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2013/01/23 23:31:15
Name   영혼
Subject   지고나서야 비로소 꽃인 줄을 알았다.-1
#1
방학이 된지 한달여가 지나고, 성적이 나오고 다음 학기의 수강을 하는데에 있어 유의할 점을 준비하느라 하루하루를 정진하며 지냈다.
학기 중에 작성했던 레포트나 교수님들이 보내주셨던 전공 관련 서적 및 정보를 정리해놓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는 메일에 로그인했다.
아주 오래 사용했던 계정인지라 근 몇년은 물론이고 대학생활이 전부 채록되어 있는 메일함인데,
보낸 메일함을 정리를 하던 도중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지금은 기간이 지나버려 다운로드 받을 수 없는 대용량의 파일과 함께
썬, 너가 이 만화 좋아한다고 하니까 왠지 안어울린다 인마, 하고 타박이 들러붙어있는 예전의 기억.
그냥 상단의 삭제 버튼을 눌러버렸으면 그만이였을 것을 당혹스런 마음만큼이나 나의 손 끝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되도록이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였는데, 한 번 방향을 정한 사고의 회로는 도통 멈출 생각을 않았다.



#2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까.
첫눈이 불어닥친지 사나흘이 지나 부대에 쌓였던 눈이 미처 녹지 않았던 어느 주말이였으니까, 2010년 초겨울쯤이였다고 기억한다.
군필자라면 이름만 말해도 "아 그거?" 하고 혀를 내두른다는 훈련을 준비하느라 야근에 야근을 걸쳤던 한달이였고, 훈련의 성과가 우수해
훈련 준비에 대대장과 작전과장의 눈에 아주 잘 띄게 힘을 쓴 나에게 4박 5일의 포상휴가증이 주어지는 게 결정된 날이였다.

그간 너무 바빠 연락하지 못하였던 부모님과 통화를 했고, 포상휴가 사실을 알렸다. 오랜 군생활에 부모님도 나의 휴가에 마음 졸이시진 않으셨고
축하한다고, 언제쯤 나올거냐고 여쭤보셨던 것 같다.
그러고나니 왠지 마음이 내켜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연락이나 한번 해볼까싶었고, 입대하며 챙겨왔던 손떼묻은 수첩을 꺼내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낯섬과 묘한 긴장감으로 미처 잠들지 못했던 훈련병 시절, 한 손에 꼭 쥔 수첩을 보며 바깥 생각에 힘을 내곤 했었는데
군생활이 길어지고 이 곳의 생활에 적응하게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는 빈도가 줄어들었던 때였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과 동기가 퍼뜩 생각나 오랜만에 통화를 하였고, 휴가를 나간지 근 반년이 넘었을 시점이였으니 어색할 법도 했지만
여전히 막역한 친구와 여러 욕과 비난으로 치장된 애정어린 통화를 하며 나름의 위안을 얻었던 듯 싶다.
그러다 저녁시간이 되어 후임들을 챙겨 식당으로 가려고 일어섰는데, 수첩 마지막장에 급하게 휘날려쓴듯한 이름과 번호가 눈에 밟혔다.



#3
글쎄, 내가 키가 크니까 키가 작은 사람이 좋은걸까, 내가 경상도 사람이라서 보수적인걸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사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데에 이유나 명분 같은게 중요하지는 않듯이,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그런 사람들에게 끌렸고
쬐깐한 키에 헤실헤실 상냥한 웃음, 한 마디를 하더라도 성의를 다하는 진솔한 모습의 그 아이가 참 좋았던 듯 싶다.

스무살의 첫 학기, 시덥잖은 이야기도 재미있게 풀어내는 과동기와 커피나 한잔 하자 싶어 교내 카페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동기의 고교 동창이였던 여자아이를 만났고, 비록 키는 작지 않았지만 사리분별이 확실한 그녀의 모습에 혹해 교제를 시작했었다.

워낙에 여자들 뿐인 과의 특성상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다는게 모두의 귀에다 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했고
과 내에 이런 저런 친분은 오히려 생활에 독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과생활을 뒷전으로 제치고 연애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학기를 진행하며 전공 과목 가운데에 팀플레이로 제출해야했던 과제가 있었다. 그래, 거기서 그 아이를 처음 만났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카페에 가장 먼저 도착해있었고, 그 다음으로 내가 도착을 했었는데 나는 사실 그 아이가 우리 조라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래서 눈길을 헤메고 있자니 자그마한 키에 어깨까지 오는 머리칼의 그 아이는 야, 영혼~. 여기야 여기 일찍 왔네? 하며  빙긋 웃었고
나는 그냥 어어, 그래. 우리 과 참 인물이 없긴 없구나 내가 이렇게 유명할 정도면 크크크. 애들 아직 안왔나봐?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참을 뻘쭘하게 앉아있다가 다른 아이들도 삼삼오오 도착을 했고, 야~ 이거 영광이네 남간(남자 간호학과)이랑 같은조를 다 하고! 하며
나에게 친한 척을 해 오는 동기들도 있었다.

가만 앉아 커피를 쭉쭉대고 있자니 성격이 좋지 않기로 알고있는 동기들도 그 아이를 대할 때는 헤실헤실 웃음을 지으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 아이도 애살 있게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며 굳이 말하자면 자체발광이 되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왠지 모르게 친해지고 싶다는, 아니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이야기를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따위의 마음이 혹하고 일었지만 퍼뜩 여자친구 생각이 나 주저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그날의 조별 과제를 끝마쳤고, 조별 과제의 수업이 워낙 수강생이 많아 그 이후로는 그 아이와 마주칠 기회가 없었기에
금방 학기가 반쯤은 지나 중간고사 준비로 눈코뜰새 없이 바빠져 그 때의 조모임은 소소한 일상 중 하나로 기억하게 되었고
그 아이에 대해 느꼈던 인상적인 감정도 차츰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져갔다.


#4
시간은 빠르게 흘러 여름방학이 되었고, 군대를 가기 위해서 여자친구와의 교제에 매듭을 짓고 친구들을 만나며 고별주를 함께 마셨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그 아이와 연락이 닿았는데 이야기를 해보니 우리 집 근방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시간 나면 얼굴이나 한번 볼래, 하고 이야기했더니 바로 그 다음날 약속을 정하게 되어 점심을 먹기 위해 만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밤새도록 게임을 하다가 눈을 잠깐 붙이고 그 아이를 만나러 나갔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아주 아주 더운 날이였는데
속이 좋지 않다는 그 아이를 위해서 본죽에 갔던 기억이 난다. 짭쪼롬했던 소고기장조림의 맛으로 기억되는 죽이였다.
밥을 먹고 카페에 가 두어시간 시덥잖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아이는 과를 잘못 선택한 것 같다는 여느 대학생이나 가지고 있을법한
고민을 털어놓다가 아 미안! 하고서 베시시 웃었다.
뭐가 미안하냐고 물으니 군............대 갈 애한테 할 말은 아니잖아~ 하고서 새침떼기처럼 굴었다. 나도 피식하고 웃어넘겼던 것 같다.

근처 마트에 들려 돗자리를 하나 사고, 대구의 명물이라는 야외음악당에 가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참을 그 곳에 앉아 있었다.
근사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고, 가끔은 서로 핀트가 어긋나 웃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담소를 나눌 수 있단 게 참 즐거웠다.

부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 눈을 감았는데, 왠지 모르게 그 아이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홱 고개를 돌려 그 아이를 보니 진실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당혹스레 눈길을 피하는거였다.
이번엔 내가 그 아이를 빤히 바라보니 한참 내 눈치를 보더니 그 아이는 입을 뗐다.

“사실 고백할 게 있어”

“..응?”

그 말을 하고나서도 그 아이는 한참을 입을 오물거렸고,
뭘 빤히 봐 나 좋아하냐 인마 하고서 장난을 치려던 나는 왠지 모르게 무거워진 분위기에 긴장했다.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였겠지만 부는 바람조차 잊을만큼 당황했던 나로서는 지금도 아주 그 때가 길고 길게 기억된다.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그 아이는 입을 뗐다.

“나..”

“...?”




-2부에 계속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2-15 06:42)
* 관리사유 :



Mooder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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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23 23:35
이거슨 절묘한 절단신공!
빨리 다음편좀 크크
Paranoid And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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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24 00:04
나..두줄이야...?
par33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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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24 00:09
클래식은 언제나 정답이죠.
완결안내고 롤 들어오면 막 쪼아야지...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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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24 00:33
완결안내고 롤 들어오면 막 쪼아야지... 2
Tychus Find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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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24 00:33
-o-
제 시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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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24 05:43
크크크...
제레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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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24 10:31
아니 요즘 자게에는 절단신공을 난무하는 훈훈한 연애담이 대세인 겁니까 크크 빨리 2부 올리세요!
유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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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27 01:08
왜이러는거죠. 왜 이런곳에서 끊는겁니까. 카페베네인가요..
아 자게를 너무 오랜만에 들어왔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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