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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5/25 02:35:28
Name 글곰
File #1 사본__20190525_022522.jpg (848.7 KB), Download : 53
Subject [연재] 제주도 보름 살기 - 둘째 날, 합류


  아침에 눈을 뜨니 열한 시간을 넘게 잔 후였다. 가능한 한 가장 게으른 방식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는 매우 간단한 과정을 거치는 데 거의 한 시간이 지나갔고, 이럭저럭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덧 정오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배가 고픈 나머지 다소 흉폭해질지도 모를 시각이었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었다. 산책을 겸해 걸어가기로 했다. 섣부른 결정을 후회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서울보다 훨씬 따가운 제주도의 햇볕은 무자비할 정도로 내리쬐었다. 나는 병든 수캐마냥 헉헉거리며 편의점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은 손에 들린 비닐봉지의 무게만큼이나 더욱더 후회스러웠다.

  집에 도착해서 삼각김밥을 먹고 생수를 마시며 나는 내가 본 풍경을 생각했다. 고작 칠백 미터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여섯 채의 건물을 보았다. 그중 식당 두 곳은 망해서 간판을 내렸고 슈퍼 하나에는 처량한 임대문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비율로 따지자면 오십 퍼센트.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진화론의 원칙은 이곳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기에 그만큼 더 서글퍼지는 현실이었다.

  오후 느지막이 친구 가족이 도착했다. 우리 가족처럼 부부에다 딸 한 명이 딸려 있었다. 집을 안내한 후에 자랑스레 냉장고를 열어 보여주었다. 너희를 위해 준비했노라고 뻐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맥주 네 캔과 커피 일곱 캔, 그리고 생수 한 통이 준비된 냉장고. 무더위에 편의점을 왕복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준비한 나의 손님맞이였다. 덧붙이자면 몹시 무거웠다.

  친구 가족은 공항 근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왔다고 했다. 나의 점심도 그보다 이르지는 않았다. 저녁은 애매했다. 마침 저녁 시간이 지나 아내와 딸이 도착할 예정이었기에 빵을 사다 놓기로 했다. 아내가 미리 귀띔한 바도 있었다. a la papa, 알파벳으로 써 놓으면 그럴듯하지만 우리말로 소리 내어 읽으면 꽤나 우스꽝스러운 이 빵집에서 빵을 사라고 아내는 지시했다. 명확하고도 간결한 지시였기에 나조차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삼만 원에 달하는 빵값은 친구가 지불했다. 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좋아진 친구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아내의 비행기는 예정보다 삼십칠 분 늦게 이륙했고 그만큼 늦게 도착했다. 마침내 공항으로 나온 아내의 얼굴은 완전히 진이 빠져 있었다. 심지어 딸아이조차도 지쳐 보였다. 나는 왜 늦게 출발한다고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잔소리하려던 계획을 급히 취소했다. 잔소리를 했다가는 여섯 배로 돌려받을 게 분명한 표정이었다.  

  이미 어두컴컴해진 한적한 도로를 사십오 분 동안 달려 숙소로 돌아왔다. 여덟 살인 딸아이는 네 살인 동생과 어울리느라 신이 났고, 꽤나 많이 충돌하면서도 그럭저럭 잘 놀았다. 친구의 아내는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게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나는 별 것 아닌 일로 마음이 상해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다 결국 여섯 배로 돌려받은 후에야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남자의 본성이란 그러면 안 되는 줄 빤히 알면서도 결국 저지르고야 마는 데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스레 절감했다. 그래서 그냥 맥주를 마셨다.

  자정이 되었고, 자기 싫다는 딸아이와 자야 한다는 아내 사이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모두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나더러 글을 쓰라고 재촉하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 나는 조심스레 침실을 나와 서피스를 켜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글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얼른 자야겠다고 생각한다. 졸리다.

  내일은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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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25 04:46
수정 아이콘
“남자의 본성이란 그러면 안 되는 줄 빤히 알면서도 결국 저지르고야 마는 데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스레 절감했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19/05/26 01:11
수정 아이콘
몸이 근질근질한 뭐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아시죠?(찡긋)
참돔회
19/05/25 09:00
수정 아이콘
뭐하나 공감 안 가는 묘사가 없네요 크크
NoWayOut
19/05/25 09:25
수정 아이콘
숨겨진 포인트가 한두군데가 아닌 크크
에인셀
19/05/25 09:28
수정 아이콘
아라파파 홍차밀크잼 맛있어요. 제주도 여행 갔을 때 잔뜩 사왔는데 유통기한이 짧아서 주변에 쫙 돌렸던 기억이ㅠㅠ 조만간 제주도의 진미들도 올려주시길 기대합니다.
참돔회
19/05/25 10:05
수정 아이콘
아 그 동남쪽에 카페에서 먹어본 흑돼지돈까스 진짜 맛있었는데...
19/05/26 01:11
수정 아이콘
담에 평일 오전에 가서 사봐야겠네요. 늦게 갔더니 매대가 절반 넘게 비어있었습니다.
19/05/25 10:12
수정 아이콘
제 상황이었다면 아침에 늦게 일어날 때가 행복의 절정. 삼각김밥이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이 두번째 행복..이었을 것 같습니다.
14th.ghost
19/05/25 10:44
수정 아이콘
이번 글은 '여섯 배'가 너무 인상적 입니다.
다음 글도 기대되네요!
Je ne sais quoi
19/05/25 11:55
수정 아이콘
아라파파가 이렇게나.. 괜찮긴 합니다. 전 다른 데를 더 좋아하지만
19/05/25 19:37
수정 아이콘
보통 이럴때 더좋아하시는 다른곳을 적어주시던데요,
다이어트
19/05/29 10:59
수정 아이콘
빵은 육지에도 맛있는데 많으니 패스하고 잼은 글쓴분이 북동쪽에 계시니 월정리 인근의 악마의잼도 괜찮죠.
사업드래군
19/05/25 12:04
수정 아이콘
겨우 여섯 배로 돌려받으신다니, 아내 분 너무 착하신 것 아닙니까.
19/05/26 01:13
수정 아이콘
그 이상 돌려주는 건 공정거래법 위반입니다. 저도 좀 살아야지요.
졸린 꿈
19/05/25 12:57
수정 아이콘
여섯배 크크크
人在江湖身不由己
19/05/25 13:48
수정 아이콘
병든 수탉 크크크
풀오름달
19/05/25 15:31
수정 아이콘
넘 잼있습니다. 즤집 남의편님은 10년 넘으니 좀 순해(?)지던데 크크크크크 빨리 깨달으셨네요
19/05/26 01:14
수정 아이콘
삶은 고해지만 고개를 돌리면 극락이라는 진실도 함께 깨달았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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