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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6/19 01:48:20
Name legend
Subject [일반] 너와 나에게 보내는 시들. 첫번째.
돌아올 곳

어지러이 생각이 흩어진 채

무어슬 찾으려고 하나

눈 감고 걷는 밤거리나 다름없는데

그 흔한 가로등 하나 밝힌 곳 찾기 힘들고

그렇게 계속 방황하는 마음만 내버려둔다

돌아오길 바라며

돌아올 곳 찾길 바라며



어느 겨울날

겨울날, 꽁꽁 시린 손발 이리저리 가려봐도

스며드는 냉함은 가눌 길 없네

내불은 입김은 차갑고

스쳐오는 공기는 유릿가루처럼 긁히고

그럼에도 걸어가는 이 골목

벗어날 수 없는 겨울의 세상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걸어야 한다

집은 항상 거기에 있으니까

보금자리는 기다려준다 내가 도착하기를

발이 무거운 나는 외로운 이 마음만 먼저 보내본다



그 언젠가

너에게 일단 전하겠어

언제가 될지,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이 때가 아니면 안될 거 같아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름 모를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어

우리가 만난다면

그 순간이 온다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 말을

눈으로 담아낼 수 없는 그 모습을





내 인생을 돌이켜 보건데 거기에 보통 답이 있더라

그러나 답을 알아도 답이 아닌 채로 머문다면 답이 될 수 없지 않은가

답을 아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답을 몰라도 고여 썩어가지 않는 몸부림이 필요했던 것이다



계절

울렁울렁 잎새 잃은 메마른 가지

술렁술렁 의식 없이 지나가는 하루

절렁절렁 절름발이 마냥 절뚝이는 일과

그렁그렁 맺힌 눈물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도 못해

다시 푸른 잎사귀 피어나는 계절 오면 달라질까



졸음

꿈결과 같이 동행하는 이 깊은 밤

흐릿하게 남은 사고의 잔상은 의미를 잃고

흐리멍텅한 두 눈에 졸음만이 찰나의 깨달음이었더라

히프노스가 명하노라 너는 잠들었던 것이었으니



그것들

바라만 보아도 즐거웠던 것들

바라 볼 수록 가슴 아파왔던 것들

사라지지 않을땐 몰라었던 것들

사라진 후에야 깨달았던 것들

바라옵건대 그것들을 다시 사랑하게 되기를

그 온기에 취하지 아니하며

그 냉혹에 갈라서지 아니하며

지고한 별의 옥좌에서도

비천한 지하의 구덩이에서도

단지 그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저 손을 맞잡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오직 하나만 원하고자 한다

그것 하나만 원하고자 한다



너에게

내가 만약 너에게 묻는다면

넌 무슨 예쁜 말씨로 대답해줄까

기억상실이 되어 네 모습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도

그 말 한 번 들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기억에도 없는데

갑자기 심장이 덜컥해서

고개 숙여 울어버리고 말까

말은 잊더라도 말의 따스함은 잊을 수가 없는걸까

문득 그런 상상을 해봤다고

너에게 묻는다면 넌 무슨 예쁜 말씨로 대답해줄까



까미(1)

십여 년 생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지

눈뜨고 처음으로 겪은 것은

어미의 빛깔 고운 털요람이 아니고

차가이 스며들어 오는 높은 찬바람의 진동

어두운 사각상자 안에 꺼내어져

킁킁대고 냄새 맡아보니 낯선 흙의 향기더라

철창 바깥 풍경은 수채구멍에 빨려들듯 모두 섞여

팽글팽글 내 눈까지 돌아 버릴듯이

덜컹덜컹 내 작은 몸뚱아리까지 날아가 버릴듯이



퇴근

하루를 마감하고 일터에서 세상으로 몸 내밀어보니

나 모르는 새에 밤비가 아스팔트를 적시고 있더라

아니, 비라기 보단 보들거리는 어떤 물기가 묻어나더라

하나 둘 네온사인 꺼진 이 골목

우두커니 서서 촉촉한 습기에 젖어 주변 둘러보고서

혹여나 까먹었을까 내 두번째 집 문고리 몇번 잡아 당기고 나자

샛노란 가로수 등빛 어둠에 걸려 나를 쳐다보고 있네

몇 년전 겨울부터 함께 한 전우같은 외투의 후드 푹 눌러쓰고

터덜터덜 내 첫번째 집으로 향할 때에

아직 꺼지지 않은 저 뒷편의 골목에서 작별인사 보내듯이

하얗고 불그스름하고 누런 색색들이 점멸한다

돌아보지 말란듯 느린 숨쉬며 깜빡거린다





-----

힘들고 아프고 공허할 때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어내고자 쓴 시들이 꽤 쌓였습니다.
뭐가 시이고 시가 아닌지도 모르기에 감히 시라고 칭할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감정의 표현이란게 시의 일부로써 인정된다면 그래도 조금의 자격은 갖추진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만의 비밀상자처럼 메모장 한 켠에 묵혀두기보단, 내 감정을 한 사람만이라도 공유하고 공감하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올려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로 나누어 올립니다. 첫번째는 조금 덜 아픈 것들, 두번째는 많이 아픈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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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19 01:49
수정 아이콘
수고하셨습니다!!
유지애
17/06/19 02:38
수정 아이콘
너에게가 참 좋군요
어쩐지 제가 쓴 것만 같은 글귀도 감정도 잘 감상하고 가져갑니다.
불주먹에이스
17/06/19 15:07
수정 아이콘
저도 너에게가 좋네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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