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9/16 20:09:27
Name Asterflos
Subject [일반] [10]코스모스 꽃다발
그러니까 삼십년 정도는 된 이야기일거다.
당시 국민학교도 입학하기전의 나이.
휴일없이 과일가게를 운영하던 부모님은 가끔씩 시골 집이나 가까운 고모 댁에 나를 맡겼다.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데, 가끔씩 기행(?)을 일삼던 아들내미를 건사하기가 꽤나 힘드셨을게다.

아주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 하나 있다.
며칠동안 함께한 고모와 고모부를 엄마 아빠라 부르고, 정작 나를 찾으러 온 부모님을 고모 고모부라 불렀던 기억.
그만큼 사리분별이 안될 정도로 어렸었지만, 그럼에도 그날의 부모님 표정 만큼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다른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차라리 고모네 집에 맡겨지면 다행이었다.
삼십년전의 깡촌 시골은 뭔가를 하고 싶어도 도대체 할 게 없는 곳이었다.
지금이야 유튜브와 pc, 케이블 채널이 있지만 그때는 공중파조차 낮 시간을 쉬었다.
'자연을 벗삼아 놀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수 있겠지만, 출생이 서울이었던 내게 시골은 거대한 이세계나 마찬가지였다.
산과 들이 놀이터가 아니라, 경계해야할 미지의 공간이었던 것.
(실제로 뒷산에 가면 여전히 뱀이 출몰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시골이 무척 싫었다.
그리고 명절도 싫었다.
한번 명절에 오고나면, 이주 정도는 나 혼자 남겨졌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이제 엄마가 나를 데려오기 까지 X일'이었고, 그마저도 번번히 약속을 어기기 일쑤였다.
분명 이번주 금요일이라고 했는데, 돌아서서 보면 다음주 수요일이 되어있는 기묘한 상황.

그래서일까.
산과 들이 무서웠던 나는 시골집 앞의 코스모스길을 자주 걸었다.
이 코스모스 길이 끝나면 집에 도착하지 않을까.

야, 나 지금 이 길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는 상상함..!
하지만 어림도 없지.
어린 나이에 1키로도 못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나는 어느날, 코스모스 꽃을 꺾었다.

꺾고 꺾어서, 그것들을 한데 뭉쳤다.
워낙에 알록달록한 색감덕분인지, 틀림없이 어설픈 솜씨였음에도 제법훌륭한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 꽃다발을 한아름 쥐고서,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항상 혼자남겨진 나를보며 안쓰러워하시던 할머니.
매번 몰래 나만 따로 불러서 용돈을 쥐어주시던 할머니.

나는 할머니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나 할머니 주려고 이거 만들었어!!"

눈에 넣어도 안아플 손주가 길가의 코스모스를 꺾어 꽃다발을 선물한다.
어찌 기쁘지 않을수 있을까.
그러나 할머니의 행복한 표정은 채 몇 초도 가지 못했다.

"이거 줄테니까, 할아버지한테 말해서 오토바이로 엄마한테 좀 태워다조!!응?!"

할머니의 잠깐 행복했던 표정도, 오랫동안 안쓰러워하던 표정도 모두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삼십년이 지났다.
여전히 깡촌 시골은 변한것이 없고, 명절에 가면 할머니가 있다.
무력하게 얼마 걷지 못했던 코스모스길은 이제 차로 십초면 통과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을 추석 코스모스 길을 볼때마다, 그날의 꽃다발이 매번 떠오른다.
엄마가 보고싶다며 목놓아 울고 남몰래 용돈이나 받아가던 손주는, 이제 번듯한 차를 끌고 나타나 빛깔좋은 화과자를 안겨드리는 나이가 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코스모스 꽃다발을 다시 만들어보는건 어떨까.
그러나 나는 이내 그만두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는게 더 아름다운 법이니까.
그리고 꽃다발만큼 알록달록하면서, 할머니를 더 기쁘게 해줄 수 있는게 따로 있으니까.

"할머니!! 이거 할머니 용돈이야!!"

파랗고 노오랗게 잘 익는 종이들.
나는 꽃다발 대신 돈다발을 안겨드렸다.
기분탓일까.
그날의 꽃다발보다 표정이 더 밝아보인다.

할머니.
할머니는 그날의 코스모스 꽃다발을 기억하실까.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19/09/16 20:55
수정 아이콘
기억하시겠죠?
Bartkira
19/09/16 21:26
수정 아이콘
따듯한 글 잘 읽었습니다
치열하게
19/09/17 16:29
수정 아이콘
사진이나 영상 많이 찍어두세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2749 [일반] 엄마의 음식 [3] swear5954 19/09/16 5954 2
82748 [일반] 힘내라, 조국 아들 [129] 삭제됨17755 19/09/16 17755 0
82747 [일반] 상견례 준비 중입니다. [27] 모여라 맛동산7714 19/09/16 7714 16
82746 [일반] 노팬티도 괜찮아 [12] 꾸꾸9845 19/09/16 9845 16
82745 [정치] 코링크 설립 자금은 모두 정경심 돈 [24] 물멱11000 19/09/16 11000 17
82744 [일반] 애플의 여러가지 변경된 정책 및 소식 이야기 [3] Leeka7692 19/09/16 7692 0
82741 [일반] 싫다. 하기. 출근. [25] 꾸꾸6984 19/09/16 6984 14
82740 [일반] 100년전 일반 상대성이론을 증명한 결정적인 사건 [16] attark10148 19/09/16 10148 16
82739 [일반] [10]코스모스 꽃다발 [3] Asterflos4669 19/09/16 4669 7
82738 [정치] 황교안 대표의 삭발식... [131] 삭제됨15961 19/09/16 15961 11
82737 [정치] 조국의 조국 [192] 후마니무스22834 19/09/16 22834 23
82736 [일반] 추석엔 과식 좀 해야 추석이죠!! [46] 비싼치킨9783 19/09/16 9783 27
82735 [일반] 2019년 8월 고용동향 [70] 물멱10348 19/09/16 10348 3
82734 [일반] (삼국지) 송건, 가장 보잘것없었던 왕 [33] 글곰11452 19/09/16 11452 24
82733 [일반] 문제는 섹스야, 바보야! (2) - 뇌절 의견과 오해에 대한 보충 [38] Inevitable11901 19/09/15 11901 12
82731 [일반] 우주는 어떻게 끝날까? 3가지 종말 가설 [45] attark11078 19/09/15 11078 3
82730 [일반] 방금 공항버스를 놓쳤습니다 [36] kencls14754 19/09/15 14754 7
82729 [일반] 사우디의 석유시설이 공격받아 석유생산량 절반이 날아갔답니다 [32] 홍승식13403 19/09/15 13403 1
82728 [일반] 캐나다 20년차. 딸 생일에 인종차별 당한 이야기. [68] 하나의꿈16087 19/09/15 16087 21
82727 [일반] 인스타 페미니즘 탐방- 탈코르셋, 강간공포, 타자화 [62] kien16616 19/09/15 16616 15
82726 [일반] 조던 피터슨: IQ와 직업선택, 그리고 미래 [65] 김유라16637 19/09/14 16637 17
82725 [일반] 저는 강제징병 피해 당사자입니다. [108] 개념적 문제18721 19/09/14 18721 42
82723 [일반] 최악의 쇼핑몰 롯데몰 수지점 탐방기 [55] 아유16234 19/09/14 16234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