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다수 있습니다.
! 영화에 대한 평은 개인적인 의견과 해석임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가여운 것들, 인간
영화의 주제는 하나가 아니라 다층적이지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하나의 주제를 꼽아보자면 위의 문구라 생각한다.
작중의 인물들은 모두 육체이든, 감정이든, 사회 관념이든 간에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벨라를 창조해냄으로써 그 스스로가 인간적 애정에 속박된 갓윈 박사나 맥스가 그렇고, 던컨 웨더번과 알프레드 블레싱턴은 몰인간성과 사회적 위치를 무기로 권력을 휘두르지만, 그 자신들 또한 스스로의 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웨더번의 경우 성애, 블레싱턴의 경우 폭력).
해리 애스틀리는 벨라의 안티테제와 같은 인물이다. 한 때 이상을 가졌지만 세상의 부조리에 상처입어 굴복한 냉소주의자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이러한 굴레의 부조리에 상처입고 고통 받으면서도, 또한 그에 굴복하여 부조리를 재생산하여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태생부터가 그렇게 만들어진 구제 불능의,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가여운 것들’인 것이다.
* 우리는 스스로의 굴레를 끊고 발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그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포기해야만 하는가? 우리의 입에 쉽게 들어가는 과자나 생각 없이 사는 물품은, 나보다 못한 끔찍한 환경에 처한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혹은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끔찍한 환경에 처해있으면서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한 영화의 답은 희생이라 할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굴레의 제거 및 인간성의 재구성은 일견 의사의 수술과 닮아 있다. 의사는 환부의 절개나 종양의 제거, 상처 부위의 봉합 등을 포함하는 수술을 함으로써 생명을 회복시킨다. 주요 인물들인 갓윈과 맥스가 의사이고, 벨라 또한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이러한 이유인 듯하다.
굴레라는 이름의 종양을 제거하지 못한 이들은 안타깝게도 더 발전하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그 대가를 치루게 된다. 스스로 몰락한 웨더번과 블레싱턴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고, 애스틀리나 스와이니 부인, 그리고 영화에서는 삭제되었지만 원작에서 묘사된 목사의 경우 자가당착에 빠져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갓윈은 벨라를 창조함으로써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애정을 지니게 되지만, 그녀를 인간답게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종내에는 맥스에게 벨라를 양보하기까지 한다.
맥스는 모든 평범한 인간들의 희망이다. 갓윈과 벨라는 사실상 신인(神人)에 가까운, 평범한 인간들과 다른 완성된 인간들인 반면 맥스는 범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벨라에 대한 소유욕을 극복하고, 그 자신에게는 고통스러울 수 있는 그녀의 성장을 그저 묵묵히 참고 지켜봄으로써 벨라에게 사랑과 신뢰를 준다.
*인간답기 위하여
주인공인 벨라 벡스터는 탄생 자체가 아이러니의 극치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어머니의 몸을 차지하여 죽음에서 재생함으로써, 그녀는 위의 인물들이 지닌 인습적, 종교적, 신체적인 모든 굴레에 가장 강하게 속박되어 있으며, 동시에 존재 자체로 그 모든 관념을 깨부순다. 시체에서 소생하여 육체의 속박을 뛰어넘고, 영혼을 가짐으로써 종교의 금기를 뛰어넘고,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봄으로써 사회의 규칙을 뛰어넘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세상의 모든 관습에서 자유롭다.
갓윈과 맥스의 보살핌 속에서 벨라는 인간성을 배울 수 있었다. 갓윈은 그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학대에 가까운 수술을 받았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을 지닌 인물이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애초에 벨라의 탄생 자체가 모녀에 대한 동정심 덕분이었다(비록 두 번째 창조물인 펠리시티에 가혹하게 굴긴 했지만 말이다). 맥스 또한 그녀를 관찰하며 사랑하게 된다. 비록 벨라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긴 했지만, 그녀의 모든 특이한 행동들과 탄생의 비밀을 안 사람이라면 쉽게 사랑이 식거나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맥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인 애정을 보낸다. 그렇게 가장 가여운 존재였던 벨라는 사랑을 배우고, 세상의 그 모든 잔혹함과 슬픔을 보고서도 자신보다 못한 ‘가여운 것들’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벨라를 통해 영화는 말한다. 평범해도, 심지어 괴물이어도, 우리가 사랑을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 기타
-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 중 에서는 드물게 인간에 대한 온정과 희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영화 자체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강렬한 오마주이다. 다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버림받고 불운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지만, 벨라는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선의와 배려심을 배우고 혜택 받은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다르다.
- 육체의 탈피와 재구성을 통한 변화라는 점에서는 감독의 전작 ‘랍스터’와 비슷한 점이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비슷한 면도 얼핏 보인다.
* 원작과 영화의 차이점
- 원작은 영화보다 조금 더 치밀한 구성인 동시에, 결말 부에는 지금까지의 서술을 모두 부정하는 듯한 전개를 보이며 작가 스스로도 주제의식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려야 할 지 모르는 것처럼 끝난다.
반면에 영화는 좀 더 등장인물과 스토리를 단순화시킴으로서 복잡성은 사라졌지만, 감독 나름의 결론을 짓는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원작을 ‘수술’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 이 감독의 ‘수술’이 성공인가, 아니면 실패인가? 하는 것에는 개개인의 의견이 갈릴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성공적이라고 본다. 캐릭터들은 다소 단면적이고 개성을 일부 잃어버렸지만, 그 덕분에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원작의 주제의식이 좀 더 명확하게 자리 잡는다.
- 소설은 산업혁명 시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약간의 SF적인 설정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다소 괴기스러운 분위기이지만, 영화는 화사한 스팀펑크 판타지를 시각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좀 더 환상적이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영화 미술에서
- 가장 눈에 띄는 촬영방식은 스토리 전개와 주제에 따라 각각 다른 방식이다. 영화 초반부, 벨라의 부활 장면은 20세기 초반의 흑백 호러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중반부터는 기하학적이고 환상적인 채색으로 어린 아이 상태인 벨라가 세상을 배워가는 신비함과 열린듯한 느낌을 준다. 후반부 그녀가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었을 때는 현대적인 카메라워크로 바뀐다.
- 벨라 역의 엠마 스톤의 패션도 상당히 눈에 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복식 디자인을 베이스로 해서 현대적인 터치를 가미했는데, 다른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복식에 리터칭이 적은 반면 벨라의 복식은 유달리 눈에 띈다. 어린 시절에는 고전적인 가운에 핫팬츠 매치로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보여주고, 후반부 부터는 다른 인물들처럼 좀 더 일반적인 성장을 한다. 화려한 패션 덕분에 장면 하나 하나가 마치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방불케 하며 눈을 즐겁게 한다.
- 다만 이러한 촬영방식과 패션이 영화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아카데미 촬영상과 패션 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겉도는데, 영화의 주제의식 파악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그에 비해 OST는 영화의 주제의식과 잘 어울린다. 어린 아이가 클래식 음악이나 오케스트라, 그레고리안 성가를 재구현하여 연주한 듯한 음악이 인상적이다. 마구 움직이는 자동화된 장난감이나 놀이공원의 테마가 뒤죽박죽 섞여 신경질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낸다. 주제곡인 "I Just Hope She's Alright"가 대표적.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생각 했어요 크크 이 감독 치고는 흔치 않게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난지라…
영화에서는 다소 축약되었지만 소설에서는 벨라의 짝이 맥스라고 거의 못박듯 나오더군요. 애초에 벨라가 결혼 상대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를 않아요. 갓윈은 아빠에 가깝고 던컨은 재미보는 상대 정도? 마지막에 알피를 따라간 것도 좋아서라기보다는 부활 이전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 위해 갔다는 뉘앙스가 크더라구요.
이게 원작에서만 나오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인데, 사실 어머니인 빅토리아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고 아버지인 알프레드가 약간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인물임에도 내면적으로는 새디즘을 갈망하는 성향인데, 본인은 이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지요. 잔인함은 왜 그런지 저도 모르겠네요.
저도 이번 작품으로 엠마 스톤을 좀 다시 보게 되었어요. 사실 그 전까지는 작품 선구안이나 상복은 있지만 좀 시류를 잘 탄 여배우 정도로 생각했는데, 진짜 몸을 던져 연기를 하더군요.
굉장히 다층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의 향이 짙더라구요.
결국 그 모든 걸 뚫고서 도달한 지점이 인간성과 그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도 꽤 인상적이었구요. 원작은 잘 모르지만 말씀하신 거만 보면 꽤 원작의 ‘아 씨 뭔 말로 끝내지’ 싶은 고민을 잘 정리했다고 생각이 드네요.