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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3/31 03:58:34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최전성기 청나라 역사상 가장 참혹한 최대의 참패 - 호톤노르 전투


16세기 말 유라시아 극동에서 발호한 만주족은 이후 17세기가 전부 지나기도 전에 흡사 태풍같은 기세로 성장하여 중국을 장악하였고 몽골에 영향력을 끼쳤으며 현대 중국의 서북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청나라 군은 끊임없이 서진하며 티베트에 영향력을 끼치고, 현재의 신장 위구르 지역에 군사를 파견했으며, 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도시들마저 청군의 발길에 유린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이들의 서진은 멈추게 됩니다.



흡사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 정책을 보는듯한 이 청군의 끝없는 팽창정책은 당연히 반발 세력의 저항을 받아야 했고, 청군과 가장 오랫동안 대립하며 싸워왔던 존재가 바로 유목 민족인 오이라트 '준가르' 부 입니다.



특별히 청나라 역사, 게중에서도 청나라의 전쟁사에 관심이 있지 않은 한국인에게 '오이라트' 라던지 '준가르' 는 굉장히 낯선 존재들일텐데,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면 굉장히 길어지긴 하겠습니다만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들은 '몽골인' 입니다. 단, 몽골인이라고 해서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 왕조와 겨루던 몽골인들, 즉 중국 위 쪽에 있는 몽골은 아니고, 그 몽골을 '동몽골' 이라고 한다면 '서몽골' 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존재하던 몽골인들입니다.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보통 우리가 중국에서도 베이징 북쪽 정도를 생각할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초원, 거기서 말 타는 몽골인 이런 이미지가 떠오를텐데, 여기서 계속 서쪽으로 좀 더 가다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중앙 아시아 사람 옷 입은 서양인' '이슬람 교도' '회족(回族)' 이런 그림이 떠오를 겁니다. '최대한 단순하고 간략하며 아주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바로 그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오이라트 준가르 부 인들이었습니다.



즉 지금 회족, 이슬람 교도들이 사는 신장 지역은 300년 전만 해도 헤게모니는 이슬람보다는 '티베트 불교' 에 가까웠고, 그 주축이 되는 건 몽골인들이었습니다. 이후 청나라와 거의 70 ~ 80년 간 대립하는 동안 민족 몰살 수준으로 죽어나고 세력 판도가 완전히 바뀌어서 그렇지...



그 서쪽의 오이라트 몽골족은 우리가 아는 동쪽의 몽골족과 오랜 시간 동안 주도권을 손에 넣기 위한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오이라트가 유리했고, 어떤 경우는 불리했습니다. 그렇게 아웅다웅 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저 동쪽에서 청나라가 탄생하고 확장되면서 판도가 많이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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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에서 일어나 서진하며 중국을 장악한 청나라는 중국 뿐만 아니라 몽골에도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앞서 몽골을 '서몽골' 과 '동몽골' 로 나누면 서몽골이 오이라트라고 했는데, 이 동쪽의 몽골 중에서도 대략 내몽골 쪽에 있는 세력을 차하르, 외몽골 쪽에 있었던 세력을 할하 몽골 부족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차하르가 동몽골, 남몽골 쯤 되면 할하는 북몽골 정도로 표현하는게 좋을듯) 



 청나라는 아직 산해관을 넘어 중국을 장악하기도 전이었던 청태종 홍타이지 시절부터 몽골에 영향력을 발휘해, 내몽골 차하르의 링단 칸을 패배하여 시름에 빠져 죽게 하고 그 지역을 장악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이용한 중국 침입 루트를 확보해 아직 산해관에서 명나라군이 버티고 있던 시점에도 빙 돌아 군대를 침투시켜 베이징 근처까지 진군하는 군사작전을 펼칙시도 했습니다. 



 중국을 장악하기 이전에도 이 정도 수준이었으니,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입관하고 중국의 지배자가 되어 명실공히 '제국' 이 된 시점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차하르에 이어 할하 몽골 역시 점차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게 되었고, 보통 이 청나라와 몽골의 관계는 몽골이 자치권을 유지받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라고 인식되기는 하는데.... 실제로 따져보면 할하의 여러 몽골 세력이 청나라의 기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어, 청나라가 이들의 거주지를 제한시키고 거기서만 몽골인들을 살게 하며, 지역을 이동하는 것도 허락을 맡아야 하는등 마냥 좋지만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청이 준가르와 전쟁 한다고 치면 늘 군사 동원 요구 받는 등등...




 여하간 탐욕스럽게 주위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점차 서북으로 전진하고 있던 청나라가 오이라트와 분쟁을 겪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오이라트 몽골 세력은 네 개의 큰 부족으로 이루어졌는데, 한 부족은 더 서쪽으로 떠나 버리고 남은 세 부족 중 '준가르' 부족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준가르와 청나라는 정말로 긴 시간 동안 치열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전면전을 펼치기도 했고, 서로 외교적으로 기만책을 펼치기도 했으며, 서북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청나라와 준가르 외에 티베트, 할하, 카자흐,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온갖 세력이 엮이는 차원에서 외교군사적 분쟁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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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 할하 몽골 연합군의 기병대와 총포로 이에 맞서는 준가르 병사들. 유목민족이라고 마냥 말 타고 화살만 날려댔을거라고 생각하는건 착각입니다. 준가르의 경우에 총은 물론이거니와 유럽인 포로들을 이용해 대포를 제조하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는 강희제 건륭제 시절까지 수 많은 부분에서 준가르와 끊임없이 분쟁을 겪습니다. 이게 단순히 준가르와 일대일 관계만 있는게 아니라 앞서 말했다시피 티베트, 할하, 러시아 등까지 엮이는 문제라 이걸 다 언급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데, 일단 강희제 시절 청나라는 강희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을 수차례 감행하면서 준가르와 적극적인 태도로 맞서 싸워 준가르의 칸 '가르단' 을 죽게 만들기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정력적으로 군사 원정을 감행한 강희제가 죽은 후, 새로운 황제로 옹정제가 즉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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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황제가 된 옹정제는 대만 원정, 준가르 원정, 티베트 점령 등등 수 많은 대외원정을 펼친 강희제와는 달리 '돈 많이 들어가는' 전쟁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내치였고, 방만해진 제국의 재정 상황과 관료 조직의 부패함을 척결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어지간한 큰 적들은 강희제 시기에 대략 평정이 끝난 뒤였기에, 옹정제는 군사적 원정 문제는 크게 고려하지 않고 내정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준가르는 예외였습니다. 가르단을 죽게 만든 큰 성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머나먼 곳에 있는 준가르를 격멸하는 것은 강희제 시기에는 아직 무리였고, 적이 남아 있는 이상 옹정제도 이 문제에는 어떻게든 대처해야만 했습니다.



 다만 중국 전체로 보면 동북 쪽에 있는 베이징에 수도를 둔 청군이 서북 지역에서 전쟁을 펼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청군이 준가르와 싸우게 되는 서북 지역은 너무나도 먼 지역이기 때문에 보급도 어려우며, 현지의 물자도 풍족한 편은 아니라서 현지 보급도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청나라는 이 지역에서 원할하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선 현지 개발, 교역선, 토지와 경제 정책, 현지와 조정의 협조, 더욱 많은 자원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제도와 그 제도를 원할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한 시스템의 활성화 등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했고, 이걸 가능케 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돈' 이 필요했습니다. 




 돈 많이 들어가는 일을 싫어하는 옹정제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서북으로 영향력을 늘리기보다는 '철군 프로그램' 에 착수했습니다. 변경의 군사를 감축하고, 티베트 등을 직접적으로 군사적 영향력 아래 두는 성가시고 돈 많이 들어가는 일 대신 한두명의 대신을 파견하여 이들을 관리하고, 또 반 준가르 통치자를 임명해 준가르의 발톱이 티베트에 미치는것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고, 새로 즉위한 준가르의 지도자 갈단체링(噶爾丹策凌)이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한 옹정제는 일단 나중에 철군 프로그램을 하게 되더라도 먼저 손을 봐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옹정제는 청나라군이 선제공격으로 시작하는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별별 명분을 다 가져다 붙였는데,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다른 몽골족들은 모두 청에 항복했지만 오직 준가르만 완강하게 버티고 있으며, 

2. 더 나아가서 준가르를 물리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 강희제가 본래 계획했던 일인데 다만 강희제는 가르단을 물리친 후 군사가 너무 지쳤기에 이를 하지 않았으며, 

3. 갈단 체렝은 티베트의 반도들과 공모했고, 따라서 효자인 옹정 자신은 아버지의 과업을 완수하겠다




라고 하는 식입니다. 하는 말이야 어쨌건 실상은 그냥 명분 가져다 붙이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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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종기(岳鍾琪)




 1729년 4월, 옹정제는 작전을 수행할 장군을 선임했습니다. 옹정제 시기 청나라에는 연갱요(年羹堯)라고 하는, 실력이 매우 뛰어난데다 서북 문제에 경험이 풍부한 명장이 있었으나 이 무렵에는 옹정제의 숙청으로 사망한 뒤 였습니다. 연갱요의 뒤를 이을만한 장군 후보로는 송나라 명장 악비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는 악종기가 있었는데, 평소 군사를 자주 일으키지 않았던 옹정제는 기왕지사 한번 대군을 동원하는 김에, 만주족 출신 장수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사람이 푸르단(傅爾丹) 이었습니다. 푸르단은 만주 양황기 출신으로 명문 집안이며 풍채가 당당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무예에 능한 전형적인 장군 상의 인물이었습니다. 옹정제는 이 푸르단을 정역대장군으로 삼아 북로군 2만 4천을 줘서 원정의 주공으로 삼고, 악종기는 영원대장군으로 삼아 2만 6천 병력을 이끌고 공격의 조공으로 삼기로 결정했씁니다. 일단 파견되는 병력이 그렇고, 현지에 가면 알타이 주둔군이 수만명 이상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악종기는 푸르단에 대해 뭔가 불안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악종기가 푸르단의 진영을 방문했을때, 벽에는 수많은 칼과 창이 걸려 있었습니다. 악종기가 이를 의아하게 여겨 물어보자 푸르단은 자신만만하게 대꾸 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무술에 힘써 왔기 때문에 이렇게 젊은이들에게 본을 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악종기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물러났다고 합니다.



 "대장군 된 자가 전략은 생각치 않고 개인의 무용만 자만하다니, 이는 위험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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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청나라의 서북 전진기지인 바르콜까지의 거리. 현재의 교통망으로 대략 2800km 이상 떨어져 있다.




 1729년 옹정제는 대단히 거창한 사열식을 열어 위세를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악종기와 푸르단이 현지에 파견되었지만, 청나라와 준가르가 외교적 협상을 벌임에 따라 1년 정도 전투가 늦어졌습니다. 악종기와 푸르단도 다시 황도 베이징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1731년 1월 경 준가르 부대가 청나라의 변경 기지를 공격해 많은 말을 약탈했고, 이에 악종기는 최소한 5천 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해 변경의 주둔지를 강화하자고 했지만 옹정제는 이를 묵살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감숙과 서녕에 30만 가량의 병력이 있었으나, 옹정제는 돈 문제인지 뭔지는 몰라도 이 부대를 움직이는데 심하게 망설이며 병력을 내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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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이 펼쳐진 주요 지역들. 지명들의 실제 거리는 훨씬 광활하다. 하미에서 바르콜만 해도 100km가 넘는 거리.





 3개월 정도 지나 1731년 4월이 되어 봄이 오자, 길과 강의 눈과 얼음이 녹아 청군은 식량을 운송하기에 조금 편해졌습니다. 서북 변경지대에서 펼쳐지는 이 전역은 일반적인 중국 내부에서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싸움입니다. 척박하고 인구 밀도가 한없이 낮은 변경에서, 점과 점으로 이어진 도시에 주둔한 병사들은 한정된 정보를 가지고 부족한 물자에 허덕이며 눈치 싸움을 벌였습니다. 한번의 작은 교전을 위해 100km나 2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악종기는 갈단 체링이 투루판 서남쪽에서 200km가 넘는 조그만 무슬림 거주지인 '할라샤르' 라는 곳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얻고 옹정제에게 군사를 움직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옹정제는 바르콜 수비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옹정제를 괴롭게 하는 것은 바로 보급 문제였습니다. 변경 지대에 있는 수만 병력을 지원하기 위한 물자 공급 때문에 산서성의 현지 시장 가격이 폭등했고, 이에 대한 불평불만 여론 때문에 그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옹정제는 이런 불평들은 "자신과 황위를 놓고 경쟁했던 황자를 비롯한 적대자들" 이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선동하는 술책으로 돌렸고, 백성들에게는 "작은 이득에 눈이 팔려 큰 일을 보지 못하는가." 하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당시 청군이 배치되어 있는 가장 먼 서방 전진 기지는 바로 투루판입니다. 하지만 그 투루판은 절망적인 보급 상황 때문에 대군을 주둔시킬 수 없었고, 따라서 준가르의 습격에 셀 수 없이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악종기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투루판에서 서쪽으로 170km 넘게 떨어진' 우루무치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루무치는 투루판보다 훨씬 큰 오아시스라서, 이 곳을 장악해 병력을 주둔시키면 우루무치를 점령하는 동시에 투루판에 대한 방어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군사를 더 서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마땅찮아 하던 옹정제도, 계속되는 준가르의 투루판 습격에 질린 나머지 결국 현장에 위임 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전했습니다.



 "나는 1천리나 떨어져 있다. 그대는 현장에서 결정해야 한다."



 악종기가 이끄는 서로군이 우루무치 공격을 준비할때, 푸르단이 이끄는 북로군은 알타이에서 좀 더 서진해 홉도(Khobd)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곳은 지난날 청군이 몽골 땅으로 침투한 이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이 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 그러니까 대략 500km에서 600km만 더 가면 - 준가르의 중심지를 타격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준가르의 갈단체링은 악종기의 서로군은 일단 크게 신경쓰지 않은 채 푸르단의 북로군을 상대할 준비를 했습니다. 투루판 근처의 오아시스에 대한 싸움은 어디까지나 '영향력' 싸움이지만, 푸르단의 군대는 준가르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위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단 체링은 휘하의 최고 명장인 체링 돈둡(tsering dhondup) 형제에게 3만이나 되는 병력을 주어 푸르단을 상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혹시라도 올지 모르는 할하 몽골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국경선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런 적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듣게 된 푸르단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적이 군사를 분열 시키고 있으니, 한번의 싸움으로 적을 격파하기 쉽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푸르단은 홉도에 7,300명의 수비 병력을 두고, 나머지 전군을 이끌고 적을 급습하러 이동했습니다.



 이때의 병력에 대해서 청나라의 국가 기록에서는 '푸르단이 1만 명을 끌고 나갔다' 고 하지만, 이는 이후에 벌어질 참극을 최대한 축소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이며 이십이사차기를 쓴 조익은 이때 청나라군이 2만명이었다고 했고, 3만이었다는 말도 있으며, 이는 청군의 숫자만 따졌을때 이야기입니다. 즉 2만~3만에 달하는 청군 외에도 몽골 지원병력이 여기에 합류했기에 푸르단이 끌고 나간 병력의 총 숫자는 4만 ~ 6만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 대병력을 이끌고 나간 지휘관은 푸르단 외에 순승군왕(順承郡王) 석보(錫保), 정수등(定壽), 파새(巴賽), 사필납(查弼納) 등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오배의 손자인 달복(達福) 역시 이 싸움에 참가했습니다. 



 푸르단은 군사를 3군으로 나누어, 소보(素圖)와 대호(岱豪) 두 장수로 하여금 선봉에 서게 하고는, 정수에게 1군을 맡기고 마이살(馬爾薩) 장군에게 2군을 맡긴 후 본인은 푸르단 본인은 제 3군이자 본대인 대군을 이끌고 이를 뒤따랐습니다. (素圖、岱豪為前鋒,定壽等領第一隊,馬爾薩等領第二隊,傅爾丹舉大兵繼其後)
 



6월 9일(庚子)



1군을 이끌고 가던 정수는 찰극새(扎克賽) 강이라는 곳에서 준가르 정찰병을 발견해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보니 3일 거리에 있는 찰한하다(察罕哈達)라는 곳에 준가르 병사 천 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천명 정도는 대군으로 쉽게 이길 수 있기에 그 소식을 들은 푸르단은 서둘러 적을 추격하러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동안 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六月庚子,師發科布多,定壽等進次扎克賽河,獲準噶爾邏卒,言距察罕哈達止三日程,準噶爾兵不過千人,未立營。傅爾丹命乘夜速進,行數日不見敵




6월 17일(戊申)


일주일 가량 허송세월 하던 푸르단군은 이날 되어 또다른 포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포로에게 정보를 얻어 보니, 준가르 병사 2천 명이 박극탁(博克托) 고개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푸르단은 그 즉시 소보, 대호 두 장수에게 즉시 삼천 명을 거느리고 적을 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준가르의 2천 병사는 전부 파리하고 지친 병사들로서, 준가르의 이만 병력은 조용히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푸르단과 청나라 병사들은 그것도 모르고 미끼를 물어가고 있었습니다.


戊申,獲諜,言準噶爾兵二千屯博克托嶺。傅爾丹遣素圖、岱豪將三千人往擊之。敵出羸兵誘師,而伏二萬人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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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 기병




6월 18일(己酉)


고열도(庫列圖) 고개에서 마침내 적을 만난 청나라 군은 적 사백여명을 참살하는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성과를 올립니다. 청군은 수천 명 정도 된다는 남은 병사를 찾기 위해 동분서준 하고 있습니다.
 

己酉,定壽師次庫列圖嶺,遇敵,斬四百餘級,敵驅駝馬踰嶺遁




6월 19일(庚戌)


푸르단의 본대가 1군에 합류했고, 그 외 다른 한데 모여 추격군(이라는 이름의 떡밥을 모고 달려온 생선들)이 모두 한데 모여 맹렬한 기세로 적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庚戌,傅爾丹師至,素圖、定壽皆會




6월 20일(辛亥)



적을 쫒던 청나라 군이 골짜기에 이르자, 숨어 있던 준가르 대군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리적 이점을 차지한 준가르 병사들은 파죽지세로 공격을 퍼부었고, 푸르단은 병사를 독려하여 적군 천여명을 참살했고(단, 후술할 옹정제의 편지에서도 나오겠지만 옹정제는 푸르단이 적군 천에서 이천 명을 죽이면 칠천명을 죽였다는 식으로 3배 ~ 4배는 부풀려서 보고하는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탑이대(塔爾岱)와 마이재(馬爾齊) 등의 장수등이 적의 서쪽 고지를 빼앗을때만 하더라도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리적 이점이 충분했던 준가르 군이 이런 공격을 전부 방어하면서도 청나라군의 시도는 모두 무위에 그치고 맙니다.


辛亥,逐敵入谷,伏發,據高阜衝擊。傅爾丹督戰,殺敵千餘,塔爾岱、馬爾齊督兵奪西山,敵據險,師攻之不能克




 6월 21일(壬子)


 푸르단은 이제 상황이 완전히 끝장났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중요한건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소도, 각라해란(覺羅海蘭), 상록(常祿) 등의 장수가 한 쪽길로, 탑이대와 마이재의 병력은 다른 서쪽으로 움직였으며, 승보(承保) 장군이 이끄는 병력은 중앙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오배의 손자 달복과 대호 등의 장수는 선봉에 섰습니다. 서능액(舒楞額) 장군은 후위에 서서 지휘했습니다.



 그러나 준가르 군은 청군이 동쪽과 서쪽, 양쪽을 뚫어 돌파하려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를 저지했으며, 때마침 악화된 날씨로 큰 폭풍과 함께 우박까지 불면서 청군은 최악의 상황에 몰렸습니다. 청군은 최후의 투지를 불사르며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으나, 결국 이날 포위망 돌파는 실패했습니다.


傅爾丹令移軍和通呼爾哈諾爾,定壽、素圖、覺羅海蘭、常祿、西彌賴據山梁東,塔爾岱、馬爾齊據其西,承保居中,馬爾薩出其東,達福、岱豪當前,舒楞額、沙津達賴等護後。師甫移,敵力攻山梁東西二軍,定壽等奮戰。大風雨雹,師為敵所圍。傅爾丹遣兵援塔爾岱出,又令承保援定壽,日暮,圍未解




 6월 22일(癸丑)


 포위되어 사투를 펼친치 이틀이 지난 후, 마침내 각라해란이 이끄는 부대가 포위망을 뚫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정수, 소보, 마이재 등의 장수들은 최악의 전황에 절망하여 자살한 뒤였습니다. 여하간 청군은 서둘러 각라해란이 뚫어난 곳을 지원하러 가 활로를 넒히려 했는데, 활로가 여기 밖에 없었으니 이 곳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순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방어선의 밸런스도 모조리 무너져 전군이 궤멸하기 시작했고, 또 수 많은 장병들이 절망하여 자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癸丑,海蘭突圍出,定壽、素圖、馬爾齊皆自殺;西彌賴令索倫兵赴援,兵潰,亦自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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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톤노르



 6월 23일(甲寅)


 죽음의 사투 끝에 마침내 준가르의 포위망을 기적적으로 탈출한 청군은 주변의 호수인 호톤노르 주변에 모여 진영을 재정비 했고, 몰려드는 준가르 군 500명을 죽이면서 성공적으로 재정비를 하는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누군가가 준가르 진영을 보고 이렇게 소리질렀습니다.


 "투모터(土默特) 부족이 우리를 배신했다!"


 청군에 있는 몽골 투모터 부족은 하얀색 깃발을 자신들의 표식으로 사용했는데, 공고롭게도 준가르 군 역시 하얀색 깃발을 표식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해가 나왔고, 그 발언 하나로 전장의 사기가 다시 역전되어 "사지를 간신히 돌파해서 이제 좀 정비되나 싶었는데 아군이 배신했다고 생각한" 청군은 이제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甲寅,敵環攻大營,傅爾丹督兵禦之,殺敵五百餘。科爾沁兵潰,沙津達賴奮戰入敵陣,師望見其纛,曰:「土默特兵陷賊矣!」遂大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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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4일(乙卯)



  청군은 이제 최후의 전투력을 모조리 상실하고 처참하게 도륙되었습니다. 거진 하루 동안 이어진 살육전에서 절망한 영국(永國), 각라해란, 대호 등의 장수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고, 사필납, 파새, 달복, 마이살 등은 전사했습니다. 


 다만 총사령관 푸르단은 죽어 나자빠지는 병사들의 사이에 섞여 어떻게든 몸을 빼내는데 성공했고, 잔병을 수습해서 합이갈납(哈爾噶納) 강을 건너 홉도 방향으로 도주했고, 그 과정에서 준가르 병사 오백이 죽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乙卯,永國、海蘭、岱豪皆自殺。傅爾丹雜士伍中以出。敵大集,查弼納、巴賽、達福、馬爾薩、舒楞額皆戰死。傅爾丹率殘兵渡哈爾噶納河,敵追至,擊殺五百餘人.

 


 7월 1일(壬戌朔)


 대패한 푸르단은 겨우 홉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당초에 베이징에 자신이 '전 병력' 을 잃었다고 보고했고, 나중에는 '상당한 손해를 입었다' 고 보고 했습니다. 청군은 전 병력의 80%를 잃었고, 돌아온 병력은 겨우 2,000명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청군의 전사자는 최대한 적게 보더라도 1만 8천 명 이상이며, 몽골 동맹군을 포함해서 더 많이 볼 시 4만에서 6만에 육박할 수도 있습니다. 청나라 역사상 손에 꼽을만한 끔찍한 패배였습니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 유독 '자결' 한 장수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전장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며 끔찍한 지옥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중에 하나 압니다.



 청군이 호톤노르 부근에서 그야말로 참살당하는 동안, 악종기는 재빨리 우루무치로 진격해 이 곳을 점령했습니다. 푸르단과 준가르 군이 교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악종기는 이를 통해 준가르 병력의 일부를 끌어내어 푸르단의 싸움을 도우려고 했지만, 푸르단이 너무나도 빨리 패전하는 바람에 이는 소용 없었습니다. 푸르단의 대패로 우루무치를 방어할 능력이 전무해진 악종기는 다시 바르콜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역사에 남을 대패를 당한 푸르단은 옹정제에게 이것이 모두 자신의 죄이며, 부디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옹정제는 푸르단을 심하게 질책했지만 일단은 홉도 방어에 집중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옹정제에게 있어 하나의 위안이 있다면, 이 역사적인 패배는 이후 벌어진 사건 때문에 어떠한 연속적인 의미를 가지는 일이 아닌, 한번의 '참사' 로 끝났다는 점입니다.



 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준가르의 갈단 체렝은 대승리에 고무되어 홉도 남동쪽을 약탈하려고 나가면서, 할하 몽골족들에게 자신만만하게 연합을 제기했습니다. 


 "그대들은 칭기즈칸의 후예로서, 누구에게도 신속 되지 않는다. 방목지를 알타이로 옮겨 우리와 평화롭게 사는 것이 어떤가? 우리는 연합하면 어떤 군사적 위협에도 맞설 수 있다."


 하지만 할하 몽골은 준가르의 이 대승리가 결코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갈단 체렝의 연합 제한을 거절하고 오히려 에르데니 자우 근처에서 준가르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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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할하 몽골의 사령관, 체렝(策淩)




 이 전투에서 할하 몽골은 1만이 넘는 준가르 부대를 참살했고, 나머지를 알타이 서쪽으로 퇴각시켰습니다. 옹정제는 이 승리에 너무나도 감격해서 체렝을 울리아수타이(Uliastai) 정변좌부장군(定邊左副將軍)으로 임명했고, 궁궐과 도시를 만들어 주었으며, 사후에 태묘에 그 신위를 봉안해주었습니다. 몽골인으로서, 청나라의 태묘에 봉안된 사람은 오직 두명 뿐입니다.



 체렝의 이 대승리로 인해 옹정제는 자신의 군사적 패배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서북으로서의 팽창 정책은 한동안 쓰레기통에 처박아야만 했고, 1734년 9월, 옹정은 최고 대신들을 머나먼 준가르 땅으로 보내, 할하와 준가르의 영역을 구분하는 평화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원정이 실패함에 따라 옹정은 변경의 청나라 주둔군을 줄였고, 어중간한 화친 정책을 이어나갔습니다. 전쟁으로 서북의 경제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는데, 옹정제 치하에서 제국은 준가르와 싸우는데 6천만냥의 자금을 소비했지만, 거의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서북에서 옹정이 거둔 군사적 성과는, 오로지 연갱요의 도움으로 이루어낸 것이었습니다. 연갱요가 없는 싸움에서 그는 궤멸적인 타격을 맞보았습니다.


 기실 이 패배는 자신만만한 이 통치자에게 큰 시련을 주었습니다. 옹정은 자신의 계획을 모두 수정해야 했고, 이후 20여년 가까이 청은 준가르에 대해 적극적인 원정보다는 교역을 이용한 관계로 전환하였습니다. 1731년의 재앙 소식에 비틀거리며, 그는 사령관 악종기에게 조서를 보냈습니다. 이 조서에서는 그의 심리 상태가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거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지고의 천자마저도, "잔인한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인가?" 라고 당황할 정도의 패배였고, 옹정제는 이 편지에서 자신의 심리 상태를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짐이 예상한 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짐은 실로 불안하고 두렵다. 고통스럽게 짐의 책임을 돌아보며, 짐과 대신들이 모든 비난을 자초했음을 알았다. 병법가들은 교만하게 세력을 보이는 자는 패하며, 적에 대해 자신을 기만하는 자는 패하며, 상대를 알지 못하는 자는 패한다고 했다. 우리군이 이 모든 잘못을 저질렀다. 양로군을 함께 준비시키는 것은 모두 도를 넘은 일이었다."



 "짐은 끊임없이 후회한다. 그저 하늘에 짐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할 뿐 이다. 짐이 무엇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적의 세력은 짐이 알고 예상한것보다 훨씬 컸다. 진격하여 적을 섬멸하는 작전에 대해 말하건데, 우리의 힘과 기술이 미심쩍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우리에게 가호를 내리지 않는 듯 한데, 감히 우리가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절대로 투르판을 구하려 하지 말거라! 짐의 이전 지시와 네 책략은 모두 틀렸다. 그대와 장군 이리부와 창지만이 이 뜻을 알고 있어야 하느니라. 투르판에는 스스로를 보호할 성벽이 있고, 위구르 병 1000과 우리병사 3000이 있다. 적이 투르판을 친다면 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지금 우리는 기다려야만 한다. 이 3000의 병사와 수많은 투르판 시민들을 구하지 못함은 짐이 몰인정하여서가 아니니라. 상황이 우리가 그럴 수 없게 하고 있다. 이 결과는 몹시 참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이해하실 것이다!"



 "그대가 완벽하게 안전한 기회를 포착한다고 해도, 극히 신중하게 행동하라! 만약 하늘이 우리에게 완전한 승리를 허락하고 적이 달아난다고 해도, 그대는 멀리 추격하지 말라. 왜 그런가? 우리는 전투 한번으로 성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을 추격하더라도 성을 수백 리 이상 떠나지 말고 군대를 돌려라. 그대는 짐의 의중을 아니 이를 깊이 생각하라. 짐은 겁쟁이가 아니다. 단지 하늘의 명을 따르고 하늘의 뜻을 존중할 뿐이다. 그대는 짐의 의중을 가슴에 새기라. 그대는 변경에서 전투 의욕을 높이는 방법을 쓸 수 있고, 적을 섬멸하기 위해 진격을 선언하고 적을 죽이라고 군사들을 선동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짐의 지시를 신중히 따르라."



 "요약하건대, 진중히 기다리며 동요하지 말라. 이는 짐의 명확한 지시요, 구원 원정에 대한 가장 간절한 명령이다. 그대는 이 조서의 사본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대가 이를 몇 번 씩 읽고 싶다면 잠시 관사에 두었다가 다른 명령서들과 한꺼번에 돌려 보내라."



 "짐은 건강하니 괘념치 말라. 그대는 요즘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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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31 04:46
수정 아이콘
이렇게 잘 싸워도 국력차이를 못이기고 고구려처럼 무너지는게 참......
멀할까나
17/03/31 10:49
수정 아이콘
애초 체급차이가 넘사벽이니까요 ㅜㅜ 땅넓이를 넘어서 인구수와 물자가..
샨티엔아메이
17/03/31 06:46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어서 이후얘기도 찾아봤더니
회광반조라고 불러도 되겠네요.
17/03/31 07:38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전혀 알지못했던 부분을 아는 재미가있었네요
ThreeAndOut
17/03/31 07:40
수정 아이콘
그렇게 패해서 지금의 중국의 서쪽 국경선이 거기서 멈추었군요. 이겼으면 카자흐스탄 우즈벡 모두 중국이 될뻔 했겠네요. 잘풀렸으면 터키와 국경을 맞대는 결과가 나왔을수도요.
신불해
17/03/31 09:52
수정 아이콘
이 패배로 서진 정책이 한동안 멈추긴 했지만, 20년 뒤 건륭제 시절에 다시 전쟁이 재개되어 결국 동투르키스탄까지 청군이 진군하긴 합니다.
노다메
17/03/31 09:49
수정 아이콘
연갱요가 중드 "후궁 견환전"에 나왔던 화비 오빠 아닌가요
신불해
17/03/31 09:52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백마탄 초인
17/03/31 10:18
수정 아이콘
선대 왕인 강희제를 닮아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훌륭한 군주의 면모를 보이네요...
내치를 힘쓰고 관리를 엄격히 대한걸로 알고 있는데... 정작 자신이 대외적으로 말아먹었으니...
멘탈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대단합니다.
괜히 강희제, 옹정제라고 하는게 아닌듯.... (그런데 이핏줄에서 건륭제가......... 망.....)
무무무무무무
17/03/31 10:34
수정 아이콘
오배는 어떻게 유명하죠?
신불해
17/03/31 10:53
수정 아이콘
옹정제의 선황인 강희제가 굉장히 어린 소년 시절에 즉위했는데, 청나라 초창기부터 공신이었던 '만주 제일의 용사' 라는 평을 들은 오배가 정권을 좌지우지 했다가 이후 칼을 갈고 닦은 옹정제에게 숙청 당한 걸로 유명합니다.

다름 아닌 김용의 소설 녹정기에도 나와서 무협 팬들에게도 꽤 친숙한 이름일듯.
백화려
17/03/31 16:26
수정 아이콘
강희가 아니라 옹정에게 숙청당했던가요?
신불해
17/03/31 17:31
수정 아이콘
아, 오타를 냈네요. 옹정제 무렵이 아니라 강희제 시절에 숙청 당했습니다. 본문 글에서 옹정제를 다루다보니 순간적으로 잘못 적었네요.
상계동 신선
17/03/31 11:54
수정 아이콘
여러 모로 아우구스투스의 토이토부르거 숲 전투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cadenza79
17/03/31 12:4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하면서 잘 보고 있습니다.

P.S. 傅爾丹의 표기 관련하여 만주어 발음인 푸르단으로 하셨는데, 중간에 우리 한자음인 부이단 표기도 보여서 한자를 잘 모르는 분들이 보시면 혼동을 일으키실 것 같기도 합니다.
Paul Pogba
17/03/31 13:46
수정 아이콘
잘은 모르는데 결국 나중에 준가르가 거의 인종청소 수준으로 삭제되지 않나요?
도로시-Mk2
17/03/31 15:10
수정 아이콘
네 청나라의 제노사이드로 사라집니다.
자유감성
17/03/31 17:08
수정 아이콘
오오 그 이후의 내용은 어디서 찾아볼수 있나요? 정말 너무 재밌네요
17/03/31 20:16
수정 아이콘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갈단 체렝은 동정에는 실패하자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카자흐스탄, 투르키스탄 쪽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다가 1745년에 갈단 체렝이 죽자 준가르에 내분이 생겨서, 최종적으로 지배자가 된 '다와치'의 반대파가 청나라에 투항합니다. 그동안 원기옥 모았던 건륭제는 이때다 싶어서 1755년에 대군을 동원해서 준가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 뒤에는 도로시님이 말씀하신 청나라의 대대적인 소탕작전 + 천연두 로 인구 대부분이 사망, 남은 이들도 대부분 여성이라 위구르인에게 동화되면서 준가르인은 사라졌다고 봐야됩니다.
자유감성
17/04/02 13:0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신불해님 블로그 너무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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