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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8/12/06 23:18:18 |
Name |
잉곰 |
Subject |
플스를 샀습니다. |
아마 롤 아이디를 지운 게 3년쯤 전이었을 겁니다.
게임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승패에는 과도하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고, 짧게 승패를 내는 롤은 그런 제 성향과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밤을 새가며 롤을 하곤 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롤 아이디를 지운 이유는 헬퍼 때문도 아니고, 빡쳐서도 아니고, 신고로 계정정지를 먹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인생이 강등되고 있었기 때문이죠.
삶을 살다보면 누구나 덤프트럭에 치인 것 같은 시절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그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과격하게 다가왔습니다. 일상은 무너졌고 생활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고정된 지출이 수입을 추월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었습니다. 무너진 생활이 수입을 줄여 적자폭이 늘어날 때도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통장이 막혔을 때는 멍했고, 차량이 압류당했을 때는 넋을 놓았습니다. 망가지는 흐름에 휘말려 어어하다보니 어느 순간 바닥에 처박혔습니다. 아둥대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지하로 떨어지더군요.
그리고는 맨틀에 닿았습니다. 선택의 시간이 오더군요. 이제는 죽어도 기어올라가거나 아니면 죽는 수 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후자쪽이 훨씬 편할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운명공동체 때문이었습니다. 네. 혼자 죽는 법은 없더라구요. 죽으면 다 같이 죽지.
아시다시피 죽지 못하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발버둥치기 시작했습니다. 유일한 취미였던 롤을 손대지 못하게 아이디를 지워버리고 컴퓨터에 깔려있던 게임도 모두 날렸습니다. 그리고 가방 하나 싸서 홀홀단신 상경했습니다.
상경하기 전날 가족에게 이를 악물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반전 시키기 위해서는 절대 이 생활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죽든 살든 가서 결판을 낼테니 그 때까지 버텨라.
그렇게 연고 하나 없는 곳으로 올라와 보일러도 돌아가지 않는 냉굴에 밀고 들어갔습니다. 하필 그날이 크리스마스였죠. 인터넷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 냄비박스를 책상삼아 노트북을 켜놓고 전기장판 하나 깔고 누우니 몸살이 오더군요.
이러다 죽는다는 생각에 억지로 일어나 죽을 사러 갔습니다. 네. 당연하게도 죽집은 문을 닫았고, 라면 하나 사들고 터덜터덜 돌아왔습니다.
어디선가 은은한 캐롤이 들려오는 낯설기만한 거리.
다들 행복해보이는 사람들 속을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이상하더라구요. 제가 살던 곳과는 다르게 거리의 좌우는 커다랗고 네모난 건물로 막혀있어, 보이는 거라고는 조막만한 크기의 작고 네모난 하늘 뿐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눈이 시큰해졌습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죽어도 그날 보았던 하늘을 잊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논하는 건 구차하고 민망한 일이라 피하고 싶지만, 저를 아는 누구에게도,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마저 ‘정말 열심히 하셨어요’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만큼 이 악물고 살았습니다.
덕분에 맨틀을 박차고 지하를 기어나와 바닥에서 올라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충분하다 소리를 들었음에도 악문 이에 힘을 뺄 수 없었던 건, 언제 다시 덤프트럭이 내 인생을 치고 지나갈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3년을 쉼없이 달리다보니 지치더군요. 그럼에도 티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할 수 있으니까요. 아직 쓰러진 것도 아니고 다리에 힘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러다 지칠 때쯤에는 여기에 들어와 종종 피식피식 웃곤 했습니다.
아 물론 키배도 떴습니다. 혹시 제게 악감정을 가지신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을 빌어 사과드립니다. 종종 신경이 날카로운 채 들어와 패악질을 부렸습니다. 욕하십시오. 죄송합니다.
그 중 유난히 눈에 띄는 글들이 플스에 관련된 글들이었습니다. 고백컨대 저는 단 한번도 콘솔을 사본적이 없습니다.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플스글에 관심이 간 것은 제게 있어 플스의 의미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투자할 여유가 있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무언가’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입에서 푸념처럼 한마디가 나왔습니다.
“아 플스 사고 싶다.”
딱히 생각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투정과도 같은 말이었죠. 하지만 그 말의 여파는 굉장했습니다. 회사 동생이 그 말을 듣고는 씨익 웃더군요. 블랙프라이데이 주간이라 해외에 최저가가 뜨고 있어서 지금이 적기랍니다. 그리고 링크까지 보내주더군요.
링크를 멍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걸 사도 될까? 이제는 내가 여유를 좀 가져도 되는걸까?
다른 이들에게는 별 것 아닌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허락보다 쉬운 용서를 구하는 일일테고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취미의 일환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있어서 플스를 구매한다는 건 쉼 없이 달리던 일상에 쉼표를 찍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설사 그 플스가 일년에 채 몇 번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해도 말입니다.
고민은 길었지만 고개는 결국 끄덕여졌습니다. 이 파란색 마물은 지체없이 태평양을 넘어 제 손에 떨어졌습니다.
플스를 집에 가져가기까지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집에 둔 플스를 열어보기까지도 오 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어쩌면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달리던 마라토너가 그 자리에 한 번 주저앉아 심호흡을 하고 일어나면 다시는 원래의 페이스를 회복하지 못하는 것처럼, 게임을 다시 즐긴다는 게 제 인생을 다시 과거처럼 되돌려 놓을까 봐.
그렇게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플스를 개봉했습니다.
제가 제게 말합니다.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된다고, 3년을 달렸으면 일년에 며칠쯤은 쉬어도 아무도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고. 아니, 나도 이제 나를 쉬게 해도 된다고,
박스를 뜯는 과정은 경건했습니다. 미묘한 떨림. 그리고 미묘한 설렘. 오늘 하루만큼은 다른 일을 다 접어두고 게임에 흠뻑 빠져야지. 스파이더맨도 샀으니까 오늘은 다 내려놓고 자유롭게 빌딩 사이를 날아다녀야지.
그날 내가 보았던 그 크고 네모난 빌딩 아래서 조막만한 하늘을 보는 게 아니라 훨훨 날며 그 하늘로 뛰어올라야지.
불안을 밀어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박스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플스를 꺼낸 저는 흐믓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10볼트 코드]
아 이거 미국에서 왔지. 미국은 220v가 아니지. 지금 시간이 새벽인데 어디가서 돼지코를 구하나. 빌어먹을!
으아니차! 왜 햄볶할 수가 없엉!
웃음이 터졌습니다. 어이가 없더군요. 떡 줄 플스는 생각도 안 하는데 스파이더맨부터 마시고 있었습니다. 빵터져서 플스를 다시 넣고는 조심스레 다시 봉인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봉인된 플스는 다시 3일째 TV앞에 놓여 있습니다.
한번 연 봉인은 다시 닫을 수 없는 법. 저 플스는 언젠가는 다시 박스를 뚫고 나오겠죠.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게임을 했다는 게 아니라 제가 게임을 할 마음을 먹었다는 거니까요.
어 뭐 물론 이번 주말은 바쁘고 다음 주중도 바쁘니 다음 주말쯤에는 큰맘 먹고 게임을 해볼까 합니다. 썩어버린 손이 잘 움직일까 모르겠지만, 괜찮을겁니다. 게임은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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