트 뒷면에 해서체로 된 '나무아미타불'이 보였다.
대도시에서 저런 오소독스한 폭주족은 이미 멸종했다던데, 아직 지방에는 남아있는 모양이다. 천년기념물?
다만 삿포로에서 본 폭주족도 그러했듯 이 사람도 헬멧은 착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단일차선 길에서 추월조차 하지 않았다. 나보다 운전이 얌전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C》


 17시 무렵 신호등의 수, 표지판의 수, 그리고 차량 통행량이 늘어났다. 아키타 시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아늑하고 편안한 소도시의 느낌이었다. 여기 인구 얼마 안되겠구나, 싶었다.

 아키타 시로 접어든지 얼마 되지 않아 목적지인 '아키타 현 청소년 교류센터 유스펄(秋田県青少年交流センターユースパル)' 에 도달했다. 유스호스텔도 겸하고 있는 곳이었기에 지난 10개월 간 겨우 한 번밖에 써보지 못한 국제 유스호스텔 회원증을 내밀 모처럼의 기회였다.

 1층 정문의 행사 안내판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함께 그려진 인쇄물이 붙어 있었다. 뭔고 하고 읽어보니 며칠 전까지 경기도 평택시의 청소년 대표들이 이곳에서 일본 학생들과의 교류회를 가진 모양이다. 나도 고등학생 시절 비슷한 자격으로 야마구치에 간 적이 있다보니 반가웠다.

 2층의 카운터에는 젊은 여성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연갈색의 단정한 생머리에 하얀 피부, 완만한 계란형 얼굴에 부드럽지만 또렷한 이목구비 등 얼핏 봐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바빠보이기에 잠시 기다렸다가 틈을 봐서 말을 걸었다. 나는 국제학생증과 유스호스텔 회원증을 내밀며 あなたをください도미토리실에서 숙박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곤혹스러운 듯 잠시 기다려달라더니, 상급자인 듯한 남성 직원과 상의를 하고나서 아주 죄송한 듯이 방이 없다고 말했다.


- 정말 죄송합니다만, 오늘 단체손님이 오셔서 비는 도미토리 실이 없습니다.

- 음…. 저는 다른 손님과 한 방을 써도 괜찮은데 어떻게 안될까요?

- 송구합니다만 단체손님과의 계약이 대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혹시 근처에 다른 숙소는 없습니까?

- 유스호스텔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근방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해요.

- 아닙니다. 혹시 로비에서 잠깐 쉬었다가 가는 건 괜찮을까요? 인터넷으로 숙박할 곳을 찾아보려고 하는데요.

- 물론 괜찮습니다.

 아쉽지만 수가 없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넷북으로 부근의 숙박업체를 찾기 시작했다. 원래 이곳 유스펄은 1박 당 숙박료가 5,000엔 정도인데, 유스호스텔 회원의 경우 3,000엔 대에 이용할 수 있었고 청소년(대학생 포함)은 2,000엔 정도에 이용할 수 있었다. 그만한 가격대의 숙박업소는 잘 찾아지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쪽으로 알아봐야겠다고, 없으면 차라리 바다로 가서 해안 어딘가에서 노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검색어를 바꾸어 넣는데, 아까부터 남직원과 무언가를 상의하던 미인 여직원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저, 손님, 괜찮으시다면 별도의 객실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 어라…. 개인실은 요금이 비싸지 않나요? 모처럼의 말씀이지만 그만한 여유는 없어서요.

- 오늘은 빈 방의 여유가 있으니 도미토리 요금으로 묵게 해드리겠습니다.

- 정말입니까?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잠시 '나 뭔가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불쌍한 꼴을 하고 있나?' 하는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지만, 기껏 배려해주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실례같아 그만두었다. 국제학생증도 인정되어 나는 청소년 숙박료와 다음 날의 아침식사값을 합쳐서 내고 숙박계를 썼다. 여직원이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안내된 방은 2층의 4인용 화실(和室, 일본식 방)이었다. 방은 아주 깨끗하고 쾌적해서, 유스호스텔이라기보다 콘도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방에서 2천엔에 혼자 묵을 수 있는 건 횡재다 싶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2층이라고는 해도 뒷쪽의 대지가 높아 사실상의 1층이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밖에 나왔다. 차를 몰아서 내 방에서 보이는 자리에 다시 주차한 뒤 텐트를 베란다로 옮겼다.

 방으로 돌아와 가방을 열어보니 깊숙한 곳까지 몽땅 젖어서 엉망진창이었다. 약간의 비는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비닐에 싸둔 속옷과 수건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물건이 젖었는데, 특히 팸플릿이나 영수증, 지도 등이 엉망이었다. 서둘러 물건을 꺼낸 후, 다다미가 상하지 않도록 신문지를 펼치고 그 위에 물건을 하나씩 펼쳐놓았다. 간밤의 습기가 남아있을지 듯한 텐트도 베란다에 펼치고 지퍼를 모두 열어서 통풍시켰다.







 18시부터 공중목욕탕을 쓸 수 있다고 되어 있기에 때를 맞춰 가보았다. 텅 빈 탈의실은 머리카락 하나 없이 아주 청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목욕탕 내부 또한 깨끗하고 밝아서 기분 좋았다. 아무도 오지 않기에 느긋하게, 노래마저 흥얼거리며 목욕을 즐겼다. "거리를 내려다보자 / 이 세상 가장 높은 굴뚝에서 / 그러면 슬픔이나 기쁨은 모두 / 푸른 하늘로 날아가네" 아키타의 하늘에 감탄하며 돌아다니던 낮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돌던 노래였다. 온탕에 퍼져 있으니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탁실에 들러 드럼세탁기에 젖은 옷들을 넣어 돌렸다.






 저녁을 해결할 차례였다. 나는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이륜차를 몰아 편의점에 갔다. 아까 도착 직전에 편의점을 본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는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30분도 넘게 헤매고 다니다 겨우 로손을 한 곳 발견했다. 도시락 하나와 야끼소바 컵라면 하나, 키린 맥주 두 캔과 사이다 한 병을 사서 유스펄로 돌아왔다. TV를 켜보니 『맨 인 블랙 3』 홍보차 내일한 윌 스미스가 007 어쩌고 하는 일본 쇼 프로그램에 나왔기에 보며 식사했다. 재방송처럼 보이기도 했다.

 배가 부르자 곧 잠이 왔다. 전날 제대로 못 잔 영향인 듯했다. '나는 내 생각만큼 젊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웃었다. 벽장에 들어있는 침구를 한 채 꺼내 펼쳤다. 드러눕자마자 눈이 감겼다. 조용한 잠자리에서 나는 곧 편안한 잠에 빠졌다. 새하얗고 커다란 배개가 포근해서 좋았다.




(계속)



* kimbill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4-07-20 09:18)
* 관리사유 : 연재 게시물 이동 조치합니다.



YORDLE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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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22 11:13
정화됩니다. 감사합니다.
서린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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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22 13:34
미야기현 센다이 북쪽으로는 위도상 북한과 더 가깝기 때문에
아키타나 아오모리, 홋카이도라면 러시아 사람이 올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하코타테의 호텔에서 묵을때, 온천에서 러시아 사람 많이 봤습니다.
큐슈에서 부산사람하고 중국사람들 많이 본거랑 비슷한 느낌이려나요.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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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23 00:14
읽어주시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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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23 00:21
말씀대로의 경우일 듯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이후의 여정에서 러시아인을 만난 일은 없었군요. 좀 더 뻔뻔하게 말이라도 붙여보면 좋았으려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연필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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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02 15:52
왜 여행 중에는 저도 모르게 허탕을 두려워하게 되는 걸까요. 미인 분이 궁금해지는 묘사네요 핳핳.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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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02 23:32
그러게요. 가끔은 성과주의적인 마인드가 몸에 배어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큰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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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26 03:57
아키타의 하늘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하늘이네요. 감사히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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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3 유랑담 약록 #08 / 120609土 _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 [11] Tigris8532 14/06/17 8532
762 유랑담 약록 #07 / 120608金 _ 아오모리의 신석기 유적 [4] Tigris7333 14/05/30 7333
761 유랑담 약록 #06 / 120607木 _ 홋카이도의 마지막 별하늘 [5] Tigris7678 14/05/27 7678
760 유랑담 약록 #05 / 120606水 _ 흐린 날의 노면전차, 하코다테 [6] Tigris7277 14/05/22 7277
759 유랑담 약록 #04 / 120605火 _ 8인7일 계획 / 외전1 _ 홋카이도의 먹거리 [6] Tigris8148 14/05/16 8148
758 유랑담 약록 #03 / 120604月 _ 면허증 [6] Tigris6316 14/05/14 6316
757 유랑담 약록 #02 / 120603日 _ 샤코탄의 곶, 오타루의 전망대 [3] Tigris6683 14/05/08 6683
756 유랑담 약록 #01 / 120602土 _ 삿포로를 떠나다 [4] Tigris6572 14/05/07 6572
755 [내왜미!] 4화 고지라 대 메카 고지라 (5) 트린4943 14/07/10 4943
754 [내왜미!] 4화 고지라 대 메카 고지라 (4) [2] 트린5324 14/06/19 5324
753 [내왜미!] 4화 고지라 대 메카 고지라 (3) [1] 트린5758 14/06/05 5758
752 [내왜미!] 4화 고지라 대 메카 고지라 (2) 트린6491 14/05/22 6491
751 [내왜미!] 4화 고지라 대 메카 고지라 (1) [5] 트린6647 14/05/08 6647
750 [내왜미!] 3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8-끝) [4] 트린6642 14/04/23 6642
749 [내왜미!] 3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7) 트린6018 14/04/09 6018
748 [내왜미!] 3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6) 트린6301 14/04/02 6301
747 [내왜미!] 3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5) [1] 트린7513 14/03/26 7513
746 [연재] 장풍 맞은 사과와 뉴튼...100년 장미칼 VS 절세신검 화개검 2부(6) [2] 캡슐유산균6870 14/03/23 6870
745 [연재] 장풍 맞은 사과와 뉴튼...100년 장미칼 VS 절세신검 화개검 2부(5) [1] 캡슐유산균6098 14/03/20 6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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