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9/11 21:33:50
Name Fairy.marie
Subject [일반] [10] 외할머니와 추석
 추석. 한가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

 30대의 끝자락에 들어선 나에게는, 몇 년 전부터 추석은 최소 3일의 휴가였고, 올해도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그냥 그런 4일 연휴가 되었을 것이다.

 이유인 즉, 결혼 한 지 벌써 8년 차에, 강아지만 셋 키우고 있는 나로서는, 설이나 추석 같은 민족 대 명절에는 움직이면 돈이요 체력낭비요 시간 낭비라, 집에서 가까운 처가에 들러 하루 정도 명절 음식을 맛보며 업무 및 강아지 육아(?)에 지친 몸을 힐링하는 시간이었을 따름이다.

 올해는 여느해 와는 다르게, 휴가를 이틀 더 받아서 추석 연휴 전 이틀을 더 쉴 수 있었기에, 월요일에 출장을 다녀오고 나면 와이프와 함께 6일간 열심히 와우를 달려야지! 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는 행복한 마음으로 추석을 기다렸지 싶다.

 보통 친가가 있는 서울로 출장을 가게 되면, 부모님께 따로 연락을 드리거나 하지는 않고, 업무 및 출장을 마치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오곤 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오늘따라 잘 맞지도 않던 촉이 좋았던 건지. 출발 전에 부모님에 전화를 드렸는데, 기운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올 추석은 평소와는 많이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몇 년째 병상에 계신 우리 외할머니.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일터에 계신 부모님 대신 엄마처럼 할머니처럼 키워주신 우리 외할머니가, 많이 위독하셔서 오늘쯤 돌아가실 것 같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었을 때만 해도, 휴가는 이미 써놨는데 이걸 다시 경조 휴가로 돌려야 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고, 오늘 출장 마치고 병원에 들를 때까지는 계시려나, 보고 갈 시간이 되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기차에 올랐는데. 한 시간쯤 걸려 도착한 서울역에 내려서 흡연 구역을 찾아가는 길에 다시 걸려온 전화에도 그저 담담했던 나는 담배만 계속 피우게 되었을까.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두 분 다 선생님이셨던 부모님 덕분에 학교 행사나 어머니들 급식 같은 일에는 주로 할머니가 오셨다. 남들은 다 젊고 이쁜(?) 엄마가 오는데 왜 나는 할머니가 오시나 같은 생각도 하면서, 우리 할머니 참 좋은 분이라고 자랑하고 다니기도 하고. 명절이면 친가에 가서 있던 시간보다, 외할머니 모시고 찾아갔던 외가가 그렇게 좋았던 것도. 병치레를 자주 하던 탓에 열이 나면 밤새 물수건 갈아주시던 기억이나, 철없던 중2병 시절에도 학교 마치고 돌아오면 집에서 기다리시는 할머니와 강아지 덕분에, 어머니보다 더 음식을 잘하셔서 도시락과 야식으로 챙겨주신 할머니 덕분에,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고,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니며 집에서 나와 살고,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원 과정을 마치면서도, 할머니는 계속 건강하시겠지, 내가 지금 바쁘니까 다음에 찾아 뵈면 되지 뭐 라는 생각으로 명절에나 찾아갔던 못난 손주인 데다, 결혼하고는 지역도 달라지면서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 하셨을 때도 다음에 가면 되지를 반복했던 나였는데. 그래도 지난 8월에 찾아 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음에 또 올게요 할머니 라고 했던 내 말을 못 들으셨는지, 그새를 못 기다리고 떠나신 할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때마침 내리는 비가 야속하기도 하고, 참 그랬다.

 장례식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외가 식구들과 정말 오랜만에 만나 근황도 묻고, 지금 만나고 나면 다음에 또 언제 보려나 헤아리던 밤을 보내고 나서, 발인까지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던 탓에,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서 그런가 보다, 나이가 들어서 예전보다는 더 담담해졌나 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할머니의 얼굴이나 목소리, 그 음식과 내음이 깊어 피곤한 몸인데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 죽여 울게 되는가 보다.

 앞으로도 추석은 매우 좋은 3일 이상의 휴가, 연휴일 테지만. 올해만큼은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특별한 그런 추석이 될 것만 같은 생각에, 조금은 위로 받고 싶은 생각에. 남들처럼 잘 쓰지 못하는 글이지만, 이곳에나마 한 글자씩 끄적거리고 있나 보다.

 오늘까지는 좀 더 슬퍼하고 내일부터 다시 즐거운 명절, 즐거운 휴가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직 연휴는 4일이나 남았으니 와우 클래식 레벨업도 다시 시작하고, 강아지들이랑 가까운 곳에 놀러도 가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지금의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겠지만, 그래도 매년 가을이면 할머니 생각으로 조금은 눈물짓고 조금은 추억하는 그런 추석이 될 수 있기를. 행복하고 즐거운 명절이 되기를.

 앞으로도 늘 올해 한가위만 같아라.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及時雨
19/09/11 21:42
수정 아이콘
힘내세요.
저희 외할머니는 작년 이맘 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원래 외가 쪽에서 명절을 쇠는데 처음으로 할머니 없는 추석을 맞이하는 게 저도 참 낯설고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네요.
청춘불패
19/09/12 12:40
수정 아이콘
아직까지 외할머니가 살아계셔서 느낀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글쓴이와 같은 기분을 느낄것 같네요ㅡ
치열하게
19/09/13 22:45
수정 아이콘
경험상 1년이 안된 시점이긴 한데 계속 생각나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2721 [일반] (펌,스압)컴퓨터를 낳은 위대한 논쟁:1+1은 왜 2인가? [47] attark14830 19/09/14 14830 99
82720 [일반] [10] 제사 ? 어림없지, 째뜨킥! [34] 꿀꿀꾸잉10847 19/09/14 10847 44
82719 [일반] 현대의 인공지능은 단순 응용통계학이다? [81] attark17138 19/09/14 17138 4
82718 [일반] 길거리에서 사람이 쓰러져 있을때 일반인 입장에서 대처하는 방법 [45] 12315315 19/09/13 15315 17
82717 [일반] 장미 [3] 안유진4936 19/09/13 4936 13
82716 [일반] 나쁜 녀석들: 더 무비 감상 (스포 유의) [3] 루데온배틀마스터6363 19/09/13 6363 0
82715 [일반] 여친 빌리겠습니다! [10] Love&Hate13104 19/09/13 13104 10
82714 [일반] 나쁜녀석들 vs 타짜3 영화 이야기(스포있어요) [20] 에버쉬러브8648 19/09/13 8648 3
82713 [일반] 우리들의 끝은 어디일까 [11] 지하생활자8184 19/09/13 8184 11
82712 [일반] 자영업자가 본 고용시장에서의 가난요인 [135] 밥오멍퉁이264031 19/09/13 264031 451
82711 [일반] 가난이 남긴 트라우마? 정신적 가난? [73] 비누풀17216 19/09/13 17216 36
82710 [정치] 나경원 대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대학생들 [396] TTPP24507 19/09/13 24507 57
82709 [일반] [10] 보물..내 보물을 지켜라.. [2] cluefake6063 19/09/13 6063 9
82708 [정치] 조국 임명 이후 문 대통령 및 정당 지지율 [244] 렌야23839 19/09/12 23839 6
82707 [정치] 언주야. 언니는!!(삭발에 대해서) [91] 유목민17341 19/09/12 17341 23
82706 [일반] 중국과 미국과 세계질서 재편 [8] 삭제됨9206 19/09/12 9206 2
82704 [일반] 불면증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22] 김아무개9191 19/09/11 9191 9
82703 [정치] 조국 장관 자산관리인 "정경심 코링크-WFM 먼저 언급" [81] 물멱16399 19/09/11 16399 26
82702 [일반] [10] 외할머니와 추석 [3] Fairy.marie4767 19/09/11 4767 6
82701 [일반] 대륙의 실수? 한국인들 삶에 파고 든 중국제품들 [62] 청자켓15887 19/09/11 15887 0
82700 [일반] 피지알 베너는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115] 김아무개14376 19/09/11 14376 144
82699 [일반] [10] 공포의 사촌몬이 온다. [17] goldfish25915 19/09/11 25915 25
82696 [일반] 문제는 섹스야, 바보야! [93] Inevitable18662 19/09/11 18662 10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