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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8/02 15:33:55
Name Eternity
Subject 이해의 밥상
이해의 밥상


나는 생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의 내 생일이건, 타인의 생일이건. 그래서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것도 좀 서툴고, 누군가가 내 생일을 챙겨주는 것도 좀 어색하고 낯설다. 누군가가 내 생일을 기억해주고 챙겨주면 감동하고 고마워하기보단, 그냥 괜히 민폐를 끼친 듯한 기분이 든다. 막연히 느끼기에, 이 세상에는 생일보다 중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다. 작년 초의 내 생일도 그랬다. 마침 생일이 명절 즈음이라서 아주 마음이 편했다. 그냥 북적북적한 명절 분위기에 묻혀 조용히 지나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즈음해서 친구 한명을 만났다. 당시 친구는 오랜 수험생활 끝에 교사임용시험에 합격했다. 축하를 위한 자리였다. 비록 내 일은 아니었지만 내 가족의 일처럼 자랑스럽고 기뻤다. 그 친구도 또한 내게, 어려운 시기에도 든든히 곁을 지켜주고 묵묵히 힘을 줘서 힘든 수험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 친구도 나도, 같이 합격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합격 축하를 위해 가진 만남이었건만, 어느새 친구는 내 생일축하를 목적으로 그 자리를 변질(?)시켰다. 나는 이제 막 시험에 합격해서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않을 친구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는 내게 고급 횟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친구는 내 손을 끌었다. 나는 다소 편치 않은 마음으로 친구를 따라나섰다. 혹시나 몰라 검색으로 찾아보니 우리가 가려던 횟집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다행이었다.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어디를 갈지 몰라 신촌 거리를 한참을 헤매던 중에 친구에게 말했다. "야 그냥 우리 갈빗집이나 가자. 가서 고기나 먹자!" 돼지갈비 정도면 나도 친구도, 부담가지지 않고 맘 편히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자 친구는 생각난 고깃집이 있다며 나를 이끌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친구를 따라나섰다.

우리가 당도한 곳은 으리으리한 건물 한 채가 전부 고깃집으로 되어있는 신촌 한복판의 B갈빗집이었다. 나는 그냥 '이 갈빗집은 장사가 잘되나보네. 건물이 참 크네.'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고깃집 입구로 들어섰다. 그런데 출입문 초입에서 우리를 안내하는 여직원의 태도와 옷매무새가 심상치 않았다. 깔끔한 개량한복에, 사장님을 모시는 듯한 공손하고 깍듯한 매너까지. 한마디로 무언가 과하게 친절하고 쓸데없이 고급진 느낌? '대충 뭐 갈비나 먹지 뭐.'라는 생각으로 입구에 들어서던 나는 무언가 내 예상과 다르게 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고급지고 깔끔한 인테리어와 그보다 더 깔끔한 직원의 응대가 마치 "너희를 위한 메뉴는 없다."라고 웅변적으로 말하는 듯 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다를 향해 폴짝폴짝 몸부림치는 갯뻘의 물고기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며 조급하게 메뉴판부터 찾았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물통의 물부터 따랐을 내 손은 재빠르게 메뉴판을 움켜쥐고 있었다. 내 엉덩이는 언제든지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가 돼있다는 듯 시트에 반쯤만 걸쳐진 채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른 메뉴판을 펼쳤다.

세상에.

메뉴판에 있는 1인분 가격 뒤에 0이 실수로 하나 더 붙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눈을 씻고 메뉴판을 뚫어져라 훑어봤다. 메뉴는 전부 한우였다. 내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액수의 1인분이었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메뉴판을 탁 닫았다.

["야, 일어나자. 여기 너무 비싸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미 엉덩이를 시트에서 뗀 채로 친구에게 나갈 것을 재촉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친구도 속으론 적잖이 놀랐을 것이 분명했다. 아직 자리가 정돈되지 않은 이 어수선한 타이밍에 얼른 끌고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타이밍은 빠를수록 좋았다. 괜히 미적대다가 친절로 중무장한 개량한복 점원이 웃으며 다가오기라도 하면 더 곤란했다. 하지만 친구의 태도는 내 예상과 달리 의연했다. 그는 조급함 없는 태도로 말했다.

["여기서 먹자. 이 정도는 내가 사줄 수 있어."]

친구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너한테 비싼 밥 한번 사주고 싶더라."]

물론 마음은 고마웠지만, 나는 이런 호의에 감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장수생으로 수험생활을 했던 친구의 수중에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그의 고혈을 빨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그의 말에도 나는 계속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깟 생일 때문에, 고된 수험생활을 이제 막 끝낸 친구에게 괜한 금전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값 싼 밥 한 끼 정도면 충분했다. 입구에서부터 풍기던 이 갈빗집의 위용을 진작에 눈치채지 못하고 생각없이 들어선 나의 무심함을 탓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내 속내를 눈치 챘는지,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너는 평소에 보면, 남한테 니가 해주는 것들은 별거 아닌 것처럼 굴면서, 남들한테 받는 작은 것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당황하고 미안해하고.. 그러더라. 괜찮으니까, 오늘은 그러지 말고 그냥 맘 편히 먹어."]

그말을 듣는 순간 사실 속으로 놀랐다. 친구의 말처럼 나는 항상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았다.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은 아무리 많은 것을 해줘도 대단치 않아보였다. 그건 내가 통이 크고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라 그냥 보잘 것 없는 내 입장에선 상대방에게 뭘 해줘도 변변치 않은 것만 같은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뭘 해줘도 꼭 무언가 쑥스럽고 빚진 기분.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로부터 받는 호의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미안하고 크게 빚진 기분이 들었다. 직장에서도 어떤 문제가 생겨 동료들 가운데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면 내가 나서는 일이 보통이었다. 동료가 당한 부당함을 상사에게 알리고 따지는 일도 내 몫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것이 항상 내게 좋은 결과로 돌아오진 않았다. 하지만 서로가 뻔히 아는 상황에서 나 하나 편하자고 귀 닫고 모른 척하는 일은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친구 모임 또는 지인 모임에서 총무 역할이나 정산 업무를 주로 담당하던 나는, 그래서 알게 모르게 손해 보는 일이 잦았다. 정산 도중 누군가 살짝 더 내야하는 애매한 상황이 생기면 그냥 내 돈을 조금 더 내서 맞추곤 했다. 어차피 소액이고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이 여러 모임에서 점점 반복되다보니 그것도 은근 작은 액수는 아니었다. 다만 주변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내 주변에는 나보다 훨씬 더 통이 크고 씀씀이가 큰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의 화통한 씀씀이에 비하면 나의 이런 사소한 행동들과 속마음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이 타인에게 생각 외로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 혼자만 나를 이렇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에 좀 놀라기도 했고 그러면서 무언가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의 물질적 호의에는 무감각했던 내가, 이 순간에는 좀 감동했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작은 속사정을 누군가 알아주는 기분. 나의 내밀한 무언가를 누군가로부터 이해받는 기분이 참 오랜만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과 시각으로 서로를 규정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 이 두 가지가 일치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관대한 경우가 많고, 타인은 타인대로 자신만의 굴절된 시각으로 바라보기 쉽다. 이 두 종류의 주관적 판단이 어긋나지 않고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려면 '치열한 관심'이 각자에게 필요하다.

타인의 작은 호의에도 민감하게 굴고 불편해하는 나를 보며 누군가는 '유난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저러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친구는 "네가 그런 사람인 걸 잘 안다. 그러니 괜찮다."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친구의 관심어린 한마디가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날의 생일상이 내가 받은 가장 고마운 밥상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뭐랄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해의 밥상' 같은 느낌. 그의 말에, 나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날의 저녁밥을 먹으며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싼 이 세상을 '미안하게만' 바라보기 보다는 좀더 '고맙게'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편해져서였을까. 목에 탁 걸려 안 넘어갈 것 같던 값비싼 소갈비가 혀에 닿자마자 아침 이슬처럼 녹아들며 술술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시원하고 청량한 맥주도 왜 그리 맛있던지. 부담스럽던 여직원의 친절도 어느새 마냥 반갑고 흐뭇했다. 그리고 역시 고기는 한우가 최고였다. 한우의 귀한 맛을 맘 편히 즐길 수 있게 해준 그날의 친구의 한마디가, 헤어진 후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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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해랑
17/08/02 15:37
수정 아이콘
너무나 공감이 가서 마치 제가 썼나 싶네요...
사악군
17/08/02 15:4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좋은 분의 좋은 친구, 좋은사람들이시네요!^^
Janzisuka
17/08/02 16:25
수정 아이콘
공감이 가네요...
저 역시 누군가 밥을 사는거에 이상하게 불안하더라구요. 그냥 제가 사면 마음도 편한데..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닉 로즈
17/08/02 16:42
수정 아이콘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가지듯이♬
밥은 서로 서로 ♬ 나누어 먹는 것♬먹는 것!♬
철철대마왕
17/08/02 16:43
수정 아이콘
한우 살살 녹는다!
누군가 날 이해해주는것만큼 기쁜일은 없죠.. 좋은친구네요
17/08/02 16:55
수정 아이콘
b...brother...형제..갈비인가요
살려야한다
17/08/02 19:20
수정 아이콘
벽제갈비겠죠?
싸이유니
17/08/03 09:51
수정 아이콘
벽제갈비 냉면도 비싸던대..갈비를....
17/08/03 13:08
수정 아이콘
'생각난 고깃집'이라며 벽제 갈비로 인도한 친구라면, 그 가게의 가격을 몰랐을리 없을겁니다.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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