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9/02/19 21:09:41
Name TheLasid
Subject 하루
어제저녁에 문자가 왔습니다.
오늘은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하네요.
온 세상을 더 예쁘고, 더 조용하게 만드는 하얀 눈을 저는 좋아합니다.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시는 날만 아니라면요.

웬일인지 새벽부터 어머니가 깨셨습니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시네요.
어디가 편찮으신가 싶어서 여쭤봤지만, 그렇진 않다고 하십니다.
일곱 시까지 병원에 가셔야 하는데...
조금 더 주무시지...

어머니께선 가끔 엉뚱한 짓을 하십니다.
일을 하면서 어머니께서 준비를 마치시길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말씀이 없으시네요.
엄마? 준비 다 됐어? 우리 가야 해. 엄마?
어머니가 어디 가셨을까요?
아들이 일한다고 혼자 나가셨나 봅니다.

후다닥 외투를 입고 저는 달립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은 없습니다.
현관을 나서고 잠시 고민합니다.
어머니는 왼쪽으로 가셨을까요? 오른쪽으로 가셨을까요?
어쩌면 어머니는 전생에 사마의셨나 봅니다.

저는 왼쪽 길을 고르고 달립니다.
얇게 쌓인 새하얀 눈 위에 자그마한 발자국이 찍혀 있네요.
알 수 없는 이유로 저는 그 발자국이 어머니의 발자국임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어머니는 대체 언제 나가신 걸까요?
그런데 아이코, 정신이 어디에 팔렸는지,
미끄러운 맨홀에 발을 디딘 저는 살짝 미끄러집니다.

재빨리 일어나 저는 다시 달립니다.
저기 길가에 갈색 패딩을 입고, 검은색 모자를 쓴 사람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어머니입니다.
왜 말도 없이 혼자가?
혼자 가도 돼. 오늘 온종일 병원에 있어야 해. 집에 있어.
그렇게 두 사람은 택시에 탑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채혈실 들렸다가 밥 먹을까?
점심엔 병원 밖에 나가서 먹을까?
파스쿠찌에서 요즘 딸기 메뉴를 엄청 많이 팔던데?
어째 먹는 얘기만 잔뜩이네요.
뭐, 괜찮겠지요. 벌써부터 지칠 필요는 없으니까요.
옆구리가 슬며시 아파옵니다.
얼마 전에 수술을 받았던 부위입니다.
약해진 근육이 놀랐나 보네요.

오늘은 피 검사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번에 병원에 오셨을 때 미리 하셨거든요.
소변 검사만 하시면 됩니다.
9시 20분 진료니, 7시 20분까지만 샘플을 넘기면 되겠네요.

현재 시각 6시 50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난번에 채혈을 하시면서, 소변 검사를 하지 못하신 데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화장실에 들어가신 어머니께서 한참이 지나도 밖에 나오지 않으십니다.
소식이 없으신가 봅니다.
마실 걸 미리 사다 놓을까?
저는 고민합니다.

불안합니다.
30분이 지나도 어머니가 나오시지 않습니다.
한 고민은 다른 고민에 자리를 내줍니다.
혹시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채혈실에 계신 아는 선생님께 확인을 부탁드려야 하나?
방금 나온 여자분께 확인해 달라고 부탁드릴까?
마음속 갈등은 심해져만 갑니다.
휘청휘청, 어머니가 나오시네요.

안 나와.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뽑아드리고, 3층으로 내려갑니다.
생강 꿀물이 드시고 싶다는데, 편의점에 없네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제대로 데워진 음료가 없습니다.
전화를 걸면서 옆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갑니다.
유자차도 괜찮으시다네요. 다행입니다.

도란도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때 되면 나오겠지.
이거 검사하는 데 2시간 걸린단 말이야.
9시 20분 진료 다음에 10시 20분 진료도 있는데 늦으면 안 된다고.
그렇구나. 근데 어차피 오후 4시에 심장 내과 진료도 있잖아.
조금 늦어도 상관없지 뭐.
아냐 진료 빨리 보고 심장 내과 앞에 가서 간호사한테 진료 빨리 봐달라고 부탁드릴 거야.
아는 간호사님이야? 저번에 다른 방으로 옮기셨다며?
응. 그런데 이 간호사님이랑도 친해졌어.

또다시 30분이 지납니다.
소변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3층으로 향합니다.
걱정입니다. 커피숍에 줄이 너무 기네요.
다행입니다. 그 사이에 편의점에 있는 음료들이 데워졌군요.
데워진 수준을 넘어 델 정도입니다.
조지아 카페라테를 팔뚝 사이에 끼우고 계상대로 향합니다.

저기 좀 봐. 눈이 참 예쁘게 내리네.
우산 가져올걸. 급하게 나온다고 깜빡했어.
괜찮아.
커피 맛있지? 캔이긴 해도 조지아는 괜찮아.
나 학교 다닐 때 조지아 에메랄드 블렌드가 처음 나왔는데 진짜 엄청 마셨어.
달콤하네.
너무 뜨겁진 않아?
뜨거워. 그래서 좋아.
커피 다 마시면 조금 걸을까?
그럴까?
다시 30분이 지나갑니다.

커피 다 마셨어? 조금 걷자.
응.
이쪽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 거지?
몰러. 저기 영상의학과 있네. 아까 찾던 사람 있었는데 여긴가 보다.
그렇네.
그냥 밥을 먹고 올까? 아까 채혈실 선생님이 그러랬잖아.
싫어.
돌아가자.
응? 조금만 더 걷자. 얼마 안 걸었잖아.
화장실 갈래.

눈이 참 예쁘게 내립니다.
그리고 눈과 함께 시간이 내립니다.
눈이 참 예쁘게 쌓입니다.
시간과 불안도 눈과 함께 쌓여만 갑니다.
  
엄마가 나옵니다. 표정이 썩 밝지 않으시네요.
우동 먹을래.
뭐?
점심에 우동 먹을래.
일단 따뜻한 물 좀 더 마실까?
싫어.
소변은 봐야지.
이미 봤어.

신장 내과는 5층에 있습니다.
간호사가 난색을 표하네요.
어머니, 사정은 알겠지만 소변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2시간이 걸리세요.
식사하시고, 10시 반에 오세요.
채혈실 선생님이 빨리 봐주신다고 했어요.
10시 20분에 다른 과 진료도 있어서 안 돼요.
그래도 그렇게 빨리는 안 되실 것 같은데?
그럼 일단 기다려 보세요.

9시 40분, 두 사람은 진료실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 이름을 부르던 간호사의 놀란 표정이 기억납니다.
뭐, 놀라셨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이쪽은 14년 차 베테랑 환자입니다.
그쪽과는 경력이 다르다 이겁니다.
알고 지내는 채혈실 베테랑 선생님께서 검사 빨리해주신다고 하셨다고요.
사람과는 일단 친해지고 볼 일입니다.
친절, 미소, 선물, 사교술, 화술, 외교술, 관계의 기술...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 해요.

종양 내과는 암센터에 있습니다.
두 사람은 느긋하게 암센터로 갑니다.
눈이 열심히 두 사람을 때려봅니다만,
두 사람의 표정에서는 여유가 넘쳐나네요.
웬일인지, 평소에는 한참 기다려야 하는 종양 내과 진료도 순식간에 끝납니다.
지금 11시 몇 분이야?
10시 40분이야.

심장 내과는 심장혈관 병원에 있습니다.
암센터와는 거리가 조금 있어요.
때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다행히 눈발이 조금 약해졌습니다.
쌓인 눈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미끄럽지 않은 길로 돌아돌아, 심혈관 병원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는 어린이 병원이 있어요.
옛날에는 커다란 기린 인형(?) 상(?)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애들도 좋아했지만, 저랑 어머니도 참 좋아하던 친군데 말이죠 :(
어라? 심혈관 병원 안에 파스쿠찌가 생겼네요.
전에도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오후 진료 아니세요? 왜 벌써 오셨어요?
새로 친해지셨다는 간호사가 어머니를 알아봅니다.
다른 진료가 너무 일찍이었어요.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전 마지막 타임에 봐드릴 수 있는지 알아 볼게요. 잠시만요.
네.
가자.
응? 어디가? 알아 보신대잖아.
알아봐 준다는 건 해준다는 얘기야.
파스쿠치 가자.
무언가 찝찝하지만 제가 뭘 어쩌겠나요.

니트로 콜드브류를 주문합니다. 정말 멋진 커피에요.
어머니는 아포가토를 드신다네요.
다 드신 다음에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드시겠다고 하십니다.
밖에 눈이 오는데...괜찮겠어?
응.
무언가 찝찝하지만 제가 뭘 어쩌겠나요.
주문을 끝내고 자리에 앉습니다.
해피포인트 적립을 안 했다네요.
사람도 많고, 나 너무 피곤한데 그냥 오늘은 안 하면 안 될까?
그러던가.
음료를 받으러간 저는 직원에게 해피포인트 적립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툴툴툴툴,
엄마의 목소리에서 묻어난 소리를 들었거든요.

해피포인트 적립했어?
응.
잘했어. 저번에 그걸로 재미 좀 봤다고.  
근데 이거 따뜻하질 않은데?
응? 아포가토잖아 당연히 차지.
그런가? 아이스크림은 차고 음료는 따뜻한 줄 알았지.
에스프레소가 따뜻하긴 한데, 양이 많이 들어가진 않으니까 금방 식어.
그런가? 괜히 시켰네. 따뜻한 거 먼저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을랬는데.
아이스크림은 아직 안 시켰지? 다행이다.
툴툴툴툴, 아아... 소리가 잠깐 멎었었는데... :(

사람과는 일단 친해지고 볼 일입니다.
진료를 보고 나오니 11시 50분이네요.
심장내과 선생님은 참 친절한 분이십니다.
눈도 그쳤습니다.
요리조리 쌓인 눈을 피해가며,
구글님이 알려주신 우동 맛집 겐로쿠 우동으로 향합니다.
저는 심각한 길치입니다만, 네이버 지도는 저를 강하게 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동집 주인을 강하게 만들어 주진 못했나 봅니다.
가게 문이 닫혀 있네요. 병원에 가셨답니다. 10분 넘게 걸어왔는데...
어쩔 수 없지. 나도 병원 갔다 왔는 걸 뭐.
그러신 것 치고는 표정이 그리 좋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번 구글신의 신탁을 기다려 봅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좋으련만, 어머니가 갑자기 활발히 움직이시네요.
구글 신의 신탁을 기다리며, 어머니 뒤를 이리저리 쫓으며, 미끄러운 데가 있나 어머니 발 앞을 보며,
저는 걸어갑니다.
다행입니다.
7분 거리에 마루가메 제면이라는 곳이 있네요.
그런데 가는 길이...꽤 복잡합니다.
툴툴툴툴.

우동을 먼저 고르고,
우동이 나오는 걸 기다리고,
튀김과 주먹밥을 고르고,
계산합니다.
처음엔 엄청 복잡한 방식이라고 느껴졌는데,
글로 써보니 무지하게 간단하네요.

에이, 김 빼 달라는 말을 깜빡했네.
근데 아들, 큰일 났다.
왜?
짠데?
어쩌지 물 좀 넣을까?
그럼 싱겁잖아.
으음...
김치우동이 조금 짰나 봅니다.

여기 되게 맛있다.
응? 짜다며?
근데 맛있네. 면이 쫄깃쫄깃하다. 야채 튀김도 되게 맛있어.
엄청 큰데도 재료 하나하나가 잘 튀겨졌네.
다행이네. 새우 튀김도 마저 먹어. 뼈가 약하다잖아. 단백질도 먹어야지.
너무 느끼해. 안 먹으면 안 될까?
한 입만 더 먹어봐.
벌써 두 입 먹었어.

택시를 타고 동네를 돌아와 약국에서 항암제를 주문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늘어지게 잡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동네 이비인후과로 갑니다.
역류성 식도염 약을 추가로 받기 위해섭니다.
한 달 치를 처방해 주시네요. 다행입니다.
진료실에서 어머니를 내보내고, 의사쌤께 슬쩍 여쭤봅니다.
혹시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면 제가 대신 와서 약 타가도 될까요?
약국에서 약을 찾아 집으로 돌아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 피지알에 글을 씁니다.

썩 나쁘지 않은 하루였습니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8-06 12:57)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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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 하루
19/02/19 21:17
수정 아이콘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나면서 저도 절로 먹먹해지네요. 아무쪼록 평안히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19/02/19 21:19
수정 아이콘
추천을 누르고, 댓글을 달고 싶은데, 무어라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멍하니 있었습니다.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네 삶 같은 글이네요. 달콤함과, 씁쓸함과, 짭짤함과, 비릿함과, 고소함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있는.
TheLasid
19/02/19 22:18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서도 평안하시길 빕니다.
하루라는 제목을 붙인 글에 더딘 하루님께서 첫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삶이 주는 우연에 다시 한번 놀랍니다 :)
TheLasid
19/02/19 22:22
수정 아이콘
가끔씩 매콤한 일도 생기는데, 그래서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
치열하게
19/02/19 22:38
수정 아이콘
겐로쿠나 마루가메 제면이나 아는 곳이라 추리 시작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는 데 결국 네이버지도의 힘을 빌려서 어디인지 알았습니다. 크크크크

어른들 대학병원 검진 참 힘들죠. 저도 외할머니 몇 번 따라갔는데 기다리는 시간에 비해 검사나 면담시간이나 너무 짧죠. 다녀오면 최소 반나절은 지나고 있고. 근데 글을 보면 그래서 나쁘지 않은 하루인 거 같아요
자몽쥬스
19/02/19 22:41
수정 아이콘
진료실 책상 위의 벨을 누르면 환자가 들어옵니다. 인사를 하고, 필요한 것을 말하고, 간단한 신체검진 후 약을 처방하고 환자가 다시 나가는 데 까지는 평균 5분이 채 안 걸리는 것 같습니다. 환자가 일어나 문고리를 잡으면 저는 다시 벨을 누르고 다음 환자를 만나죠.
“띵동”이전, 그 이후의 순간에 대해 상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 글을 읽고 문득 마음이 먹먹해졌어요. 내일부터는 한번 더 눈을 마주치고, 한 마디 더 건네면서 진료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TheLasid
19/02/19 23:05
수정 아이콘
꼭 검색해서 찾아보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게 치열하게 님이셨군요 :)
좋은 병원입니다. 그 병원 다니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TheLasid
19/02/19 23:09
수정 아이콘
환자도 5분도 채 안 걸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만 의사를 만나죠.
저도 자몽님 글을 보고, 종종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의 "들어오세요" 이전과 이후를 상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그리움 그 뒤
19/02/20 00:50
수정 아이콘
동선을 보니 신촌에 있는 대학병원인가요?
TheLasid
19/02/20 06:28
수정 아이콘
넵 :)
유쾌한보살
19/02/20 13:50
수정 아이콘
어머님 모시고 하루 병원 다녀오신 기록인데요.. 긴 하루를 보내신 듯 느껴집니다.
저도 시어머니(작년에 89세로 돌아가심) 모시고 숱하게 병원 다녔었지요.
시어머니라 그런지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 커피 한 잔, 우동 한 그릇 함께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늘 며느리로서 의무감만 가진 채 열심히 병원을 드나들었을 뿐,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지 못한 점이 후회로 남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 일을 담담히 써내려간 글이 좋습니다.
19/02/20 15:34
수정 아이콘
추천만 하나 남기고 갑니다.

조미료 듬뿍, 달고 짜고 맵고 자극적인 글이 대세인 요즘 넷에서 보기 드문 담백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근디.. 그래서 댓글로 남길 말이 별로 없.... 크크크
19/02/20 15:5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어요.
TheLasid
19/02/20 16:52
수정 아이콘
(수정됨) 그러게요. 정말 긴 하루였어요.
지켜보는 것 말고는 딱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더 길게 느껴졌네요.
아무리 잘해드리려고 해도 지나고 보면 항상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남는 듯해요.
저도 의무감의 발로로 어머니를 모시고 다닐 때가 많고, 마음을 헤아려 드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좋은 며느리이신 유쾌한보살님이 계셨으니 고인께서 더 행복한 말년과 덜 불행한 병원 생활을 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TheLasid
19/02/20 16:54
수정 아이콘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 :D
TheLasid
19/02/20 16:5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혜우-惠雨
19/02/21 00:40
수정 아이콘
친정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싶네요. 부모님이 보고싶어서 훌쩍훌쩍하는건 오랜만이라..
TheLasid
19/02/21 12:53
수정 아이콘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네요.
바쁘셔서 만나 뵙기 어려우시다면, 조만간 시간이 나시길,
더는 직접 만나 뵈실 수 없으시다면, 꿈속에서라도 만나시길 빕니다.
19/03/12 13:03
수정 아이콘
저는 아직 어립니다. 아직은 제 나이지긋한 부모님께서 손을 잡고 제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시지요.
두분께서 일을 하느라 바쁘시니, 이제 가끔은 제가 할머니를 모시고 움직입니다.
앞으로는, 이 글 덕분에, 더 진중하게 그 순간들을 맞지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손자라고 촐싹거리는 일을 줄이고요.

저는 병원이라는 장소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골기질이 만충할때, 군병원에 오래 있는 일도 생겼고,
그 병원에서 "숨결이 바람될 때" 그리고, 이름을 까먹어버린 "아미쉬"에 대한 책을 읽었습니다.

기계 앞에,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전능한 신을 섬기나, 스스로는 전능하지 못한) 의료-사제 앞에,
옥음을 기다리고 허리를 조아리는 환자들에 대한 연민의 글이 들어있는 책들이었지요.
마치 백인 지배자를 섬기는 원주민들처럼, 화물 신앙을 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기뻐하고 고집을 부리며, 의사를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반항하게 되는,
정신적인 변화과정, 모종의 종속, 낙인에 대한 공증, 낙인 없음에 대한 공증...

간호사 없이 '간호 장교'가 있는 장소에 왜 그런 책을 두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아마도 책을 정하는 사람이 간호와 같은 계통에서 일하지 않으니
그런 참사가 일어났겠지 않았겠나 생각합니다.

백발이 성성하신 제 피터팬 아버지께서는, 할머니의 약봉지를 보시고는
맘에 쓰라리신지 툴툴툴툴 정겨운 소리를 내십니다.
제가 반골기질을 가진 이유는 아버지의 화법을 말을 하는 방법으로 배웠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을 말로 정리하시면서, 모든 것을 저주하시지요.
한국에 심취할 부두술이 없는게 정말 다행 아닐까요.

언젠가는 나 또한 약을 저렇게 많이 사겠지.
그리고서는 한 알 한 알 마다 유의미하게 건강이 늘어난다고 믿게 될 거야.
돈 몇 푼이, 소중한 삶 찰나를 몇 푼어치나 사줄 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야기를 믿지 못해 지금 불행하고,
나중에 생명이 궁하면 이야기를 믿게될 것이라 불행하다.

그래서 저는 일상글을 어떻게 적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복잡한 삶의 타래 중 하나, 가장 예쁘지도 않은 타래를,
하지만 제가 감히 '좋다고' 말할 수 있을지,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TheLasid
19/03/19 20:28
수정 아이콘
저는 어릴 적에 외할머니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할머니를 모시고 이 병원 저 약국 다닐 때가 많았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굉장히 바쁘셨거든요.

돌이켜보건데 어린 시절 제 세상 속에서,
아버지는 난폭한 폭군이었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따뜻하지만 약하고 아픈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는 두 분의 병간호를 해야겠습니다.
병원에 간다는 것은, 약을 사러 다니는 것은, 환자와 산다는 것은,
솔직히 고백하건데 다만 한 순간도 좋았던 적이 없습니다.

살다 보니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생각보다 더 중한 환자였음이 밝혀졌으며,
실은 저도 환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환자가 되어 환자와 함께 살아야한다는 것은,
역시나 다만 한 순간도 좋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환자와 함께 하는 삶이,
저를 슬픔을 줌으로써,
저를 더 사려 깊고 친절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환자로서 사는 삶이,
제게 고통을 줌으로써,
저를 더 강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환자로서 환자와 함께 사는 삶은 제게 무엇을 주었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비하면 조금 더 삶을 살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삶에 살아지는 대신에요.

아마쉬에 대한 책은 모르겠지만, 숨결이 바람될 때는 저도 읽어봤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어떻게 사느냐와 같은 의미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결국 기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 같은 의미라는 느낌도 받았고요.

행복이란 뭐랄까요. 니체의 말로 갈음하겠습니다.
Man does not strive for happiness; only the Englishman does that.
불행해도 괜찮지 않을까, 정도의 주제 넘은 말씀을 드립니다 :)

군대에서 다치신 데는 요즘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역시나 주제 넘지만 그 주제로 일상글을 써보시면 어떨까 싶긴 하네요.
모든 글이 그렇듯, 쓰기 어려운 주제를 고르면 상대적으로 글쓰기는 쉽지 않겠습니까? :)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을 나를 더 강하게 할 뿐이다.
조홍스러운 얘기를 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원하지 않더라도, 죽지 않는 한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라는 말씀을 드리고는 싶습니다.
다음에 또 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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