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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4/25 20:08:00
Name OrBef
Subject [8] 귀가길 (수정됨)
이 글은 제가 5년 전에 올렸던 '아들, 아들을 키워보자'
https://ppt21.com/?b=8&n=54809
와 2년 전에 올렸던 '아들, 아들을 키워봤습니다'
https://ppt21.com/?b=8&n=73429
의 후속편 격의 글입니다.

Image result for night driving

1. 아빠 살좀 빼.

일주일에 두 번, 아들을 데리고 검도장에 갑니다. 이제 어린이가 아니라 고등학생이라 성인반을 같이 다닙니다. 열 시 조금 넘어서 끝나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은 항상 어둡고, 미국 북부의 교외 지역에 살기 때문에 가로등도 거의 없어서 대충 사진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이 삼십 분 정도 되는 귀가길은 제가 일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입니다. 아들하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 수 있어서입니다. 저도 바쁘고 아들도 고등학생 된 이후로는 많이 바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같이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 않아요. 같이 땀 흘리고 집에 가게 되는 이 시간에는 친밀도도 높기 마련이라 평소에는 조금 조심해야하는 이야기들도 쉽게 꺼낼 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요즘은 아들놈이 자꾸 살 빼라고 타박합니다.

아들: 아빠, 난 아빠가 살을 좀 뺐으면 좋겠어.
저: 응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 빼려고.
아들: 아~ 네네 물론 그러시겠죠.
저: 진짠데?
아들: 아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살 좀 빼. 이러다가 아빠가 어느날 꽥 죽어버리면 내가 곤란해.
저: 그건 네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잖습니까.
아들: .....

2. 이건 남부가 아니라 중서부가 배경이거든? 이 무식한 놈들!


이 시간에는 대개 음악을 틀어놓게 마련이죠. 제 아이가 거의 일 년째 차에 탈 때마다 틀어놓는 음악입니다. 아이가 요즘 음악을 잘 듣지 않고 프랭크 시나트라(....)라던지 냇킹콜(........)이라던지 임현정씨(......) 같은 옛날 가수를 좋아해요. 아, 임현정씨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엮일 세대는 아닌데, 이 가수분이 옛날에 제 이웃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열심히 음악을 모으더군요.

7년 살던 텍사스를 (미국 남부) 떠나서 작년에 뉴저지로 (미국 북동부) 이사했습니다. 제가 이직을 해서 그렇게 된 건데, 아이가 고생을 많이 했지요. 친한 친구들하고 헤어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니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먼저 학교는 한국 아이가 별로 없는 곳이었는데 이번 학교는 학생의 1/3 정도가 한국 아이들인 학교로 왔어요. 미국 동부가 원래 좀 그렇습니다. '한국 아이 많은 학교는 경쟁이 심해서 힘들다던데, 괜찮을까?' 라는 걱정을 조금 했었는데, 다행히도 아이들이 착해요. 아들이 먼저 다가가서 친구를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라 첫 한 달 정도는 굉장히 힘들어했지만, 다른 아이들이 선선히 그룹에 끼워줘서 요즘은 잘 지냅니다. 

아들: 아빠 이 학교 아이들은 약도 안 하고 담배도 별로 안 피워. 키스하는 커플도 별로 없어서 다른 아이들이 막 놀리고 그런다?
저: 그거 참 다행이구나. 그래서 넌 여자친구가 있는가?
아들: 야이X 
저: 앞으로는 있을 예정인가?
아들: 흑흑흑 난 아마 안될 거야... 아무 여자아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 ㅠ.ㅠ

그래도 이번 여름 방학때에는 텍사스에 잠시라도 여행가서 옛친구들과 하루라도 다시 놀고 싶다고 하는데, 웬만하면 그렇게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이 한국인 그룹입니다. 교포도 있고 조기 유학온 학생도 있는데, 제 아들같은 텍사스 촌놈은 그 그룹에서도 처음인지라 서로 웃긴 일이 많다네요. 좋아하는 음악이나 가수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제 아이는 진짜 촌티가 팍팍 나거든요. 친구들이 존 덴버의 저 음악을 듣는 아들을 보고 '텍사스 촌놈이라 이런 음악을 듣는군!' 라고 놀리길래 '이 노래는 남부가 아니라 중서부가 배경이거든? 이 무식한 놈들!' 이라고 했다더군요 지가 미국 중서부와 남부의 차이에 대해서 뭘 안다고 크크크. 

3. 아이에게는 자기 길이 있긴 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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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수학 교습소(?) 에서 일하는 아들놈입니다. 이 사진은 인터넷에 공개된 사진이니까 초상권 침해 아닙니다. 저기서 어린 아이와 같이 책 들여다보는 학생이 제 아들이에요. 저건 시간이 좀 지난 사진이라서 지금 모습과는 조금 다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얘는 뭘 좋아할 지 몰라서 이것저것 잡다하게 시켜봤는데, 대부분은 두어 달 하다가 때려치더군요. 싫다는 걸 강제로 시키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미술 음악 테니스 디베이트 등등 한국계 미국인이 해볼 만한 활동은 대충 다 건드려봤지만 결국 다 그만뒀습니다. 다행히도 운동은 좋아해서 저와 검도하는 것 말고도 체육관에서 킥복싱하고 집에서는 근육 운동하고 그러네요. 

근데 신기하게 수학 공부하는 것은 좋아하고 봉사활동으로 수학 가르치는 것은 좋아해요. 다른 과목도 아니고 딱 수학 하나만 그렇습니다. 

D3lVFK-XkAMLYkE.jpg
이것도 인터넷에 공개된 사진이니까 초상권 침해 아닙니다. 학교 수학 클럽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맨 오른쪽에서 웃고있는 아이가 제 아들이에요. 옆의 형/누나들은 대부분 12학년 (한국 고3) 이라 아직 10학년 (고1) 인 제 아이가 아무래도 좀 어려보이죠. 저 중 형님 한 명이 고맙게도 제 아이한테 유난히 잘 대해줘서 요즘은 제 아이가 잘 따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확실해지니까 (사실 좋아하는 건 하나고 나머지 모두를 싫어하는 거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이 쉬워지더군요. 어렸을 때는 물리학자가 되겠다 경제학자가 되겠다 등등 이것저것 이야기하더니, 요즘은 수학/컴사로 거의 진로를 굳혔습니다.

4. 곧 품에서 떠날 날이 올 것 같습니다.

bb

뭐 피할 수 없습니다. 올 여름 지나면 11학년이고 1년 지나면 12학년이죠. 12학년 끝나면 대학교에 갈 거고, 집 근처에 좋은 학교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학교에 가면 당연히 아주 기쁘겠습니다만, 아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높은 확률로 집을 떠나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될 거고,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오고, 곧 두 달에 한 번오다가, 이윽고 일 년에 한 번 찾아와주면 고마운 사이가 되겠지요.

당연히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가끔 그게 감정적으로 확 느껴질 때가 있어요. 얼마전에 검도 관련해서 승단 심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실력이 정체기라 (분명히 시작은 같이 했는데.... 이런 제길 아무리 이런 쪽으로 욕심을 버렸다지만 가끔은 좀 한심해요) 이번에 자격이 안 돼서 관람석에 있었는데, 심사장에서 다른 응시자 아저씨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더라니, 예전에 이야기했던 그 감정이 다시 느껴지더라고요.

아래는 2014년에 썼던 글에서 따옵니다:
Ik2Fo8w.jpg

[인용시작] 우연히도 해가 지는 와중에 말을 타고 한참을 돌게 되었었어요. 그림자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진 왼쪽에 저물어가는 해가 있고 앞에서 아이는 리더 누나 옆에서 쫄래쫄래 쫓아가고 있었는데, 앞에서 저렇게 말 타고 가는 아들을 보다 보니, '그래 니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주마. 그다음에는 언젠가 너도 짝을 찾아서 가정도 만들 거고, 우리도 헤어질 날이 오겠지? 그다음에는 내가 아예 세상에 없는 날도 올 거고. 그런 날이 늦게 오길 바라지만, 결국 그 날은 올 거고, 그 뒤에도 넌 계속 앞으로 가야 하는 거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인용끝]

아직 제가 세상에 없는 날이야 조금 더 미래의 일이겠지만, 아들이 성인이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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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5 21:07
수정 아이콘
조금 빠르죠? 저도 제 딸아이가 떠날 날을 가늠해보곤 하는데 아내는 실감이 안 나는 모양입니다. 아직은 딸아이가 엄마와 쭈욱 살 거라고 자신있게 말 하고 저도 그게 지금 딸의 진심인건 알지만 우리에겐 만남과 이별이 예정되어 있는거니까요. 곁에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사랑해줘야겠죠.
19/04/25 21:10
수정 아이콘
그렇죠 아이들은 평생 부모하고 같이 살 거라고 이야기하고 그게 물론 진심인데, 대부분의 결과는 다르게 나오는 것 역시 사실이지요.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은 꼭 아이가 돌아가신 부모님한테 하는 말만은 아니지 싶습니다.
제랄드
19/04/25 21:12
수정 아이콘
1.
저 역시 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훈훈하면서도 부럽네요.
이제 초2라 어느 세월에 저렇게 키우나 싶...

2.
지금 서울에서는 옅은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존 덴버 아저씨 노래가 참 잘 어울리네요.
감성이 촉촉해진다능.

3.
시리즈 모두 추천을 남겼습니다.
알흠다운 일대기네요 :)
19/04/25 21:23
수정 아이콘
초2면 아직 갈 길이 멀긴 한데, 이게 점점 가속이 붙어요. 아무래도 아이가 클 수록 조금씩 수월해지는 것도 있어서 체감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지요. 초2 에서 고등학교 갈 때까지 금방입니다. 힘들긴 해도 돌이켜보면 그 때가 참 재미있었어요. 큰 욕심 없이 그저 아이가 건강하고 큰 사고 안 치면서 크면 주어진 복에 감사하면서 살아야하는 것 같습니다. 아드님이 잘 크길 기원합니다.
사악군
19/04/25 21:18
수정 아이콘
다이어트도 하고 운동도 하고 해야겠네요.
아들이 '아부지 왜 일케 오래 사슈? 낄낄'
노가리깔만큼 살아야지..

하 아들보고싶네요 ㅜㅜ 잘읽었습니다.
19/04/25 21:20
수정 아이콘
사실 저도 말만 저렇게 하지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근데 안 빠집..... ㅠ.ㅠ;;;;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 진짜 더 노력해야지!
19/04/25 22:09
수정 아이콘
오.. 예전에 자게에 올리신 orbef님 사진 보고 연두색 옷입은 분이 자제분 아닐까 했더니, 그 뒷 분이군요. 훈남이네요!
19/04/25 22:27
수정 아이콘
연두색 입은 학생이 텍사스에서 제일 친했던 친구입니다. 지금도 자주 서로 텍스트하고 게임 같이 하고 그래요 :)
19/04/26 09:3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괜시리 마지막에 코끝이 찡.
서린언니
19/04/26 13:44
수정 아이콘
2번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곡이네요 테입으로 늘어질때까지 들으셨죠
유쾌한보살
19/04/26 20:41
수정 아이콘
오~~ 선하게 인상 좋은 훈남 !!
밥 안 잡숴도 배부르시겠어요.
읽으면서..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자신이로구나..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19/04/26 22:49
수정 아이콘
그러게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본인과 타인 사이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그런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주여름
19/04/28 09:21
수정 아이콘
자식농사는 가늠조차 안되지만.. 행복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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