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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1/06 03:58:55
Name CoMbI COLa
Subject 착한 사람
나는 착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물론 못 생긴 사람한테 착하게 생겼다고 말하는 것처럼 일종의 립서비스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다지 싹싹하지도 않고, 입에 발린 소리도 못 하고, 기부천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나는 누군가 혼자 일하고 있는걸 보고만 있지 못 한다. 저건 분명 내 일이 아닌데도 일처리에 허덕이고 있으면 신경이 너무 쓰여서 도와줘야만 마음이 편해진다.


언제부터 이랬을까 생각해보면 아마 어렸을 때 우리집의 풍경 때문인 것 같다. 저녁을 먹은 후 형과 누나는 방으로 들어가고 아버지는 술 기운에 TV를 보시다가 잠에 드셨다. 그러면 어머니 홀로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곤 하셨다.

IMF 이전에는 전업주부셨으니 그게 당연했을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신 후에도 집안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시대를 살아오셨고, 형 누나는 고등학생이었으니 충분히 있을법한 상황이었지만 어린 나는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보기 힘들어 종종 도와드렸다.


군대에서도 후임들을 많이 도와줬다. 물론 천사표 선임은 아니었다. 괴롭히기도 했고 소위 악폐습도 그대로 대물림했었다. 어쨌든 마지막으로 맞은게 일병 6호봉 때였는데, 5개월 고참이 나보고 이기적인 놈이라고 했다. 후임들이 할 잡일까지 해버리니 나만 성실한 놈으로 보이고 후임들은 개X놈으로 보이게 만든다는 이유였다.

평소에도 나를 안 좋아하던 선임이라 그러려니 했다.

말년이 되어서 제대 후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간부에게 직업군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 간부는 나에게 병사일 때 잘 하는거랑 간부일 때 잘 하는 건 다른거라며 직업군인은 나에게 안 어울린다고 했다.

군인보다 더 나은 직업을 찾으라는 뜻이라 생각했다.


작년 연말 회식자리에서 팀장과 단 둘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팀은 7명짜리 작은 팀이었는데, 우리 둘을 빼고는 다들 경력 1년 남짓에 20대들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어울림이었다.

팀장은 나만한 부하직원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관리직으로서는 별로라고 했다. 신입들 일까지 해줘서 그들이 숙련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고, 당연한듯이 도움을 구하도록 만들고 있다면서 말이다. 만약 자기에게 인사권이 있다면 절대 팀장자리를 주지 않을거라며 새해에는 좀 내버려 두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이제 알았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일을 잘 도와줘서 그런거였다는걸, 그리고 나는 도가 지나치다는걸 말이다.


누군가는 나를 호구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높은 곳에 오르지 못 할지도 모른다.
후에 사람은 착한데... 라는 평가를 받을지 모른다.
그 땐 분명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글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될지도 모르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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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잎클로버
20/01/06 06:03
수정 아이콘
사람사는거 다 자기주관 있고 정답은 없다고 생각해요 몇몇 사람은 타인에게 너무 현자인듯이 자기가 옳다고 말하는경향이 있는거 같아요 힘내세요
휀 라디언트
20/01/06 07:11
수정 아이콘
사람됨됨이와는 별개로 팀장님 의견은 그래도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글쓴분을 위해서 하신 말로 보입니다.
회사일이란게 대부분 혼자서는 할수없는 거대한 일들이고, 그렇기에 과도한 서포트는 팀의 전체적인 역량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일에 다 손을대는것은 본인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타인에게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
관리자라면 적절하게 시키고 동기부여를 하는것도 잘할수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아쉽겠지만 맞는 조언이니 곱씹어 보시는것도 좋을껍니다.
22raptor
20/01/06 11:18
수정 아이콘
내가 도움을 준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그가 날 도와줄 기회를 주면 좋습니다. 그것이 비록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도요.
비밀의문
20/01/06 14:48
수정 아이콘
본인이 마음 편하신거면 그대로 하셔도 괜찮지 않을가요..? 살면서 조건없이 도와주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믿고 살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호구보다는 combi cola 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을거에요.
-안군-
20/01/06 14:52
수정 아이콘
물고기를 잡아주는것과 낚시를 가르쳐 주는 것. 말로는 단순하지만 사실 낚시를 가르치는 일이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100배는 힘들죠. 특히 자신이 물고기를 잡는데 베테랑이라면 더욱...
잘 가르치는 사람이야말로 조직이 커지고 직위가 높아질수록 더 필요한 인재일겁니다. 물론 그것조차도 귀찮아서 안하는 사람도 많지만, 글 쓰신 분의 심성이라면 그냥 마음가짐의 문제에 불과할 수도 있을겁니다.
20/01/06 16:10
수정 아이콘
사회에서 후임을 도와주는 건 다 해주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 해주는 건 성장할 기회를 빼앗는 게 맞고요. 가르치는 게 훨씬 더 힘듭니다. 저도 후임 받기 힘든 성격이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다 해버리지 않으면 못 참아서요. 물론 성격은 못돼쳐먹었습니다 크크크
20/01/06 18:22
수정 아이콘
'착한 사람 문성현'이라는 소설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약은먹자
20/01/07 15:35
수정 아이콘
별 문제 없는거 같은데 어떤 업무에 종사하는지 모르지만
개인이 매출을 올리는 프리랜서 쪽으로 변경해보시죠.
후임들이나 상사에게 하듯 고객들에게 하면 될듯합니다.
약간의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거 같은데 그러면 팀플레이보다 개인플레이가 더 맞죠.
가브라멜렉
20/01/07 18:52
수정 아이콘
저도 비슷한 성향이라 어느정도 동질감이 듭니다... 그래서 손해본 것도.. 호구잡힌 것도 무지 많았는데 그걸 통해서 느낀 게 ... 어차피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 어느정도 노력을 통해 타협점은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래서 .. 일이 있으면 도와는 주되... 먼저 요청하면 도와주자.. 그게 아니면 내 할일만 신경쓰자 이런 식으로 사소한 부분부터 행동을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 하잖아요? 하하.. 죄책감 가지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구요... 작은 것부터 조금씩 다르게 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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