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일 적, 한자학원을 다녔다.
매주 숙제로 한자 3개를 각 10번씩 적어야 했고, 글씨가 엉망이면 벌이 주어졌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지정된 글을 손으로 옮겨 적은 뒤, 한자로 바꿀 수 있는 단어는 모두 바꿔야 했다. 분명 벌이었지만, 나는 즐겼다. 글의 내용이 재미있었고 옮겨 적는 동안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거의 매주 벌이 주어졌고 나중에는 옮겨 적을 글이 없어 넘어간 적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의도적으로 정치적인 내용을 피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특정 정치관에 경도되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하신 것 같다. 대신 에세이나, 수필, 사설 (정치가 제외된) 등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일상에 신문이 있었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한자 학원을 그만 두었지만 계속 신문을 구독했다.
오랫동안 신문을 읽다 보니, 국어 시험이 쉽다고 느꼈다. 모의고사나 수능에서 종료시간을 20여분 남기고 다 풀었으며, 실제로 1등급이 나왔다. (당시에는 킬러 문항이 없어 가능했다. 최근 수능 문제를 보면 불가능하다.)
중학생일 적, 셰일가스를 시추하는 사업가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기사에 첨부된 사진에 안전모를 뜬 중년의 백인 남성이 있었고, 팔짱을 낀 채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자, 셰일가스가 세계 경제 및 정세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과거 기사에 나온 아저씨가 주요업체의 창업자 겸 CEO로 소개될 때 전율이 흘렀다.
조그마한 요소, 사건 등이 훗날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깨달음. 그 이후로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책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적어도 TV나 인터넷 보다는 책이 훨씬 분석적이고 신뢰할 만하며 깊이가 있었다. 최근 유튜브의 요약 방송을 (대부분 10 ~ 20분 분량) 보고 해당 주제를 통달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특히 역사, 정치, 경제, 투자에 대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다.
현실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서로 충돌하거나 강화하고, 저마다 영향력을 행사한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이는 결과를 알기 때문이다.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 때는 어렵지만, 답지를 보면 명확하다. 오랜 시간 다양한 근거를 수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취재하며 기자의 경험으로 자료의 신뢰도를 분류해 논지를 작성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유튜브의 영상 중 상당수는 자료 준비보다 자극적인 연출에 공을 들이는 것 같다.
신문을 20년 넘게 읽다 보면, 회사의 성향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성향에 반발해 다른 신문으로 갈아타는 경우가 있었다. 구독자를 특정 방향으로 선동하기 위해 사실관계, 기사 배치 등을 구성하는 경우가 있었고, 나는 역겨움을 느꼈다. ‘이 회사는 구독자를 조종하려 한다. 언론으로써 공공성 보다 자신들의 권력이 중요하다.’
수차례 언론사를 바꾸면서 기사와 신문사에 대한 기준을 나름 정했다.
[구독할 신문을 정하는 기준]
1) 실수를 인정하고, 최소화하려 노력하며 이를 공표하는가.
모든 언론사는 마감 시간에 쫓긴다. 이 과정에서 오보는 당연히 발생한다. 다만, 일부 언론사는 실수를 인정하면 자신의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단순한 사실관계 착오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사람의 명예나 사회적 관심에 관련된 것이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신뢰도의 의문을 가지게 되면 나머지 기사도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이는 매우 피곤하다. 굳이 그 신문사를 구독할 필요가 있을까?
2) 구독자가 시간을 내어 읽을만한 기사를 생산하는가.
매일마다 많은 사건이 일어나지만 사회가 알아야 하는 주제는 따로 있다. 그 주제는 각 신문사가 추구하는 가치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준은 아래와 같다.
2-1) 사회에 영향을 주는 문제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의외로 이 기준에 따르는 신문사는 별로 없다. 예를 들어 개인의 이혼이나 불륜이 사회에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살인범의 흉악한 범죄를 몇일 동안 보도할 필요가 있을까? 대중의 화제가 되는 것과 사회에 중대한 영향이 있는 것은 다르다.
2-2)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가.
중세 유럽에서는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당연했고, 조선에서는 상업을 억압해야 했다. 내가 믿기에 언론사는 상식에 합당한 근거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의 허점을 밝혀내야 한다.
2-3)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는가.
어느 시대이던, 사회의 어둠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은 있고 이들의 목소리는 사회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사회적 논쟁을 보면 여유 있는 중산층의 관심사가 대부분이었다. 노숙자나 저임금 근로자, 고아 등 대중이 모르고 관심 없어 하는 주제를 누군가가 나서서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3) 특정 집단에 봉사하는 신문사 인가.
‘3)’항은 피해야 하는 신문사에 대한 기준이다. 신문사 마다 옹호하는 가치가 있고 자연스럽게 특정 집단을 옹호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정부의 시장 개입, 낙태, 동성애, 이민 등이 있다. 하지만 특정 이념이나 진영에 경도되어 한쪽 의견만 강조한다면 이는 신문사가 아니다. 기관지나 프로파간다이다. 예를 들어, 트럼프의 경우 비판적일 수 있다. (나 또한 그를 불신하며 권력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의 경우 그를 비난하는 논조의 기사로 ‘도배’가 되어있다. 심지어 그의 지지자들을 ‘교화’해야 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수천만명의 지지자가 (그를 지지하진 않지만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안 된다는 사람 포함) 교양이 없거나 음모론에 빠져 있다고? 뉴욕타임스 당신이 오만한게 아닐까? 실망입니다.
이 태도의 문제는 트럼프가 왜 지지를 받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민주당을 공격할 때 하는 주장으로 ‘민주당 엘리트 들은 서민과 노동자의 삶을 챙기지 않았다. 긴 집권기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다가 내가 문제를 제기하니 챙기는 척한다.’, ‘당신들은 이민이나 동성애에 대해 도덕적으로 훈계하려 한다. 하지만 그 문제를 겪을 일도 없으면서, 당사자들에게 무책임한 지시를 한다.’ 이게 과연 근거 없는 말일까?
한국 언론의 경우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 협상, 관세 장벽 등에 대해 비판을 한다. 논조를 보면 비도덕적이고 의무를 거부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신뢰성 높은 근거들을 기반으로 치밀하게 분석한 내용을 알고 싶지, 규탄대회의 구호를 듣고 싶지 않다.
[읽을 기사를 선정하는 기준]
1) 10년이 지난 뒤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 주제
과거가 쌓여 현재를 이루고, 미래를 결정한다. 나는 세상과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알고 싶다. 사회에 충격을 주고, 회자될 위대한 기사를 읽고 싶다. 그러다 보니 연예계, 스포츠, 화제거리를 피하게 되었다.
2) 제대로 된 출처,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 통계 등을 제시하는 기사
기자가 결론 을 내기까지의 과정도 중요하다. 왜 이렇게 판단하는가? 그 출처는 무엇인가? 기사를 읽으면서 참고해야 할 사이트, 통계, 책 등을 알게 되고 비슷한 내용을 조사할 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3) 고정관념의 허점을 제시하고 새로운 관점을 주는 기사
정보를 알고 싶으면 굳이 신문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또한 글을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다면 다른 매체와 달리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 기사를 읽고 난 뒤 생각에 변함이 있어야 한다.
4) 글쓰기에 본받을 만한 기사
근거와 논리에 기반해 결론에 이르기까지 글쓰기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기사. 언젠가 이런 수준의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며 이런 글을 읽는 것은 기쁨이다.
[현실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서로 충돌하거나 강화하고, 저마다 영향력을 행사한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이는 결과를 알기 때문이다.] 이 말에 공감 합니다
근래에 다른커뮤니티에서 몇몇주제를 댓글로 대화 이어가보면 가장 큰 이유는 이거 겠지만 몇몇가지 연결된 이유가 이런 것들도 있다 하면 꼭 찝어서 다른 이유는 무시하고 한가지 이유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거 같아요
하단 댓글에서 언급한 < 00 신문사가 번역한 하이에크의 저서 '노예의 길' >에 대해서..
노예의 글 최근 번역본은 24년 3월(개정본), 18년 4월(초본)으로 김이석 이라는 경제학자(미국 뉴욕대학교 경제학 박사: 하이에크 관련 논문)가 번역한 것으로 자유기업원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신문사가 번역한 책이 아닙니다. 물론 김이석이라는 분이 아시아투데이의 논설위원이기는 하나, 이 분이 신문사 논조에 따라 기업 비판 내용을 삭제했을까요? 신문사 논조보다는 역자 개인의 판단에 의해서 번역 내용을 취사 선택했을 것으로 봅니다.
신문사보다는 역자를 탓해야 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