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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5/30 23:47:06
Name 글곰
File #1 20190530_130503.jpg (718.0 KB), Download : 60
Subject [일반] [연재] 제주도 보름 살기 - 여덟째 날, 열심히 돌아다닌 하루 (수정됨)


  아침에 아이가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아빠. 오이 좋아해?”
  “응. 좋아해.”
  “아빠. 당근 좋아해?”
  “응. 좋아해.”
  “아빠. 배추 좋아해?”
  “그저 그래.”
  “아빠. 양파 좋아해?”
  “아니. 싫어해.”
  “아빠. 감자 좋아해?”
  “응. 좋아해.”
  그리고 또다시 아이가 물어보려 해서 내가 선수를 쳤다.
  “아빠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예쁜 우리 딸.”
  그러자 딸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지금 채소 이야기하는 중이잖아. 그런 말은 하지 마.”
  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오랜만에 제주 시내 쪽으로 나갔다.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에는 IT업종의 여러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데 곳곳에 흥미로운 장소가 숨어 있다. 예컨대 세미양빌딩에는 문화공간 ‘낭’이 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과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합쳐진 데인데, 둘 다 본격적이지는 않다. 장서는 많지 않고 놀이기구도 두엇 정도가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 자체가 워낙 시원하게 뚫려 있어서 안에 앉아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평일 오전에 갔기에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한적한 즐거움을 느끼며 책을 뽑아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얼마 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단체로 들어오며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급히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왔다.

  유명한 카카오의 본사도 이곳에 있다. 카카오 스페이스 닷원과 닷투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부에서는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며 VR체험공간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은 스페이스 닷원 건물 1층에 위치한 조그만 카카오프렌즈 카페 겸 샵이다. 이곳에서는 제주도 한정품인 해녀복장 카카오프렌즈 인형을 살 수 있다. 손바닥만 한 인형 하나에 만 오천 원이라는 거금을 각오해야 하지만. 사실 이곳의 진정한 인기 상품은 인형 따위가 아니라 일회용 비닐봉지다. 카카오프렌즈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비닐봉지는 구입한 물건을 담아주는 용도로 크기에 따라 장당 삼백 원에서 백 원 사이의 가격인데, 사람들이 몇 장씩 사 가는 경우가 많다.
  
  첨단과학기술단지를 떠나 서쪽으로 십여 분쯤 가면 넥슨 컴퓨터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지난 20세기에 어린 게어미로서의 삶을 살았던 이들을 위한 성지다. 아타리부터 시작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출시된 대부분의 콘솔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 게임 패드를 직접 쥔 채 플레이해 볼 수도 있다. 금성사 브라운관 TV에 연결된 채 작동하고 있는 패미컴용 슈퍼마리오 월드를 플레이하고 있노라면 문득 행복마저 느껴진다. 입장료가 꽤 비싼 편이지만 게이머를 자칭하는 자라면 반드시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점심은 제주도에 올 때마다 한 번씩은 꼭 사 먹는 김만복김밥으로 정했다. 네모지고 큼지막한 김밥 안에는 전복을 섞어 지은 밥과 큼지막한 달걀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게 정말이지 꿀맛이다. 게다가 오징어무침을 함께 주문하면 그야말로 최고. 관광지의 맛집이라는 게 대체로 별 것 없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 엉망진창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김만복김밥은 항상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맥파이 양조장에 들렀다. 맥파이는 요즘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개인 양조장 겸 수제 맥주집이다. 운전을 해야 했기에 맥주를 마실 수가 없어서 이곳의 수제맥주가 다른 곳과 비교해 얼마나 뛰어난지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다만 감자 하나는 참 맛깔나게 튀겨 준다. 아내는 맥주 두 잔을 마시고, 아이는 사이다 한 잔을 마시고, 나는 튀긴 감자를 우적우적 퍼먹으니 모두가 만족스러워하는 간식시간이 되었다.

  저녁은 평대리에 있는 평대앓이라는 곳으로 갔다. 아내의 말로는 셰프가 홀로 운영하는 원테이블 식당이라 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사장 겸 셰프 말고도 직원이 하나 더 있었고 테이블은 넷인 데다 의자가 스무 개나 있었다. 아내의 맛집 정보 수집력은 뛰어난 편이지만 가끔씩 이런 식으로 오류가 발생하곤 한다. 게다가 뭔가 애매모호한 앤티크 인테리어까지 더해져서 아무래도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식당처럼 여겨졌는데, 맛은 뜻밖에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명란과 양상추와 아보카도와 튀긴 마늘과 각종 소스를 곁들이고 그 위에다 딱새우 대가리 다섯 개를 장식한 괴상망측한 비빔밥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맛이 좋았다. 다만 파스타는 지옥의 불길로 볶은 것처럼 매웠다.

   제주도에 온 이후 최초로 여행다운 여행을 다닌 하루였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힘들다. 게다가 이렇게 착실한 정보전달성 글이라니. 아무래도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마냥 어색하다. 아무래도 내일은 좀 더 게으른 일정을 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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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mind
19/05/31 00:14
수정 아이콘
넥슨컴퓨터박물관은 저도 기대안하고 그냥 들렀다가 한참 있었습니다.
그냥 대충해놨을줄 알았는데 상당히 잘해놨더라구요.
한번쓱보고 갈려다가 1시간넘게 있었네요.
19/06/01 00:35
수정 아이콘
참 좋았지요. 마음 같아서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죽치고 있고 싶었습니다.
마리아 호아키나
19/05/31 00:42
수정 아이콘
넥슨박물관.. 옛날 오락실게임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 1라운드 깨는게 한계였어요.
예를 들면 WWF 슈퍼스타 하는데 힘겨루기가 2라운드부터 너무 힘들어요.
아이유_밤편지
19/05/31 12:54
수정 아이콘
그게 안될때는 백대쉬하시면서 주먹질 4대치고 다운시킨 후 머리잡기(데굴데굴) 로프반동 반복하시면 어느새 기둥위에서 해머락을 시전하실수 있을겁니다.
마리아 호아키나
19/06/03 11:02
수정 아이콘
빅보스맨도 팀에 있어서 발차기로 서너번 연달아 쓰러뜨리고 로프반동 반복했는데도 지더라구요. 버튼이 좀 뻑뻑해서 연타가 안됐을수도 있겠네요.
동굴곰
19/05/31 07:04
수정 아이콘
장식해놓은건 일본판 패미컴인데 실연용은 NES네요. 컴보이일려나?
19/06/01 00:36
수정 아이콘
컴보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옆에는 슈퍼알라딘보이도 슈퍼겜보이도 있었거든요.
Hammuzzi
19/05/31 08:43
수정 아이콘
오늘은 맛있는것도 많이 드시고 관광도 많이 하셨군요. 흐흐. 안가본곳들도 있어 열심히 받아적었습니다. 넥슨컴퓨터 박물관은 큰 기대 안하고 갔는데 생각보다 잼있게 놀았습니다. 온라인으로 사면 좀더 싼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제주도 일부 표들은 온라인에서 사면 더 쌀때도 있고 비쌀때도(?!) 있고 하더라고요. 가장 좋은게 미리 링크 잡아놓고 현장 가격보고 사는게 싼것 같아요.
콩탕망탕
19/05/31 08:54
수정 아이콘
글쓴분 지금 베이스캠프로 삼고 계신곳 위치가 어디쯤인가요?
제주에서의 생활은 어디에 근거를 두는가도 꽤 중요한것 같더라구요
19/06/01 00:37
수정 아이콘
구좌읍, 비자림 근처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로 동북부로 다니네요.
다음주 초에 서귀포 쪽으로 이동 예정입니다.
영혼의공원
19/05/31 09:04
수정 아이콘
박물관 갔는데 우리딸 멘트가

"아빠 저거 우리집에 있는건데 ... 저것도 있고 저것도 있어! 우리집이 박물관이야?!"
Hammuzzi
19/05/31 09:38
수정 아이콘
아이고 크크크크
19/06/01 00:37
수정 아이콘
부럽습니다!!
ComeAgain
19/05/31 09:40
수정 아이콘
넥슨 박물관...
내 어린 시절이 박물관행이라니, 하는 마음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크크.
19/06/01 00:38
수정 아이콘
멋진 감상이네요. 하지만 힘내시지요. 게임기는 바뀌었을망정 우리는 아직 현역 게이머 아닙니까.
aDayInTheLife
19/05/31 09:46
수정 아이콘
넥슨 박물관은 아무 기대 안했는데 재밌었습니다. 크크
동네형
19/05/31 11:17
수정 아이콘
고런건 숙소구할떄 비용이 우찌 되나요?
19/06/01 00:39
수정 아이콘
제가 묵는 숙소는 대략 1박당 10만원 조금 넘어갑니다.
10년째도피중
19/05/31 15:40
수정 아이콘
"여행다운 여행을 했다" = "이동을 많이하면서 돈을 지불하는 장소를 갔다" 혹은 "음식이 맛있었다"
크크크

진짜 한바퀴돌면 못보던 데들이 우후죽순 생겨나있고 그 곳이 곧 지중해요 스칸디나비아요 독일이더구만요. 간혹 제주도...라고 주장하는 곳도 있긴하고. 폴리네시아에 관광객을 위한 폴리네시아만 살아남듯이 제주도도 그렇게 될테지요.

넥슨 박물관은 '중년' 게이머의 성지 맞습니다. 어린이들의 성지는 아닙니다. 크크크 아이들 상당 수가 1층 도서코너에서 얼쩡거리는 걸 볼 수 있고 1층 오락실에서 신난 아재들이... 여자들은 빨리 가자고 하는데 추억에 잠겨 잠깐만을 외치며 이것저것 해보는 아재들을 보니 동질감이 뭉클.
19/06/01 00:39
수정 아이콘
저는 30대라서 중년은 아닐 겁니다 . 아마도요. 아마도...
제가 슈퍼마리오 월드 플레이하는데 아이가 옆에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보고 있으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더군요.
10년째도피중
19/06/01 00:44
수정 아이콘
"우리 동년배들 다 소싯적에 슈퍼패미콤으로 슈퍼마리오 월드 해봤다.... "

농담이고 저는 소싯적에 패미콤으로 록맨하던 세대니 약간은 차이나...겠죠. 네. 뭐... (후비적)
19/06/01 00:52
수정 아이콘
제가 어머니를 졸라서 가장 처음에 산 타이틀이 록맨2였습니다. 그 어린 시절에 그 어려운 게임을 어떻게 클리어했는지 원...
Je ne sais quoi
19/06/01 20:44
수정 아이콘
하룻동안 엄청 열심히 다녔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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