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6/10/23 23:52:09
Name Eternity
Subject TV를 끄지 못했던 마음
TV를 끄지 못했던 마음


도서관은 아침 8시에 열고 밤 11시에 닫았다. 수험생 시절의 나는 그 시간에 맞춰 직장인처럼 꼬박꼬박 도서관으로 출퇴근을 했다. 공부하는 중간 중간, 자꾸 자리를 비우고 담배를 피며 멍 때리는 시간이 아까워 어느 순간 담배를 끊었다. 어느 날은 내방에 들어오는 인터넷 통신도 끊었다. 전화요금도 부담이 되어 휴대폰마저도 끊고 나니 안 그래도 단조롭던 인간관계도 저절로 정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요란스럽게 공부했다 싶지만 당시의 나는 그만큼 절박했다. 그런 내게 도서관은 마음의 쉼터이자 전쟁터였다. 밤 10시 반쯤 되면 늦게까지 공부하던 이들도 주섬주섬 짐을 쌌고, 도서관 마감을 안내하는 종이 울리는 10분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방을 싸들고 도서관을 나섰다. 하지만 나는 버릇처럼 맨 마지막 즈음에 도서관을 나서기 일쑤였다. 왠지 그래야 마음이 좀 놓이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한 듯 뿌듯했다.

어떤 날은 10시 45분쯤에 까무룩 잠이 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너무 피곤했는지 마감 종소리도 듣지 못했다. 공부하던 사람들은 모두 퇴실했고 열람실의 불은 꺼졌다. 갑자기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책상에 파묻었던 고개를 황급히 들었다. 손전등을 든 경비 아저씨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아저씨는 말했다. "학생, 집에 가서 자야지." 깜깜하게 불꺼진 열람실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 도서관을 나서며 시계를 보니 12시가 가까웠다. 그날따라 까만 하늘에 달만 홀로 훤했다. 휴대폰이 없으니 어디 전화나 문자로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고.. 그렇게 달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가만히 빌었다. 합격도 좋지만.. 염치없이 합격만 바라기 전에, 합격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나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평소 11시가 넘는 시간에 동네 도서관을 나서 터덜터덜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거실의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켰다. 그시간쯤 되면 아버지는 안방에서 주무시고 엄마는 TV를 틀어놓고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조용히 들어와 씻고 부엌에서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고 나선 가만히 엄마를 깨웠다. 그제서야 엄마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안방으로 향했다. 그러고 나면 나는 텅 빈 소파에 앉아 TV 리모컨을 들었다. 흔해빠진 외화채널, 홈쇼핑 방송들, 해외축구 중계, 지나간 옛날 드라마들까지.. 케이블 채널은 자기들끼리 웅성웅성 떠들어댔지만 보고 싶은 채널은 하나도 없었다.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나는 무슨 주문에라도 걸린 인형처럼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꾸역꾸역 늦은 밤까지 TV를 시청하곤 했다. 항상 그랬다. 졸더라도 TV를 보면서 졸았다. 그 당시 내겐 TV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유흥거리(?)였다.

사실 피곤하면 그냥 방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면 그만인데, 나는 왜 TV를 끄지 못했을까. 그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순간의 나는 무언가 보상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루종일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공부만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쳇바퀴 같은 수험생의 일상. 어디 말할 곳 없이 쓸쓸하고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던 하루하루. 그 시절의 내 삶이 그랬다. 공부하는 기계처럼 하루를 마감하는 게 괜시리 아깝고 억울해서, 축축 처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렇게 고집스럽게 TV 화면을 쳐다봤다. 당시엔 내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위안거리가, 그 정도밖엔 없었나보다. 이른바 '저녁이 없는 삶'에 대한 보상 심리이자 내 나름의 소박한 반항. 누군가를 향한 반항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나는 매일 밤 TV를 보며 내 삶에 반항했다.

사실 그러면서도 그게 나한테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였다. 잠을 일찍 자야 다음날 좋은 컨디션으로 공부할 수 있는 수험생에게 늦잠은 나쁜 습관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 괜한 죄책감(?)에 휩싸여 TV를 보던 나는 한 번도 내게 괜찮다고 말해준 기억이 없다. 이왕 그럴 거, 하루라도 맘 편히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만약 내 주변 누군가가 그런 스트레스에 싸여 피곤한 하루를 꾸역꾸역 마감하고 있다면 그에겐 얘기해주고 싶다. 그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 내가 잘 안다고. 저녁이 없기에 오히려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한 채 헤매는 그 쓸쓸한 마음 말이다. 피로하기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그의 삶에 내가 저녁을 만들어주진 못하더라도, 그래도 이런 얘기는 해주고 싶다. TV를 좀 더 봐도 괜찮고, 컴퓨터를 좀 더 켜놔도 괜찮다고. 이 힘든 세상 속에서 우리들의 이런 모습은 지극히 정상이니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맘 편히 키보드를 두드리자는 얘기 정도는 해주고 싶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1-02 17:3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6/10/23 23:5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 마음을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공감이 가네요. 저도 일을 하고 밤늦게 들어와 별로 할 게 없더라도 컴퓨터를 1~2시간씩은 꼭 켜고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다 저절로 눈이 감길 정도가 되면 끄고 잠자리에 들곤 하거든요..
근성러너
16/10/24 00:37
수정 아이콘
잘보았습니다. 공감이많이되네요..
회자정리
16/10/24 07:41
수정 아이콘
제가 요즘 업무스트레스때문에 그러는데, 일종의 현실도피라 생각하고있어요. 아침해가 뜨는게 두려워 밤을 놓아주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고요.
음악세계
16/10/24 08:43
수정 아이콘
다들 공감하는 이야기인듯해요
파핀폐인
16/10/24 09:2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냉면과열무
16/10/24 09:45
수정 아이콘
좋아요.
즐겁게삽시다
16/10/24 09:47
수정 아이콘
TT
싸이유니
16/10/24 09:55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16/10/24 10:06
수정 아이콘
요즘 세상은 다들 그리 사는건가 싶네요..
이글이 100%공감됩니다.
그래도 모두들 파이팅입니다!
휀 라디언트
16/10/24 10:27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프로젝트 달릴때면 일주일 내내 출근하고 매일 새벽 1시 넘어서 퇴근하고 하는데, 그 시간에 미쳤다고 소주한잔 빨러갑니다.
그거먹고자면 아침 출근 늦어지고 몸버리고 하는걸 알면서도, 그냥 들어가면 내가 이래 살아 뭐하나 하는 자괴감이 너무 심해요...
거기서 더나가면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을 막쓰게 되죠. 흐흐.
-안군-
16/10/24 11:37
수정 아이콘
정말 공감이 갑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나면... 뭔가 놀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죠.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종의 보상심리랄까...
차라리 맘편하게 "난 이래도 돼, 난 이렇게 해도 될 만큼 충분히 했어." 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으면...
라니안
16/10/24 13:40
수정 아이콘
저도 고시와 유사한 수준의 공부를 장기간 했었고,
결국 합격하여 지금은 이전 공부할때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는데,

피곤에 쩔어 새벽에 들어와도
바로 잠자리에 들기 보다는 인터넷을 한다던지, 티비를 본다든지 하고 자게 되더라구요

나의 소중한 하루가 이렇게 끝나는게 너무 아쉬워서,
그리고 하루종일 똑같은 짓?만 해온 뇌에 다른 신선한 자극도 주고 휴식을 주고 싶어서 그랬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눈뜰때 후회하죠
보로미어
17/01/04 20:35
수정 아이콘
감동받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행운유수
17/01/16 02:01
수정 아이콘
pgr에 오면 다양한 장르의 수준 높은 글들을 볼 수가 있는데, 많은 지식이나 강한 주장이 담긴 화려한(?) 글보다 이런 잔잔한 수필이 더 좋습니다. 제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겠지만...
카미트리아
17/02/17 13:19
수정 아이콘
11시에 퇴근하면 피곤하다 자야지가 되는데...
1시반에 퇴근하면 억울해서라도 뭔가를 하게 되더라고요..
17/02/23 21:18
수정 아이콘
다른 분들처럼 공감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376 누리호 1차 발사에서 확인 된 기술적 성취 [29] 가라한7490 21/10/21 7490
3375 [도시이야기] 인천광역시 서구 [41] 라울리스타5899 21/10/19 5899
3374 [ADEX 기념] 혁신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는 헬리콥터 이야기 [22] 가라한5536 21/10/18 5536
3373 [역사]청바지가 500년이나 됐다구?! [15] Fig.16292 21/10/18 6292
3372 가장 위대한 인터넷 신조어 - 국뽕 (feat. 맑스) [55] 아스라이9157 21/10/17 9157
3371 이공계 대학원생을 위한 논문 쓰는 팁 [68] 해바라기7309 21/10/14 7309
3370 엄마에게 사랑해요! 라고 처음 말했습니다. [47] 엄마 사랑해요6199 21/10/12 6199
3369 5대 종합상사를 통해 알아보는 건물주 국가 일본의 돈 버는 방법 [86] 이그나티우스15266 21/10/09 15266
3368 [도시이야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57] 라울리스타6107 21/10/09 6107
3367 [LOL] 36살 3년만의 재도전 다이아 달성 후기,마지막 열정 [34] 가치파괴자6583 21/10/06 6583
3366 [기타] [강력 스포] 투더문 시리즈를 관통하는 떡밥에 대한 이야기. (신작 포함) [12] 랜슬롯5728 21/10/05 5728
3365 난제군 난제야. 이걸 어떻게 푼담. [8] onDemand6135 21/10/04 6135
3364 엄마, 제사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 [55] 일신9180 21/10/04 9180
3363 [오징어게임][스포] 깐부의 진짜 의미에 대해서 [26] 두 배런7941 21/10/04 7941
3362 [역사] 100년 전에도 슈퍼개미가? / 국내 증권시장의 역사 ① [11] Fig.14543 21/10/04 4543
3361 힌두교에서 가장 위대한 쇼: '릴라' [20] Farce4523 21/10/03 4523
3360 AI가속기 경쟁, 그리고 차세대 반도체 칩 시장 [53] cheme6203 21/10/01 6203
3359 누군가의 죽음을 선고하는 일 [39] 오만가지7600 21/09/30 7600
3358 차기 일본 총리 기시다 후미오는 누구인가? [45] 이그나티우스7530 21/09/29 7530
3357 무술이야기 1편, 가라데에 한국인을 끼얹는다면? [9] 제3지대4088 21/09/26 4088
3356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군을 가진 PMC. [24] 한국화약주식회사8143 21/09/26 8143
3355 [역사] 가장 오래된 인간의 친구 / 개의 역사 [12] Fig.14799 21/09/21 4799
3354 아랍 이름에 대한 대략적인 가이드 [61] Farce5787 21/09/24 578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