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출장이야?”
아내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목소리가 저절로 변명조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진짜 너무하네.”
짜증과 뒤섞인 한숨이 날아왔다.
“망할 놈의 회사에 직원이 당신밖에 없대? 왜 만날 당신보고만 나가라는 거야?”
“일손이 부족하긴 하지.”
나는 시인했다.
“팀원이라고는 고작 네 명인데 김 차장이 지난번 출장 때 다쳐서 병가 냈고, 또.......”
말끝을 흐렸지만 아내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육아휴직으로 일 년 삼 개월째 나오지 않고 있는 그 직원이 바로 아내였으니까. 직장에서 눈이 맞는다는 건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로 알았는데 그게 현실화되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결혼식장의 입장로 위에 서 있었다. 그 때 이미 아내의 배는 불룩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쌍둥이였다. 원래 일 년을 예정했던 육아휴직은 여름철 엿가락 늘어나듯 길어지고 있었다. 업종의 특성상 수시인원 충원이 불가능했기에 회사는 남아 있는 두 사람만으로 근근이 끌어갈 수밖에 없는 판국이었다. 그리고 이번 달에 벌써 두 번째 해외출장이었다. 갓 돌이 지난 아이 둘을 아내에게만 맡겨 두고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살짝 안아주었다.
“얼른 마치고 돌아올게.”
“이번에는 어디야?”
그렇게 묻는 아내의 목소리는 이미 체념조에 가까웠다. 나는 대답했다.
“뉴욕. 4박 6일.”
“......몸조심해. 김 차장처럼 실수하다 다치지 말고.”
“당연하지.”
나는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좀 더 농밀한 신체 접촉을 시도했지만 때맞추어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아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의 품속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짐은 당신이 싸.”
젖병에다 분유를 타기 시작하면서 아내가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여행용 트렁크를 꺼내들었다. 챙길 짐이 많았다.
나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빌딩 옥상 위에서 보는 하늘은 지상에서 마천루의 틈새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광활했고, 시원했다.
잠시 그렇게 점심 무렵의 햇살을 만끽하다 나는 작업에 착수했다. 뉴욕 지사에서 수령한 물건을 가방에서 꺼낸 후 조립했다. 이틀 전 미리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필요한 조율과 준비는 모두 끝내 두었다. 그렇기에 준비는 금세 끝났다.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내와 두 아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출장을 끝내면 들어올 해외출장수당을 생각했다. 아내는 얼마 전부터 플라스틱으로 만든 문짝을 사고 싶어 했다. 무슨 ‘국민 문짝’이라고 하던가. 아이들이 신나게 가지고 논다는 육아 용품이었다. 하지만 외벌이로 빠듯한 살림에 덥석덥석 구입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수당을 받으면 기분 좋게 사들고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본급은 그야말로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악덕업체였지만 수당만큼은 언제나 넉넉했다. 그깟 문짝쯤이야 수십 개도 너끈히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가방도.
처녀 시절에는 나름대로 꾸미고 다닌다는 평을 들었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단 한 번도 자기 물건을 구입한 적이 없는 아내였다. 그런 아내가 나는 안쓰러웠다. 독박육아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선물을 안겨 주어야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아래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나는 머릿속의 생각을 털어내고 상황을 살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였다. 차가 멈추고 제임스 모리아티 상원의원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후 멈추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내 어깨에 강렬한 반동이 와 닿았을 때 상원의원의 머리통에서 피가 솟구치는 모습이 스코프 너머로 보였다. 나는 잽싸게 짐을 챙겼다. 인근에 수색망이 쳐지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야 했다. 김 차장보다 빠르게.
“아니, 이런 걸 사 오면 어떡해?”
아내의 목소리는 바짝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어깨를 움츠리며 변명했다.
“아니, 당신 변변한 가방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내가 못 살아.”
언제나와 같은 한숨. 그리고 잔소리.
“생각해 봐. 우리 외벌이야. 당신이 목숨 걸고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이 먹고 산다고. 이 집도 전세야. 좀 있으면 애들 어린이집도 보내야 해. 유치원비는 얼마인지 알아?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 방과 후 학습이다 학원이다 해서 얼마를 갖다 바쳐야 하는지 아냐고. 그리고 그 때 되면 집도 키워서 옮겨가야 해. 애들 방 하나씩은 줘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이런 걸 무작정 사 오면 어떡해? 이거 가격이 우리 집 넉 달 치 생활비야. 넉 달 치. 그런데 이걸 나한테 상의도 없이 사? 정신이 있어, 없어?”
“하지만 면세점에서 사서 싸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반항하다 아내의 매서운 눈빛에 직면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내가 또다시 발을 구르더니 재차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아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힐긋 옆을 보았다. 두 아들이 국민 문짝을 열었다 닫으면서 신나게 뒹굴고 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이 조금씩 조금씩 풀렸다. 잠시 후 아내는 팔짱을 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환불도 못할 거, 할 수 없지.”
잠시의 침묵. 그리고 아내가 덧붙였다.
“고마워.”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잽싸게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밀려 있던 설거지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청소기를 밀고 바닥을 닦은 후 나는 아내의 귀에 대고 이번 출장에 따라오는 수당이 얼마인지를 속삭였다. 아내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분이 확 나아진 모양이었다. 심지어 아이들이 잠든 후 녹초가 되어 누웠을 때 집적거려 오는 남편을 걷어차지도 않을 정도로.
다음날 유모차 두 대를 끌고 나간 산책길에서 아내의 어깨에는 그 가방이 매여 있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9-22 13:3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