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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2/15 21:22:50
Name 꿀꿀꾸잉
Subject [11] 메리크리스마스, 제제 (수정됨)


패딩을 껴입어도
교복이 춥게만 느껴지던 그때
나는 너를 처음 보았다.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강아지를 들여온 건지
나는 화를 내며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게 짜증이 나던 때였다.

얼마나 작고 겁은 그리 많았는지
부모님이 들어가서 불꺼진 거실에서
너는 당황해서 한참을 문앞에 있었다

작디 작은 목소리로 낑낑거리는 너를 안고
퉁명스럽게 문을 열고,
조심스레 침대위에 올리니
이불속이 따뜻했던 모양인지
너는 금방 잠이 들었다

신경이 너무도 쓰여
자습서를 던져버리곤 그대로 옆에 누웠다.

작고 작은 배가 부풀어오르고
그보다 더 작은 입에서는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고요하고 어둡던 방에
자그만 소리가 방을 채우고
조심스레 뻗은 팔엔
온기가 느껴졌다.

다음날 나는 퉁명스럽게 문을 나서며
엄마에게 강아지 이름은
"제제"라고 부르자고 했다.
부끄러워하면서

*  *  *


즐겁고 즐겁던 일이 많았다.

작디 작은 너는 우유를 마시고
배를 두드리면 트림을 했다.

처음으로 개껌을 주자,
한번도 본적 없던 기세로
야무지게 씹어먹기 시작했다.

상상해본적도 없는 물건들이 집에 들어왔다.
수건이 있던 박스가 강아지 집으로 바뀌고
냉장고 옆에는 물통과 사료통이 놓여지고
거실 위에는 작고 작은 강아지 옷이 걸렸다

처음으로 너가 침대위로 오를때는 기뻤다.
처음으로 나를 물었을때는 정말로 화냈다.
처음으로 운동장에 놓았을때는, 어찌나 빠르던지

너와 모든 순간이, 경험들이
지루했던 일상의 색깔을 진하게 물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작고 작은 너를 챙겨준건 나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우리 가족을 챙기던 것은 너였다.

누군가 우울할때면 먼저 와서 꼬리를 흔들곤 했다.
누군가 화를 낼때면 조심스레 눈치를 보곤
괜찮다 싶을 때 다가와, 품안에 들어오곤 했다.

이따금 이리저리 성질을 부리곤 했지만
실제론 얼마나 겁은 많고 소심했는지
우리가 어딘가로 나갈땐 서럽게 울곤했다.
동물병원에 맡기고 보면 무서웠는지 꼼짝을 못했다.

어느샌가 우리 가족은 집에 들어오면
너의 이름을 제일먼저 부르기 시작했다.

*  *  *

하나의 즐거움이 익숙해지고
새로운 에피소드가 바닥날 무렵에도
너는 여전했고, 변한건 나였다.

공부할건 왜 그리 많고,
새로운 친구들은 왜 그리 많고

발버둥 타령을 하면서 힘든척을 했지만
실제로는 놀러다니기만 했다.
너를 집에 두고

평범한 하루는 언제나 비슷한 모양이라
나는 정말로 우리의 시간은 똑같을 줄 알았다.
익숙한 일상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다.

여전히 너는 작고 어리고,
어리광을 부리던 아이같았다.
그러니 언제나 우선순위는 뒷전이었다.
해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깐.

*  *  *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내가 너무 무신경했나"하고 돌아보면
이미 너는 소파위를 오르기 버거워하던 때였다.


‘어쩔수 없지’

두손으로 너를 잡고,
무릎에 앉히곤 tv를 봤다.


언젠가 너는 아무런 밥을 먹지 못했다.
이대론 죽는거나 싶어서 엄마와 나는 울었다
다음날 너는 씩씩하게 밥을 먹길래 우리는 안도했다.

‘어쩔수 없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죽음, 질병, 헤어짐

그제서야 나는
너와 보내는 시간을 조금 더 많이 가졌다.
실은 인간관계가 파탄이 나버렸기 때문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하루가 지나고, 내일이 오다가,
한달이 갔다.

언젠가 너는 늘상 오르던 계단을 못올라가서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수 없지’

너를 두손으로 잡고, 품안에 안았다가
무언가 울컥해서 아무것도 못했다.




'잘해줘야지'

그러나 언제나  
“여유가 있으면” 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었다.
여유가 없었다.


모든것들이 불안정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랐다.

비틀거리며 겨우겨우 일상만 유지했을뿐
아무런 이벤트가 없었던 나날이었다.
생일날  케이크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무언가 풀리는 시간이 오면
그때는 정말로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답답했던 과거를 한번에 몰아서 풀어주자고 생각했다.

그럴듯하게 가족사진이라도 찍을까.
해주지 못했던 생일상을 차려서 선물이라도 줄까.

그래,
모든게 좋아지면 그때는 여행을 가자



어느샌가 낙엽이 지고
몇번인가 병원을 다녀온 끝에
너는 자주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어쩔수없지'

켁켁거리는 너를 두드리면서,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직은 남은 시간이 있다.



늙어가는 너는
점점더 까다로워졌다.

어느샌가 먹을 수 있는 통조림이 하나로 줄었다.
언제 부턴가 내가 현관문을 나서도 따라오지 않았다.
화를 내며 나를 깨물지도 않았다.
조그만한 집 쿠션 아래엔 먹지도 않는 개껌들이 쌓였다.

어느샌가 눈이 내리고, 거리엔 입김이 보였다.
꼴보기도 싫은 성탄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는 동안 너는 점점 잠을 자야할 시간에도
기침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엔 작게 케익이라도 사고
무언가 강아지 옷이라도 새로 사면서 기념을 하자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무언가 검색을 하고는
오지도 않을 카톡을 기다리다가
이내 잠이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너는 떠났다.



화장실에 가려고
비틀비틀 거리는 너를 보며
있다가 병원에 데려가봐야겠다며
엄마가 너를 안으니

들어본적 없던 단말마의 소리를 내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고 말았다.

엄마는 한번도 들려준적이 없었던 비명을 질렀다.

다를게 없었던 일상의 경계가
그 순간 아프게 갈라졌다.

엄마와 나는 한참을 안고 안은채,
온기가 식어가는 너를 붙잡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느껴지는 털들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실날 처럼 남아있는 온기가 아직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는 너의 조그만 심장소리를
좋아했다는걸 알았다.

아무런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훌쩍이는 소리만이 차가운 거실을 배회하였다.

처음으로 갔던 강아지 장례식장 벽면에는
수많은 포스트잇들이 붙여있었다.
모두가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며칠 뒤의 크리스마스는 평범했다.
아무렇지 않게 우리가족은 저녁을 먹고
침묵을 유지한채로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



*  *  *


해주고 싶었던게 많았다.
생각해보면 못할 것도 아니였는데
그게 뭐가 어려워서 망설였는지 모르겠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카메라가 없는 것도 아니였는데,
나는 왜 소중한 순간들을 남기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더 새로운 걸 보여 줄 수 도 있었는데

조금 더 너가 즐겁게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텐데
조금 더 너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사줄 수도 있었는데
나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거 같은데
행복한 기억은 온데간데 없고
아쉬움과 후회만이 남았다.

방안을 어지럽히던 너의 털들이 사라지고
마침내 남아있던 너의 냄세가 없어질때까지도
한참을 우울하고, 우울하게 보냈다.

외로움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너가 나의 고독을 흡수하고 있어서
버틸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흰 도화지에 검은 점처럼 외롭다고 투정부리던 나는
너가 사라지니 어두운 검은색만 남았다.



어느샌가 모든것들이 익숙해졌다.
아쉬움과 후회조차도 희미해지고
공허했던 빈자리마저도 익숙해진다.
잿빛처럼 탁해진 하루하루를 이어나갔다.
별로 좋아진건 없었지만.




겨울이 왔다.
성탄절에 울리는 캐롤소리가,
선물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미소나 사랑이나 행복이나 그런 말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전화를 받는 모습들이,
메세지를 나누는 모습들을 보면
어쩐지 고독한 것은 나뿐인가 하며 착각한다.  


'어쩔수 없지'
생각하고 생각한다.
받기만 했을뿐 선물을 제대로 준적도 없었으니까
지금 내모습은 당연한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더 이상 우는 건 아니였지만
더 이상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였다.

터벅터벅 걸어서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집에 들어온다.

불을 켜지도 않고 방에 들어가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아버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느꼈었던,
착각인지 과거인지 모를
행복했던 순간들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달콤했던 순간들을.

그러면 성냥이 켜진 것처럼
조그맣던 발소리가 들리고
차갑던 방에는 온기가 느껴진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너를 두손에 안고
따듯하게 겉옷으로 너를 감싸고
토닥 토닥 거리며 작고 작은 체온을 느낀다.

조그만한 심장소리가 교차하면서
가슴쪽이 따듯하게 부풀어오른다.  

아마도 나는 피곤해서 잠이든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제멋대로 환상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하루정도는 이기적인 것도 괜찮겠지.
올해는 행복한 적이 없었으니까.

어둑어둑한 창가에는 하얀눈이 내리고
누군가가 부르는 캐럴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러고 보면, 벌써 크리스마스

사고싶은 선물이 뭐였는지
가고 싶은 곳이 어디였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래,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생각이 선명해지면 꿈에서 깨어날테니



잊고 있었던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작디 작은 털들을 만지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메리크리마스
나한테 와서, 정말로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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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축제
19/12/16 13:09
수정 아이콘
...하
19/12/16 15:49
수정 아이콘
아아 이것은 진짜로 개를 사랑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
갤럭시S10
19/12/16 23:27
수정 아이콘
시츄를 키우는 전여자친구를 만났을때 강아지를 처음 만났고 같이 산책도 하고 정도 많이 쌓였습니다.
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시츄와 떨어졌는데... 일주일에 한 두번 봤는데도 정이 많이 쌓였는지 생각이 나네요.
노견이었는데.. 건강은 할련지... 집에 찾아가면 여자친구 보다 먼저 저한테 와주던 그 모습이 잊혀지질 않네요.

이런글을 보거나 저의 짧은 경험으로 저는 못키우겠어요. 무서워요. 사람과 비슷한데... 사람은 배신하지만 개는 배신하지않는데... 수명이 짧다보니 그 헤어짐의 무게가 너무 클꺼같아요.

글이 너무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블루시안
19/12/17 02:43
수정 아이콘
브금이 너무 좋네요. 무지 사랑했던 남자친구와 무지 사랑했지만 남겨놓고 떠날 수 밖에 없던 고양이가 생각나는 밤이예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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